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2학기-마지막 학창시절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서울의 여고생들은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에 수시로 동원된다. 당연히 영우도 이 행사에 동원 됐다. 여학생들은 군인들이 행진하는 타임에 맞춰서 카드섹션을 하는 것이 주요 역할이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앉아서 다양한 종류의 두껍고 큰 색도화지를 들고 앞에서 보내는 신호에 따라 색종이를 바꿔가면서 여러 가지 표현을 하는
응원 행위인데, 반대편 관람석에서 보면 멋있고 신기하다. 그러나 정작 연출을 하는 학생 자신들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뙤약볕 아래서 몇 시간 동안
색종이를 바꿔가면서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연습을 하게 되는데, 그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현기증이 나기도 해서 간혹 쓰러지는 학생도 있게 된다.
학생들이 카드섹션을 연습하는 같은 시간에 군인들도 행진연습을 한다. 간혹 그 모습을 보려고 색도화지를 옆으로 빼고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미는 친구들이 있는데, 앞에서 지휘하는 선생님한테 여지없이 발각이 되어 전체가 혼이 나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의 원망을 듣기도 한다. 다만 휴식 시간을 이용해서 군인들의 멋진 행진 모습을 잠깐씩 볼 수 있는 것이 즐거움이다.
그렇게 반복된 연습을 거쳐서 실수 없이 완벽한 연출을 할 수 있게 되면 국군의 날의 행사에 참여하여 그동안 연습했던 멋지고 화려한 모습을 전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게 된다. 하지만 학생들의 얼굴은 그 누구도 보여질 수 없다. 다만
학생들 스스로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서 해냈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을 얻을 뿐이다.
영우 눈에 군인 복장이 멋있다고 느끼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이곳 여의도 광장에서 펼쳐지는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하여 가까이서 보게 된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군의 날에 참여한 군인들은 전국의 군인들 중에서 키 크고 잘생기고 멋있는 사람들만 차출되어 왔기 때문에 영우의 눈에는 군복 입은 사람은 전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게다.
영우가 다니는 상명여고에 농구부가 있다. 상명여고 농구팀은 전국대회에서 4강에 들어가는 강팀이다. 상대팀과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학교에서 응원을 보내는데, 특히 숭의여고와 경기가 벌어질 때는 응원의 열기가 뜨거웠다. 전국최강 숭의여고에 간판스타 박찬숙 선수가 있다면 상명여고에는 최고의 포워드 최승희 선수가 있다. 두 선수가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최승희 선수는 상명여고 농구의 희망이고 장래 유망주이기 때문에 농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빼놓지 않고 응원을 보낸다.
경기는 주로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지는데, 농구경기 응원을 갈 때면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고 좋아한다. 학생들은 응원단장의 율동에 맞춰서 고고박수를 치고 음률에 맞춰서 응원구호를 외치다 보면 그동안 공부에 지친 정신을 시원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짹짹 고래 짹고리샤 리샤인샤 만샤 샤인샤 만샤 음마이 짹짹 음마이 짹짹!’
‘무스카르 파르채 마르케타 루사카 사라토프 코코차 올림피아 품품푸 아킨도 킨탐포 브이 아이 시티 오 알 와이 빅토리 빅토리 와!’
‘사치기 사치기 사빠빠 사치기 사치기 사빠빠’
영우네 학교 응원구호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건지 내용도 출처도 모른 채 마구
질러대는 소리 같지만 무릎과 손뼉을 번갈아 치며 부르는 구호는 들을수록 재밌고 중독이 된다.
여학생들이 농구응원을 반기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고달픈 공부를 하지 않아서 좋기도 하지만 남자학교 농구선수들의 멋진 경기 장면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영우네 학교 농구시합 시작 전에 응원단은 미리 응원석에 자리를 잡는데 간혹 그 시간에 남자학교 농구시합이 벌어질 경우가 있다. 그러면 반대편석에 응원하고
있는 남자학교 학생들하고 마주 보게 되는데 여학생들은 어느 학교를 정해서 응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가 속한 학교를 응원하게 된다.
