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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9;13-35. 아나, 디아, 엔 블레포.2. 2017. 8. 20.
복음 찬송가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종이 울리고 닭이 울면 태양이 떠오르는 소망의 아침을 맞이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 송 제목이 실로 암 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본문 속에 등장하는 연못, 저수지 이름이 실로 암입니다. 실로 암이란 연못은 “보내다”(샬라흐 חלשׁ)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입니다. 남쪽 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 시리아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그런데 침공한 이후와 이전에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 암 못까지 수로를 만들어 물이 성벽 안으로 흐르도록 토목 공사를 했습니다. 당시 기혼 샘은 예루살렘의 두 수원지 중 가장 중요한 수원지였지만 다윗성 밖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성이 포위당했을 경우에는 물을 공급받지 못해 꼼짝없이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 암 못까지 수로를 파서 기혼 샘의 물을 예루살렘의 성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총 길이 533m가 되는 이 히스기야 터널, 실로 암 터널은 완전한 암석지대를 파서 만든 터널입니다. 기혼 샘의 위치가 해발 636m이며, 이 물이 예루살렘성 안으로 흘러들어 생겨난 실로 암못의 높이는 해발 634m 입니다. 겨우 2m의 고저차를 유지해서 기혼 샘의 물이 실로 암 연못까지 완만하게 흐르도록 만들었습니다. 터널 수로의 높이가 2~5m입니다. 측량 기술이 발달하기 전 히스기야 시대에 단단한 암반을 뚫어서 수로를 만든 대단한 토목공사입니다. 그런데 기혼 샘과 실로 암 양쪽에서 땅굴 공사를 시작하여 땅속 중간에서 만날 수 있게 했습니다. 높이와 거리 계산을 정확히 해서 기혼 샘물이 자연스럽게 실로 암까지 샘물이 흘러갈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만들어졌던 실로 암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지난주일에 나누었던 것처럼 오늘 이 사건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시각장애인을 두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던졌던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생후부터 평생을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 앞에서 긍휼과 연민을 표하기 보다는 누구의 죄로 인함인지 원인과 책임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 하나님의 하실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사람이 볼 수 있게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보게 해 주신 과정이 지난주 와 같이 매우 특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시각 장애가 된 사람의 눈을 보게 하실 때에 3가지 동사를 사용합니다. 그 동사는 뱉다, 짓이기는 이기다. 그리고 바르다 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전에 하지 않으셨던 동작입니다. 그러면 이 동작이 어떤 상황을 말해 줄까요?
먼저, “뱉다”라는 동사입니다. 한낮 뜨거운 햇볕 아래서 주님은 땅 바닥에 쭈그려 앉으셨습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그 사람 앞에서 온 입안의 침을 모아 메마른 흙 위에 뱉으셨습니다. 아열대성 기후의 지역이기 때문에 순간순간 입 안이 턱턱 말라오고 갈라집니다. 침을 뱉기는커녕 물을 계속해서 마셔주어야 갈증이 해소 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입 안의 물기를 짜내어 메마른 흙이 진흙이 될 정도로 뱉어냈습니다.
두 번째, “이겨”라는 동사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애써 뱉어내신 침으로 주님은 흙과 함께 섞고, 젖은 흙을 주무르듯이 침과 흙을 골고루 주물렀습니다. 거친 돌맹이를 제거하고, 부드럽고도 고운 흙으로 이기고 또 이겼습니다.
셋째, “바르다”라는 동사입니다. 땅 위에 한참을 침을 뱉고, 그 뱉었던 것을 이겨 진흙을 만드셨던 주님은 이것을 시각장애인의 눈 위에 바르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굳이 힘들고도 번거로운 방법을 써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도록 하셨을까요?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고, 고칠 능력이 있으신 분인데 왜 이런 방법을 이용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지금의 자신을 보는 관점을 고쳐주기 위함입니다. 병의 원인을 묻던 제자들의 질문도 그러하고, 이후 전개되는 이 사건과 관련한 본문에서도 드러나지만, 병자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있습니다. 평생을 죄인취급 받은 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스스로 버려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날그날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겨우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는 인생으로 취급을 받던 시대입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오늘날도 이와 같습니다. 수없이 많은 모멸과 조롱과 차별을 겪으며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연명해 온 사람입니다. 이 사람 속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먼저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당시 침에는 병을 치료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 민간 치료적 이유도 있었지만, 주님의 의도는 또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침을 사용하신 것은 멸시와 천대의 의미로 내뱉던 침을 치료의 도구로 쓰신 바로 그 자체에 있습니다. 침 뱉음을 받으며 경원시 여김과 경홀히 여김을 받았던 바로 그 수단과 물질인 침을 사용하여 지나온 그 시간과 과정을 역전시켜 주고자 하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것은 자신을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주기 위함입니다.
