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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10 - 역사상 유명한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 로마군을 전멸시키다!
이 글은 세계 역사상 대 회전인 “칸나이 전투” 의 과정과 그 결과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5권을 쓴후 무언가 미진했던지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를
썼으니.... 145페이지 ‘칸나에 전투’ 편에서 로마군 85,000명에 비해 50,000명으로 병력수에서
열세인 한니발이 로마군 7만을 죽이고 포로로 잡을때 아군 희생자가 5천 5백명에 불과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처럼 “전투는 격동이니 기병의 스피드를 살린 전술” 을 사용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럼 로마도 기병의 기동력을 살리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수도 있겠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저
책의 149페이지에서 그게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니... 첫째 이탈리아는 아펜니노산맥 외에는
말의 산지가 없어 말이 적고 두번째는 북방 유목민족이 등자를 발명한 것은 BC 4세기경입니다.
하지만 서유럽 기사들이 저 등자(鐙子) 를 사용한건 오랜 훗날인 AD 8세기이니, BC 216년 칸나이
전투때는 등자가 발명되기 전이라.... 어려서 부터 말과 함께 자란 유목민이 아니면 말을 타고
전투하기는 어려우며 세번째는 장기인 중무장 보병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30년 전에 제주도에서 말을 처음 탔는데 들판이라면 안전하지만 재미가 없는지라 언덕을 올라
가는데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관리자는 말들을 쫓아 올려보내니 여학생과 처녀들을 태운
말은 얌전히 가는데, 나는 덩치가 크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니 심술이 났는지 아님 원래
고집이 센 말인지 길을 벗어나 풀을 뜯는데 바위 투성이에 낮은 관목지대라 위험하니
관리자가 뛰어 올라와서 말을 길로 되돌리기를 두세번을 하고서야 간신히 고개에 도착합니다.
바위는 없지만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인데 관리인이 채찍으로 말의 엉덩이를 후려치니 말이 놀라 앞발을 드는
바람에 오른발이 등자에서 빠졌는데 다시 넣을려니 이눔이 쏜살같이 달려 내려가는데, 말에서 떨어지면
뒤따라 달려내려오는 다른 말의 발굽에 밟히는지라 죽을 힘을 다해 다리를 말의 배에 오므린 기억이 나는
데.... 등자가 없던 시절 기병들은 이런 이유로 말에서 내려 걸으면 “안짱다리” 라 어기적 거리며 걷게 됩니다.
기원전 218년에 알프스를 넘어온 보병 2만에 기병 6천 카르타고의 한니발군은 북이탈리아 티치노
강변에서 로마 집정관 코르넬리우스의 4천 기병과 2천 보병을 몰살시키니, 이 승리로 인해
갈리아족(켈트족) 의 협조를 받아 1만 갈리아인 용병을 받아들여서 군세를 3만 6천으로 키웁니다.
그후 트레비아강변에서 셈프로니우스의 4만 로마군 중에 25,000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후
남진해 피렌체 남쪽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플리미니우스의 25,000 대군을 전멸시키고....
페루자에서 세르빌리우스의 기병 4천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으니 모두 6만을 죽였는데,
그중에 하루 아침에 보충할수 없는 기병이 15,000명이나 사라졌다는게 로마군의 큰 아픔입니다.
기원전 216년 집정관은 결전론자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지구전론자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선출됐는데... 8개 로마 군단병과 8개 라틴 군단병등 8만에다가, 6천 4백의 기병
으로 이루어진 9만 대군을 두 집정관에 맡겼고 즉시 칸나이로 진격하는데, 기원전 218년
6개 군단이던 것이 217년 11개 군단 그리고 216년에는 13개(16개?) 군단으로 늘어난 것 입니다.
