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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L'Etoile 원문
지난 이야기: 억눌린 감정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한지 12년, 찬드라 날라르는 고향 칼라데시로 귀환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무법자들의 지도자 피아 날라르는 플레인즈워커 테제렛이 통치하는 영사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찬드라는 니사 레베인과 오비야 파시리의 힘을 빌어 그녀가 잡혀 있는 곳을 추적하지만 그곳에는 바랄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 방어가 쳐진 독방 안에 독 가스가 가득 찬 지금, 유일한 탈출 방법은 플레인즈워크 뿐이었다. 하지만 찬드라는 파시리 부인을 두고 가지 못했다. 그리고 니사 또한……찬드라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팔이 아직 익숙하질 않아 지붕에서 떨어질 뻔 했다.
‘할머니’ 가 준 기계 손은 튼튼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민감했다. 마치 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장갑을 낀 손이 그렇듯, 감각이 달랐다. 유리를 잡을 때는 의식해서 손에 힘을 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생각났다. 뒷길 지붕 위를 다닐 때는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등 뒤로 불던 바람이 멈추었다. 색이 바랜 벽돌을 소리 없이 뛰어 올라 행동을 멈추자, 체중이 한 쪽으로 쏠리면서 대들보가 움직였다. 손가락이――진짜 손가락이――장갑 안에서 쥐어졌다. 기계 손이 조용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움직여 돌덩이에 박혔다. 자세가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 지붕을 스치며 다리를 들어 올리자, 명암이 섞인 오후의 구름과 창공이 시야를 회전하며 지나갔다.
한 순간이었다.
멈추어서 귀를 기울임과 동시에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아래쪽 부엌에서 5개월 전에는 이름조차 몰랐던 몇 가지 향신료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카더몬, 터메릭, 정향, 커민. 지금은 전부 아는 이름들이다――일반적인 사람들은 이 이상의 냄새는 판별하지 못한다――더 아래에서는 태양에 뜨거워진 돌과 놋쇠, 케케묵은 기름, 그리고 열 명 정도 되는 영사관 조사원들의 땀 냄새.
감시용 비행기계의 날개소리가 머리 위에서 조그맣게 들려왔다. 금속 손가락이 박힌 구멍에서 돌 부스러기가 몇 개 떨어져 소리를 냈다.
옷이 스치는 소리. “건물 상태가 안 좋은데요.” 조사원 중 한 명, 여성의 목소리가 벽돌로 된 벽과 길에 메아리 쳤다. “정부는 이곳 건물을 재건축 해야 해요.”
다른 목소리. 이쪽은 남자였다. “그렇게 하겠지. 도시금고는 박람회 개최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정지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들에게 들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건너편 지붕으로 조용히 착지해 아래쪽 벽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발코니, 발코니, 물받이, 차양――체중이 버틸 수 있을까? 가로등을 사용하는 편이 좋아 보이는데. 그리고 벽, 마지막으로 길거리. 호흡 몇 번으로 지면으로 내려와, 금속 손으로 빌려온 망토를 여몄다.
번쩍거리는 황동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매끈한 망토 소매에서 보이는 건 손이 전부지만 이 장갑은 팔목까지 이어져 있다. 제작한 것은 이러한 육체적 연결 장치의 전문 집단, 반짝소매협회. ‘할머니’ 가 이러한 물건을 만들게 했는데 의심할 것도 없는 장인의 작품이었다. 할머니가 직접 만든 이 망토에는 톱니바퀴를 회전시켜 소리를 내는 영리한 장치가 달려 있다. “수수하기 짝이 없는 옷이로군요.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는 되려 눈에 띨 거에요.” 그때는 비단 한 필을 만지며 정중하게 원하는 색과 모양에 대한 질문에 대답했었다.
숨을 고르고 몸을 숙여 시끄러운 군중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귀를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땀이 가득한 짜증나는 악취를 차단했다.
“……무슨 일이야?”
“저기서 꽤나 오랫동안……”
“……혁명파가 함정을 설치했다는데……”
“……아빠, 언제 집에 가……?”
“저렇게 많은 건 처음 봐……”
망토가 만든 그림자 안에서 선회하는 비행기계와 영사관 조사원 제복을 두르고 불규칙하게 서두르는 인간과 베달켄의 움직임을 살폈다. 할머니의 집이 포위되어 있었다.
다른 뒷길로 조심스레 들어가 옥상을 오르고, 기억을 재확인하기 위해 정원 도구가 가득한 판잣집에 몸을 기대었다. 황금색은 스물 두 번 호흡할 때마다 돌아온다. 건물 뒤를 걷는 오렌지색은 사십 번 호흡 할 때마다 없어지고……주민들의 향신료 냄새가 콧구멍 안에 충만했다.
할 수 있어.
때를 기다리며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비행기계의 날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이다.
구르듯 지붕을 가로질러 점프했다.
착지의 충격으로 폐에서 내뱉어지는 숨.
이어 채광창과 굴뚝을 피해 달렸다.
날개 소리가 벽돌 건물에 울리며 메아리 쳤다. 조금만 더.
할머니의 집은 이 구역에서 가장 높았다. 점프해 머리 위로 장갑을 뻗자 망토의 선명한 파랑과 금색이 등 뒤에서 펄럭였다……
황동 손가락으로 지붕 끝을 잡고 몸을 끌어 올리며 신음했다――목소리가 커!
거기서 잠시 드러누워 입으로 숨을 들이쉬며 호흡을 조절했다. 비행기계의 움직임과 거리의 고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들키지 않았다.
‘할머니’ 의 집 바로 반대편에는 영사관 소유의 에테르 탑이 있다. 그녀는 그 건물에 몇 가지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그 중 가장 완곡한 것이 ‘눈에 거슬림’, 반대로 예의 없는 표현은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단계적으로 확대되는 외설적 표현이 포함되었다. 몸을 앞으로 뻗어 냄새를 맡았다. 그 사람의 난초 냄새가 전부다. 조사원들의 냄새는 없었다.
식물 사이로 조용히 내려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허락 없이 들어온 것을 용서해 주세요.
색이 바랜 아마 천 커튼이 바람에 흔들렸다. 몸을 숙이고 귀를 기울이자 두 사람의 목소리……아니, 세 명. 하나는 기계적인 명령어투. 전부가 복도 앞, 그 사람의 침실 안에 있었다. 집 안이 난장판이었다. 타일 바닥에는 오래된 목제 서랍 안의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었고, 소파 배게는 커버까지 벗겨졌다.
어질러진 물건들을 건드리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며 조용히 타일 위를 걸어가, 다른 방에서 들리는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낮은 톤의 근엄한 여성의 목소리. “저쪽 찬장은 확인했나?”
불만스런 젊은 남성의 목소리. “네. 찬장은 확인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더군요.”
또 다른 남성의 예리한 목소리. “뭔가 있을 것이다. 어떤 증거가 분명히. 그 여자가 10년도 더 가담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말이야. 왜 그거 하나 못 찾고 있는 거냐……한심한 것들. 한번 더 거실을 뒤져봐.”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라시미가 심사를 돌파했답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에테르로 충만한 대기와 금속의 냄새가 그가 지나간 곳을 떠다녔다. 무장한 병사. 그 목소리가 의심을 동반하며 이어졌다. “꽃병 전송 장치에 무슨 용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좀 더 장기적으로 생각을 해 봐.” 여성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구두에 밟힌 유리조각이 튀기더니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은 꽃병이라도 내일은 기계거신일지도 모르잖아.”
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소리가 나지 않도록 움직여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왔다. 조사원들이 서로를 등지고 서서 빨강과 오렌지 제복에 어울리는 장소를 수색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작은 소리를 내는 금속으로 된 검은 장치가 그들의 허리에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여자 애완동물은 봤어요?” 젊은 남자가 물었다.
“있을 리가 없잖아.” 여성이 대답했다. “그 여자는 생명체 제작자니까. 스스로 만들 수 있어.” 그러곤 상처가 있는 손으로 허공에 새의 모양을 그렸다.
신속하면서도 조용하게 타일 위를 이동해 양 팔을 뻗었다. 망토 후드 밑으로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젊은이가 눈가를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 위에 하얀 털 뭉치가 있는데요.”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가 손을 칼집으로 가져갔지만, 곧 양 눈의 초점이 경악으로 크게 벌려졌다.
금속 손이 두 사람의 머리를 잡아, 서로 충돌시켰다.
뼈와 뼈가 충돌하는 충격. 조사원 두 명이 사지에 힘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네들이 공유하는 고통은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그런 종류겠지.
감독관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바사니? 지금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나?”
문 옆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바사니?”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빨강과 오렌지색 비단, 황금색 금속, 상아색 아마 천, 갖가지 색채를 인간이 인식하기보다도 더 빠르게 황동 손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서 들어올렸다. 옛날부터의 본능으로.
그 인간이 허덕대며 손으로 벨트 장치를 더듬거리며 찾았다.
다른 손으로 장치를 떨어뜨리고, 인간을 회전시켜 등부터 벽에 처박았다. “고맙네.”
그가 목 언저리를 긁어대며 입을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네. 평소 쓰는 팔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리고 손의 악력을 풀었다. 남자가 일순 신음하더니 악취가 더해졌다. “공포의 냄새가 나는군. 내가 무섭나?” 이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감독관이 허덕대며 후드 안을 보려고 눈을 크게 떴다.
“그거 잘 됐군.” 질문을 하기 전에 남자가 땀을 흘리도록 기다렸다. “파시리 할머니는 어디냐?”
