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우시니, 황금연휴 마지막 날에 애써 쓴 제 댓글들까지 사라졌잖습니까! 글 지우고 다시 올리지나 마시지…. 글 다시 올리셔서 {준회원 게시판}에 있었던 파랑새 염지웅 목사님 글, <존 머레이의 확정 성화는 위험한 교리이다.>에 썼던 제 댓글들을 더 자세히 업그레이드해 다시 씁니다. 삭제하신 걸 보고 김빠져 머리도 잘 안 돌아갑니다만….
2020년 12월 16일에 파랑새 목사님은 ‘조나단 에드워즈 이신칭의 교리’를 이단시하면서 페친들에게 ‘구원의 서정’을 다룬 훌륭한 책으로 ‘존 머레이 {구속}’을 소개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목 <존 머레이(John Murray)>로 올리셨던 그 글 첫 문장을 옮깁니다.
제가 구원의 서정에 관한 책 가운데, 단연 최고로 여기는 책은 John Murray 박사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료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인 저에게는 우물 밖 개구리이신 존 머레이 목사님, 이토록 존 머레이 목사님을 20세기 개혁 신학 거목으로 여기는 저에게 “존 머레이 광신도”라는 큰 명예를 수여해 저를 무척 높여주신, 고마우신 파랑새 염지웅 목사님, 아직도 여전히 ‘존 머레이 {구속}’을 최고로 여기는 “존 머레이 광신도”인 저처럼 “존 머레이 광신도”이셨다가, 1 년 반만에 이렇게 “존 머레이 광신도”에서 벗어나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에 이어 존 머레이 저격수로 등극하시니, 축하합니다. 짝짝짝!!! 또 세월이 흐르다 보면, 존 머레이 저격수 존 페스코와 에스콘디도 광신도에서도 벗어나시는 일도 있겠지요.
아 참, ‘존 머레이 {구속}’에서 구속성취의 적용으로서 구원의 서정을 다룬 [제2부]는 완독하셨나요?
“전통적인 개혁주의가 제시하는 구원의 서정은 칭의-성화의 순서이다.”??????? “칭의”에 선행하는 ‘일반 부르심→특별 부르심ㅡ중생ㅡ회심’은 ‘목사님 주특기 삭제’가 아닌, 생략하신 거죠?
“머레이의 확정 성화를 인정하게 되면, 외적 구조상 성화-칭의의 순서가 된다.”??????? 아닙니다. ‘지극히 거룩(聖)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씨(요일 3:9)로서 지극히 거룩(聖)한 믿음(유 1:20)의 씨인 확정 성화聖化의 씨를 죽은 영혼에게 심으셔서 다시 살리시는 중생ㅡ중생의 발현으로서 회심ㅡ칭의ㅡ점진 성화’입니다.
도道의 초보조차 모르는 젖먹이 신앙에서 벗어나 선과 악을 분별하는 온전한 선생(히 5:12~6:1)이 언제 되실지….
여기까지는 제 댓글들을 기억을 더듬어 좀 더 자세히 업그레이드한 글입니다. 게시 글로 쓰니,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굵은 글씨로 쓸 수 있어서 무척 좋습니다. 아래부터는 지금 타이핑하는 글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하)
“결론하여, 존 머레이의 확정 성화는 일개 개인 신학자의 견해일 뿐이다. 반대해도 별반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 전혀 몰라도 신앙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 예. 그렇습니다. 확정 성화 진리, 중생과 동일한 확정 성화 진리를 몰라도 양무리 신앙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으로서 능동 순종과 수동 순종 진리’를 자세히 몰라도 양무리 신앙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 주님의 청년으로 장성해야 하건만 도道의 초보에서만 머무는 젖먹이 신앙을 가진 양은 양의 탈을 쓴 Wolf들에게 미혹당하겠지요. {페북}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이자 존 머레이 저격수를 지지하는 넋빠진 목사들도 있는 현실인데,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짧은 나머지 예장 합동, 예장 합신, 예장 고신을 상대로 한국 보수주의 장로 교단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목사들, 예장 합동을 욕 먹이는 예장 합동 꼴뚜기파 목사들 예에서 보는 대로, 양무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 할 목자일 때는 다릅니다.