로마시대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원로원은 8개군단을 새로 뽑기로 결정하니 로마역사에서 전례없던
일로 각 군단은 5천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동맹군 역시 이와 비슷한 규모였는데, 대부분의 전쟁은
집정관은 2개의 군단과 그에 해당하는 동맹군을 지휘하였을 뿐이고 4개의 군단이 지휘받는
일은 없었으니 로마 시민들로 하여금 위기감과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때문” 이라고 적었습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 아풀리아에서 로마군을 맞을 준비를 했으니 한니발의 군대는 본대는 보병 2만,
기병 6천이고 켈트족 갈리아인 용병이 보병 2만에 기병 4천등 총 병력 5만 명이었는데.... 에스파니아
에서 인솔한 5만여명 중에 살아서 알프스를 넘은 2만 6천명은 4차례의 전투와 늪지대 행군에서도 거의
손실이 없었다니, 대장정(大長征)을 거친 모택동의 홍군처럼 정예중에 정예병이 되었기 때문인가 합니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칸나이에서 벌어진 카르타고군과 로마군의 전투에서 카르타고군 5만은 로마 시민병
보병 4만에 기병 2,400명과 동맹국 보명 4만에 기병 4,800명등 87,200명을 맞아 전력의 열세를 뒤집고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 전투로 한니발 바르카는 “세계 전쟁사의 전설” 이 되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진 칸나이 Cannae 는 고전 라틴어 발음으로 ae 이중모음은 ㅏㅣ가 되는데 헬라어 알파벳
으로 Caesar 라는 이름을 "Kaisar 카이사르" 라 음가를 표기했으며 혹은 칸나에로도 읽는데,
이후 ae는 교회 라틴어에서 ㅔ 또는 ㅐ로 읽게 되었는데, 교회 라틴어 발음은 로마 말기
라틴어가 전해진 것이니 당대의 발음이 아니며 현대 이탈리아어에서는 Canne(칸네) 라고 읽습니다.
로마군은 한번 제대로 싸우자는 결심을 한후 전투를 금지했으니 신임 집정관이 선출되고 7개월간
전투가 없었는데 새로 징병한 신병의 훈련이 끝날때까지 기다린 것이며..... 또한 이전의 전투도
철저히 연구해 전술을 짰으니 트레비아 호수 전투의 경우 로마군이 포위당한 상황에서 카르타고
군의 중앙 전열을 돌파하여 전멸을 면한 바 있었으니.... 보병전으로 적진을 뚫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손자병법에 아군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해야 한다고 했으니
칸나이는 로마군이 철저히 연구해 선택한 전장이었는데, 한쪽에는 강, 한쪽에는 숲이 있어
양쪽으로 방해되는 지형이라 카르타고군이 우세한 “기병을 운용” 하기 힘든 지형이었던 것입니다.
전투를 하는 시기도 로마가 선택했으며 도저히 질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전투를 수행하고자
했고 더 이상 준비할 수도 없을 만큼 완벽하게 해냈지만.... 문제는 상대는 한니발
이었다는 것인데, 어쨌든 양쪽 군대는 기원전 216년 7월 30일 칸나이 평원에서 마주칩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전투 개시전 온건파 파울루스와 강경파 바로가 대립했으니 파울루스는
평원에서 한니발과 싸우면 안된다고 만류했지만 바로는 그것을 무시했고, 그 바로가 지휘권
잡은날(하루씩 교대로 지휘함) 결전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로마의 전력을 말아먹은 바로를 비난합니다.
우익의 기병대 지휘권을 맡는 사람이 전체 지휘권을 맡는 것이 로마군의 관례인데, 리비우스와
폴리비우스 모두 전투 당일 파울루스가 우익의 기병대 지휘권을 맡았다고 서술했으며 또한
패배 이후 도망쳐 온 사령관이면 그 책임으로 정치생명이 끝나야하는 것이 맞는데, 바로는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달아난 도시에서 버젓이 집정관,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군대를 이끕니다.
또한 파울루스는 당대 최고의 귀족 가문 출신 중 한명에 집정관을 역임한 경력이 있으며 2차 일리리아
전쟁을 총지휘하여 진압하고 개선식을 거행해 군사적 경험, 원로원 내에서의 입지 등에서 바로보다
앞서니... 이 때문에 바로가 수석 집정관에 당시 주전파, 원로원 비판파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었긴
하나 파울루스의 의견에 정면으로 충돌하기보다는 합의 하에 일관성있게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니발의 군대는 아프리카 보병대와 에스파니아 보병, 갈리아족 용병으로 보병을 구성했고
기병은 에스파니아 기병과 켈트족 중기병, 누미디아 경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한니발은 아프리카 보병대에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살육한 로마군의
갑옷(로리카)을 노획해 입게했는데 기존의 아프리카 보병 처럼 그리스식으로 창을 들고
팔랑크스로 싸웠는지, 로마식 보병처럼 검과 방패로 무장하고 싸웠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베리아(에스파니아) 보병은 철로 만든 원판 흉갑을 갖추거나 간단한 튜닉으로 무장했으며 이들
은 투창의 명수로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라는 스페인 검으로 무장했고, 켈트족(갈리아인)
보병은 갑옷을 입지 않고 방패와 검으로 무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엘리트 귀족부대가
소모되면서 전투 효율을 높이기 위해 중보병 부대가 중기병 부대로 전환되기 때문으로 봅니다.