“체포한지 오래다.” 그가 물에서 사막으로 내던져져 괴로워하는 물고기처럼 신음했다. “함정에 걸렸지. 그 여자는 무법자다.”
그녀는 현재 무사히 도주 중이고, 이 자들은 수색을 위해 온 것일 뿐이라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자들은 이미 그녀를 확보하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다시 질문했다. “어떤 함정이냐?”
“찾아서 소문을 흘렸다. 그렇게 해서 잡았다.”
애매한 대답이었다. 감독관을 조금 더 위로 들어 올렸다. “누구를 말이냐?”
“혁명파의, 지도, 자.” 남자가 몸을 떨며 심하게 켁켁댔다.
할머니는 자주 혁명파의 지도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항상 가명을 사용했다. 그녀를 딱 한번 만나본 적이 있다. 어깨에 진 무거운 짐을 먼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와 강인한 의지로 감춘 고상한 여성.
“그 함정은 어디 있나?”
감독관이 필사적으로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모――몰라!”
“곤란하군.”
남자의 눈이 크게 뜨이자 동공이 검은 구덩이처럼 흔들렸다. “풀어, 줘. 죽일, 건가?”
“죽이지 않아.” 다른 한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잡아 입을 다물게 한 뒤, 그대로 처박아 의식을 잃게 만들고 타일 위로 떨어뜨렸다. “그 누구도.”
할머니의 테라스로 돌아가 난이 있는 화분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혹시 놈들이 그녀를 유인한 것이라면 할머니는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서 나온 거겠지. 하지만 방법은 있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대기가 불협화음 그 자체였지만 어떻게든 집중했다. 향신료, 금속, 군중의 걱정들, 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테르와 곳곳에서 번뜩이는 번개의 냄새에 정신을 기울이며.
찾았다.
거리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아주 희미한 속삭임. 여름 과일, 장미, 히아신스, 그리고 벌꿀. 할머니한테서 나는 특유한 향유의 아주 아주 희미한 냄새. 그리고 약간의 기계 오일과 뜨거운 놋쇠,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암호를 전하는 금속으로 된 새의 냄새가 났다.
뒷길엔 아직 인기척이 없었다. 울타리를 뛰어 넘어 구르며 착지했다. 그 희미한 냄새가 저물어가는 태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거리를 빠르게 빠져나가 호흡을 할 때마다 코를 움직였다. 지나가는 길에 비둘기와 재봉 새가 퍼덕이고 있었다.
이곳은 밀림과는 그 종류가 다르지만 나는 여전히 추적자다.
6개월 전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숫자를 샜다. “하나, 둘……”
여기 저기서 키득키득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여러 방향으로 뛰어가는 발소리가 바닥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집중하면서 맨발이 나무와 갈대에 닿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난 귀에는 자신이 있으니까. “……셋, 넷……”
숨바꼭질이 싫었다. 내가 여기서 몸도 가장 작고 다리도 제일 늦었으니까. 그래도 누군가 하나만 잡으면 돼, 딱 하나만이라도. 그걸로 충분해. 그렇게 하면 모두가 나 말고도 잡힌 녀석도 함께 웃을 테니까. “다섯, 여섯……”
물소리? 누가 연못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치사해. 나는 다른 애들처럼 정원엔 못 가는데. 모두가 태양 아래서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난 툇마루에 앉아서 차가운 연못에 무거운 다리를 흔들면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일곱, 여덟……”
다들 날 좀 생각한 놀이를 해야 해. 내가 여기서 가장 작고 제일 느리니까. “……아홉, 열!”
눈을 뜨고 밝은 빛이 들어오는 도서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양이 미닫이를 통해 따스한 금빛으로 빛나며 책장 넘기는 소리를 내는 두루마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다 숨었니!” 내가 소리 쳤다. 먼저 문에서 툇마루 쪽으로 나와 눈을 실처럼 뜨고 연못을 관찰하며 반칙을 한 애가 없나 확인했다.
《Oboro, Palace in the Clouds》 아트 : Rob Alexander
지나가던 학 한 마리가 그 소리에 수면에서 머리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정원의 안개가 바람에 날렸다. 목제 풍경이 지붕에서 시원한 소리를 연주했고, 머리가 큰 테루테루 보즈도 바람에 흔들거렸다. 내 발 밑이 분홍색 꽃잎으로 뒤덮였다.
나는 뒤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와 옆구리를 긁으며 발소리를 기억해내려 했다. 누나 우메요가 제3서고로 간 소리가 아닐까. 하지만 우메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녀가 간 얼음을 먹고 이빨이 아팠던 적이 있다. 자기 전에는 내 머리를 간지럽히기도 했지. 아마 제3서고에 있을 것 같지만 그만두자. 형 히로쿠는 항상 제10서고로 간다. 왜냐하면 거기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있으니까. 들고양이와 까마귀의 이야기. 게다가 히로는 숨바꼭질에 그닥 관심도 없었다.
조심조심 황금 빛이 내리쬐는 복도를 지나갔다.
세찬 바람이 오른쪽에서 불어와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현관! 누군가 바깥문을 연 것이 틀림없었다.
재빨리 미닫이를 열면서 소리쳤다. “찾았다!”
흰색 거인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인의 푸른 한쪽 눈이 깜빡였다. “내가 한 방 먹었군, 작은 사냥꾼.” 주변의 공기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라고 해야지.
인사를 하고, ‘어서 오세요.” 라고 해야 해. 그렇게 하라고 배웠으니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누구한테 전할까요. 멀리서 오셨나요. 실내화는 필요 하신가요.
거인의 발이 내 머리보다도 컸고, 발톱은 내 손가락만했다.
거인이 몸을 숙였지만 그럼에도 내 키의 두 배는 되었다. 그에게서 여름 풀과 모르는 나무의 냄새가 났다.
거인의 푸른 한쪽 눈이 새빨갰다. 마치 늦게까지 책을 읽은 히로쿠처럼. 다른 눈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상처자국이 남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가 맞으려나.” 거인이 입을 열었을 때 보인 이빨이 엄청 날카로워 보여서 쓸 데가 참 많겠다고 생각했다.
복도의 마루청을 삐걱거리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등 너머에 들렸다. 하지만 거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등을 돌렸다가 저 이빨을 갖다 대면 어쩌지?
거인의 하늘색 눈이 나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펴보았다. “떨고 있구나.”
“고양아!” 귀 뒤에서 갑자기 소리가 나 펄쩍 뛰었다. 누나 루미요의 목소리. 발소리가 복도에서 울려 퍼지더니 곧 멀어졌다. “엄마―――! 고양이가 돌아왔어!”
등 뒤에서 거인이 웃었다. “루미의 목소리는 언제나 크구나.” 그러곤 한 발짝 물러나 다리를 꼬고 앉아 손을 무릎 위에 두고 머리를 숙였다. “이 손이 너를 상처 입히는 일은 없단다.”
그래도 무서워서 뒷걸음질을 쳤다.
“나시?”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오는 사람은 바닥에 발을 디디는 일이 없다. 그렇게 하고 싶을 때를 제외하면. 나는 복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다가온 어른 뒤로 급히 숨을 숨겼다. “왜 그러니――어머. 카미가와에 잘 돌아오셨어요.”
하늘색 비단 옷에 코를 비볐다. 하얀 거인이 앉은 채 허리를 곧게 펴더니, 경의를 담아 머리를 숙였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타미요 씨.”
타미요가 미소를 지으며 긴 귀 한 쪽을 내 어깨 위에 걸쳤다. “이 분은 아자니라고 해. 우리 이야기의 친구란다.” 그 목소리가 마치 도기로 만들어진 꽃병처럼 맑게 빛났다. “나르셋 씨처럼 하늘 저편까지 갈 수 있는 분이야.”
나르셋이 생각났다. 그녀는 쉬지도 않고 돌아다니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 지붕 위에 같이 누워서 구름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하는 농담마다 웃어주었고, 진심 어린 소리에는 집중해서 들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용이 나오는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었지.
타미요가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아자니 씨, 이 아이는 나시라고 해요. 우리 가족이랍니다.”
거인이――아자니가――다시 머리를 숙였다. “반갑다.”
내가 그녀 뒤에 숨어 꾸벅 인사를 했다. 가르쳐 준 대로. “이쪽이야말로――”
“고양아!” 상아색 흔들림이 코 앞을 재빠르게 지나갔다.
아자니가 섬광처럼 반응하며 그 두꺼운 양팔로 얼싸안았다. “우왓! 루미.”
그 얼빠진 웃음소리가 방 안을 밝게 만들었다. “진짜 오랜만이네.” 뒤에서 복도가 시끄럽게 울렸다. 형제자매들이 뛰면서, 아니면 부유하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루미가 손을 뻗어 아자니의 털을 쓰다듬었다. “짱 재밌으면서도 웃긴 얘기 해줘!”
“아자니가 돌아왔다!”
“용 이야기 해줘!”
“세계의 구멍 이야기가 좋아!”
소라타미의 아이들이 아자니의 양 다리로 몰려들어 그 하얀 털과 거대한 도끼는 물론, 몸에 두른 흰색 망토를 만졌다. 히로쿠가 그들 중 키가 가장 컸지만, 아자니의 가슴팍까지밖에 닿질 않았다. 루미가 그의 가슴팍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모두를 혼내고 있었다.
타미요가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만!”
“……자, 이야기 들을 시간이에요! ――아.” 루미와 타미요의 목소리가 겹쳐지더니 소란이 멈추었다.
