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학년도 2학기 문화 ․ 예술 철학 과제물
예술이란 무엇인가? 1-9장 요약
200417872
철학과 고광춘
제 1장
신문을 보면 연극난과 음악난이 있으며, 연극과 오페라 등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사화되어 나온다. 음악과 소설 시 등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나 프랑스, 독일과 영국 등도 예술에 대한 보조금의 규모가 상당하며 대도시라면 예술 활동을 위해 노동자가 배치 되어있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예술에 대한 노력은 사람의 생명까지 희생시킨다. 수십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여러 예술 활동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고 공부함으로써 다른 유익한 사업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술에 종사함으로써 편벽해지고 정상적인 일에 둔감하며 일면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도 문제다. 무용교사는 노동자 열 명의 1년 치 급여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 또한 예술가의 전통이라며 인격을 무시하고 단원들을 혹독하게 다루는 것도 문제다. 노동자가 무거운 짐을 떠받치지 않았다고 해서 야단을 맞는, 건초를 벨 때 풀 더미 쌓는 방식이 틀려 야단을 맞는 것과 단원을 혹독하게 다루는 것은 의미가 틀리다. 이들은 어떤 일을,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지 명확히 설명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가리켜 예술을 위한 활동이라고 한다.
예술뿐만 아니라 비평이라는 것도 모순된다. 여러 유파의 비평가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예술에서 제외한다면 예술 영역은 남는 것이 없게 된다. 신학처럼 예술 유파도 서로 배척하고 부정한다.
결국 예술은 사람들의 노력과 생명을 요구하고, 인간의 애정까지 파괴하면서도, 그 본질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 또한 예술을 애호한다는 사람들도 그 해석이 모순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술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제 2장
어떠한 예술 활동이라도 노동자의 조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술품을 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다. 결국 그 돈은 국민에게서 징수되지만, 국민이 예술에 참여하는 바는 없다. 이처럼 사람들의 노력과 생명을 희생시키고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면서 추구하는 예술은 해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이라 불리는 것이 모두 진정한 예술이고 좋은 것이며, 어떤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예술의 범주도 애매하다. 건축, 조각, 음악, 시만 예술인가? 발레나 오페레타도 예술인가? 발레나 오페레타에 등장하는 인물의 몸과 얼굴을 아름답게 하는 일련의 사람들도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미에 대한 학설 등이 있는데 크랄릭은 주관적 감성에서 싹튼 다섯 가지의 예술이 있다고 본다. 미각예술, 후각예술, 촉각예술, 청각예술, 시각예술이 그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서, 예술의 문제는 모두 미를 예술의 내용이라고만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미신과 종교처럼 태연하게 사용함으로써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삼스레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미라는 말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알려져 있지 않고 분명치 않다.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미학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미’라는 말은 러시아어 ‘krasota’, 즉 눈을 즐겁게 하는 것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러시아 민중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름답다’는 말은 눈을 즐겁게 하는 경우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미’의 개념에는 ‘선’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로서의 미에 관한 학설이 유포되어 있는 프랑스와 독일, 영어와 이탈리아에서는 형식미의 의미 이외에 ‘선’ 또는 ‘친절’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어 ‘좋다’는 말의 대응으로 쓰인다. 이들 나라에서는 ‘형태에 의한 아름다움’이나 ‘보기에 아름다운’과 같은 합성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를 말미암아 러시아인이 유럽식 예술관을 차츰 받아들이게 된 후부터는 위의 나라의 언어처럼 변화 발전된다.
제 3장
바움가르텐은 미에 관하여, 부분 상호의 관계와 부분의 전체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의 일치 이것을 질서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오직 자연 속에서만 미를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모방이 예술의 최고 목적이 된다.