이베리아 보병은 칼을 '찌르는 방식' 으로 사용했고 갈리아인(켈트족)은 '베는 방식' 으로 사용해서
한니발은 이들을 교대로 투입해서 로마군을 괴롭히기도 했으니, 한쪽 전투방식이 눈에 익을쯤
되니까 갑자기 패턴이 다른 부대가 들어온다는 뜻으로 고대 전투에서는 1열이 죽어 무너진
뒤 2열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1열이 지치면 이들이 후방으로 빠지고 2열이 앞으로 전진합니다.
즉 한니발은 패턴이 다른 부대들을 순서대로 열을 이루게 하여 1열과 2열이 교대될 때 다른 패턴으로
로마군을 괴롭힌 것이니 같은 칼로 찌르거나 벨수는 있었지만 찌르기는 이베리아(에스파니아)
진영이, 베기는 갈리아(켈트족) 진영의 칼이 조금 더 적합했던 것뿐이며 발레리아스 제도 투석병
은 서로 다른 슬링 세개를 사용해서 원거리, 중거리, 근거리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명수들이었습니다.
이베리아 중무장 기병들의 무장은 보병과 유사한데..... 철제 투구와 철제 원형 흉갑을
착용했고 한 손으로 쥐는 창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근거리에서는 코피스라는 굽은
역날검으로 적과 교전하니 코피스는 이베리아에서는 팔카타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말 전체를 사슬 갑옷으로 감싸고 기수도 스케일 아머와 사슬갑옷으로 무장한 무시무시한 중기병
도 보이는데....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용과 유지관리상 다수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며, 스페인 부족 출신의 기병들은 갈리아 중무장 기병대와 같이
서유럽 정상급의 기병으로 확실히 로마군 기병보다 전체적인 전투능력이 뛰어났다고 여겨집니다.
갈리아족 중무장 기병은 대개 귀족이나 유력자 출신인 전사들로 체인메일로 중무장했으며 투구는 로마군
과 같은 몬테포르티노식 투구로 무장했고, 긴 창 한자루와 투창 두 자루, 검으로 무장했는데 스페인
기병대 처럼 갈리아 중무장 기병대도 로마 기병대를 능가하는 서유럽 정상급의 중무장 기병이었습니다.
누미디아 경기병은 지중해 최고의 기병이라고 역사가 리비우스가 평했으니 이들은 뛰어난
승마술에 투창 투척후 작은 방패와 글래디우스 같은 단검으로 돌격전을 벌이는
게 장기였으며, 창 한두자루는 남겨뒀다가 격투전에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투창이 특기이지만 그렇다고 백병전에서 창이나 칼을 전혀 안쓴건 아니라는 이야기 입니다.
투창 공격 이후 적이 약화되거나 적군이 패주하면 그때를 노려 백병전으로 공격하곤 했는데 특정 상황
에서는 경기병이라는 특성이 약점으로 작용해 유구르타 전쟁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기병에게 격파되기도 했는데 누미디아 경기병의 진정한 무서움은 투창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전술에 능하다는 것에 있었으니 유구르타 전쟁 초기에는 로마 보병대에게 큰 타격을 주게됩니다.
적을 향해 돌진해서 도륙하는 맹렬한 근접전 타입이 아니라 아주 능숙한 투창 경기병 타입으로, 한니발은
전투에서 이들의 특성을 고려해서 로마군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겼으니 바로가 지휘한 좌익 동맹군
기병대 4,800명이 많은 피해를 입으며 고전했던 이유도 누미디아 기병의 저런 투창 전술 때문이었습니다.
트레비아와 트라시메노에서 정규군이 워낙 심각하게 박살난지라 로마군 부대에는 신병이 많긴했지만
카르타고군의 2배에 달하는 수적 우위는 로마군의 강력한 이점이었는데, 이는 보병에
한정되고 기병 전력은 카르타고군이 2배 가까이 많은 데다가 질적으로도 크게 우세를 점했습니다.
