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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꽃지기 원문보기 글쓴이: 양산박
고치령과 갈곶산 중간지점 - 마구령에서
2019년 3월 24일 일요일 백두대간 28 회차 갈곶산
자유인 산악회
갈곶산 : 백두대간 28회차 : 고치령 – 마구령 – 갈곶산 – 봉황산 – 부석사
산행후 박산 저수지에서 뒤풀이 (강도사님 참석)
산행거리 : 약 17 km 산행시간 : 약 7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431759
거리 17.2 km
소요 시간 7h 36m 42s
이동 시간 6h 45m 2s
휴식 시간 51m 40s
평균 속도 2.6 km/h
최고점 1,121 m
총 획득고도 610 m
난이도 보통
백두대간 (白頭大幹) 28 –갈곶산
양백지간 (兩白之間)
양산박
벌써 이렇게 멀리 왔나 소백산을 지났다
이제 얼마 안남았네 태백산을 지나면
소백산과 태백산을 넘나드는 곳
양백지간에 선다
그 곳엔
비운의 왕 단종과
그의 삼촌 금성대군 이야기가
고치령 고갯마루 한 켠에 앉아 있다
벌써 옛 이야기 되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양재역 화단 봄이 오는 풍경
꼬리풀비단 - 니포비아 - 꼬리풀
겨울이 간 자리에 봄이 들어서려 하나 물러가려다 미련이 남은건지 겨울이 주춤거린다. 어제 눈비가 내리고 난 뒤 급히 달려오던 봄님이 몸을 움추린다. 잠시 그렇게 둘이 눈치를 본다. 봄은 겨울더러 아쉬워 말고 빨랑 가라 하고 겨울은 봄에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오라 한다.
모처럼 맑은 하늘이다. 이 맑다는 표현이 이렇게 간절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에게 일상화 되버린 미세먼지 노이로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반증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미세먼지 주의보에 그리 개연치 않는 편이지만 오늘같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날을 맞으니 뭔가 보너스를 탄 기분이다. 간밤에 잠을 설쳐 중간 휴게소에 들러서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잠과 뒤엉켜 씨름하다 버스가 커브를 돌면서 눈을 떴다. 풍기 나들목을 지나고 차창너머로 점차 소백산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3시간 여 남쪽으로 달려왔는데도 산 중턱위로는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다. 남쪽에는 봄이 자리를 잡은지 한달은 되었슴직한데 여기는 계절이 봄의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한 것 같다. 목적지에 다가오고 있슴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차린 자유인들이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곰처럼 하나 하나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배낭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를 꺼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 먹고 또 주변 곰들에게 조금씩 나눠준다. 등산화끈을 조이고 스틱을 풀어 채비를 갖춘다.
풍기읍을 지나며 바라본 소백산 - 눈이 쌓여있다.
고치령 (古峙嶺 760 m )
버스는 우리를 어느 팬션 앞마당에 내려 놓는다.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 고칫재 팬션에 대기하고 있던 작은 특럭을 타고 고치재까지 약 5 km 를 이동한다. 한 번에 약 열댓명씩 두번에 나눠 실어 나르는데 난 두 번째에 배당받아 트럭이 되돌아 오는 동안 다른 대원들과 트럭이 올라간 방향으로 약 1.5 km 쯤 걸었다. 좁은 공간에 배낭을 끌어안고 꼬불꼬불 급경사길을 힘있게 타고 오른다. 2년전 덕풍계곡에서 나올 때 트럭을 타본 이후 처음이다. 몸은 불편하지만 이색적인 경험에 나름대로 재미도 있다. 길가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눈을 즐겁게 한다.
고치령은 ‘옛고개”라는 뜻이다. 영주시 단산면과 단양군 영춘면을 이어주는 고개인데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영월에 유배를 보냈을 때 세조의 동생이자 단종의 삼촌인 금성대군은 단종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지금의 영주인 순흥부에 유배되었다. 삼촌과 조카는 이 고갯길을 통해 서로 소식을 주고 받으며 처지를 아쉬워하며 그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한다. 남성대군이 군사를 이용하여 단종을 복위시켜려던 계획이 탄로남으로써 안동으로 끌려가 처형당하고 단종마저 영월 청령포에서 죽임을 당하면서 그들의 애틋한 정을 전달해주던 이 고개도 이젠 옛고개가 되고 말았다.