여학생들이 유별나게 남자학교 농구경기를 반기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휘문고 응원단과 접촉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휘문고 학생들도 자기네 농구
경기를 응원하러 오는데 휘문고는 하복이 다른 학교 교복하고 다르게 세련돼 보이고 멋있다. 연하늘색 차이나 카라에 목 부분에 흰 줄이 디자인되어 있고, 다른
학교 교복하고는 다르게 허리가 짧고 잠바 같은 스타일이 멋있어 보였다. 여학생들은 단지 교복이 멋있어 보인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휘문고 남학생들과 사귀고 싶어 했다. 당연히 영우도 그 중에 한 명이다.
친구들은 경기중간에 휴식시간이면 체육관 복도로 몰려나와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상형을 표현하는데, 어느 구역에 몇째 줄에 앉아있는 누구누구가 괜찮다느니,
누구는 벌써 임자가 생겼다느니, 친구들은 호기심도 많고 말들도 많았다.
목에 파스를 붙이고 다니던 정미는 휘문고에서 가장 잘생긴 어떤 남학생을 찍어
놨다느니, 자기하고 눈도 마주쳤다느니, 하는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영우의 학창 시절이 이렇게 기대와 희망, 싱싱함과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학교에서나 꼭 한두 명씩은 있을법한 독종선생님이 영우네 학교에도 있었다.
똥피리라고 이름 붙여진 노총각 학생주임 선생님이다. 늘 겨자 씹은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고 매의 눈으로 노려보면서 학생들의 사소한 일탈이나 교칙위반 행동이 보이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없이 마치 장가 못 간 한을 풀려는 듯
야단을 치며 닦달을 해 댔다. 그래서 학생들은 조금의 잘못이라도 똥피리한테 발각되는 날이면 저승사자한테 잡혀가는 심정으로 잔뜩 겁을 집어먹게 마련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똥피리라는 별명을 지었는데, 단지 무서운 존재라서 그런 별명을 지은 것은 아니고, 학생주임 선생님의 외모에서 보여지는 느낌에 상상을 더해서 지어진 별명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우선 40살 노총각이라는 답답한 선입견에 외모에서 풍기는 고리타분한 이미지는 한창 민감한 여학생들의 눈에 좋은 인상을 주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체육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서 몸은 단단해 보일지 몰라도, 검게 탄 얼굴에 옷차림은 거의 매일 츄리닝이 전부이고 머리에 숱이 없어 모자를 꾹 눌러쓴 모습은 정말 최악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학생들이 똥피리 선생님을 비아냥거리며 놀려보려는 의도로 노래도 지어서 불렀다.
똥피리 선생님도 그 노래를 들어서 잘 알고 있는데, 단지 노래를 부르는 것 만으로 학생들을 혼낼 수는 없어서 혼자 씩씩대며 몹시 흥분해하기만 했다. 노랫 말은 불쾌하고 맘에 않들지라도 자주 듣다보니 경쾌하고 발랄한 음률에 스며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흥얼대며 똥피리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개구리 노총각이 살았는데 아하!”
“사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 가. 안 간 건지 못 간 건지 나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과연 똥피리 선생님한테 시집오는 여자는 누구일까? 아니! 장가는 갈 수 있을까?’
국군의 날 행사와 가을 농구대회가 모두 끝나면 본격적으로 대입준비를 위한 워밍업을 하는 시기가 돌아온다. 이제 여고시절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2학년을 마무리하고 겨울방학이 지나면 3학년으로 승급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누구나
분주해지기 시작하고 초조함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깨를 짓누른다.
