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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 :11)
주님으로 만족하고 주님으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소서. 그러면 승리하는 삶이 되실 것입니다.
20. 하나님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냐?
(마태복음 22:15-22)
나는 누구의 것인가? 나는 누구의 소유인가?
돈에는 그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의 그림이 있다. 정치적 통치자의 형상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 또 그 나라의 글이 쓰여 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말씀이 또렷이 새겨져 있는가? 누가 봐도 저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구나,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할 수 있는 마크가 있는가?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자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대한민국 시민권자이지만 동시에 천국 시민권자이다. 만약 아무리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높은 지위에 있다 해도 죽어서 지옥 가는 인생이라면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탄한가?
내가 하늘나라, 천국 시민에 대해서 깊은 영감을 준 사건이 있었다.
2년 전에 신대원 동기였던 고경민 전도사님이 오랜 투병 끝에 천국에 갔다. 그가 천국에 가기 전 어느 날, 동기 전도사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 내용은 동기들 뿐만이 아니라 장신대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과 충격, 감동을 주었다.
“저는 이사를 준비 중입니다.
‘굿나잇’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사람들에게 보내는 인사말입니다.
‘굿바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인사말입니다.
‘굿바이’라고 인사하기는 너무나 아쉽습니다.
모두에게 ‘굿나잇!’으로 인사하고 다시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그의 편지는 우리들의 본향이 하늘나라라는 것을 다시 되새겨 주었다.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우리의 영원한 국적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믿음의 경주를 해본다.
21. 영에 속한 사람이냐, 육에 속한 사람이냐?
(고린도전서 2:10-16)
1. 육에 속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1)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
① 성령의 일에 관심이 없다.
②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지 않다.
③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들은 성령의 역사를 거절한다.
2) 성령의 일을 미련하다고 비웃는 자들이다.
① 이런 사람들이 성령의 계시를 비웃는다.
② 성령으로 역사하는 제자들을 미련하다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들이다.
③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비웃고 배척하는 자가 바로 육에 속한 자다.
3)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이다.
① 성령으로 하는 말씀을 마귀의 소리라고 배척하고 대적하는 자들이다.
② 성령으로 시작하여 신령한 사람이 되었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다시 육체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이다.
③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이단이라고 무섭게 정죄한다.
2. 신령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1) 성령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영적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2)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3) 신령한 사람은 전심으로 주님만 구하는 사람이다.
3.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에 속한 사람이 될까?
1)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 철저히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를 깨달아 늘 자신을 살펴야 한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 전심으로 주님을 구해야 한다. 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한다.
☞ 예수님은 열매로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인지, 육에 속한 사람인지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죄)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서 좋은 성품과 인격이 나타날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령의 사람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22. 버린 자냐, 가진 자냐?
(마가복음 10:23-31)
1. 우리가 왜 먼저 버리는 일을 해야 할까?
1) 버리는 것이 믿음의 정문이기 때문이다.
①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다(요 10:1). 신앙에도 정문이 있다. 그 정문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마치 우리가 죽을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것, 곧 가장 좋은 것은 아예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사는 것이다. 무엇이고 생기기만 하면 곧 바쳐버리고 빈손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믿음은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고, 하늘에 속한 것을 붙잡는 행위다. 그러니까 세상의 것을 잔뜩 움켜쥐고 있으면 하늘의 보화를 받을 손이 없으니, 이런 사람은 결코 믿음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② 예수님은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선언하셨다.
③ 정문으로 들어가야만 “구원을 받고 또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요 10:9).
2) 왜 버리라고 하시는가? 버려야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① 마라톤 선수가 짐을 잔뜩 짊어지고서 달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는가? 그런 일은 결코 없다. 우리도 몸을 가볍게 하고서 달리기를 해야 한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고 초청하셨다.
② 어리석은 인생들이 많이만 가지면 좋은 줄 알고, 잔뜩 움켜잡으려고 애를 쓰지만, 실은 그곳엔 행복이 없다. 참 행복은 오히려 모두 버리고 몸을 가볍게 하는 데에 있다.
③ 우리는 차라리 주님께 맡기고 사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러니까 버린다는 말은 맡긴다는 말로 이해하면 더 좋다.
3) 왜 버리라고 하시는가? 그래야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① 예수님은 간음죄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려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려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백체 중 하나를 버려서라도 천국에는 가야 한다. 버리지 않으면 오히려 지옥의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
②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롬 8:13). 떠나야 하고, 버려야 하고, 또한 죽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진다.