“칭의 이전에 의나 거룩성의 주입이 있게 되면, 이것은 개신교가 아니라 로만 카톨릭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을 연구하신 신학박사 이윤석 목사님께서 {페북}에서 염지웅 목사님을 “정이철 류”로 비난하시자 적반하장으로 “무단 복제”, “명예 훼손”이라며 발발 뛰셨는데, 이 주장은 ‘{바른 믿음} 서철원 <능동 순종, 종교개혁 허물어 다시 율법주의-로마교회로 복귀>’가 떠오르게 만드는 주장입니다.
파랑새 염지웅 목사님은 2020년 여름에 {페북}에서 “존 오웬의 칭의 교리에 관한 책의 목차에, 전가(imputation)라는 단어는 수없이 나오지만, 주입(infusion) 또는 주입된 의(infused righteousness)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하셨습니다. 완독은 아닙니다만, 중생을 의의 주입으로 설명하시는 글이 있는 ‘존 오웬 {개혁주의 성령론}’을 읽었던 저는 이 글을 읽으며 ‘<목차>에는 없더라도 본문에는 있을 수 있는 법인데…’ 하며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파랑새 염지웅 목사님, ‘존 오웬 {칭의론}’은 비록 칭의를 다룬 책이긴 하지만, <목차>에는 없더라도 본문에는 있을 수 있는 법 아닙니까? 칭의는 중생(성화)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칭의의 전제조건은 중생(성화)과 중생의 발현으로서 회심이기에, ‘존 오웬 {칭의론}’은 의義(거룩성)의 주입으로서 중생(성화)를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義의 주입”, 혹은 “주입”이라는 말이 이 책 여러 곳에 있습니다. 셀 수 없도록…. 저는 ‘존 오웬 {칭의론}’을 2020년 가을에 산 뒤 <목차>만 보고 지난해 여름에 이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타이핑하면서 불현듯 이 책이 떠올라 또 확인했으니, 직접 확인하십시오.
다음은 ‘존 오웬 {칭의론} 박홍규 역 (서울: 처음과 나중, 2020)’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지난해 가을엔가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비몽사몽 간에 읽었던 부분이라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의義의 주입” 혹은 “주입”이 몇몇 쪽에 있나 확인하면서 쪽 상단 모서리가 접힌 곳이 있어서 펼쳐보니, 연필로 밑줄을 그어 놓은 쪽이더군요. ‘확정 성화 위치를 중생 시로 잡은 신학자를 대라.’ 하신 닉네임 님이 또 반론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파랑새 목사님보다는 닉네임 님 때문에 참 힘들었는데, 덕분에 감사드립니다. ‘존 오웬 {칭의론}’ <목차>만 보고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을 이단시하신 분이라, 완독하시라고 쪽수는 밝히지 않습니다. 들여쓰기 없이 ‘-’를 써서 옮깁니다. 밑줄은 연필로 그은 밑줄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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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이 영적으로 깨끗하게 되고 정화되고 생명과 거룩과 하나님을 향한 순종에 대한 원리를 부여받게 되는 성화의 은혜는 의심할 여지 없이 탁월한 특권이며, 어느 누구도 그것이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중략)…
만약 성화가 여기에서 표현돼있는 특권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포함되거나 포함하려고 했다면, 작정을 제외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보다 더 축소될 가능성이 있는 특권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소명이 명확히 포함돼있는 것 같다. 소명이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이나 믿음 그 자체의 거룩한 원리가 전달되는 유효한 소명을 의미한다면, 그 안에 그 직접적인 원인의 결과로서 우리의 성화가 급진적으로 포함돼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롬 1:7)고 언급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고전 1:2)과 똑같다. 그리고 많은 구절에서 성화가 유효한 소명에 포함돼 있다.
우리의 성화는 영적인 생명의 원리가 주입되고, 그것이 거룩과 의와 순종의 의무를 증가케 하고, 그로써 우리가 영광에 적합하게 되며, 영광 그 자체와 본질상 똑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그런 진보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것”(고후 3:18), 영광 그 자체는 “생명의 은혜”(벧전 3:7)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다.”라기보다는 “영화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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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레이 “진리의 자기 주장은 장엄하다!”
Soli Deo Gloria!!!
참고로, 텍스트에 적힌 오타 “(벧전 3:17)”을 제가 “(벧전 3:7)”로 고쳤습니다. 더 옮길 수 있지만, 여기까지 옮깁니다.