“아자니 씨는 손님이에요. 지금 이야기를 부탁하는 건 실례랍니다.” 아자니가 루미를 바닥에 내려놓자 타미요가 양 팔을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아자니 씨는 아주 아주 멀리서 오셨어요. 루미, 아버지에게 식사 준비를 하도록 전해주겠니. 다들 루미를 도와주렴.”
“이야기 해주기 전에 가버리진 않을 거죠?” 루미가 팔짱을 끼고 턱을 내밀면서 물었다. “모험에 나가면 꼭 돌아와서 이야기 할 것. 이건 깰 수 없는 약속이에요.”
타미요가 아자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입이 굳게 닫혀 있으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아버지 흉내랍니다.”
“당연하지.” 아자니가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한쪽 손을 가슴에 댔다. “이야기를 하기 전엔 절대 떠나지 않으마.”
아이들이 자리를 떠나면서도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리 와, 나시.” 누나 우메가 소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분홍빛 눈이 흥분으로 크게 뜨였다. “나랑 주먹밥 만들자.”
“응.” 내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와 복도를 빠르게 걸어가던 중, 어깨 너머를 한번 돌아보았다.”
타미요가 아자니의 팔에 손을 얹었다. 밤 늦게 모두가 잠들었을 때 겐쿠에게만 보이는 표정이었다. “몇 개월 만이네요.”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 “엘스페스 씨는요?”
거인이 비 속의 버드나무처럼 고개를 숙이자, 그 빛나는 눈동자가 감겼다. “그녀는……못 옵니다.”
우메가 내 손을 잡고 모퉁이를 돌았다.
냄새가 그를 더 많은 조사원 곁으로 이끌었다.
아래쪽에서 많은 조사원들이 발견한 기계를 주의 깊게 분해하는 중, 그가 번쩍이는 황동 탑 모퉁이에 앉아서 그걸 보았다. 그들이 자신보다 더 큰 물체에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극소의 부위를 조심스레 떼내 아무도 볼 수 없는 장소로 옮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신경이 곤두선 냄새가 공중을 떠다녔다. 에테르 광선의 그것과, 타버린 금속 알갱이의 냄새.
갑자기 등 너머로 무언가가 접근했다. 칼 끝의 위협이.
“주저했나?” 어딘가 즐기는 것 같으면서도 노래 소리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크게 놀랐다. 이 자에게선 소리도,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리숙한 추적자가 절대 아니었다.
체중을 움직였다. 천천히, 미세하게――”점프할 생각이야?” 칼 끝이 장난치듯 움직였다. “내가 살인을 하길 바래? 에테르의 흐름에 맡기면 머리카락만으로 끝날 거야.”
그가 힘을 뺐다. 이건 분명 할머니의 친구들이 서로를 판별하기 위해 쓰는 암호, 영사관을 상징적으로 비유하는 말이었다. 올바른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발을 벗어 던져라. 그리고 발끝을 둥글게 말도록.” 혁명파의 심볼, 영사관의 반대 방향.
“아주 잘했어!” 칼날이 치워졌다. “미안, 미안 친구. 알고 있겠지만 오늘은 운이 안 좋았어.”
뒤돌아보려는 순간, 엘프가 옆자리에 앉아 지붕 끝에서 양 다리를 흔들어댔다. 겉보기론 십대 후반,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엘프라도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두운 보라와 회색이 섞인 옷. 거기에 수많은 주머니와 벨트가 달려 있었고, 검은 단비색 머리는 암색 금속 고리로 묶어서 머리 위로 올려져 있었다. 그녀에게서 아몬드와 진한 차이, 그리고 땀 냄새가 났다.
“좋은 구경거린데? 그렇지 않아?” 그녀가 조사원들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어린 아이처럼 허공에 발을 차면서 흔들어댔다. 금속으로 된 작은 곤충 몇 마리가 그녀 어깨 위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생명을 교활하게 모방한 비단 날개와 황동의 나비, 눈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는 검정 철제 거미, 남빛과 보라색 꽃이 그 기계 생명체 사이에서 꽃을 피웠다.
“저들이 뭘 찾고 있는 거지?” 아자니가 물었다.
그녀가 관심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나도 몰라. 가짜 폭탄 아닐까?” 그러곤 노래하듯 새 소리를 냈다. “농담이야. 흐음, 대체 뭘까, 우리랑 관계 없는 걸 찾아내도 의미는 없을 텐데.” 그녀가 밝은 은회색 눈동자를 그에게 돌렸다. “아아, 그것보다 난 섀도우 블레이드라고 해. 블레드가 아니고 블레이드야.”
“섀도우 블레이드?” 그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그녀가 쾌활하게 웃었다. “진짜 간지나는 암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그래, 마음에 드는군.” 그가 애써 그리 대답했다. 이전, 할머니가 한 재능 넘치는 젊은 생명체 제작자, 도시 생활을 하는 바하달 엘프에 대해 말해준 것이 기억났다. 분명 그녀가 천재라고 했었다. 기계 곤충으로 영사관의 조사용 비행기계를 잡아서 분해했다고. 그 천재의 이름을 묻자, 할머니는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움직일 뿐이었다.
“내가 생각해 낸 건데 진짜 씩씩한 느낌이 들지?” 그녀가 망토 안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러자 그가 재빨리 얼굴을 돌리며 손으로 두건을 당겼다. “의문 많은 남자, 좋은데?” 그녀가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좋은 센스야.”
그가 헛기침을 했다. “할머니는 어디 있지?”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방금 보다 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 움직임이 숙달되어 있었다. “그건 몰라. 난 지도자를 찾으러 여기 온 거야. 근데 아직 오지를 않네.” 그러곤 손을 입으로 가져가 이미 자국이 나 있는 피부를 이빨로 깨물었다. “이미 여기 와 있던 거라면……영사관한테 잡힌 걸지도 몰라.”
“그 말 대로야. 할머니 집을 찾아온 조사원에게 들었지.”
그녀의 한쪽 눈가가 위를 향했다. “들었다?”
“설득이 좀 필요했지만.” 그가 금속 장갑을 쥐었다. “할머니가 어디로 끌려 간 건지 알 수 있었으면 했지. 조사원들이 흔적을 없애고 있어.”
“흥, 흥, 흥” 섀도우 블레이드가 생각에 잠기자, 그가 깜짝 놀라며 생각했다. 지금 그걸 입으로 직접 낸 건가?
“근처에 혁명파 은신처가 있어. 이 수색에서 빠져 나온 자는 분명 거기에 모여 있을 거야. 뭐라 그러나 들으러 가자.”
그가 끄덕였다. “감사하네.”
그녀가 자리에서 뛰어 올라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난 지붕을 타고 갈 건데, 따라올 수 있겠어?” 그 목소리가 다시 쾌활하게 돌아왔다. 마치 태양 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처럼 근심이 온 데 간데 없어진 모양이었다.
그가 후드 밑에서 미소 지었다. “한번 시험해봐.”
“좋았어.” 섀도우 블레이드가 어깨에 두른 기계 나비를 향해 휘파람을 여섯 번 불었다――일반인에게는 새의 울음소리로 밖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기계 곤충이 날개 짓하며 날아가 조사원들 위를 왔다 갔다 하며 불규칙적으로 움직이자, 그녀가 눈짓을 하며 말했다. “이쪽 망은 됐어, 가자.” 그러곤 사슴처럼 달려가 다음 지붕을 향해 우아하게 점프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즈음, 그녀는 벌써 건물 두 개 앞까지 뛰어가 있었다. 건물 사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한쪽 눈으로 긴 거리를 판별하기 위해선 직관, 추측, 경험이 필수 요소다. 이어 도움닫기로 점프해 그녀 옆에 착지했다.
달빛 눈동자가 웃었다. “다리가 튼실한걸.”
그녀가 햇빛에 탄 지붕을 지나 굴뚝을 피하고는, 무너진 벽돌 계단을 넘어 사람으로 넘치는 거리를 지났다. 다소 먼 길을 선택해 외곽을 나선으로 그리며 뛰어가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훌륭해. 그녀가 스스로를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기억과 지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목적지를 도저히 알 수 없겠지.
집합 주택에 깔린 그림자 위에 두 사람이 착지했다. 그 건물 천장이 뚫려 구멍이 나 있었고, 옥상에는 더러운 물이 가득 차 작은 연못을 연상케 했다. 아래층 벽에는 흑색과 녹색의 줄기가 벽을 덮고 있었고, 계단을 떠다니는 에테르 빛이 어둡고 차가웠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섀도우 블레이드는 수많은 포켓 중 하나에서 파랗게 빛나는 봉을 꺼냈다.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그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위에서 본 기라푸르는 모든 것이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어험.” 불쾌한 목소리.
그녀가 헛기침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입을 통해 말했다. 아자니가 물었다. “내 말이 들렸나?”
그녀가 당황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아니고, 우리 엄마가 똑 같은 소리를 했거든. 어떻게 알았어?”
“우연이겠지.”
앞길이 문으로 막혀 있었다. 복잡하면서 소음을 내는 장치가 보였다. “6개월 전만 해도 이 거리는 지금 같지 않았어.” 섀도우 블레이드가 눈을 깜빡이며 장치를 재빠르게 조작하자, 곧 소리가 멎더니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등 뒤로 문을 닫은 그녀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이런 ‘비 개발 지역’ 이 혁명파의 은신처론 안성맞춤이지. 이상한데, 이번 달 말에 에테르를 통하게 하겠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시선을 움직이며 말했다.
누군가가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 그가 바짝 긴장했다. 이어 두 사람이 모퉁이를 돌았다.
“나야 나.” 섀도우 블레이드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 파시리 부인 본 사람 있어? 지도자랑 있는 거 아니야?”