③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4) 왜 버리라고 하시는가? 그 넷째 이유는
① 버려야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이 세상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바울도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하였다. 천국은 우리 마음에 있고, 성령으로만 건설된다.
③ 이렇게 먼저 마음에 천국이 건설되어야 이 땅에도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
2. 무엇을 버려야 할까?
1) 세상에 있는 것을 버리고 하늘에 있는 것을 취해야 한다.
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즉시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②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부르심을 받자 즉시로 자기의 겉옷을 내버리고 주님 앞에 달려갔다(막 10:50). 엘리사도 엘리야의 옷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에 즉시로 자기의 옷을 벗어 두 쪽으로 찢어버리고, 엘리야의 옷을 주워서 취했다(왕하 2:12-31).
③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④ 십일조도 마찬가지다.
⑤ 구제하는 일도 역시 마찬가지다.
2) 육신에 속한 것을 버리고 영에 속한 것을 취해야 한다.
① 본문 29~30절을 보자.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② 육신의 지혜와 지식을 버리면 하늘의 지혜와 지식이 임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을 다 버렸다.
③ 목숨도 버려야 한다.
3) 마귀에게 속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취해야 한다.
① 마귀에게 속한 것은 죄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취해야 한다.
②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③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 말에 속아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거역하였다. 마귀의 달콤한 속삭임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3.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버리고 살 수 있을까?
1)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믿음으로 결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곧 세상에 속한 모든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2)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4)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 인간은 자꾸 움켜쥐려는 본능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자기의 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작은 물질부터 나눌 수 있는 훈련을 하게 하신다. 순종도 마찬가지다. 작은 순종을 하다 보면 어느새 믿음이 쌓여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어린아이에게 큰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믿음을 훈련 시켜서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만드신다. 포도가 숙성되지 않으면 포도주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람은 광야의 시간, 숙성되는 시간을 반드시 거친다. 따라서 버리기 전 단계의 훈련은 절제의 훈련이다. 절제의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욕심을 내려놓고, 버릴 수 있게 된다. 세상의 것을 과감히 버리고, 하늘의 것을 취한다.
23. 이면적 유대인이냐, 표면적 유대인이냐?
(로마서 2:28-29)
1. 표면적(表面的) 유대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첫째 특징은 할례에 있다.
2) 둘째 특징은 율법에 있다.
3) 셋째 특징은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에 있다.
2.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1) 그 첫째 의미는 나다나엘의 경우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이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셨다.
2) 둘째 의미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야곱은 아직 참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밤새워 씨름한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되었다.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할례의 언약을 받은 것과 같은 이치다.
3) 셋째 의미는 육신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인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이면적 유대인이란 말의 넷째 의미는 이사야 41:14-15에 나타난다.
3.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면적 유대인이 될 수 있을까?
1) 우리는 표면적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2)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3)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 할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에 언약의 징표였다. 따라서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할례가 이 역할에 충실하여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할례는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할례의 본질을 잊고 그것을 단지 선민의 자랑거리로만 삼았을 때 할례는 무의미한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구약시대에 의는 율법이었고 율법을 행할 때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과 가르침은 있었지만, 그 율법이 삶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자랑스러워하지만 정작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한다. 율법은 지켜질 때야 비로소 온전하다. 율법 자체로는 결단코 효력이 없다. 오히려 율법이 지켜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이름은 세상으로부터 모독을 받는다.
유대인의 할례의식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때만 가치가 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야 가치가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 율법은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서 판단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 여김을 받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결국 할례 즉 오늘날 세례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유익하고 인정을 받는다. 겉으로 보이는 형식과 전통은 본질이 아니다. 세례나 종교적인 표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는다.
유대인 부모에게서 나거나, 또는 할례 의식을 거쳤다고 유대인이 아니다. 이면적 유대인은 하나님과 마음이 맞는 사람이다. 따라서 유대인의 표가 있다고, 육신의 할례를 했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오늘날 유대인의 표가 자칫 직분자라고, 목사 전도사 선교사 장로 권사 집사라고 여길 수 있다. 육신의 할례 곧 세례받았다고 모태신앙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선교단체에 있다고 교회 안에 있다고 사역의 열매가 있다고 헌금과 봉사를 한다고 절대 안심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점검이 필요하다. 자칫 종교적인 것에 속을 수 있다. 나에게 성령의 세례 곧 인치심이 있는지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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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성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놀라운 지혜와 명철과 능력이 입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