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희의 신작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서 홍길동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은 불법 흥신소 활빈당의 사립탐정입니다. 불법 흥신소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일당 홍길동은 '명탐정'이고 활빈당 뒤에는 어마어마한 부자인 황회장이 버티고 있어서 오리지널 홍길동이 도술로 가능했던 것들 대부분을 돈으로 커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안티 히어로입니다.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이긴 하지만 악당들에겐 다른 악당들 못지 않게 잔인합니다.
웬만한 사건이면 24시간 안에 해결하는 홍길동이지만 아직 미해결인 문제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살해한 원수 김병덕의 행방이죠. 수 년의 노력 끝에 간신히 그가 사는 곳을 알아내지만 홍길동이 도착하기 직전에 김병덕은 정체불명의 악당에게 납치됩니다. 홍길동은 김병덕의 두 손녀를 껌딱지처럼 달고 김병덕을 찾아나서는데 그 뒤에는 나라를 뒤흔들 어마어마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광은회라는 조직이 버티고 있었죠.
일인칭 하드보일드 탐정물입니다. 시대배경은 1983년도 정도 되려나요. 하지만 [씬 시티]의 세계가 구체적인 역사적 공간이 아닌 하드보일드 세계의 추상적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80년대도 사실적인 역사적 공간은 아닙니다. 미국 하드보일드물과 7,80년대 한국 장르 영화의 재료들이 컴퓨터 그래픽이 만든 백일몽 속에 뒤섞여 있다고 할까요.
홍길동이 추구하는 일인칭 하드보일드물의 자뻑은 그가 원수의 손녀인 동이와 말순을 만나면서 제지를 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역을 끼워넣으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요. 애들이 귀엽다기보다는 짜증나는 방해물이 될 가능성이 높고 스토리도 느끼해지죠. 하지만 조성희는 [남매의 집]의 감독. 어린 배우와 캐릭터를 다루는 솜씨가 장난이 아닙니다. 수첩을 들고 다니며 모든 상황을 기록하는 왓슨 역의 동이도 예쁘지만 늘 콧물을 흘리고 다니며 사사건건 홍길동의 수사를 방해하는 말순은 캐스팅부터 연기지도에 이르기까지 완벽해요. 씬 스틸러라는 단어가 이런 애를 가리키려고 만들어진 거죠.
홍길동도 제대로 만들어진 캐릭터입니다. 그의 큰 장점은 진짜로 명탐정이라는 것이죠. 우리나라 장르물의 주인공들 중엔 설정이 주장하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는 진짜로 명탐정입니다. 물론 배배 꼬인 이야기 속에서 실수도 하고 뻘짓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머리가 나쁘거나 실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건 김성균이 연기하는 악당 강성일도 마찬가지. 한마디로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탐정, 악당, 껌딱지 꼬꼬마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합니다. 이야기의 진상이 특별히 어렵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영화가 관객들보다 뒤쳐진다는 생각은 안 들죠.
제가 이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으로 떡칠한 채도 떨어지는 화면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많이들 [씬 시티]의 영향이 지나치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단순히 [씬 시티]의 모방작이라고 부르는 건 좀 게으른 것 같습니다. 여기엔 [남매의 집]에서부터 일관되게 이어진 조성희만의 개성이 있어요. 단지 발전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을 뿐이죠.
2시간을 좀 넘기는 러닝타임은 좀 긴 편입니다. 다소 속도가 떨어지는 후반부로 넘어가면 이야기를 정리하느라 애를 먹고 있는 게 보이고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재미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에필로그가 약속한 속편이 나온다면 홍길동의 모험이 이 영화에서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새로 발전할 기회를 얻을지도 모르죠. (16/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