어디선가 베달켄 소년 한 명이 나타나 섀도우 블레이드의 팔을 잡았다. “배――”
“섀도우 블레이드!” 엘프가 꾸짖듯이 소년에게 속삭였다.
그 베달켄 소년이 한 걸음 물러나더니 눈을 동경에 반짝거리며 말했다. “예, 예이, 그니까, 섀도우…블레이드…님. 무사하셔서……다행입니다.”
그녀가 가슴을 펴고 손을 허리에 대며 말했다. “섀도우 블레이드님이 짜증나는 영사관 놈들 따위한테 상처 하나 생길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저기요?” 다 탄 하늘색 로브를 몸에 두른 인간 여성이 나타났다. 갈기처럼 보이는 머리――밑으로 처지지도 않고 꼬여 있지도 않았다――를 하고. “제가 지도자님과 함께 있다 헤어졌는데 합류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목소리가 동요에 기어들어갔다. 거기서 피로와 공포의 냄새가 났다.
앞으로 나와 자세를 낮게 하고 몸을 숙였다. “가르쳐주게, 뭘 보았나? 아, 이름이……”
“탑리에요. 제가……그니까, 제가 거기 도착했을 때는 영사관 놈들에게 포위당해 있었어요. 그 중 한 사람이 팔을 잡았는데……의수였어요. 붙어 있는 게 아니라 팔 그 자체였죠.”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기억 깊은 곳을 되뇌었다. “손가락은 세 개 뿐이었고 색이 검은 금속이었어요. 에테르의 파랑이 아니라 보라로 빛나고 있었고요. 분명……고대의 것이 틀림없었죠.”
후드의 그림자 속,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턱을 긴장시켰다. “그럼, 파시리 할머니는?”
탑리의 숨이 멈추었다. “부인도 그곳에 떨어져서 있었어요. 제가 모르는 여성 세 명과 함께요. 빨간 머리랑 검은 드레스, 녹색 옷을 입은 사람들. 병사들이 피아 씨――지도자님을 데리고 가버렸어요. 파시리 씨는 다른 여성 둘을 데리고 갔구요. 쿠자르 쪽으로요.
쿠자르. 부유층이 사는 녹림이 가득한 지역이자 많은 영사들의 거주지가 있는 곳. 침입은 물론, 정찰조차 힘들다. 그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살 것이다.
탑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넘쳤다. “저……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가 스스로의 발 밑으로 그 말을 내뱉었다.
그가 물었다. “자네 전사인가?”
“전――아뇨! 아니에요. 전……전 그저 물건을 좀 만들 줄 알 뿐이에요.” 그녀가 다 타서 더러워진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어깨에 손을 올릴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렇게 할 정도로 그는 그녀를 잘 알지 못했다. “각오도 없이 전투로 돌입하는 건 용기랑은 달라. 어리석음이지. 더 큰 죽음을 부를 뿐이야.” 그 목소리가 근엄하게 이어졌다. “이건 얻기 힘든 지식 중 하나지. 부디 믿어주게.”
“뭔가……했어야 했는데.”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자네는 목격했고 그걸 말해주었네. 지금 모두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네.” 그가 탑리에게 머리를 숙였다. “감사하네.”
탑리는 아무 말 없이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큰일 났네.” 섀도우 블레이드가 입을 열었다. “쿠자르는 넓어. 넓은 잔디에 가로수까지. 벽도 감시도 잔뜩 있지. 넌 몸집이 너무 커. 그렇게 몸을 숙이고 있어도 말야.” 그녀가 베달켄 소년을 보았다. “다얄! 병사들을 모아!”
소년의 얼굴이 눈부실 정도로 밝아졌다. “분부대로 합죠, 블레이드 님!”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난 네가 이제까지 만나 본 최고의 생명체 제작자야.” 그녀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생명체 제작자가 나뿐만은 아니지.” 다얄이 방 안을 돌아다니며 기계 야수 또는 근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모았다. “난 곤충, 다른 사람들은 새라던가 쥐, 아니면 고양이, 개구리, 짖어대는 개까지 있어. 이런 작은 창조물들이 기라푸르 안에 몇 천이고 넘쳐나지.”
그는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난 자력으로 그녀를 쫓겠어.”
엘프가 웃었다. “그러시겠지. 그래도 우리가 하면 훨씬 더 빨리 찾아낼 수 있을걸.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까. 눈이 많으면 빨리 찾아낸다. 뭐, 그런 거.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녀가 곤충의 울음소리를 따라 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같이 가줄게.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도록 말야. 에…그니까……” 거기서 말을 끊고 그의 손을 잡았다. “문을 부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오면, 그 때는 너한테 맡기는 편이 좋겠네.”
황동과 녹림의 기계를 손에 든 젊은이들이 두 사람 앞에 가득 찼다. 그들 모두가 20살도 채 안 되어 보였다.
“근데, 넌 어떻게 부인이랑 아는 사이가 됐어?” 섀도우 블레이드가 물었다.
그가 생각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한 남자를 찾는 걸 도움 받고 있네. 아주 위험한 남자야. 지금쯤 더 위험한 누군가와 함께 일하고 있겠지.”
“수수께끼의 남자 추가!” 그녀가 웃었다. “그럼 가보실까!”
6개월 전
마룻바닥 밑에서 몸을 비틀어 대들보에 엉덩이를 긁었다.
침실 벽, 의복이 있는 장롱에 몸을 숨길 장소가 있었다. 형제들 중 아무도 모르는 곳. 타미요와 겐쿠는 알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대서고 바닥 밑으로 조용히 기어 나와 널빤지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거나, 숨 죽이고 귀를 기울이며 이 안전하고 좁은 공간을 홀로 만끽했다. 나만의 어둠 속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 때때로 장난감이나 책을 가지고 와서 몇 시간을 보내다 다른 아이들이 나를 찾아 다니는 소리를 기분 좋게 듣곤 했다.
이곳에서 가장 작고, 제일 느려도 때로는 좋을 때도 있다.
그대로 타미요와 겐쿠가 그 거인과 함께 있는 거실로 슬그머니 향했다. 기묘한 음식 냄새가 났다. 우리가 평소 먹는 마른 녹색의 그것만이 아니었다. 검은색이 뭍은 새빨간 무언가도 함께 있었다. 그 냄새가 가슴에 막혀 목구멍 뒤를 경련시켰다.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코를 잡고 입으로 숨을 쉬며 움직였다.
방 전체가 보이는 구멍이 방 구석에 있었다. 타미요가 책상 끝에 전용 방석 위에 걸터앉아 있었고 그 옆에 겐쿠가 있었다. 그 거인, 아자니가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아 줄무늬로 된 갈색 사각 접시 위에 있는 음식을 정중하게 입으로 옮기고 있었다. 고기다. 그게 떠오르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겐쿠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자니에게 머리를 숙였다. “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요. 이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거인이 멍하니 있다 대답했다. “아아, 이거 죄송합니다, 물론이죠.”
겐쿠가 타미요에게 다가가 그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눈을 감고 잠시 머리를 그의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팔과 손가락이 넝쿨처럼 엮였다. “넌 네 할 일에 최선을 다 해줘.” 그가 말했다. “난 아이들을 보고 올 테니까.”
“고마워. 애들도 어머니랑 있는 것에 슬슬 지루해할 때니까.” 겐쿠가 빈 접시를 가지고 한쪽 다리로 문을 닫으며 나갔다.
그 거인이 불편하다는 듯 앉아 있었다. 풍경이 소리를 냈고, 그 바로 옆에 있는 도기로 된 화로가 불타고 있었다. 그걸 보자 갑자기 심장이 고동쳐 나무에 손톱을 세웠다. 그와 동시에 아자니를 바라보는 타미요를 살폈다. 그녀 이마의 보라색 인장이 걱정으로 주름져 있었다.
겐쿠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타미요가 입을 열었다. “엘스페스 씨를 찾아서 테로스로 가셨었지요. 그녀를 찾았나요?”
“네.” 아자니가 뭔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입을 닫았다. 그 대신 방 안을 둘러보다 두꺼운 일지가 올려진 짐을 가리켰다. “혹시 좋지 않을 때 온 건 아닙니까? 보아하니 여행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요.”
“이니스트라드라는 차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타미요가 묻자 그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작년 그곳에서 수개월을 보냈답니다. 달을 연구하려고요.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그녀가 몸을 내밀자 크게 뜨인 그 눈이 빛났다.
“차원의 마력 그 자체가 독자적인 주기로 달을 향하며 그 주위를 돌고 있었지요. 그곳의 생물들도 마찬가지로……” 거기서 말을 끊고 소맷자락의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저번에 젠릭 씨와 갔을 때, 아, 함께 연구를 한 그곳에 사는 분이에요. 이례가 없는 조사 결과를 보여주셨죠. 마나의 움직임, 조류의 변화, 이번엔 그곳 생물들에게 주는 영향을 조사해볼 생각이에요.”
“그렇군요.” 그가 거대한 양 손을 책상 위에 두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자니 씨, 저에게 말씀하실 생각이 없다면 왜 이곳에 오신 거죠?”
거인이 천천히 숨을 내쉬자 큰 중압감이 그의 표정을 덮었다. “저번에 왔을 때……나시는 없었죠.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라 보이던데요……”
타미요가 한숨을 쉬었다. 겐쿠와 의논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나시는 네즈미에요. 늪지에 사는 쥐 인간 중 하나죠.”
내가 좁은 공간 안에서 몸을 떨었다. 계속 듣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타미요가 계속했다. “수년 전, 그 아이가 살던 마을이 플레인즈워커에게 불태워졌어요.”