고치령에는 길가에 작은 산령각(산령각)이 세워져 있다. 바로 단종과 그의 삼촌인 금성대군의 혼을 위로해주고자 매년 정월 열나흣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영월을 태백산지역으로 그리고 금성대군이 유배되어 처형당한 순흥(영주)을 소백산지역으로 여겨 산령각에는 태백산신과 소백산신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산령각의 두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쓰여 있다.
此山局內至靈至聖 이 산 안 모든 곳이 지극히 영험하고 성스러우니
萬德高勝性皆閒寂 온갗 덕이 높이 번성하며 성품이 여유롭고 한적해지네
내가 특정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1457년 (세조 3년) 단종이 참살당한 사건은 당시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3년 여 걸렸지만 그 3년동안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고 마침내 자신의 동생인 금성대군과 이전 왕이자 조카인 단종마저 무참하게 살해하는 상황을 겪게 되었을 때 일반인들이 느껴야 했던 도덕적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치 컸을 것이다. 더구나 소문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더 과장해서 퍼지는 것이고 말을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17살 어린 나이에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던 단종에 대한 측은하고 동시에 애틋한 마음은 하나의 전설이 되어 백성들에게는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고 이를 치료하는 것은 결국 신앙 밖에 없었을 터이다. 노산군 단종 복위를 꿈꾸다 안동에서 참살당한 금성대군과 단종의 신위가 각각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으로 승화하여 이 고치령 고갯마루 사당에 모셔지게 된 것은 그런 많은 의미가 반영된 것이리라.
좌석리 이장님의 트럭이 소중한 운송수단이다
고치령 풍경
지자체에서 세운 표지석 - 누에고치 모양의 돌을 세워 오히려 혼란스럽다
음지에 쌓인 눈 옆으로 금성대군과 단종의 혼을 제사하는 사당이 세워져있다.
마구령 (馬駒嶺 820 m )
어제 내린 눈인지 지난주에 내린 것인지 산비탈 음지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겨우내 그렇게 바라던 눈이 눈에 보이지도 않더니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마당에 이렇게 눈이 내려 눈이 호강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이런 것이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산길이 제법 미끄럽다. 뜻 밖의 설경에 취한 사람들은 모두 카메라를 꺼내 자신만의 독특한 풍경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미끄러운 산길을 스틱에 의지해 오른다. 준비성이 있는 이들은 배낭에 챙겨온 아이젠을 꺼내 착용한다.
산길은 대체로 참나무가 우거진 부드러운 흙길이다. 발 밑에 묵은 낙엽이 밟힌다. 500 미터 간격으로 거리목이 세워져 있고 백두대간길이 옆으로 새지 않아 길 잃을 염려도 없다. 키 큰 참나무 사이로 작은 철쭉과 진달래 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4월이면 아름다운 꽃길이 되어 있을 것 같다.
산길에는 눈이 쌓여도 산행을 하다 보면 몸에서는 땀이 난다.
부드러운 흙길이다
500 미터마다 거리목이 설치되어 있다.
조망은 없어도 하늘이 맑고 미세먼지가 없어 깨끗하다.
갑작스레 췌장염으로 입원한 별동대장 대신 황일병과 김병장이 역할을 대신한다. 다른 대원들도 조금 더 긴장하여 뒤쳐지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모습이다. 걷기에 편안한 길이라서 그런지 그다지 지치지도 않는다. 가끔씩 나타나는 아름드리 소나무의 장엄한 모습에 눈길을 주면서 또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맑은 하늘을 보면서 여유도 부려본다.
오르막에 배어난 땀이 능선바람에 금방 싸늘하게 식는다. 오른쪽 양지로 한 발만 내려서면 따뜻한 봄이요 능선 왼쪽 음달은 흰눈 덮인 겨울이다.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백두대간 능선길을 따라 걷는 기분이 묘하다. 이제부터 이 산속의 생명은 생존을 위한 경쟁에 돌입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저 땅속에서는 그 햇볕이 쪼이기를 기다리며 언제라도 흙을 뚫고 나와 엽록소 공장을 가동할 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참 멋진 팀이다.
