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고향산천의 어제와 오늘 -2
무오사화(戊午史禍)를 피해 선무랑<휘 차근(次謹)14世>공께서 자양으로 입향 하신지가 어언 500여 년이 지났다. 그간 취락을 이루어 자자손손이 살던 터전이 1970년대 영천댐 건설로 수몰되어 자손들은 산지사방으로 생계 따라 떠났고, 태어나 자란 집들은 물속에 잠겼으나 다행히 몇몇 빛난 문화유산들은 댐 주위에 이건 되었고 아름다운 산과 전설어린 곳들은 오늘도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대소가(大小家)가 이웃하여 정답게 오순도순 살던 정겨운 모습은 찾을 길이 없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
이 곳 저 곳 추억이 서린 곳을 찾아 찍은 사진과 여러 곳의 자료를 모아 정리하여 몇
가지 주제로 정리하여 본다.
오늘의 후손들에게 조상의 고향인 세향(世鄕)을 이해하는 기회로 만들고자 한다.
<주제 :1.우리 가문의 고택 2.고향 마을의 전경 3.고향의 명소 4.고향의 산천>
*참고 : 이미 게시된 1, 2. 3회의 내용을 수정보완 하였습니다.
二. 고향 마을의 전경(全景)
1. 수몰되기 전의 고향 모습
<이 사진은 정기식씨가 제공한 사진으로 수몰되기 전의 눈 내린 어느날 인구마을의 동쪽 언덕(마당령)에 올라가서 인구마을과 멀리 월연마을을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댐공사가 한찬일 때 수로공사용 콘크리트 흄관이 널려있다. 저 멀리 위쪽에는 아래귀미마을이 보이고 그 마을 뒤로 보이는 흰 선이 신방으로 가는 길이다. 아래쪽은 새들의 들판이다.>
<수몰되기 전의 정기식씨의 집 사진이다. 집 뒤로 몇 그루의 소나무사이에 농와공(휘 夏澍)의 묘소가 보인다. 그 뒤 산이 벌거벗은 마당지산이다.>
<수몰되기 전의 백암산에서 내려다 본 인구, 월연마을 모습이다. 앞개울의 오른쪽이 인구마을로 자양초등학교와 자양중학교의 모습이 보인다. 왼편의 월연마을은 면사무소, 경찰지서, 우체국, 농협 등 기관의 집들이 작게 보인다.
사진의 오른쪽의 자양초등학교 넘으로 소나무 숲이 보인다. 그 솔숲을 '수무솔뱅이'라 부리웠다.>
<수몰되기 전의 면소재지인 용산동의 인구, 월연, 원각 세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쪽이 신용산이고 오른쪽이 인구마을, 왼쪽이 월연마을, 위쪽은 원각마을이다. 특히 신용산의 발전된 모습이 눈에 띄다.>
<수몰 직전의 면소재인 용산동의 인구, 원연, 원각의 어느 봄날의 모습이다. 앞개울에 맑은 물이 흐르고 학교와 관청의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불행히도 문화재나 좋은 기와집들은 이건 되고 난 뒤이고, 아래쪽에는 포항으로 보내는 물의 수로공사의 모습도 보인다. 이사진은 자양중하교에 근무했던 어느 교사의 슬라이드를 기증받아 현상한 자료이다 >
2.수몰 된 뒤에 들어난 고향 모습
<댐 건설 직후는 수량 부족으로 자주 물이 줄어 옛터전이 들어났다. 뒷솔밭에서 인구마을의 터전을 배경으로 저 멀리 물에 잠긴 자양초등하교 건물의 일부가 보인다. 그곳 신용산은 면소재지로 여러 관청이 있었다. 인구마을은 9대조이신 모재공께서 귀미에서 분가하여 정착하신 후 10대를 이어 살아온 16촌수 내의 집성촌으로 많은 기와집이 즐비한 마을이었다. 7대조이신 농와고택은 지방 문화재로 하천에 이건 되어 있고 추모당과 송학정은 중귀미로 이건 되었다.>
<인구마을 뒤편인 뒷솔밭의 끝자락에 큰 바위들이 여러 개 흩어져 있었으며 내가 집고 있는 바위에는 한자로 인구(寅丘)라고 새겨져 있었다. 즉 범의 언덕이란 뜻이다. 지명이 寅丘가 오늘의 仁邱로 변한 것 같다. 그 바위 옆에는 큰 밤나무가 있어서 가을에 알밤을 많이 주웠다. 옆에 넓은 바위가 몇 개 있었는데 전설로는 장군의 공기돌이란 말이 전했다. 수몰되기 전에 지석묘(支石墓)인가 해서 발굴 해보니 아닌 걸로 들어났다. >
<옛날 마을 어귀에 있던 연자방아의 석맷돌의 하나로 이곳을 석맷둑이라 했다. 그 아래에 앞개울이 보인다. 마을 사람들이 개울가의 샘터에서 물을 길러 이 옆을 지나 마을로갔다. 저 멀리 원각마을과 기룡산 줄기의 산들이 보인다. 앞개울의 추억이 많다. 동내 아이들이 물에 빠져 둥둥 떠내려가는 변이 많은 곳이고, 여름이면 동내사람들이 밤마다 더위를 피해 강바닥인 청석(靑石) 위에서 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겨울이면 마을 어린이들이 얼음지치기를 많이 한 곳이기도 하다. >