숨이 멈추었다.
“불태워졌다고요? 어째서요?”
거인 옆의 화로가 한층 더 큰 소리를 냈다.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테제렛이라는 이름의 차원 이동자 죄인의 명령이라는 것 외에는. 범죄조직에 쓰기 위해 쥐 인간을 복종시켰다고 들었어요.”
불타 오르는 석탄이 빨강이 섞인 금색 빛을 마룻바닥으로 튀겼다. 그것이 춤추고, 흔들리며 스스로를 먹고는 빛을 더하며 어두운 곳을 더 칠흑같이 만들었다. 아자니가 반점이 있는 옆구리를 긁었다. 피부가 빨갛게 부풀어 오른 곳을.
가야 돼.
“테제렛? 그 이름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엘스페스가……미로딘에서 그 남자와 만났다고.”
빨리 가야 돼.
나는 눈을 감고 구멍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암흑 속에서 뒷걸음질치며 몸을 말았다. 작은 공간 속에서 심장의 소리가 들렸다. 쿵쾅, 쿵쾅, 쿵쾅쿵쾅――
“그녀의 적과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죠. 그게……2년 전이었을 겁니다.”
밤과 별. 덮쳐오는 열기와 고통. 지붕이 불타고 있어! 도망쳐!
오두막이 불타고 있었다. 보이는 전부가 눈부시고 뜨거웠다. 질병 같은 노란색. 어머니가 나를 들쳐 업고는 달렸다. 아버지는? 어머니, 아버지는요? 아버지를 두고 가지 마요!
무너지는 소리. 어머니가 멈추어 섰다. 품 안에서 건너편을 보자 오두막이 쓰러져 있었다. 입구가 막혀 있었다. 뒤에도 불이 다가왔다. 그것이 두 개의 다리를 가지고 별을 먹었다. 지붕이 화염과 함께 무너지더니 바로 옆 길까지 불바다가 되어 번졌다.
《불의 정령》 아트 : Slawomir Maniak
“2년 전? 그럴 리가요. 아자니 씨, 테제렛은 죽었을 텐데요……3년 전이었던가요? 동료에게 배신당해서. 나시 마을의 생존자가 그를 살해했어요. 그리고 한 용이 시체를 가져갔지요.”
“……한 용?”
달리렴.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 어머니의 털이 그을려 있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도 신경 쓰지 말고 달리렴.
어머니가 나를 안고 불을 뛰어 넘고는 내던졌다. 빨리! 달려!
그대로 달렸다. 한 걸음 갈 때마다 고통으로 피부가 타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쓰러져서 흙 안으로 숨고 싶었다. 진흙은 차가우니까. 스스로 그 안에 묻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명.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불타고 있었다. 사람의 형태를 한 불덩이에게 잡혀서. 비명이 계속되었고 신음이――
타는 고기 냄새가 났다.
눈물이 흘렀다.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눈에 손을 대고 몸을 둥글게 말아 비밀의 어둠 속에서 홀로 떨었다.
비단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비밀장소 밖에서 타미요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렴, 나시.” 그리고 천장 판자를 들어 내가 나오도록 했다.
도망쳐야 돼, 숨지 않으면. 건너편의 제일 작은 구멍까지 가자. 가장 작고 제일 느린 애가 되는 건 이제 싫어. 그렇게 하면 숨바꼭질에서 아무도 이기지도 않고, 웃음거리가 되는 일도 없고, 부풀어 오른 피부를 긁지도 않고, 그리고 아무도 나를 더럽고 기분 나쁜 애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소라타미의 여성이 구멍 안으로 속삭였다. “제가 말한 걸 기억하고 있나요? 언제든 제 곁에 와도 괜찮답니다.”
타미요의 팔 안으로 뛰어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세상이 흔들렸다. 그녀의 무릎 위에서 따스한 팔이 나를 껴안았다. 거인이 바로 거기 있었다. 크고 강하고 커다란 어금니도――
타미요가 턱을 내 머리 위에 올리더니 더 세게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전 여기 있답니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 넘쳤다. 멈추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행동에는 결과가 동반돼요.” 타미요가 아자니를 향해 말했다. “때때로 저희 같은 사람들은……스스로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잊어버리곤 한답니다.”
기계로 만들어진 재봉새가 한 마리, 생명의 신비한 모방품이 포장마차에서 나오는 기름으로 가득 한 연기 속으로 들어왔다――그 핵에는 꽃 피운 이끼 덩어리 나무가, 뼈대에는 백금의 금속이, 날개에는 선명하게 염색된 비단이 있었다. 그것이 날개 짓하며 교활하게 황동 다리를 뻗쳐 아자니의 넓은 어깨 위에 우아하게 착지했다.
그가 의문과 함께 어깨의 둥글면서 작은 생물을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황동 새가 그리하듯, 그것이 귀에 익숙한 리듬을 연주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말하고 있는 건가?”
“응?” 섀도우 블레이드의 달빛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 볼이 닭 꼬치로 가득 부풀어 있었다. “응응! 응응응!” 그녀가 먹다 만 꼬치막대로 그 새를 가리키더니 입에 물고 있던 것을 조금 삼켰다. “미히르!” 겨우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한번 먹던 것을 삼키고는 가슴을 때리며 포장마차에 붙어 있던 쓰레기 통에 막대를 던져버렸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막대가 꽂혀 있었다.
포장마차의 주인, 고결하면서도 어딘가 이해하기 힘든 엘프 한 사람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섀도우 블레이드의 금속 거미를 바라보았다. 그 곤충이 영사관 직원의 지갑에서 훔친 돈을 그의 손에 떨어뜨렸다.
두 사람은 쿠자르의 끝, 매력이라곤 없는 그 지역에 인접해 있는 시끄러운 시장통에 있었다. 섀도우 블레이드 말하길, 들어간 방향에 따라 빈민가와 사교계가 달라진다던가. 지금 그녀는 오가는 인파에 흥분한 모양이었다. 아는 사람마다 손가락질하며 이 마을의 역사에 대해 백 가지도 넘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가 심한 두통을 느꼈다. 두 사람이 이곳에 와서부터, 광장 모퉁이에 설치되어 있는 음악 장치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흔들리는 색채가 되어 대리석을 때렸고 작은 고음과 내장이 떨리는 듯한 저음이 그의 귀를 찔렀다.
《팬하모니콘》 아트 : Volkan Baga
“그 새는 미히르 꺼야. 우리가 생각해낸 암호. 대단하지?” 섀도우 블레이드가 씨익 하고 웃었다. 그녀의 검은 피부에 빛나는 이빨이 두드려져 보였다. “파시리 씨가 20분 전에 던드에서 목격됐어.”
“알겠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던드가 뭐지?”
“곤티의 야간시장이라고 알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실은 암묵의 비밀이었다. 대규모 불법 거래가 에테르 시대가 오기 전 시대의 유물인 오래된 에너지 공장에서 행해지곤 했다. 정직한 것을 좋아하는 자에게 있어선 안전성이 의심되는 발명품과 도덕성에 눈가가 찌푸려지는 것들이었다.
“던드는 곤티의 시장 지하를 통해 건설된 영사관의 지부야. 지하도가 미로처럼 꼬여 있지. 환풍구랑 하수도 그런 것들로 말이야. 놈들은 거기서 첩보원을 보내거나 중요한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곤 해. 이 모든 걸 극비리로. 무슨 뜻인지 알지?” 그녀가 눈짓을 보냈다.
법적 조직이 시민들 발 밑에 숨어서 운영된다니. 이 세계는 모든 것이 정반대다. 그가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암시장으로 가는 길은 아네. 하지만 던드는 어떻게 해서 찾아내지?”
섀도우 블레이드가 대답했다. “입구까지 안내할게. 들어가는 곳 몇 개를 아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하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오지 말게.”
그녀가 입술을 뾰족 내밀며 눈썹을 내렸다. “너 혼자 가는 건――!”
“섀도우 블레이드.” 그가 말을 끊었다. “이건 할머니를 잡기 위해 설치된 함정이야. 들어가는 것 보다 나오는 게 몇 배는 힘들겠지. 밖에서의 조력이 필요해. 탈출 방법을 찾아봐주지 않겠나? 빠르면서도 비밀스러운 것으로.”
그녀가 재빨리 숨을 쉬며 근처의 벽을 보는 척 했다. “비행기계.” 그리고 얼굴을 들었다. “영사관의 비행기계는 전부 대량생산품이야. 전부 동일한 파워지만 약점도 똑같지. 지도자님이 훔치는 법을 보여주셨어.”
“그녀가 자네에게 날리는 법도 보여주었나?”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 아냐?”
“글쎄.”
“후우.” 섀도우 블레이드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는 새를 밀자 두 마리의 새가 서로 경쟁하듯 길게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개를 퍼덕이며 기세 좋게 한번 울었다. “얜 너한테 줄게. 던드 입구 근처까지 가면 그쪽으로 날아갈 거야.”
“고맙네.” 그가 등을 돌려 갈 채비를 하자 그녀의 손이 어깨 위로 올려졌다.
“넌 파시리 부인의 친구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암호를 알려주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넌 지금 부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범 아가리에 들어가려 하고 있어.” 그녀가 한쪽 팔을 허리에 댔다. “넌 틀림없는 혁명파의 일원이야. 아니라는 녀석은 내가 숙련기술로 승부를 내주겠어.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암호명을 말해주지 않았지? 이거 실례 아니야?” 그리고 팔짱을 끼고 불쾌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암호명은……그렇군. 날 ‘하얀 고양이’ 라고 부르는 자도 있더군.”