이는 트라시메노에서 기병이 몰살당한 것이 주요한 이유인데 게미누스가 보냈던 기병 4천이 트라시메노의
로마군을 도우러 가다가 전투가 다 끝나고 뒤늦게 도착하면서 4천 기병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사라진
것이니, 로마군은 전통적으로 기병대는 동맹에게 의존하여 채우고 있던 만큼 이것은 매우 뼈아픈
손해였기에 강과 숲이 있어 기병 운용이 힘든 칸나이를 전장으로 골라 기병의 불리함을 상쇄하려 했습니다.
로마군은 1만명을 후위에 남겨 본진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들은 후위에서 퇴각시 방패가 되는
역할을 하는 “트리아리” 로 여겨지며, 로마 군단병을 우익에 배치하고 동맹군 보병을 좌익
에 배치했는데 평소보다 훨씬 조밀하게 서 있었으니 '정면보다 종심이 더 깊었다' 라고
표현하니 엄청난 숫자를 통해 카르타고 보병 대열을 '밀어서 뚫어버리는' 작전을 시도했습니다.
두 로마 사령관이 중앙을 돌파하고자 한 이유는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군이 로마군을
포위 섬멸작전에 몰아넣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포위된 로마군 보병이 사력을 다해
한니발군의 중앙을 뚫고 달아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니, 따라서 로마 지휘관들은
한니발의 약점이 중앙이라고 판단하고는 큰 스케일로 중앙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상대의 약점을 파악한뒤 전술을 짜서 실행하는 국가는 고대에 드물었으니
이러한 고대 로마인들의 장점은 이들이 약소국가에서 출발하여 전 지중해를 제패하는데
일조했는데, 과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제패하고 있었을때 일리리아
지방의 알렉산드로스 사촌이 이탈리아에 쳐들어왔는데 삼니움족이 이들을 쳐부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100년뒤 그리스 에페이로스의왕 피로스와 전쟁을 하였을때 삼니움족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인들을 이길수 있었는지 철저하게 연구하였고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니,
그 당시 로마군이 무조건 힘으로만 밀어붙인 게 아니라 할수있는 능력 안에서
적군와 아군의 전투능력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로마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작전을 세운 것 입니다.
따라서 기병대가 측면에서 버텨주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는데, 로마군 우익에 아우피디우스
강이 흐르는 것에 착안해, 우익 부대에 기병 1,600명을 배치하여 파울루스가 이들을
직접 지휘하고, 바로에게는 기병 4,800명을 맡겨 좌익에서 한니발의 기병을 저지하게
했으니 강 때문에 공간이 제한되는지라 조금이라도 오래 버틸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습니다.
8만명이나 모이다 보니, 로마군은 종래의 체크무늬 방진을 펼수가 없었으니 횡진으로 넓게 펴기엔
강이 있었고, 결국 체크무늬 방진을 포기하고 팔랑크스를 연상케 하는 초밀집 방진을 펼치게
되니, 유기적인 기동력으로 승부를 보는 로마 군단병(레기온)의 특징보다는 밀집 충격력에 의존
하게 되고 또 로마군의 전략 자체가 중앙을 돌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바짝 밀집시켜 놓았습니다.
로마군이 질,양으로 카르타고군을 완전히 밟아버리려는 것을 완벽하게 예측한 한니발은 그 유명한 초승달
대형을 시도하니 초승달이 앞쪽으로 볼록하게 튀어나와 적의 공격에도 뒤로 물러날 공간을 충분히 확보
하는 한편, 초승달이 뒤쪽으로 튀어나올 때가 되면 로마군의 접전 면적이 넓어지는 한편, 밀어가는 쪽
으로 질량이 과도하게 쏠려 제대로 무기도 휘두를 수 없는 '과다 밀집' 상태에 빠트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중앙에서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로마군의 엄청난 수로 인해 점점 뒤로 밀릴 것이 확실
한데 그렇다면 일직선보다는 초승달 형태로 튀어난 쪽이 더 오랫동안 뚫리지 않고
뒤로 물러날수 있는 진형이었으며 또 초승달 형태가 되면 로마군이 자연스레 공격을
튀어나온 앞부분에 집중하게 되고 따라서 로마군은 중앙을 향해 자연스레 몰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1선 부대가 심각한 피해를 볼 것이 명백하고 또한 중앙 부대가 로마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패주한다면 포위고 뭐고 카르타고군은 끝장나는 것이니... 따라서
한니발은 갈리아족들 사이,사이에 자신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온 스페인 중보병을 배치합니다.