둘째, 진정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 줍니다. 불레포 하기는 하는데, 그냥 블레포하고 아나 블레포하고 디나 블레포하는 사람들에게 엔 블레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아나 블레포의 시각이 되지 않는 유대인들이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같이 계신 메시야를 보지 못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입니다. 육체의 질병은 보면서도 영혼이 병들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미움과 원망과 불평, 시기와 질투, 다툼으로 병든 인생들의 모습이 아나 블레포인 이사람 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두가 멀리하던 그 사람 앞에 쪼그려 앉으셨습니다. 저주와 멸시의 침 뱉음을 하던 바로 그 침으로 진흙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죄인이라고 여기던 그의 얼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단 한 번도 빛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의 눈 위에 바르셨습니다. 진짜 죄인이 누구인줄 아느냐? 정말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누구인줄 아느냐?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저주받은 것이라면, 정말 저주받은 인생이 누구인줄 아느냐?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너희들이다. 침 뱉음을 당한 이 사람이 아니라, 침을 뱉었던 당신들이다. 이렇게 멋지게 말씀을 하시고 상황을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에도 주님께서 하시면 상황은 새로워집니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고 멸시를 하더라도 주님께서 만지시며 깨끗하게 하시면 상황은 반전이 되고, 신분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어 육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의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육체를 넘어 영적존재로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침으로 진흙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 진흙을 평생 저주받은 자라고 멸시와 천대를 받던 한 사람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래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진정 메시야를 볼 줄 아는 사람, 유한한 것 속에서 영원한 것을 바라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지난주와 마찬 가지로 생명을 얻고, 진리의 내용을 정확하게 바르게 분명하게 확실하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17절에 선지자라고 합니다. 30절에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들이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 반문하며 탄식을 합니다. 33절에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아니 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바리새인과 이웃과 지인들에게 제대로 보고, 인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주 어부의 마을, 벳세다에서 예수님께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눈을 고쳐 주시는데 눈에다 침을 뱉으시며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엇이 보이냐고 물으시는데 여기에 이 사람은 눈이 보여 지는 것을 3단계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이 보다 를 구분하면서 쳐다보다 주목하다 밝히 보다 이렇게 구분을 해서 말을 했습니다. 블레포 보다를 말하고 , 아나 블레포 처다 보다로 말하고 , 디아 블레포 주목을 하다로 말하고, 엔 블레포, 분명하게 보인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 블레포, 아나 블레포, 디아 블레포, 엔 블레포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멧세지가 무엇일까요? 블레포, 아나 블레포, 디아 블레포, 엔 블레포에 대하여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실히 다시 한 번 되 새겨보는 그래서 우리의 분명하고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먼저는 블레포, 보다 입니다. 보는 것의 전체를 헬라어로 블레포라고 합니다. 아나 블레포, 디아 블레포, 엔 블레포를 총 망라합니다. 좋은 것과 해 되는 것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이 블레포입니다. 기쁘고 좋고, 나쁘고, 싫은 모든 것을 보는 것이 블레포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예수님께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먼저 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2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이 것이 누구의 죄냐고 장애가 죄악 때문이라는 블레포로 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을 봅니다. 7-8절에 이웃 사람들과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지인들이 보는 관점인데 의아하게 봅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의심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블레포 입니다. 11절에 고침을 받은 사람이 이웃과 지인들에게 대답을 하는데 이 대답 속에 불레포를 말합니다. 무엇 무엇을 시키는 대로 그대로 시행을 했더니 보게 되었다는 순종의 블레포입니다. 15절에 바리새인들이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실제로 보게 된 경위를 묻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보게 된 경위와 대답을 하는 사람의 의지 없이 보게 된 사실을 말하는데 이들이 사용하는 보다의 동사가 블레포입니다. 17절, 18절, 19절, 21절, 다 블레포입니다. 특별히 25절에 고침을 받은 사람이 나는 모르지만 앞을 보지 못하다가 지금은 보는 것의 블레포입니다.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이 불레포입니다. 