섀도우 블레이드가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나도 안 어울리지 않아? 왜 그렇게 부르는 건데?”
내가 실수한 걸까. 아니야. 이 엘프는 날 도와주었고 신뢰해 주었어. 그리고 아무것도 캐묻지도 않았고.
그가 후드를 벗었다.
달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거기에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추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털가죽, 한쪽만 있는 푸른 눈, 수염과 커다란 코.
그녀가 크게 웃었다. “그 멋진 얼굴을 지금까지 감추어 왔다니, 아깝네.”
그가 인사를 했다. 칼라데시 식이 아닌, 젊은 시절을 보낸 나야 식으로. 이 차원의 사람들은 친절하면서도 어딘가 특이했다. “의지하고 있겠네, 섀도우 블레이드.” 그리고 후드를 다시 썼다.
“배티.”
그가 뒤돌아보았다. “뭐?”
그녀가 짓궂은 미소를 보였다. “흔한 이름이야. 배티. 넌 나한테 비밀을 보여줬어. 그 대가야. 아, 그 새는 절대 고장 내뜨리지 마. 미히르가 기다리니까. 나도 걔한테 빚을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배수관을 재빠르게 올라갔다.
그가 뒤돌아 근처의 벽을 살펴보고는 황동 장갑을 낀 손을 움직였다.
창문은 조용하게, 벽돌은 느긋하게, 그리고 물받이를 넘어 옆 건물로 이어지는 남색 에테르관을 건너갔다.
그 눈이 정확한 길을 선택했다. 마치 꺾인 고사리와 강가의 발자국마냥.
몸을 위로 던지고 발 끝으로 점프해 금속의 손으로 벽돌 사이를 정확하게 집고, 연마된 철을 잡았다. 그 와중에도 새가 부드럽게 울어대며 그의 어깨에 착실하게 붙어 있었다.
에테르관 위를 달리자 나이 든 엘프가 구운 꼬치구이의 연기가 길거리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도시의 냄새가 후각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림자의 시원함과 햇볕의 열기가 어른거리며 지나갔다. 그의 움직임이 사고를 능가해 본능적인 그것으로 변했다.
피한 것이 굴뚝이었는지, 아니면 나무였는지.
놋쇠와 대리석으로 가득한 공간을 지났지만, 그게 뭔지 알 필요는 없었다.
뒷길을, 그리고 땅이 갈라진 곳을.
다리가 열기를 띠고 폐가 거칠게 맥동했다. 어깨에 걸리는 태양――옛날부터의 친구였다. 평원과 밀림을 헤치며 다니던 젊은 시절. 번갯불처럼 빠르면서도 조용하게.
그가 커다란 새의 등 위로 기세 좋게 착지해――아니면 비행기계였나――거기서 더 높은 언덕을, 지붕을 향해 점프했다.
어깨의 새가 무언가를 알리듯 짧은 음색으로 울었다. 거기서 소리 없이 급정지해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어디지?” 숨을 내쉬며 묻자, 기계 새가 비단 날개를 펼치며 날아 올랐다.
어느새 암시장 모퉁이까지 와 있었다. 도시의 냄새가 윤활유, 에테르, 녹슬음으로 가득했다. 가장 가까운 낮은 건물 저편에서 난잡하고 소란스런 군중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새가 쪼개지고 기름에 더럽혀진 장작 위에 앉아 머리를 이곳 저곳으로 돌리더니, 방금 전처럼 울었다.
장작 뒤편에 문이 있었는데, 혁명파의 은신처에서 본 것과 같은 잠금 장치로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건물에서 뛰어내리자 흙먼지가 올랐다. 새가 그를 향해 다시 울었다――새의 울부짖음이 아니라 기억에 있는 암호문을. 그리고 열쇠 앞에서 작은 날개를 퍼덕이더니 가는 주둥이로 문 표면의 돌기를 눌렀다. 에테르의 희미한 울림이 사라지면서 문이 천천히 열렸다.
“고마워.” 그가 감사를 표하자, 새가 짧게 울고는 그곳을 떠났다.
차가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황동을 두른 사람의 모습이 벽에서 미끄러지듯 나오자 햇빛에 칼날이 하얗게 빛났다. “여기가 어디라고――”
장갑을 낀 손이 쥐어졌다. 그가 경비병의 관절을 거꾸로 꺾으며 벽에 내동댕이치자 갑자기 피 냄새가 코를 찔러 주춤했다.
“미안하네.” 그가 의식 없는 몸을 향해 중얼거렸다.
경비병을 피해 코를 킁킁대며 푸르게 빛나는 지하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할머니의 망토 후드를 벗고 귀를 쫑긋이 세우며 발소리에 집중했다.
던드는 불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래된 땀 냄새, 코를 찌르는 똥 냄새들. 많은 사람들이 이 좁은 곳에 갇혀 있었고, 암흑 속에서 절망으로 가득 찬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사라졌다.
찾았다. 지하도 왼쪽에 아주 희미하게. 여름 과일, 장미, 히아신스, 그리고 벌꿀 냄새.
그대로 지하도를 달려, 발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 안에 숨겨진 할머니의 거실 냄새를 쫓았다.
앞쪽에는 오후 태양의 시퍼런 빛이 가득한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가 미끄러지듯 급하게 정지해 귀를 기울여 공기의 맛을 확인했다. 중얼대는 소리가 많은 반향에 반사되면서 사라져 판별하기가 힘들었다. 금속의 날카로운 소리와 들어본 적 없는 속삭임, 돌 위의 구두소리, 그리고 신음하며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
집중하며 몸을 움직였다.
원형으로 된 방으로 들어왔다. 바닥에서 뻗어 나온 황동 테가 저 높은 천장까지 가늘고 우아한 곡선으로 이어져 있었고 머리 위의 원형 창문에서 빛이 들어왔다.
할머니의 냄새가 났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 중앙 근처에서 진홍과 황금을 두른 경비병 둘이 서 있었다. 무언가……박스처럼 보이는 것 앞을 지키고 서서. 불쾌한 소리를 계속해서 내는 네모나고 검은 금속. 그 안에 그가 모르는 냄새도 섞여 있었다. 혀 뒤쪽에 남는 듯한 쓸개즙의 단맛. 그 구석에 작은 창문이 하나 박혀 있는 문이 보였다.
힘 없는 주먹이 창문 유리를 때렸다.
누구인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주먹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5개월 전
구름이 어두운 회색을 띄며 물에 젓은 솜처럼 빗물의 냄새를 풍겼다.
아자니가 소지품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흰색 외투, 강철 갑옷, 거대한 도끼. 나시가 복도에서 훔쳐보는 중, 그가 세 번도 더 이불 접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어 몇 번 더 시도했지만, 그의 큰 손으로는 도저히 어려운 동작이었다. 우메와 히로에게 심부름을 부탁 받은 루미가 양 팔을 들고 뒤뜰로 달려가더니 안개 속에서 타미요가 하지 말라고 했던 그 자세로 공중제비를 했다. 그녀가 옷이 흠뻑 젖은 채 웃음 소리를 내자, 물방울이 코와 귀에서 흘러 내렸다.
타미요는 저번 주에 이니스트라드로 출발했다. 자신이 다른 세계의 달을 관찰하는 사이, 아자니를 모두에게 부탁한 채.
그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앉아, 참을성 있게 이불을 접었지만 둘둘 말릴 뿐이었다.
“나시, 들어와도 된다.”
나시가 방 안으로 들어가 그의 도끼를 보았다. 신기하게도 한쪽 날은 검었고, 나머지 한 쪽은 하얬다. 뭔가 의미가 있는 걸까.
그 빛나는 날 끝에 조심 조심 손가락을 댔다. 날이 두꺼웠다. 하지만 상처는 나지 않았다.
“안 갈아?”
“그럴 필요는 없단다. 민첩함과 무게로 베는 거니까.”
손가락을 더 세게 대보았다.
“조심하려무나. 날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거인이 둘둘 말린 이불을 들어 선반 안으로 넣었다.
이번엔 칼 옆 부분에 새겨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를 드러낸 긴 털을 한 고양이의 얼굴. “이제 출발하는 거야?”
“그래.”
“어디로?”
그가 소년을 보았다. “네 가족을 죽인 남자를 찾아서. 친구가 말하길, 칼라데시라는 곳에 있다는구나. 누군가에게 돈과 지식을 받아 힘을 얻었다고 들었다.”
나시가 옆구리를 긁었다. “나도 그 녀석을 봤어. 주술사가 그를 죽였는데 다들 숲 속에서 그걸 봤어.”
아자니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볼만한 게 아니었다.”
소년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게 큰 일이래.”
“중요한 일이라고?” 그가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응. 그 녀석이 우리한테 나쁜 짓을 했으니까, 합당한 대가를 받는 걸 봐야 한다고. 다들 명예가 걸린 일이라고 했어.” 소년이 코를 훌쩍거렸다. “그 인간이 이상한 팔을 하고 있었어. 다른 인간이 그걸 잘랐고. 그가 말할 때, 왠진 잘 몰랐는데 머리가 아팠어.”
아자니가 끈으로 묶은 무기를 등에 달자 그 검은 칼날 끝이 차갑게 빛났다.
“그 인간을 죽이러 가는 거야?”