한니발에겐 알프스를 같이 넘은 1만 6천여의 아프리카 중보병과 스페인 중보병이 있었는데 아프리카
중보병은 양익에 배치하고 남은 스페인 중보병은 중앙의 갈리아 병사들과 함께 배치하였으며,
한니발은 자신이 직접 중앙의 보병을 지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로써 중앙의 카르타고군
은 그들의 사령관과 함께 로마군과 싸우게 되었고 이는 그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소수의 기병만 우익에 배치시키리라는 것을 간파하고 중기병
들을 모조리 좌익, 즉 로마군 우익 기병의 상대로 몰아넣었으며.... 바로의
로마 기병은 비슷한 숫자의 누미디아 경기병들이 견제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전투가 개시되자 동생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갈리아 귀족 중기병과 스페인 중기병대로 구성된 카르타고
좌익 기병대가 로마군을 향해 돌진했는데 로마군 우익과 카르타고군 좌익은 강과 보병의 사이에 위치
하였으므로 기병의 화려한 기동은 불가능한 전장이었고 어차피 숫자로 카르타고군에 우위였기에 바로
힘으로 뚫어버리려고 한 것인데 하필 이때 집정관 파울루스가 투석병의 돌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습니다.
로마 기병대는 파울루스를 호위하려고 애썼으나, 파울루스가 말을 탈수 없게되자 이들도 말에서
내렸으니... 누군가가 파울루스가 기병에게 말에서 내리라는 지시를 했다고 전달하자
한니발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병사들을 사슬에 결박해 내게 인도하는게 더 낫겠군."
이라고 말했다는데 원래 숫자가 1,600명에 불과한 로마군 우익 기병은 순식간에 박살나버립니다.
양측의 보병대는 상대를 향해 전진하였으니 처음엔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카르타고군은 점점 중앙
이 빠르게 전진함으로써 초승달 형태가 되었고 이때 칸나이에선 강한 돌풍이 불었고 모래가
시야를 가렸으여 상대가 잘 안보여 공포는 극대화되었는데... 이런 심리적인 영향은 로마군이
더 많이 받았으니.... 한니발군은 여러번 "지옥을 넘나드는 경험" 을 한 데다, 갈리아 병사들
까지 3박 4일간 "수면 없이 늪지대를 돌파하는 강행군" 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한니발은 전투 전날 로마군이 강에서 물을 긷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에, 로마군은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해 갈증에 시달렸으며.... 게다가 한니발은 자신의 부대를 동쪽에 배치해 놓았는데 아침
전투시 카르타고군은 태양을 등지고 로마군은 태양을 마주보고 싸워야 하게끔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한니발은 회전 이전에 기후로 인한 심리적인 영향과 태양의 조건을 고려하였고, 물의 보급
을 방해해 갈증을 나게하여 상대방의 전투력을 저하시키는 등 최대한 카르타고군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셈이었으며... 게다가 한니발의 군대는 칸나이에서 먼저
도착해 머문 3주간 동안 충분한 훈련과 기후에 익숙해질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카르타고군의 돌출된 중앙부대는 로마군의 집중 공격을 받게되었고 이때 횡대를 이룬 로마군의 대열은
중앙 쪽으로 집중되었는데 그럼에도 대형을 잘 유지할 수 있었으니 그 이유는 고대 유럽의 중보병
전투 방식에 기인하는데, 두 군대가 조우하면 방패를 들고 접근하여 찌른 뒤 다시 방패로 보호
하고, 다시 찌르고 방패로 보호하고 이를 반복하는 패턴으로 초반에 우열이 바로 가려지지 않습니다.
공격 보다 방어위주 전투를 지시한 한니발의 명령을 받은 중앙의 갈리아 중보병들은 집중 공격받은 상황
에서도 찌르기 보다는 방패를 사용해 막는데 집중함으로써 시간을 버는데 성공하였고, 긴 시간에 걸쳐
공방을 주고받았으며 거센 로마군의 공세를 더 효과적으로 버티기 위해 중앙에서 보병과 함께 있었던
한니발은 동생인 마고와 함께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전열 안으로 뛰어들어 돌아다니며 사기를 높입니다.