오늘 앞을 못 보는 사람은 뱉어, 이겨, 바르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을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고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의 마음의 블레포 입니다. 그런데 블레포는 아나블레포와 디아 블레포가 포함이 되고 엔블레포가 다 포함이 되는 블레포입니다. 쳐다보고, 좀더 깊이 쳐다보는 주목을 하고, 그리고 분명하게 보기위하여 엔 블레포 이 모든 것이 블레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보십니까? 지인과 이웃의 사람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부모 형제자매를 어떻게 보십니까? 주변에 일어나는 사선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 보시는 각도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보시는 혜안에 따라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집니다. 거기서 오는 은혜와 복의 크기도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원하시고 여러분이 원하시는 봄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과 내일이 시온의 대로처럼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1. 블레포의 첫 단계 아나 블레포입니다, 블레포 중에 처음 단계가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육체적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나 블레포 입니다. 아나(ana) 블레포는 그냥 쳐다보는 것입니다, 보긴 보는데 제대로 못 보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그냥 보는 것입니다. 현상을 보고 눈에 보이는 그 자체를 보는 것입니다. 지난주 막8; 24절에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보긴 봐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무엇무엇 같은 것이 보이고, 사람 같은 것이 보이고, 나무 같은 것이 보이고, 진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이나이다. 그러니까? 쳐다보다, 아나 블레포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러러 보고 위인으로 보지만 신앙고백이 없습니다. 아나 블레포는 보기는 보는데 힐끔 쳐다보는 정도입니다. 지난주의 시각장애인의 처음이나 오늘 실로암으로가서 고침을 받고 물음에 답하는 처음 단계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은혜지요!!! 조금이라도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만났더라도 그냥 지나치면, 그리고 이상한 방법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서 뒤 돌아 섰으면 이 마저도 못 봅니다. 주어진 기회를 잃어버리는 아나 블레포가 됩니다. 오늘 이 사람의 삶은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을 찹아 떠나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뱉고, 이기고, 바르는 일을 수용하고 감당을 합니다. 그랬더니 아나 블레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족하고 여기서 머물면 아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에 첫 번째로, 맨 먼저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 무덤을 본 것도 아나 블레포입니다. 마리아는 빈 무덤을 아나불레포로 보았습니다. 몸을 숙여서 안으로 들어다 보았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서 의아해서 보았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마음과 정신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나블레포는 예수님이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본 표현과 동일합니다. 안타까움으로, 연민으로 삭개오를 보는데 아나 블레포로 봅니다. 그러니까? 의아해서, 희미하게, 육체와 마음과 정신으로, 연민의 정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는 것을 블레포라고 합니다. 그냥 보고, 부활이나, 영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바로 옆에 계신데도 부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아나블레포는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고, 사고와 시각과 감정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현상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삶의 감동이 없고 즐거움이 없고, 감사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영적으로 연결되지 아니하면 껍데기만 보는 것이고, 형식만 보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도, 예수님의 약속도, 예수님의 능력도, 예수님의 말씀도 나에게 의미가 없고 그 능력, 약속, 부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블레포로 보았습니다. 처음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보신의미이고 지난주 벳세다의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처음 표현이고 오늘 시각 장애인의 처음 모습입니다. 그냥 주어지기에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나 블레포 까지도 상당한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침으로 흙을 이겨 시각장애인의 눈에 바르신 주님은 그로 하여금 실로 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실로 암까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가라고 하셨을까요? 불편하게 오랜 시간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셨던 예수님께서 의미 없이 실로 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실로 암 못에는 33개의 가파른 계단이 있었습니다. 성한 사람도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던 계단입니다.