현관의 초인종이 돌풍에 크게 울렸다. “잘……모르겠구나.” 그가 툇마루 밖을 내다보며 하얀 망토에 손을 가져갔다. “어쩌면 그게 올바른 길일지도 모르겠구나. 자신이 어떤 길을 걷는지 알지 못하는 자가 이토록 많을 줄이야……”
그가 양 손으로 하얀 망토를 잡았다. 다 사라져가는 빛 바랜 벚꽃잎 문양. 그걸 얼굴로 가지고 가 깊게 냄새를 맡았다.
“그것 때문에 슬퍼?” 나시가 물었다.
“뭐? 아니야.” 그가 눈을 깜빡이며 등허리를 세우고는 엄지로 눈 밑을 닦았다. “이건 내 친구 물건이다. 엘스페스, 그녀가 떠오르는구나."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어?”
“그녀는……” 아자니가 망토를 어루만지자 하늘색 눈이 회색으로 흐려졌다. “……난 그녀를 잃었어.”
“내가 아버지랑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아자니의 큰 눈이 감겼다. “그래.”
나시가 하늘의 구름을 보았다. “죽었구나.”
거인의 몸이 작게 떨렸지만 곧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렇단다.” 그의 한쪽 눈 상처가 유리가 깨진 것처럼 들쭉날쭉해졌다. “엘스페스는……이젠 없어.”
하늘이 굉음치자 루미가 뒤뜰에서 뭔가를 외쳤다. 나시는 부모님이 죽었을 때 주술사가 한 말을 되뇌여 보려 했지만 많은 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정원의 깊은 안개처럼 차갑고 둔탁하게 희미해졌다. 마을을 불태운 그 인간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에 지쳐버린 것처럼.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자신들을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희미한 기억으로 남았다. 한 소라타미의 여성이 서고에서 찾아 와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까지는. “날 타미요라 부르렴.” 그녀가 그랬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단다.”
바람에 툇마루의 꽃잎이 흩날렸다. 나시가 그걸 한쪽 발가락으로 잡았다. “타미요가 그랬어. 누군가를 잃는 건 다치는 거랑 똑같다고. 그니까, 넘어져서 아픈 거랑 같은 거라고. 무릎이 까지면 피가 나오지만 낫잖아? 그리고 눈물은 마음이 흘리는 피랬어. 그니까 흘리면 좋아질 거야.”
아자니의 턱이 떨렸다. “타미요는 똑똑하구나.”
“내가 슬플 때, 타미요는 항상 같이 있어주거든. 같이 있어도 돼?”
“그렇게 해주겠니?”
그가 툇마루 모퉁이에 다리를 꼬고 앉아 도끼를 두자 나시가 그 옆자리에 앉아 다리를 공중에 흔들었다. 하늘이 구름으로 거의 덮였고 멀리선 천둥소리가 났다.
나시가 나무 밑둥처럼 두꺼운 아자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친구 얘기, 하고 싶어?”
아자니가 입을 굳게 닫고 침묵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비구름이 번뜩이며 소리를 내자 아자니의 구레나룻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암흑 속에서 태어나 자랐다. 사악한 것에 멸망 당해 괴물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말이야. 그것들은 죽이지 않는 대신 자신들과 똑같이 만드는 괴물들이지. 놈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일부가 될 때까지 상처 입혔다. 그래도 참고 울면서도 꿈을 보았지만 어느 날 놈들이 찾아오자 도망을 치고 싶어졌어.”
“그 사람도 하늘 저편을 걸을 수 있었어?” 나시가 물었다. “아저씨랑 타미요처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부신 별 하늘이 있는 세계에서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렸지. 그리고 그 세계도……외부에서 온 자에게는 상냥하지 않았어. 결국 거기서 도망쳐 나와 태양이 따뜻하면서 선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왔다.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주었고, 두려움이 멈출 때까지 꼭 껴안아 주었지. 그리고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내며 그들이 스스로를 지킬 방법과 타인을 돕는 방법, 그리고 상처받은 자를 치료하는 법을 알려주었어.”
하얀 손이 그의 한쪽 팔 위로 올려졌다. 히로쿠가 언제나처럼 소리도 없이 와서 세로로 뻗은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난 처음으로 그녀와 만났다. 그 세상이 변해가는 순간에. 그녀는 내게 생명을 주었어. 어떤 의미로 그곳은 내 세계이기도 했지. 그리고 그걸 지키기 위해 함께 싸웠다. 하지만 그 세계는 전쟁으로 상처받고 병들어 모든 것이 변해버렸어. 결국 그녀는 그곳을 떠나 스스로를 잊어버릴 때까지 방황했다……”
아자니가 말을 끊었다. 그 한쪽 눈이 지평선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하늘은 안개 속에 사라져 형태 없는 회색만을 남겼다.
“그녀는 어렸을 적 본 괴물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한때 모든 것이 빛났던 세상이 지금은 완전히 황폐해져 있었지. 그녀는 거기서도 싸움을 계속 했다.”
그리고 나무바닥에 둔 도끼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의 악몽과 싸운다니 나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 성장한 눈으로 그 괴물을 보고 진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니. 굶주려 있는 그 괴물을. 그녀는 그 아가리 안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한도 끝도 없이 싸웠다. 그 세상이 완전히 암흑으로 물들어 더는 싸울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야. 결국 괴물이 이겼고 그녀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비단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누나 우메가 종이 학처럼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아자니의 무릎에 손을 올리고 연보라 빛 눈동자에 공감의 빛을 머금었다.
“그녀는 다시 하늘 저편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와 다시 만났지. 다른 세계의 그녀는 유명한 영웅이자 악명 높은 죄인이 되어 있었다――우리보다도 거대한 존재가 만든 무기를 손에 들고.”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 안의 무언가가 망가져 있었어. 그걸 내게 이야기 해준 적은 없었지만 마음 속에선 무언가가 계속 걸렸지."
“종말이 가까웠고 우리는 세상 끝까지 여행을 해 별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의 괴물과 싸워 승리했지. 그 대가로――” 그가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자 발톱이 그 무릎을 찔렀다. “그 대가로 다른 괴물이 그녀를 죽여버렸다. 그것도――내 눈 앞에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뒤에 있던 루미가 훌쩍거리며 정원에서 더럽힌 옷을 입은 채 불편하게 한쪽 귀를 만지작거리다 중얼거렸다. “바보!” 그리고 갑자기 아자니의 넓은 어깨를 꼭 안더니 하얀 털에 코를 풀었다.
그가 얼굴을 숙인 채 손을 루미의 작은 손 위에 올렸다. “난 사람들에게 가 내가 본 대로 그녀의 이야기를 전했다. 모두가 알고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전설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전했다.”
어느새 모두가 주변을 둘러싸 정적 속에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메, 히로, 루미까지도. 하늘이 번뜩이더니 천둥소리가 났다.
“주인공이 스승을 잃는 옛날 이야기지. 그녀는 삶을 얻고 슬퍼하면서도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싸웠다.”
구름이 진동하자 테루테루 보즈가 끈에 매인 채 춤을 추었다. 타미요라면 뭐라고 할까. 나시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때로 타미요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자니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그렇게 되었어야 했어. 그녀가 아니라.”
그의 큰 손이 떨고 있었다. 감추어진 발톱과 어금니, 그리고 나무 뿌리 같은 팔까지도.
“내 영웅은 죽어버렸어.” 갈라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괴롭게 싸우면서도 원했던 건 그저……안식할 장소였어. 그저 그런 자그만 소원이었는데.”
나시가 그를 껴안았지만 그 몸의 절반도 닿질 않았다. “괜찮아, 우리 모두가 있으니까.”
그가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아무 말 없이 그를 둘러 함께 앉았다. 많은 손들이 그의 어깨와 팔, 등, 그리고 무릎 위에 얹어졌다.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힘 없는 주먹이 창문 유리를 때렸다.
누구인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주먹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놈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려 하고 있어.
어떻게?
천천히.
누구를?
고통스럽게.
그들이.
아자니가 이를 드러내며 울타리를 뛰어 넘었다.
할머니가 준 망토가 어깨에서 떨어지자, 그 밑의 하얀 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갑 안의 손을 정확하게 움직이자 잠금 쇠가 풀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여름의 번개처럼 재빠르면서도 소리 없이 공중을 날았다.
지금껏 손에서 떼본 적 없는 도끼와 함께.
고양이 다리로 달리며 구멍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남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검은 머리, 가는 콧수염, 갈색 눈이 불쾌하면서도 익사할 것 같은 공포를 표출하고 있었다.
아자니가 그 목덜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때때로 저희 같은 사람들은……스스로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잊어버리곤 한답니다.”
고대의 마법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아주 먼 옛날, 테노치에서 그리 했듯이.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타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경비병의 양 눈이 공포로 크게 뜨이자 아자니가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건너편에 있는 거대한 빛을 찾았다.
끝이 없는 한 순간, 손 위에 남자의 빛나는 영혼이 올려지자 아자니가 그것을 살펴보았다.
소외감을 느끼며 지낸 젊은 시절. 모두가 화려한 것을 보는 사이, 회색 빛을 바라보았다. 실망한 아버지의 목소리. “발명가도 못 되나.” 무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도 타인의 뒤에 서는 제 2인자의 인생. 길게 묶은 머리카락, 손가락을 자주 다치는 아내에 대한 사랑. 이상한 얼굴을 만들면 자지러지게 웃음소리를 내는 아기. 아침이 되면 태양과 함께 일어나 좁은 부엌을 빵과 향신료의 냄새로 가득 채웠다.
몇 억 개 얼굴 중 하나의 단편. 곳곳이 깊은 상처 구멍에 묻힌 뒤틀리고 어두운 순간들……남은 생애를 전부 써도 씻어낼 수 없는 기름과 같은 것.
하지만 아자니의 영혼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존재일 뿐.