<모교인 자양초등하교 건물의 잔해가 댐 건설 당시 예산관계인지 콘크리트 건물의 뼈대는 그냥 두고 담수(湛水)를 했기에 물이 줄어드니 형체가 나타났다. 그 뒤에 모두 철거되었다. 저 멀리 백암산의 일부인 탕건바위가 보인다>
<면소재지인 신용산의 자취가 보인다. 왼편은 자양초등하교 운동장이고 오른쪽의 구조물들은 신용산의 상점이나 가옥의 기초로 보인다. 이곳에 죽당공의 상점과 경산형님의 정미소가 있었다. 그때 백암산 밑으로 자호천이 흐르고 있었다.>
<아래쪽은 수몰된 아래귀미 마을의 일부인데 호수 건너 인구마을 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가까운 산은 마당지산이고 먼 산은 고깔산의 모습이다. 12대조이신 삼휴공께서 인구마을에 분가 입향 하여 아드님으로 사과공과 구연공, 무재공 삼형제 분을 두셨고 사과공께서 귀미마을로 옮겨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 10대조 통덕랑 선조께서도 분가하여 사신 마을이다. 대를 이어 살던 마을인데 수몰로 삼휴고택, 삼휴정, 오회당 등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하천묘역으로 이건 되었다. >
<아래쪽은 물이 줄어서 새들(들판의 이름)의 모습이 조금 보이고 그 넘어 자호천이 흐르고 그 다음은 뒤귀미들의 우리 논들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어릴 때 논에 갔다가 뒤편 언덕에 올라가서 산나리 꽃을 꺾어 놀던 추억이 생각난다. 오른편 언덕 아래에 '면경소'가있었다.>
<뒷번드기에서 호수 건너 아래귀미 일부와 뒷귀미들의 일부 그리고 중귀미를 거쳐 눈 덮인 운주산이 보인다. 호수 밑은 자호천이 흐르고 새들의 논들이 물에 잠겨있다. >
<물이 빠진 새들의 모습이다. 새들(들판 이름)의 끝자락의 언덕에 자호정사(강호정)가 있었던 자리가 보인다. 멀리 백암산과 그 넘어 진경산 그리고 끝에 오미산의 일부가 보인다.>
<이곳은 월연마을 끝자락에 있었던 ‘솔 끝’이라 불리었던 소나무 숲으로 몇 기(基)의 묘소가 있었고 묘 둘레에는 노송들이 많이 서있었다. 성곡에서 도로를 따라 와서 아래쪽의 도로를 돌면 용산동의 자양면소재지가 나타났다. 사진에 소나무의 남은 뿌리가 보이네!>
3. 수몰 된 오늘의 고향 모습
<댐의 물이 줄어든 영천댐의 호반의 모습이다. 저멀리 자양면 소재지가 보이고 왼편은 고깔산의 일부이며 바위가 많이 있는 곳에 성혈암이 있다. 오른쪽의 먼 산은 마당지산이다. 그아래에 인구마을이 있었다.>
<백암산 위에서 태기가 찍은 마당지산 아래의 인구마을 언덕 마당령에 새로 생긴 집들과 오른쪽에 삼귀로 통하는 다리와 왼편으로 원각마을이 보인다.>
<백암산에서 태기가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은 마당령에 새로이 새워진 집들이고 중앙은 원각마을, 왼쪽은 고깔산과 그 아래 중앙에 노적산이 보인다.>
<어느 가을날 곱게 물든 단풍으로 단장한 오미산과 멀리 마당지산이 맑은 물로 가득한 호수를 감싸고 있다.>
<눈 덮인 운주산이 멀리 보이고 호수 넘어 보이는 짙은 산이 백암산 줄기이다. 오른쪽의 백암산 남쪽의 물이 찬 골이 노항마을이 있던 곳이다.>
<호수에 떠있는 모습의 백암산과 수문장인 오미산이 얼굴을 내 밀고있다.>
<귀미마을로 통하는 댐건설로 건설된 다리로 다리 밑에는 귓귀미들판이 있고 자호천도 있었으며 다리 끝 왼편 바위에는 범굴이 지금도 있다. 또 저 멀리 운주산이 호수를 내려보고 있다.>
<댐의 호수가 만수이다. 여수로가 원통으로 되어 물이 흘으면서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지금은 여수로를 댐둑 동편에 새로 만들었다.>
<1995년 1월에 바닥을 드러냈던 호수의 물이 3 년만에 만수가 되어 백암산이 물을 가득 안고있는 모습이다. 앞으로는 임하댐의 물을 끌어드려 호수바닥을 볼수없게 되었다.>
수몰 후 헬기로 촬영 된 댐의 둑과 댐 안의 모습
첫댓글 ,옛 추억이 있는사람은 다시 향수에 젖게 하고 생소 하신분은 우리 선조가 사신든 고향을
역사에 기록토록 정리 잘해주셨습니다,
사진 배열도 연도별로 정리하시고 많은량의 사진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릴 때 한번씩 갔던 고향의 모습에 감개가 무량합니다.귀한 자료 올리신다고 수고 하셨습니다.
아련히 기억되는 지명들,
어릴적 추억속에 잠겨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