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33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눈을 씻는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는 것은 도전으로 이루어집니다. 힘들어도 감당해야합니다. 기분이 나빠도 참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 험한 곳으로 왜 예수님께서는 굳이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까요? 요한은 이 사건을 기록하며 실로 암의 뜻을 설명해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가늠하게 만듭니다. 실로 암은 '보냄을 받은 곳'입니다. 이는 성 외곽의 기혼 샘에서 예루살렘으로 물을 보냈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나아가 그곳은 영적으로 보냄을 받은 곳이란 뜻이 됩니다. 적으로부터 예루살렘 사람들을 구하고 살리기 위해 기혼 샘에서부터 나온 생수는 533m 땅 속을 흘러내려 예루살렘의 가장 낮은 곳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생명은 사실 낮은 곳을 향하는 지향성이 있습니다. 평생 앞을 보지 못하던 이 사람을 실로암으로 보내신 것은 낮은 곳으로 향하라는 음성입니다. 왜 꼭 가장 낮은 곳이어야 했습니까? 가장 낮은 그곳이 바로 생명을 살리려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에 흘러온 생명의 물, 실로 암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낮은 곳 짐승의 우릿간에 태어나셨던 주님은 낮고 천한 목수로 사셨습니다. 천대받고 멸시받는 죄인과 여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으며,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왜? 왜, 꼭 그렇게 하셨어야 했습니까? 주님은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섬기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대속 물로 주시기 위해 낮은 땅, 낮은 모습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생명의 주님은 한평생 남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도움에 붙어 생명을 유지해 왔던 이 사람을 실로 암으로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지나온 아픔과 고난을 딛고 섬기는 사람으로 일어서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제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기 위해서는 아나 블레포에서 시작을 합니다. 이 것을 이겨내고 뛰어 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 동안 무엇을 위해 애쓰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그토록 수고하셨습니까? 일평생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던 주님께선 오늘 우리에게도 실로암으로 가라 하십니다. 낮은 자리, 생명의 대속자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내려가라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전하지 못해도, 그런 것 같아도, 시작을 했으니까? 더 깊이 더 확실하게 더 분명하게 은혜와 복을 받기위해서 계속해서 주님과 함께 하시면 디아 블레포로 더 깊이 깨닫고, 더 깊이 보고, 더 깊은 복을 받고 더욱 확증할 수 있는 엔블레포까지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블레포의 두 번째 단계인 디아 블레포입니다, 주목하다를 가리켜서 헬라어로 디아블레포라고 합니다. 디아(dia)에서 dialogue , diagnosis. 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다이아로그는 대화 라는 뜻인데 합성어입니다. dia -더 깊이 , logue –로그입니다, 로그는 로고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제 보는 것이 다르고 오늘 보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diagnosis –다이아그노시스 , 병원에서 쓰는 말로 진단입니다. diagnosis는 그노시스파(Gnosticism)에서 나온 말인데 그노시스파는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했던 영지주의를 말합니다. gnosis는 의사가 겉으로만 알아보는 것이 아닌 안과 속을 진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dia, 꿰뚫어 알아보는 것입니다. 막8; 25절에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이렇게 주목하여 꿰뚫고 볼 때 디아블레포 라고 합니다. 그런데 디아 블레포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안수하셨을 때에 주목하게 됩니다.주님께서 다시 안수할 때에 더 깊이 보고 더 속을 진단하고 관찰합니다. 디아블레포는 속 깊이 꿰뚫어서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두 번째로 베드로가 무덤을 찾는데, 베드로는 보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헬라어 테오레오 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테오레오는 블레포 이상으로 보되 세심하게 비판적인 시각의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테오레오라는 단어에서 theory, 이론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디아로 깊이 있게 보지 않으면 theory 가 나오지 않습니다. 꿰뚫어 보지 않으면 theory 가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시신을 감싸고 있던 세마포가 개어져 있는 것을 보고, 머리의 수건은 다른 곳에 개어져 있는 것을 보고 모든 향품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리아나 요한이 보지 아니한 수건을 보고, 세마포를 보고,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넣어 두었던 향품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했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데오레오로 의심스럽게 사실일까?, 정말일까? 하면서 보았습니다. 디아 블레포 한 것입니다. 이론이 뒷받침이 되고, 논리가 따라야 합니다. 정말로 주님의 말씀대로 부활 하셨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하나? 부활 하셨다면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라는 마음으로 이리 저리 조사하면서 보았습니다. 더 깊이 봄으로 자신에 대한 이론이 뒷받침 되어야 했습니다.