이러는 동안 앞쪽으로 볼록했던 초승달의 진형은 점차 뒤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한니발이
고의로 후퇴한 것인지 아니면 로마군의 공세에 밀려 뒤로 밀리게 된 것인지 학자들 간
의 견해가 엇갈리니.... 어차피 자의든 타의든 로마군의 맹공에 그대로 맞서서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고 분명한 것은 중앙의 갈리아 + 스페인군은 싸우면서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이 후퇴로 로마군은 수십미터 전진하였으며 이런 전진으로 위로 볼록한 초승달이 아래쪽으로 볼록한
초승달의 형태로 바뀌었고, 초승달 대형 속에 진입한 로마군의 전체 대형은 초기의 조밀한 대열이
기동 때문에 더욱 밀집되어 마니풀라 대형의 형태는 무너지고 이들은 한 덩어리 무리로 바뀌었습니다.
보병 전투가 이런 가운데 마하르발이 이끄는 한니발의 우익 누미디아 기병은 성공적으로 바로의 기병을
견제하고 있었으니 말을 달려 투창을 던진뒤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면 즉시 빠졌다가, 적이 되돌아
가면 다시 접근해 투창을 던졌으니 바로의 군대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들의 목적
은 아군 보병이 적 보병 전열을 붕괴시키기 전까지 시간벌기였기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스드루발이 이끈 한니발의 좌익 중기병 부대가 로마군 우익 로마 시민 기병대를 격파하고
되돌아와 바로의 동맹시 기병대를 덮쳤으니..... 바로의 기병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격파되어 패주했고 한니발의 기병부대는 로마군 기병이 더이상 집결하지 못하게 추격에 나섭니다.
기병이 정리되는 동안 로마군 보병은 숫적으로 우세한 질량을 바탕으로 로드롤러 처럼 한니발 보병
라인을 밀어붙였는데.... 한니발은 분대 단위의 적절한 치고 빠지기로 큰 피해를 보지는 않았습니다.
한니발의 의도는 중앙에서 시간을 버는 것이었으므로 중앙의 중보병은 로마군과 적극적으로
싸우기 보다는 최대한 방어하면서 조금씩 물러나기만 할 뿐이었고 이로 인해 카르타고
군은 예상했던 것 보다 의외로 전사자가 많이 발생하지 않았으니..... 한니발이 선택한
초승달 진영은 큰 피해를 보지 않고도 시간을 벌게 해주었고 또한 충분히 효과를 보았습니다.
드디어 한니발이 숨겨놓은 카드를 꺼내들었으니 로마군 대열이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때까지
쉬고있던 한니발의 정예 아프리카 보병들을 지나쳐서 전진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보병대에게 측면과 후방을 노출했으니 한니발이 명령하자 아프리카 정예 보병들이 앞으로 전진합니다.
이들은 어느정도 전진하자 로마군의 측면에 위치하게 되었고 곧 이들은 방향을 중앙 쪽으로 돌려
로마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니.... 이 시점에서 전진에만 열중하던 로마군은 당황하여 전진을
멈추었는데, 측면에서 공격하는 아프리카 보병들은 한니발 부대에서 가장 정예 중의 정예였습니다.
게다가 체력까지 비축하였으므로 로마군이 보이는대로 맹렬히 돌격하여 공격하였으니 정면의 공격에 열중
하던 로마군은 아프리카 보병이 갑작스럽게 돌격하여 큰 혼란에 빠졌고 측면의 로마군 중 일부는
살길을 찾아 로마의 중앙부로 파고들거나, 공세에 뒤로 밀리면서 그렇잖아도 압축되어가던 로마군의
대형은 심하게 밀집되었으니 마침내 모든 로마군은 “무기도 휘두를수 없을 정도로 밀집”되고 말았습니다.
로마군의 전진이 중단되고 운신이 불편할 정도로 압축되었을 때, 타이밍을 맞추어 로마
기병을 추격하던 카르타고 기병이 추격을 중단하고 로마군의 후방에 도착하니
로마군을 에워싸고는 총 공격을 감행했으며 그리고 후방에 위치한 기병은 벌판에서
전혀 방해받는 일 없이 돌격하거나 투창을 던지는등 마치 “양떼를 사냥하듯” 공격합니다.