두터운 비늘을 덮어 쓴 소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외래종인 일본갈잎나무(낙엽송)이 계곡을 기어올라와 능선까지 차지한다.
라면은 우리 밥상에서 늘 주인공역할을 한다.
마구령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선 신갈나무 - 참 모질게도 살아왔다.
미내치(美乃峙)고개는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지나치고 나무가 조밀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조망이 없는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이 마구령 전에 있는 이름없는 산 봉우리에 당도했다. 예전에 헬기장으로 사용되었던 듯 봉우리가 평탄하게 깍여 있는데 더 이상 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아 복구작업으로 나무를 심어 놓았다. 식재된 신갈나무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쩌면 올 해 마지막 성찬이 될지 모르는 라면으로 푸짐한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 50분 마구령에 도착했다. 소백산 국립공원 관리구역에 들어 있어 산길에서 도로로 내려서는데 막아 놓은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이제 오늘 일정의 반쯤 소화했나보다. 산길이 힘들지 않아서 그런지 이미 힘든 산행에 익숙해진 대원들의 얼굴 표정이 밝다.
마구령 – 말馬 망아지駒자를 써서 우리말로 망아지고개다. 고산자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는 마아령(馬兒嶺)이라 표기되어 있다. 마친가지로 망아지고개라는 말이다. 자료에 의하면 일제시대 토지정리 이후에 마구령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말을 타고 넘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지만 고개가 그리 높지 않아 어린 망아지를 타고도 넘을 수 있다는 뜻일까? 꿈보다 해몽이다.
가끔 키작은 잡목이 발목을 잡아도 편안한 오솔길이다.
숱한 곡절을 지내온 소나무 - 일제의 수탈로 송진을 뺏기고 한국전쟁의 화염도 피하고 용케도 살아왔다.
마침내 마구령(馬駒嶺)에 도착 - 망아지고개라고 부르면 되려나
자유인 22기 백두대간팀의 대형님들 -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다
별동대 대원들 - 뒤에 남아 선두팀을 보호한다.
갈곶산인가 갑곶산( 甲串山 )인가
한문희 총대장님과 힘겨워하는 대원들이 고개에 남았다. 앞으로 남은 일정이 만만치 않으니 준비된 대원부터 마구령을 출발하여 가파른 길을 오른다. 앞길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초행길에는 그저 앞으로 묵묵히 가는 것이 제일이다. 처음부터 이때까지 조망이 트이지 않는 길을 걸으니 우리 앞에 어떤 봉우리가 있는지 또 지나온 길의 모습은 어떤지 제대로 알 턱이 없다. 그렇게 10여분 올라 오니 잔솔나무가 심어져 있는 헬기장이다. 이 산의 헬기장은 모두 폐장되어 그 벌거벗은 대지에 나무를 심어 놓았다. 모처럼 조망이 트인다. 그렇다고 사방이 내다보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멀리 솟은 산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저 봉우리가 갈곶산일 것이라고 여긴다. 물론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그 뒤로 두 개의 작은 봉우리가 더 있었다.
지나온 길과 마찬가지로 가는 길 곳곳에 수령이 10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길손을 배웅한다. 아무 말없이 100여년의 풍상을 견디면서 저 자리에 서 있었을 소나무는 지나는 길손들의 눈길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없이 내려다 본다. 두 번 다시 보지 못할테지만 저 나무는 우리가 지나고 나서도 또 앞으로 100년을 아니 어쩌면 그 두 세 배의 기간을 그 자리에 서서 대간길을 걷는 산객들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마구령에서 짧은 휴식을 갖고 다시 출발한다.
조망은 없어도 청명한 것이 산행하기에 참 좋은 날씨다.
신호등 놀이 - 빨간불에는 모두 서서 숨을 고른다.