오늘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이 한 가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깊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로 바리새인들은 윽박지르지만, 그의 대답은 이전보다 더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9;25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입니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인생을 알고 사람을 보고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신들은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것이 내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평생 앞을 보지 못했던 내가 지금 눈을 뜨고 있다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평생 구걸이나 하면서 지냈습니다. 당신들만큼 배우지도 못했고, 그 잘난 율법에 대해 알지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숨길 수 없는 단 한 가지, 내가 아는 단 한 가지는 전에 앞을 못 보던 내가 보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놀라운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구원의 사건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되는 사건, 바로 구체적인 현실이고, 체험입니다. 이것은 논리를 뛰어 넘고 교리와 이론을 뛰어 넘습니다. 온 몸으로 겪은 구원의 사건입니다. 인격적 만남으로 인한 깨달음이고, 앎이고, 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위협하고, 시비를 걸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괴롭히는 바리새인과 이웃과 지인들을 통해서 스스로 더 깊이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과정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현재의 삶으로부터 디아 블레포 하십니까? 꿰뚫어 보시고 깊이보십니까? 항상 아나 이상으로 디아 블레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블레포의 마지막 단계인 엔 블레포, 밝히 보고,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en 엔. 여러분, 클린 인데~ 엔클린 , 인클린하지요? 클로저 인데~ 엔클로져, 인클로져 라고 하지요? 막8;25절에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온전히 나아서 밝히 보는 것이 엔 블레포 입니다. 밝히 보는 것입니다. 시119;18 다윗은 내 눈을 열어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여러분, 다윗이 시각 장애인입니까? 성경을 모릅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까? 엔블레포는 놀라운 것, 기이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언제 완전함으로 예수님을 보게 됩니까? 엔 블레포하게 됩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영적으로 보고, 바로 그 순간부터 위대한 사도바울이 되고 그 길에서 한 번도 뒤돌아서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옆에 계신 주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엔 블레포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믿음이 달라지고, 인생의 삶이 달라집니다. 보는 것을 영으로 봅니다. 엔 블레포는 부활의 현장에 세 번째로 요한이 본 것입니다. 요한은 에이도의 의미로 주님을 찾았고 보았습니다. 에이도는 눈으로 보지만 뜻은 그 본 것을 이해하고 파악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밝히 보았습니다. 엔 블레포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사실이었구나!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상황을 보았고 이해를 했고 그래서 믿었고 절대적으로 확신을 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보았던 수건도 보지 못했지만 세마포가 납작하게 개어져 있는 것을 본 순간 첫 눈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순수하게 영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요한은 보는 것 자체를 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말씀한 그대로 믿었고 본 그대로 받아들이고 신앙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에이도로 본 빈 무덤은 그에게 표적의 완성이 됩니다. 부활의 표적입니다. 마침표를 찍습니다. 요한은 모든 것을 에이도의 눈으로 보고, 밝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고 노년에 유배생활 속에서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은총을 덧입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엔 블레포, 에이도의 시각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요한이 가졌던 순수한 신앙과 사랑이 여러분에게도 이어져서 참된 헌신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 부활 신앙의 능력이 어느 곳에서든지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밝히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나에게 기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온전한 변화가 체험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가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믿는 주님이 주무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 원인은 너무 머리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쳐다보고, 주목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엔 블레포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부분까지 연결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씀의 본질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못한 채 세상의 지식을 따르고, 인간의 지식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봄이고, 앎이 아닌데, 봄과 앎을 넘어선 삶인데, 머리의 차원을 넘어선 신앙으로 살아가는 차원인데, 신앙을 앎의 차원에, 쳐다보는 차원에, 머리의 차원에 가둬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적 시각의 눈으로 삶을 볼 때 우리의 영적 눈은 금방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지식에만 머무를 때 그 아는 것은 도리어 나를 헤치는 도구가 됩니다. 오늘 눈을 뜬 이 사람은 30절에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일을 증언합니다. 하지만, 줄곧 앞을 보며 살아왔던 이들은 알량한 지식으로 인해 보아야 할 것을 못보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 보고 있으되 보지 못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31절,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 32절,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3절,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바리새인들은 거듭해서 교리를 논하고, 율법을 들먹이며 거짓증거를 강요했지만, 눈을 뜬 이 사람은 흔들림이 없이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증거 했고, 31절에서는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다. 고 증언 했고 33절을 통해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자신에게 일어난 그 만남, 그 사건을 통해 그는 당당하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증거 합니다. 출교를 두려워 할 서슬퍼런 바리새인들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합니다. 그는 비록 신학적인 지식이 없어도, 성서해석의 전문가가 아니어도, 한가지 일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획기적인 변화의 사건이었습니다. 캄캄한 인생에 찾아오셔서 빛을 보게 해 주신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과 믿음입니다. 이 사람이 엔 블레포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렇게 증거 하는 참된 부요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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