반면, 바움가르텐의 논지와는 다른 의견을 내세운 미학자들도 있는데 대표적인 이들은 줄체르, 멘델스존, 모리츠 등이며 예술의 목적은 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줄체르는 인간 생활의 목적은 사회생활의 복지에 있는 것으로 이 복지는 도덕적 감정을 양성함으로써 달성되며, 예술도 이 목적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상기의 두 분야에 대한 이론은 후세의 미학자들에 의해 지지받지 못하였는데 빙켈만의 미학설이 유명하다. 그는 예술의 사명과 선의 목적을 구별, 예술의 목적을 조형미에 한정했다. 이 같은 학설에 지지한 학자로는 레싱, 헤르더, 괴테 등이 있다. 이 무렵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에는 독일 학자와는 다른 독특한 미학론이 제기된다.
18세기 영국의 섀프츠베리는 미와 선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면서도 미를 선과 융합시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으로 규정짓고 있다. 프랑스의 페리 앙드레는 미를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신성미와 자연미, 인공미가 그것이다. 프랑스 학자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취미란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결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탈리아의 파가노는 예술의 목적을 자연 속에 있는 많은 미를 하나로 통일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런 미를 찾아내는 것이 취미라고 생각했다. 네덜란드의 학자 중 유명한 사람은 헴스테르휴이스는 미를 최대의 쾌락을 주는 것이고, 이것은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최대의 지각을 주는 것이라 보았다. 18세기 이후에 독일에서는 칸트의 미학론이 나타났는데 그는 미의 개념, 예술의 개념을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이상 미와 예술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만으로 이 문제에 관한 학설을 모두 대변할 수는 없다.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등장하나 여전히 애매함과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제 4장
예술의 개념을 포괄하지 못한 미의 정의와, 미를 효용과 합목적성, 균형, 질서, 배합, 원활, 조화, 통일성과 같은 요소의 결합에 있다고 보는 견해와, 불충분한 예술의 개념을 표상하기에 부족한 정의를 논외로 한다면, 미에 관한 미학적 정의는 두 가지의 개념으로 도출된다. 첫 번째는 미란 독립적으로 그 자체 내에 존재하는 어떤 것, 즉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본다. 두 번째는 미란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사적 이익을 갖지 않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라 보는 견해다.
첫 번째 정의의 대표적인 학자는 피히테, 셸링, 헤겔, 쇼펜하우어와 프랑스 철학자인 쿠쟁, 주프루아, 라베송 등이다. 오늘날 교양 있는 사람들은 이들이 내린 미에 관한 정의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매우 광범위하며 전대의 사람들 사이에 유포된 미의 개념이다. 두 번째 정의는 영국 미학자들 사이에서 대두되었고 러시아 사회의 젊은 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미는 신비적이고 고상한 것이라 여겨지지만, 셸링과 헤겔 등의 후계자인 독일과 프랑스 학자들의 학설처럼 매우 애매하여, 철학과 종교 인생까지도 내포된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은 칸트나 그 후계자들의 정의처럼 단지 이해관계를 초월한 특별한 쾌락이라고 본다.