이 이후에 존 오웬 목사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성령으로 새롭게 되지 않고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거룩하게 되거나 우리 안에 내적인 거룩과 의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하십니다.
“내재하는 의”를 말씀하신 사무엘 러더퍼드 목사님과 중생을 (확정) 성화로 보셨던 윌리엄 펨블 목사님 제자 에드워즈 리와 함께 존 오웬 목사님도 참석하셔서 만들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존 페스코 {역사적, 신학적 맥락으로 읽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기 전부터, 염지웅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이신칭의론을 이단시하실 때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유효한 부르심]장에서 ‘새롭게 하심(의義의 주입)으로서 중생(성화)’을 먼저 고백한 뒤 [칭의]장에서 ‘의義의 주입으로 칭의를 받는 것은 아님’을 고백한다. 바로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고백한 중생과 칭의의 틀이다.”를 제가 입이 닳도록 수차례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 못 하시는 파랑새 염지웅 목사님은 여전히 칭의 뒤에 무엇을 두고 계십니까?
제가 목사님 글 <성향이 아니라, 언약이다>에 다음과 같은 댓글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나님의 씨”인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주셔서 ‘나’를 살리셨는데, 그 ‘나’는 존재하지 않은 ‘나’, 여전히 죽은 ‘나’이고, 죽은 ‘나’ 속에 있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일까요? 아니면, 살아난 ‘나’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일까요?
물론, 죽은 나는 아니겠지요. 그러면 어떤 나인가요? 연중론(연속적인 중생론)처럼 모태母胎에 있는 나인가요?
존 오웬 목사님께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거룩하게 되거나 우리 안에 내적인 거룩과 의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함에도 “칼빈주의-개혁주의 목사” 운운하면서 계속 “믿음(회심)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알미니안 신학을 주장하시겠습니까? 목사님 구원론은 또 다른 연중론임을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존 오웬 목사님 글로 파랑새 염지웅 목사님을 낭떠러지 끝에 몰고 보니, “존 오웬 광신도야, 존 오웬이 곧 성경이냐?” 하실까, 걱정입니다. 혹은 Wolf이철처럼 존 오웬 목사님을 “회중파 청교도 이단”으로 정죄하실까, 걱정입니다. ㅠㅠ
파랑새 염지웅 목사님, 지난해 1월 제가 {개혁주의 마을}에 복귀해 염지웅 목사님 교만을 지적했습니다. 이제 그만 쉬십시오. 쉬시면서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무엇 때문인지?’ 숙고해 돌이키십시오. 그래서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짧은 돈키호테 칼’로 허수아비를 찌르고 다니며 우리나라 장로교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쥐새끼, 예장 합동 꼴뚜기파 Wolf이철 길로 가지 마십시오.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0 하)
글을 마치며 {페북} 제 담벼락 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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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을 잘 정리하셨다.
朴埰同 (2020.12.05.20:18)
아쉬운 것은 그 근거(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텍스트)를 제시하지 않고 비평하셨다는 점이다. 그럴지라도 염지웅 목사님 역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텍스트를 제시해 비평하신 일이 없다는 점, ‘누구누구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판했다. 그러므로 나도 비평한다.’ 식이었지, 그 “누구” 텍스트를 제시하신 적은 없다는 점에서 피장파장이다.
만약 염지웅 목사님이 이 목사님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신다면, ‘염지웅 목사님이 저지른 죄, 허위사실을 적시한 사자死者(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명예훼손죄’를 증언하는 참고인으로 내가 나설 용의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지는 비평은 익명비평이 아니라 실명비평이다. 즉, 염지웅 목사님이 하신 블라인드 처리는 그분 인격권을 보장해 주는 일이 아니다. 그분이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분이라면, 비난받으셔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를 다투는 문제에서 ‘베드로 사도 이름을 적어 실명비평을 하셨던 바울 사도 태도’를 가져야 한다.
텍스트를 그대로 복제 인용해 이뤄지는 비평이 참된 비평이다. 이 비평 원칙을 모르시는 염지웅 목사님이 “무단 복제”를 언급하며 “명예훼손죄”를 이야기하셨는데, 무단 복제는 불법이라서 그동안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텍스트는 제시하지 않는 비평으로 허위사실을 적시한 사자명예훼손죄를 저지르셨는가? 무단 복제는 불법이라서 그 “누구” 텍스트를 제시하지 않고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을 저격하셨는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