사방이 둘러싸이자 로마군은 더 밀집되었고 무기를 휘두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유롭게 무기
를 쓰는 카르타고군에게 일방적으로 살해당했으니, 결정적으로 두 집정관이 모두 기병을
지휘한뒤 기병이 소멸되자 한명은 전사하고 한명은 진영을 이탈했으니 지휘관이 사라졌다는?
포위된 보병에게 방진을 짜라든가, 후방의 기병대를 뚫고 퇴각하라거나, 또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포위한 적 대형을 향해 전군으로 하여금 돌격 명령을 내릴..... “총사령관이 없었습니다.”
파울루스는 기병이 무너질 가능성과 그 이후를 대비하지 않았던 것 같으니 병력 수가 앞서는데다가
역사상 로마가 동원한 보병 중 사상 최대임을 감안, 로마군이 중앙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고
확신했으리라 여겨지지만 그러나 로마군 대부분은 포위당한 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마니풀라 대형의 맹점을 제대로 짚은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으니 로마의 3열 대열
은 치고 빠지기에 적합한 형태로 되어 있었지, 밀어붙이는 것과는 동떨어진 구조였으니 1열의
하스타티와 2열의 프린키페스는 바톤교체를 하는 개념이었고, 3열 트리아리는 땜질을 해주거나 또는
체크보드 배열 사이로 퇴각하는 아군을 흘려보내고 대열을 전개해 최후 방어를 제공하는 식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군이 퇴각의 여지를 확보할수 있게 하여 괴멸당하는 사태를 면하게 하는 효과를 제공
했지만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천천히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를
모두 끌어들인 것은 물론 후방을 지켜야 하는 "트리아리" 까지도 진군시키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즉, 로마군의 기초적인 전술을 증발하게 만들어서 로마 초기의 팔랑크스 전술만도 못한
상황이 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의 속담에서 트리아리 까지 밀렸다는 말이
거꾸로 적용되어 트리아리 까지 진군해 버려 이도 저도 아닌 막장 대형이 탄생해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떡진 병력이 사방에 둘러싸여 어디부터가 벨리테스고, 어디까지가 트리아리인지 전혀
알수 없는 상태에서 학살당하는 것이니 이는 초중기 “마니풀라 3열 대열의 맹점”을 정확히
짚고, 로마군이 성급하게 나서도록 유도하여 로마군을 문명군대 다운 대형을 갖추지 못한
군대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며 로마군의 부실한 기병 전력은 불바다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 됩니다.
“바깥쪽에 서있던 로마군은 끊임없이 죽어나갔으며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군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커다란 소동을 일으켰으니 그들은 결국 그들이 서있는 자리에서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 폴리비오스
어떤 전열에서는 로마군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 하였고, 다른 전열에서는 정신없이 희망없는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그때 하스드루발이 누미디아 기병을 물리고 갈리아, 히스파니아 기병을 동원해
아프리카 보병을 지원하였으니, 아프리카 보병은 전투가 아닌 살육으로 인해 지쳤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다음날 카르타고군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전투지역을 다시 찾았고 살육
의 현장에 몸서리를 쳤으니...... 수천수만의 로마인들의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운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로마인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 그곳에 둔 것 처럼 보였습니다.
“피투성이 형체로 시체 한가운데에 서있는 사람도 몇 있었는데 카르타고인은 곧바로 그들의
숨통을 끊었으니 어떤 군인은 팔다리가 잘려 피를 쏟는 상태로 그때 까지도 숨쉬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머리를 구덩이에 묻고 목숨을 끊고자 하였다.” - 리비우스의 기록
파울리 라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일분당 로마군 600명이 죽었다 했으니 이는 초당 10명씩 죽은것으로 이미
그 상황에선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으며 뼈와 살을 베고, 베다가 “칼날 까지 무뎌져 검으로
때려 죽여야”할 정도였으며 도망치다가 “자기편끼리 압사”당한 로마군 병사들도 대단히 많았다고 합니다.