차원 이동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악인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자니가 다리를 옆으로 미끄러뜨리면서 내려치는 도끼 날의 각도를 바꾸었다.
그 날이 경비병의 가슴팍을 향해 떨어지자 깨진 금속판이 대리석 바닥을 향해 흩뿌려졌다. 그 위력에 남자가 회전하면서 쓰러졌다.
《완벽한 시기》 아트 : Chris Rallis
유혈은 없었다.
다른 경비병이 비틀대며 뒷걸음질을 치더니 신경질적으로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아자니가 뒤돌아 한쪽 눈으로 한동안 노려보다 도끼의 검은 날을 바닥에 찍어 큰 소리를 냈다.
그걸 본 남자가 검을 버리고 황급히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경보를 울릴 셈이겠지. 이럴 시간이 없다.
아자니가 수용실의 제어판을 훑어보았다. 조작 봉을 잡아 회전시키자 작게 불이 들어왔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걸로 됐겠지.
도끼의 하얀 날을 감옥의 틈새를 향해 내리찍었다. 그리고 신음소리를 내며 그대로 체중을 실어 문을 밀어냈다. 그리고 팔과 다리를 푸르르 떨면서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억지로 열어젖혔다.
문이 파괴되는 큰 소리를 내며 경첩에서 떨어지자 녹색 연기가 하늘로 피어 올랐다.
눈 앞에 녹색 눈동자를 한 엘프가 다리를 꼬고 앉아 의식이 없는 빨간 머리 여성을 무릎 위에서 안고 있었다. “파시리 부인은?”
엘프가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저쪽에.” 그녀가 다른 여성을 가볍게 들고는 길을 비켜주며 말했다. “전……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할머니가 눈을 감고 낮은 숨을 쉬며 누워 있었지만, 그 표정이 온화했고 양 손이 배 위에서 깍지끼워져 있었다. 마치 일상의 오후, 남은 생애를 만끽하면서 거실의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자니가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자 빨간 머리 여성이 엘프의 팔 안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힘 없이 기침을 하더니 눈을 뜨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니사, 안 재워줄 거야?”
아자니가 파시리 부인을 조심스럽게 대리석 바닥 위로 눕히자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이 펼쳐졌다. 그가 부인의 배 위에 한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검은 독이 폐와 혈관에 가득 차, 피를 굳히고 건조시킨 것이 보였다. 빛나는 마력의 실을 보내 검은 독을 전부 태워버리고, 대신 맑은 공기로 혈관을 채웠다.
곧 그녀가 눈을 뜨더니 기침을 했다. 부인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우며 조용히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자니 씨.” 부인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더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였다. “말랐군요. 잘 먹고 있는 건가요?” 그러곤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아자니가 고양이처럼 소리를 냈다. “네, 할머니.”
“우웨엑.” 빨간 머리가 켁켁 대더니 병적인 기침을 해댔다. 엘프의 어깨를 잡은 채 무릎을 떨면서 심한 기침과 함께 몸을 앞으로 말았다. 그 입술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니사가 그걸 보더니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앉아 봐.” 그녀의 눈동자가 걱정으로 흐려졌다. “부탁이야, 찬드라.”
“잠깐만, 목구멍이 좀 말랐을 뿐이야.” 찬드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금방 좋아질――” 하지만 곧 다시 심한 기침을 하자 바닥이 빨갛게 물들었다. “우엑, 안 좋아……”
“잠깐만요.” 아자니가 조심스레 파시리 부인을 일으켜 세우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 분을 세워 주세요.” 엘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찬드라의 등을 곧게 폈다.
“우와, 고양이 무지 크네!” 찬드라가 헐떡였다. 그녀에게서 뜨거운 구리 냄새가 났다. “그 녀석 보다 팔도 두꺼운 거 아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깨에 손을 두고 눈을 감았다.
심장 고동 소리가 귀를 찢을 정도였다. 독이 그녀의 피를 빠른 속도로 태운 것이 틀림없었다. 은색의 치유 마법이 촉수처럼 흘러 들어가 더러움을 정화하고 곳곳의 폭발을 막았다. 머지 않아 그녀의 호흡이 진정되더니 이윽고 조용해졌다.
아자니가 눈을 떴다. “조금 쉬는 게 좋을 거네. 독은 깨끗이 했지만, 폐는――”
“……괜찮아.” 찬드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곧 웃음을 만들고는 손등으로 입술에 뭍은 피를 닦았다. “고마워, 정말로.”
니사가 아무 말 없이 찬드라의 등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소박한 감사를 담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경비병들이 몰려오는 소리다.
“다음은 당신입니다.” 아자니가 엘프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니사가 고개를 흔들고는 발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 괜찮아요. 출구는 알고 있나요?”
접근해오는 비행기계의 날개가 내는 시끄러운 진동에 귀 안의 공기가 떨렸다. 돌연 방 구석의 창문이 깨지면서 유리조각이 풍경 같은 소리를 냈다. 황동의 재봉새가 방 안을 가로지르며 날아와 경보음을 울리며 아자니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니사가 당혹한 얼굴로 그 기계생물을 바라보았다.
아자니가 창문에서 내려온 밧줄을 보고 말했다. “탈출합시다.”
“아자니 씨, 이걸 두고 갈 생각인가요?” 그녀가 아자니가 떨어뜨린 장갑을 허리 굽혀 줍더니, 타이르듯 말했다. "강가힐이 이것에 몇 주일이나 공을 들였는지 알고 있나요?”
그에 대한 변명은……나중에 하기로 했다.
아까 쓰러뜨린 경비병이 발 밑에서 신음하면서 일어나려 했지만, 곧 다양한 신발들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아자니가 말했다. “가족 곁으로 돌아가게.”
남자가 공포와 의문으로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날 죽이지 않을 건가?”
“죽이지 않아.” 아자니가 대답했다. “그 누구도.”
(Tr. Mayuko Wakatsuki / TSV Yohei Mori)
<새로운 등장인물>
아자니 골드메인/Ajani Goldmane [레오닌, 플레인즈워커]
아자니는 알라라 차원의 파편 중 하나인 나야 출신의 플레인즈워커입니다. 그는 누군가의 계략으로 무리의 왕이자 형인 자잘이 살해당한 쇼크로 플레인즈워커로 각성했고, 형의 원수 니콜 볼라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그 후 친목을 다진 엘스페스를 찾아 테로스 차원을 방문해 그녀와 다시 한번 재회하게 되었고 테로스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 수 많은 시련을 뛰어넘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친구의 죽음뿐이었습니다.
<용어 해설>
카미가와/Kamigawa [차원]
일본 전국시대를 연상시키는 이 차원은 본래 신과 인간들이 공존하는 신화적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카미가와의 강력한 군주 타케시 콘다는 사악한 자로, 야망을 이루기 위해 카미의 신령을 납치해 자신의 힘과 불멸성을 유지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카미는 물질계에 오니로써 형태를 구현해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콘다의 딸 미치코는 우메자와 토시로의 도움을 받아 구속된 신령을 풀어주고 그것과 한 몸이 되어 인간과 신의 경계를 수호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것으로 카미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여기로.
나르셋/Narset [인간, 플레인즈워커]
나르셋은 타르커 차원 출신의 플레인즈워커로, 무술의 달인이자 제스카이도……가 아닌 오주타이 씨족의 겸허한 학도입니다. 재창조된 운명 후의 ‘타르커 진실의 역사’ 가 기록된 두루마리를 읽고 각성한 그녀는 한동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지 않고 고향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엘스페스 티렐/Elspeth Tirel [인간, 플레인즈워커]
엘스페스 티렐의 출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각성 후의 그녀는 알라라 차원의 파편인 반트에서 수 많은 무공을 세워 기사가 됩니다. 하지만 알라라에서 일어난 ‘Conflux’ 로 인해 그녀의 인생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니콜 볼라스를 무찌른 후에는 고향과 마찬가지로 피렉시아의 침공을 받고 있는 미로딘으로 가 차원을 구하기 위해 활동하지만 이미 피렉시아의 오염은 걷잡을 수 없는 곳까지 침입한 상태였고 동료 코스를 홀로 남긴 채 도망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테로스 차원으로 온 그녀는 헬리아드에 의해 영웅이 되지만 끝에는 그의 분노를 사 살해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테로스에서의 죽음은 다른 차원에서의 죽음과는 다른 것으로, 그녀는 지금도 에레보스가 관리하는 죽음의 나라 밑바닥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엘스페스...ㅠㅠ 다시 돌아오겠죠
리턴 투 테로스는 언제가 될까요...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부활시킬까요?
플커들은 필연적으로 찡한 면들이 많네요(돔리: ???), 게다가 이번 소설들은 특히나 캐릭터들이 내면 묘사가 자세한 게 좋군요.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일본공식매직 트위터에 올라오는 만화들도 내용이 궁금했는데 서비스로 이렇게 번역해서 챙겨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ㅠㅠ
감사합니다 ^^
이번 편은 시점이 1인칭이라 심리적 묘사가 두드러진 것이 아닐까 싶네요. 사실 원문에서는 3인칭에 가까웠는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과감히 바꾸어버렸습니다(초반에는 의도적으로 누가 주인공인지 알기 힘들게 했습니다).
4컷 만화는 칼라데시 관련이면 앞으로도 올릴 예정입니다!
엄청 긴 내용인데 잘 번역하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이번편은 내용이 애절하면서도..
아자니 긔여어~~~~~~~~~~~~~~ ><
이번 편은 워낙 길이서 수정해야 할 부분도 많았네요.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라 언제나 송구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