부드러운 흙길이 작은 암릉으로 이어진다. 뾰족하게 돌출된 바윗길은 그러나 그리 험하지 않아 오히려 평범했기에 짐짓 지루하기까지 하던 대간길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 듯하다. 벌써 10여 킬로미터를 달려온 탓인지 별동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진다. 신호등 놀이가 다시 시작된다. “빨간불!”하고 외치면 그자리에 선채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파란불!” 하면 앞으로 나아간다. 별동대는 이렇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 결코 뒤돌아서 가지 않는다. 오직 목표지점인 갈곶산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갈곶산(966 m)는 한자로 갑곶산(甲串山)이라 쓴다. 갑곶(甲串)은 몽골이 고려를 침공해 왔을 때 임시로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적이 있는데 뭍에서 장병들이 갑옷을 벗으면 헤엄쳐서 다다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곶(串)이라서 부르게 된 강화도의 곶이름이다. 이런 갑곶이 어찌하여 육지 한 가운데 소백산 줄기에 있는 봉우리 이름에 붙여졌을까. 그 유래를 찾아 보니 ‘갈’은 곡식을 쌓아놓은 ‘가리’를 의미하며 ‘곶’(串)이라는 한자는 물건을 꼬챙이로 꽤뚫어 달아 놓은 모양으로서 ‘갈곶’이란 낫가리를 엮어서 쌓아 놓은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라 한다. 그럴듯 하면서도 쉽게 수긍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대부분 흙길인데 꼭 한 번 바위길을 지난다.
이제 갈곶까지 갔으니 봉황산을 거쳐 부석사로 하산하면 된다.
부석사로 내려가는 길에는 소나무가 울창하다.
키작은 조릿대가 자라는 길
급한 내리막 경사길에도 소나무가 아름답다.
천년 고찰 부석사(浮石寺) 관람
우리가 오늘 갈 곳은 갈곶산이다. 원래는 갈곶산을 지나 늦은목이까지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소백산 자락에 있는 부석사를 둘러보자는 총대장님의 긴급제안으로 대간길 산행은 갈곶산에서 접기로 했다. 이 갈곶산에서 부석사로 내려가는 길은 비법정 루트다. 자연환경 훼손을 막기 위해 통행을 금지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지만 그 팻말을 지나 봉황산으로 가는 길은 이미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닌 탓에 산길이 뚜렷하게 나 있어 ‘출입금지’라는 명령이 무색해진다. 그 말을 거꾸로 읽으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입출’ 즉 지금 바로 들어가라는 말이 된다. 굳이 그렇게 설정해 놓은 이유를 의심하자면 부석사 측에서 무분별한 산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갈곶산에서 부석사로 가는 중간쯤에 작은 산봉우리가 있다. 볼품없고 그리 높지도 않지만 이름은 거창한 봉황산(鳳凰山 866 m)이다. 지난 회차에 걸었던 백두대간상에 있는 봉황산과 같은 이름이고 이 이름을 가진 산은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다. 이 봉황산은 산의 품에 살포시 안겨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명찰인 부석사가 있기에 그 이름이 불릴 뿐, 만일 부석사가 없더라면 그저 어느 동네에나 있는 그런 산일 뿐이다.
부석사로 내려서는 초입에 올괴불나무꽃이 피어 있다.
산괴불주머니 - 이제 갓 피어난 모습니다.
무량수전 - 국보 18호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이라 한다.
안양루 아래 돌계단에서 바라본 정경
봉황산에서 부석사로 내려가는 길은 이제까지 걸어왔던 산길과 그 성질이 조금 다르다. 울퉁불퉁 튀어 나온 돌뿌리가 있는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꼬리진달래가 ‘겨울을 잘 보냈다’며 푸른 잎을 선보인다. 이어서 카작은 조릿대가 길가에 군락을 이룬 것이 부석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다 준다.
부석사의 설립에 얽힌 이야기는 신라의 고승 의상에 관한 것이다. 신라 무왕 1년 661년 원효와 함께 당나라의 불교를 배워 올 계획을 세우고 함께 떠났다. 그러나 원효는 출국 전 ‘해골물’에 대한 맛이 그 인식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다는 ‘일제유심조’ 법리를 깨닫고 다시 신라로 돌아와 자신이 스스로 깨우친 법리를 대중에게 설파하였다. 그와 함께 집을 나섰던 의상은 예정대로 당나라에 가서 화엄사상의 제 2대조인 지엄삼장을 만나 종남산에서 10년간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671년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화엄사상을 설파할 자리를 물색하여 마침내 문무왕 16년 676년에 봉황산 아래에 터를 잡고 부석사를 지었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이 중국에 갔을 때 한 신도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의 어린 딸 신묘(仙妙)가 의상의 준수한 용모와 품성에 반하여 사모하게 되었으나 의상은 불교공부에 심취하여 그녀를 멀리하게 되었다. 선묘는 그런 의상을 뒤에서 보필하는 역할로 만족해했다. 의상이 10년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선묘는 여정에 필요한 갖가지 옷과 용품을 담아 부두에 나왔으나 의상을 태운 배는 이미 바다로 미끌어져 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기도하며 옷 등 용품이 담겨있는 상자를 바다에 띄워서 밀으니 그 상자는 미끌어지듯 의상이 타고 있는 배에 닿았다.
