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부.마 민주항쟁을 아시나요?]
2026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47주년을 맞아,
강원도 출신 친구(草露초로 김성남) 의 자전적 실화를 통해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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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0월 / 격동의 열흘! ]
☞16일: (이날은 유신선포 7주년 기념일)
부산 마산에서 박정희 유신·군사정권에
항거한 최초의 민주 항쟁 시작
☞17일: 밤, 11시 40분
중앙청 임시국무회의에서
부산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 선포
☞18일: 오후, 부산대학교
베일속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3공수 여단장 등을 만나서 '초동 강경진압'을 지휘(사실상 실세였음)
☞18일: 저녁, 청와대
(부산 시위 현장을 살펴보고 돌아온)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부마 사태는 민중봉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박통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차지철 경호실장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을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10월 19일 저녁, 마산
당시 고교생이었던 나는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의거 기념탑이 지척에 있는 마산 창동에서 시작된 '유신철폐·독재타도'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다 체포·연행·구금되어 군화발에 짓밟히고 집단 구타를 당하는 등,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국가폭력(state terror)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같은 동네<산호동>에 살던 유치준 씨<당시 51세>는 당시 경찰의 폭력으로 인해 다음 날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20일: 0시를 기해 마산지역에 대한 위수령 선포
☞26일: 궁정동 안가
◐김재규(중앙정보부장)
(오른쪽에 앉아 있던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을 오른손으로 툭 치면서)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
(차지철 실장을 쳐다보며)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차지철을 향해) 탕~
◐차지철
"김부장, 왜 이래? 왜 이래?"
◐김계원
"무슨 짓들이야!"
◐김재규
고향(선산) 선배이자 만주 관동군 선배이며, 유신의 심장인 박통을 향해 다시
탕~탕~
☞이렇게 18년 유신·군부독재가 막을 내렸다.
불과 열흘 전에 시작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수백 명이 연행되고 불법 고문 등의 고초를 겪었던 부·마 민주항쟁은 10·26 사태의 기폭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어진 전두환 신군부의 12·12 군사쿠데타로 인해 근 30년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다행히 부·마 민주항쟁(1979)은 4·19 혁명(1960), 5·18 민중항쟁(1980), 6·10 민주항쟁(1987)과 더불어 우리 현대사를 대표하는 4대 민주항쟁으로 인정받아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나는 국무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의 인터뷰에 이은 6개월간의 증언, 증인, 관련 조사를 거쳐 2020년 12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사망·구속·구금·상해]로 공식 인정되었다.
부마항쟁 당시의 '폭도'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데 41년이 걸린 셈이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는 당시 고교생으로서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증인으로서 사실을 증언하고 싶었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압과 조사 과정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일조하여 역사가 바르게 기록되길 바랄 뿐이다.
한 예로, 당시 조사 과정에서 나를 미리 파놓은 흙구덩이로 끌고 가 "실토하지 않으면 묻어버리겠다"라며 겁박했던 야만적인 조사는 내가 처음으로 증언한 내용이며, 이러한 만행에 대해서는 지금도 조사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국가폭력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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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감자바우 친구 김성남의 스무 살 때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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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로(草露) 김성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