미학의 연구 발전에 관하여 살펴보면, 초기인 미학의 창시기에는 미에 관한 형이상학적 정의가 우세하지만,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경험적 특징을 나타낸다. 현대 사회인들이 예술을 정의하기 위해 주장하고 있는 미의 개념은 주관적 의미에서 일종의 쾌락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쾌락을 느끼는 것이 곧 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미학은 우리가 과학이라 칭하는 지적 활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진정한 미학이 아니다. 이런 미학은 어떤 작품이 우리에게 쾌감을 준다는 이유로 예술로 인정하여 그에 따른 예술 이론을 정립하며, 이런 예술 이론을 바탕으로 어떤 사람에게 쾌감을 주는 작품은 모두 그 이론에 맞추는 것이다. 현행 미학은 일 부 패거리들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예술로 인정하고 나서야 이러한 작품을 두루 포괄할 수 있을 만한 예술의 정의가 고안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무의미함이나 추악함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특히 지금처럼 예술은 과오를 범하지 않게끔 되어 있는 것을 예술 자체가 알고 있을 때 그 폐단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현재 보급되고 있는 예술의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미학서에 서술되고 공중에 의해 널리 공인되어 있는 미를 근본으로 한 예술 이론이란, 결국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된 것이나 현재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좋다고 인정하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수백만 명의 노력이나 인명, 도덕까지도 희생으로 제공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정리하면 여러 미학에서 얻은 예술의 목적은 미이고 그 미는 우리가 거기에서 얻는 쾌락으로써 인정하게 되는 것이며 예술에 의한 쾌락은 훌륭하고 중대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귀착된다. 즉 쾌락은 그것이 쾌락이니까 좋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술의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은 예술의 참다운 정의가 아니고, 현재 있는 예술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트릭이다. 예술이라는 개념의 근본에 미라는 개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제 5장
혼란으로 몰아넣는 미의 개념을 빼놓은 예술은 무엇인가? 실러, 다윈, 스펜서가 주장했던 것처럼 예술이란 이미 동물계에서도 볼 수 있는 성적 감정과 유희 충동에서 일어나는 작용으로, 그랜트 앨런의 말처럼 신경 에너지의 즐거운 흥분이 따르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생리학적, 진화론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가 정확하지 않음은, 그것이 예술의 본질을 이루는 작용 그 자체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예술의 기원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베롱이 주장한 것처럼 예술이란 선, 색, 동작, 음향, 언어로써 인간이 경험하는 기분을 외부에 나타낸다고 할 경우에 경험적 정의라고 보았는데, 이들 정의는 미의 개념에 기초를 둔 형이상학적인 정의 비한다면 우수하나 정확한 것이 못 된다. 이 이유는 인간이 선, 색, 음향, 언어 따위를 빌어 자기 기분을 나타내더라도 이로써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경우에 있어서인데, 그럴 때는 그 나타남이 예술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정의의 부정확함은, 예술의 목적이 거기서 향수하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이나 인류 생활에 있어 예술의 사명을 도외시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예술을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쾌락의 수단으로 보는 방식을 버리고, 인간 생활의 한 조건으로 예술을 검토해야 한다.
사상이나 경험을 전달하는 말이 사람들을 결합하는 수단이 되는 것처럼, 예술도 이와 같은 작용을 한다. 다만 예술이 말과 다른 점은 말로는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생각을 남에게 전달할 뿐이지만, 예술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그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사람이 자기가 경험한 감정을 타인에게 옮길 목적으로 재차 이를 자기 속에 불러일으켜, 일정한 외면적인 부호로 이를 표현할 때 비롯된다. 예를 들면 사람이 실제 또는 공상 속에서 고통의 두려움이나 쾌락의 매력을 경험하여 이 느낌을 표현하고 타인이 그 느낌에 감염되었으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관중이나 청중이 작자가 경험한 것과 같은 느낌에 감염되기만 하면 그것으로 예술이 되는 것이다.
예술은 형이상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라든지 신이라든지 하는 어떤 신비적인 관념의 나타남도 아니고, 생리학적 미학자의 견해처럼 유희도 아니다. 감정의 발로도 아니며, 즐거운 대상을 만들어 내는 일도 아니며, 쾌락도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상호간의 교류 수단이며, 동일한 감정으로 통일하는 수단이다.
인간의 종교적 의식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전해 부분, 즉 사람들은 예술 전체 중에서 이 작은 부분을 예술이라는 전체적 의미로 불러온 것이다. 이런식으로 예술을 보는 사람들은 쾌락을 주기만 하면 어떤 예술이나 다 좋다고 하는 현대의 견해와는 다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불가결한 교류 수단의 하나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제 6장
옛날에는 가까스로 인정받든지 혹은 배척되어 오던 예술이, 현대에 와서 만족만 주면 다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게 된 이유는 인생의 선과 악을 어디에 있다고 보느냐에 달려 있다. 인류는 인생에 대해 낮고 부분적이고 불명료한 이해로부터 높고 전체적이고 명료한 이해로 나아간다. 이 들 중 선구자격인 사람이 표명한 인생의 의미로 인하여 종교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종교는 예나 현재나 인간의 감정을 평가하는 기초가 된다.