이어서 선묘는 다시 하늘에 더욱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자신이 용이 되어 의상을 보호하게 해달라는 소원이 이루어져 선묘는 해룡(海龍)으로 변신한다. 의상이 신라에 당도할 때까지 거친 폭풍우를 잠재우며 무사히 항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의상이 자신의 화엄학을 설파할 장소를 찾아 다니는 동안에도 용으로 변한 선묘는 늘 의상의 지근거리에서 보살피던 중 봉황산 기슭에서 마침내 자리를 잡으려 할 적에 500여명의 이교도들이 의상의 화엄학에 의문을 품고 정착을 방해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에 선묘는 자신이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지상으로부터 들린채 이리 저리 움직이는 신비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에 의상을 방해하던 500 여명의 이교도들이 혼비백산 흩어져 달아나므로 의상이 마침내 무사히 도량을 건설할 수 있었다. 공중에 떠다니는 돌 즉 부석(浮石) 덕분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그 도량의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불렀다 한다.
마음같아서는 처음 가보는 부석사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지만 당일치기 산생의 자투리시간을 이용한 관람이라 여유가 없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라는 무량수전을 둘러보는데 오늘 일일 별동대장을 맡은 김병장이 버스가 이동해야 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따뜻한 봄날의 햇볕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시간이다. 저 멀리 높은 산 마루금이 푸른빛으로 감돈다. 부석사 뜰에 노랗게 핀 산수유가 남은 햇볕을 토해낸다. 짧은 부석사 관람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해동화엄종찰 (海東華嚴宗刹) >이라 쓰여진 일주문을 나선다.
아름다운 부석사 경내 이모 저모
강도사 (강도철) – 작은 거인
서둘러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왜 갑자기 행선이 급해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산행하는 동안 총대장님이 알고 있는 지인과 연락하여 잠시 조우하기로 약속을 잡았다고 한다. 버스에서 한문희 총대장님 특유의 감탄법으로 강도사를 소개한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강도사는 ‘아주 멋진 친구’라는 것이다.
아주 멋진 친구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주 멋진 친구로 인식하게 된 계기는 한대장님의 병치료를 휘해 강도사가 대침(大針)을 시술한 것이었다. 한대장님은 한 때 췌장암을 앓은 적이 있다. 병원에서 수술도 받았고 본인도 등산과 섭생 등 자연적인 치료를 겸하여 병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지금처럼 자유인 백두대간 팀이 양백지간을 통과할 때 산행 후 뒤풀이 장소에서 강도사로부터 대침 시술을 받았다. 4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큰 침 여러 개를 몸속에 쑤셔 넣는 모습은 정말 극적인 효과도 있었을 듯하다. 어쨌든 한대장은 어쩌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지병을 극복했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강도사님과 돈독한 친분을 유지해 왔다.
살다보면 쌓이는 인연중에서도 산에서 맺은 인연이 좋은 것 같다.