기말고사를 치른 친구들은 이번 겨울방학이 학창 시절의 마지막 겨울방학이라는
현실에 몹시 아쉬워했다. 영우와 가까이 지내는 반 친구들은 마지막 겨울방학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를 하기로 했다. 물론 주선자는 당연히 리더십의 끝판왕 의숙이고 영우가 준비를 위해 총무를 맡기로 했다. 처음에
의숙이한테 총무 지명을 받았을 때 영우는 못한다고 했는데, 거절의사를 표현하기가 무섭게 친구들은 꼼꼼한 영우가 제격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떠넘기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맡게 되었다. 멤버는 당연히 사군자이고 경기고에서 용주하고 진영이 나머지 두 명의 남학생은 용주가 데려오기로 했다. 장소는 의숙이네 집으로
정했다. 의숙이네 부모님과 다른 가족들은 온양으로 온천여행을 가기로 했단다.
의숙이네 부모님은 자녀들을 믿고 맡기는 이해심이 많은 분이시라 의숙이네 집은
언제나 편하고 부담이 없었다.
친구들이 의숙이네를 파티 장소로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모님이 장소를 흔쾌히 허락해 주신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집에 인켈 전축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티에 전축이 없으면 분위기도 살지 않을뿐더러 흥도 나지 않았다. 확실히 파티에는 전축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인 것은 분명했다. 물론 영우네도 전축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조건이 맞지 않아서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영우는 친구들한테 걷은 회비를 들고 파티준비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용주와 만나 방산시장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캐럴송이 흘러나왔고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용품이 화려한 모습으로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영우와 용주는 크리스마스트리에 필요한 전구와 꽃술, 꼬깔모자, 아기자기한 인형들을 사들고 의숙이네로 향했다. 미리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화려하고 예쁜 트리용품을 보자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모두들 준비된 트리용품을 하나씩 들고 방안에 데코레이션을 했다. 방 천장에는
꽃술과 풍선을 매달았고 방 한가운데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샴페인을 준비했다.
벽면에 장식한 트리에는 작은 전구들이 경쟁적으로 반짝였다.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송은 오늘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파티준비가 끝나갈 즈음 용주의
친구들이 왔다. 얼핏보기에 학생이라고 하기엔 많이 성숙해 보였다.
친구들은 미리부터 준비한 파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게임을 먼저 시작했다. 게임준비는 연배가 맡았는데, 차분한 성격의 연배가 그런거를 잘했다. 숫자 비켜가기, 난센스퀴즈 맞히기, 두 명이 짝이 되어 조그만 쟁반 위에 올라서서 벗어나지
않고 오래 버티기 등등,,, 게임에서 지거나 꼴찌를 하게 되면 당연히 벌칙을 당하거나 노래를 불러야 했다.
분위가 무르익어갈 즈음 누군가 음악을 바꿨고 신나는 팝송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 친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용주가 데려온 남자들이 먼저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어디서 배웠는지 그럴듯하게 몸을 흔들었다. 용주가 영우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지금 친구들이 추는 춤이 요즘 한창 유행하는 고고춤이라고 귓속말로 알려 줬다. 고고춤이 유행인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추는 걸 본 것은 처음이다. 용주 말에 의하면 노는 친구들을 몇 명 알고 지내는데, 그 친구들은 벌써부터 고고장을 드나들며 춤을 춘다는 거였다.
그중에 저 친구도 한명이라는 거다. 저 친구도 살짝 노는 축에 속하는 애라는 것이다.
“너도 노는 애와 어울려?”
영우는 노는 애들은 전부 불량하고 어울리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용주가 걱정이 돼서 물었다.
“노는 애라고 다 불량하지는 않아, 오히려 쟤는 공부도 등수 안에 드는걸,,,”
용주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돼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느새 친구들은 전부 일어나서 몸을 흔들고 있었고 용주와 영우만 앉아 있었다. 친구들의 성화에 영우도 일어나서 친구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몸을 따라 흔들었다. 영우는 오늘 처음으로 고고춤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