집정관 바로는 달아났지만 다른 집정관 파울루스는 기병전 초기에 일찌감치 슬링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말을 탈수가 없었고, 뒤이어 추적해온 카르타고 기병들의 투창 세례를 맞아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군사 호민관이던 렌툴루스가 파울루스를 발견하고 자신의 말을 내주며 당신은 이 참상에
가장 적은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당신의 죽음으로 오늘의 패배가 더 끔찍해지게 만들지 말라. 이미 충분한
피와 눈물이 흘렀다고 설득하니.... 파울루스는 고개를 저으며 "렌툴루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용감한
일을 하길. 그러나 적의 손아귀에서 도망갈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동정심으로 낭비하지 마시오.“
“가서 원로원에게 로마를 요새화하고, 승리한 적들이 올 때까지 방어를 단단히 하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파비우스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그대와의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고. 나를 살해당한
병사들과 최후를 맞도록 내버려두시오. 부디 나를 집정관이 아닌 몸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아니면 전우를 고발하여 스스로의 결백을 다른 이를 유죄에 빠뜨리며 증명하게 하지 말아주시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 보병 4만 7천명, 기병 3천명이 전사했고 포로는 2만명에 달했으며 또한 여기
지휘관으로 참전한 원로원 의원 80명도 전사했는데, 전사자 중에는 로마 보병의 지휘를 맡은 바로
전 해의 집정관인 게미누스와 파비우스의 부관으로 지명된 기병장관 미누키우스도 포함 되었습니다.
후대 연구에 따르면 당시 로마가 동원할수 있는 시민군과 동맹군 병력의 한계치를 보통 30~40만 사이로
잡는데, 대략 1/5에 달하는 7만명의 병력이 한번의 전투로 깨끗하게 소멸했으니.... 집계된 사망자만
해도 4만에서 6만까지 달하는 엄청난 피해였는데 한니발의 피해는 5천 7백(폴리비우스 사료)
~ 8천 명(리비우스 사료) 이었고..... 그나마 대부분은 켈트족 (갈리아인) 병사들(4천 명) 이었습니다?
총 인구수 대비 동원 가능한 병력 비율을 간단히 계산할 때는 총 인구의 1~3% 정도를 상시 유지
가능 병력(상비군), 총 인구의 10% 정도를 최대 동원 가능 병력(상비군 + 예비군)으로
계산하는데 총 인구의 1/2은 통상 군 복무에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이며, 남성
중에서도 군 복무에 부적합한 어린이, 청소년, 노인, 장애인, 환자 등의 비율이 대략 1/2입니다.
그러면 총 인구중 군복무가 그나마 가능한 건강한 성인(청장년) 남성의 비율은 대략 전체 인구의
25% 정도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사회 유지와 물자 생산을 위한 인원을 남겨야 하므로 '총 인구의
10%' 라는 병력 숫자는 사회가 붕괴되지 않는 선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상한으로 여겨집니다.
기록에 따르면 로마와 동맹시의 현역 병역 해당자 수는 각각 20만, 60만으로 합치면 80만명
이었으니 이 현역 병역 해당자는 자신의 자산을 소유하고 무기를 구매해 전쟁에
나설수 있었던 시민 계급 중 17~ 45세의 건강한 성인 남성을 뜻하니 현대로 치면 말이
현역이지 , 현역 부터 예비군, 전시 민방위(45세) 까지 모두 긁어모은 총 수에 가깝습니다.
로마가 상실한 병력 7만은 동원 가능한 한계 전력의 20% 가량으로, 현역 병역 해당자의 10%, 총
인구의 2%에 조금 못 미치는데,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는 상시 유지 가능 상한에 가까운 병력
이 한 방에 날아가 버린 것이니 시대의 변화 때문에 1:1 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현대 한국
으로 치면 5천만의 2%, 즉 전투 한번에 1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어마어마한 손실이었습니다.
인구의 2%만 해도 엄청난 수치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칸나이 전투에 대한 수치고 전쟁이
발발한 이래 로마는 계속 한니발에게 참패하며 이미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었으니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로 6만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입은 후에
칸나이의 참패가 발생한 것이니 이 시점에서 전쟁 이후 “로마의 인명손실은 13만” 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칸나이 전투 직후 법무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가 이끄는 2개 군단 및 보조병 포함 총 2만 5천여 병력이 한니발에 호응하는 갈리아 족을 정벌
하려다가 역으로 리타나 숲에서 전멸당했다는 끔찍한 소식까지 전해지니 실바 리타나 전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