강도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단산저수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저수지 뒷편 한적한 공터에 들어서는데 좁은 주차장 한 구석에 아이보리색 승용차 한 대가 미끌어지듯 들어선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허름한 검은색 가죽점퍼에 바지는 추리닝을 입은 작은 체구의 촌부였다. 그와 함께 타고 온 아주머니 두 분은 차에서 뭔가를 주섬 주섬 내 놓는데 우리 자유인 대간팀을 위해 준비한 음식이라 한다. 흰 가래떡 한 박스에 밥 한 박스 그리고 깨끗하게 씻은 냉이가 한 박스다. 그 음식을 준비하면서 어떤 고민을 했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아침부터 긴 산행을 하고 지친 사람들이 몹시 허기져 있을 것이라고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방금 방앗간에서 가져온 듯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한대장과 강도사는 오랜 친구를 만난 회포를 푸느라 마치 푸들강아지처럼 주차장을 이리저리 다니며 기뻐 어쩔줄 모른다. 빨리 뒤풀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야 하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대원들은 한적한 곳에 버너를 피우고 손 대장님(이 분은 진짜 대장 출신이시다)이 준비하신 불고기를 끓여대기에 바쁘다. 삼삼오오 둘러 앉아 불고기로 시장기를 때우느라 정신은 온통 버너위에서 끓고 있는 불고기에 가 있다. 그렇게 일단 배를 어느 정도 채우고 나서야 밥과 떡에 손이 간다. 미리 예고가 되었더라면 떡과 밥을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고마움이 교차한다.
푸짐한 인심만큼 풍성한 대접이다.
깨끗하게 씻은 냉이 한 박스
밥이 한 상자에 떡이 또 한 말이다.
강도사는 원래 강원도가 고향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서울에서 살았는데 금호동에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현재 코엑스가 있는 삼성동에 거주하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이 곳 영주로 내려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1960년생이라는 강도사는 정말 도사 같은 기품이 넘친다. 순수한 사람이라는 표시가 온 몸에서 배어 나온다. 염색을 하지 않은 회색 머리를 늘어뜨리니 그 끝이 허리에 와 닿는다. 평소 비녀를 꼽아 머리를 말아 올리고 다닌다. 도사라면 응당 마셔야 할 것 같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아마 현대식 도사의 요건에 음주(飮酒)는 포함되지 않았나 보다. 대신 담배는 꽤 많이 피우는 듯 우리와 함께 한 짧은 시간에도 두 세 개피를 피웠다.
함께 밥친구가 되고
그렇게 날이 저물어간다.
난 생계방법이 궁금했다. 응당 농사를 지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대침을 놓을 줄 아니 침술로 먹고 사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 공작새 60여마리를 부화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혹시 양계사업을 하는가도 생각했지만 대답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것이었다. “시골에 살면 돈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거야 나도 잘 아는 것이지만 그래도 현대 사회에서 일정한 수입원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재차 물으니 능이와 송이버섯으로 돈을 번다고 한다. 스무고개 하듯이 해답을 찾아 들어간다. 3십만평 정도 산을 관리하는데 그 산에서 버섯 채취권을 얻어서 분양한다고 하는데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그 산에서 나는 버섯이 어떤 경로로 돈이 되어서 강도사의 주머니를 채우게 되는지 명쾌하지는 않았다. 대충, 그 버섯채취권을 분양하여 얼마간 현금을 버는 것으로 이해할 뿐이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음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춘분이 지난 봄날이라도 7시가 넘으면 깜깜해진다. 서울까지 3시간쯤 걸리는 시간을 머릿속으로 계산하여 주섬 주섬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서로 고마움과 그리움을 챙긴다. 고마움은 머릿속에 담고 그리움은 가슴속에 포개 넣는다. 모두 버스에 올라 타 자리에 앉고 버스가 출발하기 전 버스에 오른 강도사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고마움을 꺼내 우리 대간팀의 무사귀향과 안전산행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다. 갑자을축 병인정묘… 이런 말은 이해하겠는데 나머지는 도사의 주문같아서 그냥 좋은 말이라 생각이 든다. 강도사가 우리에게 해 준 그 기도가 그대로 그의 전도(前途)에도 죽 이어지길 기원한다.
좋은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긴 하루 지친 몸을 싣고 단산을 떠난 버스는 순식간에 공간이동을 시전하여 밤 10시 양재역에 도착했다.
첫댓글 순수함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랐읍니다.
이렇게 까지 속세에 때가 많이 끼였던가???-하구요..
ㅎ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자학을 하셨나요? 김선생이야말로 순수 순결 그 자체인듯 하던데요. 속세에 살면서 때가 안끼면 좀 힘들지 않을까요?
별동대 작가님 상세한 산행기와 멋진 사진들 감사합니다.수고 하셨습니다.
에휴 별 말씀을요. 상세하게 쓴다고 하다보니 두서없고 지루한 글이 되고 말았네요. 글씨도 작은데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