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사가(祈戰死歌) '_ 철기 이범석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민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외적 놈들을
삼천리 강산에서 열혈히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백두산 찬 바람은 불어 거칠고 압록강 얼음 위에 은월이 밝아
고국에서 전해 오는 피비린 냄새 분하고 원통하다 우리 동족들
물어 보자 동포들아 내 죄뿐이냐 네 죄도 있으려니 같이 나가자
정의의 손과 칼을 손에다 들고 동족을 구하려면 목숨 바쳐라
겁 많고 창자 썩은 어리석은 놈 자유를 찾겠다는 표적만으로
죽기는 싫어 해도 행복만 위해 우리가 죽거든 뒤나 이어라
한배님 저희들은 이후에라도 천만대 자손들의 행복을 위해
맹세코 이 한목숨 바치겠으니 성결한 전사를 하게 하소서
사람이 하는 일이 결국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라고 본다면, '기전사가(祈戰死歌)'는 두려운 노래다. 이기게 해 달라는 노래가 아니다. 싸우다 죽게 해 달라는 노래다. 결의문이 아니라 기도문, 그것도 원도(願禱)다.
첫머리는 분노다.
자유를 빼앗긴 데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일어선 사람들의 분기. 고국에서 건너오는 소식은 죄다 피비린내였다. 그 냄새 앞에서 '너와 나'는 사라지고 '우리'만 남는다. 노래가 사람의 피를 끓게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중반에 이르면 어조가 바뀐다.
자유를 말로만 앞세우면서 죽기는 싫어하고 제 몫의 행복만 챙기는 자들을 정면으로 꾸짖는다. 겁 많고 속 썩은 자, 라는 표현은 지금 읽어도 서늘하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한배님을 부른다. 천만 대 자손의 행복을 위해 이 목숨을 바치겠으니 거룩한 죽음을 허락해 달라고. 홍암 나철의 '순명삼조(殉命三條)'가 자연스럽게 겹쳐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노래를 지은 이는 철기 이범석이다.
1900년생, 청산리 전쟁 무렵 그는 스물한 살이었다. 운남강무당 기병과를 수석으로 마치고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거쳐 1920년 봄 왕청현 북로군정서로 옮겨 사관연성소에서 생도들을 길러냈다. 그해 10월 백운평에서 제2제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맞붙은 것도 그였다. 스물한 살 청년이 부하들에게 가르친 군가가 죽음을 청하는 기도였다는 사실. 이 노래를 단순한 각오로 읽을 수 없는 이유다.
노래가 놓인 자리도 눈여겨볼 만하다. 북로군정서는 1911년 백포 서일이 왕청현에서 조직한 중광단에서 출발해,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을 거쳐 대한군정부로, 다시 북로군정서로 이어진 조직이다. 총재부의 핵심은 대종교 동도본사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었고, 사령부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채웠다. 두 축을 잇는 끈이 대종교였다.
총재 서일이 평생 붙들었던 원칙이 수전병행(修戰竝行)이다. 닦는 일과 싸우는 일을 나누지 않는다는 뜻이고, 조직으로 옮기면 군교일치(軍敎一致)가 된다. 정신을 맡는 총재부와 행동을 맡는 사령부를 나란히 둔 편제 자체가 그 원칙의 설계도였다. 이범석 역시 훗날 청산리의 승리를 신앙의 힘과 민족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회고했다.
그래서 이범석이 부른 대상이 하나님도 부처님도 아닌 한배님이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노래의 마지막 두 행은 개인의 각오가 아니라 교단의 언어다.
청산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화룡현 일대에서 열 차례 넘게 이어진 전투였다. 일본군 피해 규모는 자료마다 편차가 커서 한 숫자로 기록하기 어렵다. 다만 병력과 화력이 비교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군이 애초 목표했던 독립군 섬멸에 실패했다는 사실만큼은 어느 기록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 실패의 반대편에 이 노래가 있었다. 이기게 해 달라고 빌지 않고 잘 죽게 해 달라고 빈 사람들, 죽음을 계산에서 빼버린 사람들. 오늘 우리가 딛고 선 자리는 그 계산법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