종교적 의미로 이 신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나오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좋은 예술, 높은 예술이다. 이와 반하면 그것은 나쁜 예술이 된다. 조상의 전통을 따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특히 초기 기독교는 전설, 전기, 설교, 기도, 찬송가만을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인정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경건한 감정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기독교는 개인적인 쾌락을 위시한 작품은 나쁜 것으로 간주했고, 상징적인 조형미술만 인정하고 이교적인 조형예술은 배척했다. 이 후 이교에 가까운 기독교는 인간의 감정이나 이를 전달하는 예술 작품을 별도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은 맹목적인 신앙을 그 교리의 본질로 갖다 놓았다. 이것은 카톨릭 교리에 대한 경간한 숭배의 마음과 복종, 가책에 대한 공포, 천국에 대한 기대를 전달한 예술은 좋은 것으로 보게 되고, 이에 반하는 것을 나쁜 것으로 보게 되었다.
중세의 예술가들이 민중과 같은 감정의 기초에 의해서 살고, 자기네들이 경험한 감정과 기분을 건축, 조각, 회화, 음악, 극 속에 전달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가였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저급한 것일지라도 역시 민중 전체에 통하는 참다운 예술이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사회의 유력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은 듯해 보이나 권력과 부가 그들에게 있었으며로 그들이 예술을 장려하고 지도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난 예술은 얼마나 쾌락을 주는가에 따라 평가되었다. 결국 종교적 세계관을 가지지 않은 이들에게 좋은 예술인가 나쁜 예술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개인적 쾌락만 남게 되었다.
제 7장
상류 계급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상실하고 나서부터는 미가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재는 척도가 되고, 이 예술관에 호응하여 상류 계급 사이에 자연히 그런 해석을 시인하는 미학 이론이 대두되었다. 이 미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진리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리스 사람들과 현재 적용되는 그 도덕적 이상이 다르기 때문에 독선적인 것이다.
그리스 사상가들은 불교나 기독교가 표명하는 선의 개념에 접근하기 시작하여, 선과 미의 관계를 정하는 데 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오해 속에서 발전된 학문이 미학이다. 이 학문을 시인하기 위해서는 고대인의 예술론까지로 곡해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러한 고대인의 예술론은 우리의 견해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현대의 미학론으로 볼 때는 오히려 모순되어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어느 곳, 어느 때,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선에 부합되면 좋은 예술이고 이에 반하면 나쁜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과 미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일 만큼 도덕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는데도, 18세기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미학이 동일한 관점으로 보이는 것이다. 결국 미학이란 이론은 이전까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미학을 학문적, 이론적인 형태로 꾸며 놓은 창시자가 바움가르텐이다. 이 이론은 근거가 취약함에도 교양인들의 취미에 맞고 환영받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교양인들에게 바움가르텐의 진·선·미의 삼위일체설은 종교상의 삼위일체와 마찬가지고 진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세 가지 관념이 모두 근본적이고 형이상적인 것으로 인정되었으나 그렇지 않다. 선은 우리 생활의 최고 목적이고 도달하기 위한 노력은 신을 향한 부단한 노력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진정한 관념이며 이성으로는 결정지을 수 없다. 미는 우리에 마음에 드는 것으로 선과 반대된다. 미에 골몰하면 선으로 벌어지는 것과 같다. 진은 선과 미와도 일치하지 않고 독립적인 것으로 인정하기도 애매하다. 미나 진의 관념은 선과 일치하지 않다. 진은 선에 이르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진 자체는 선도 미도 아니다. 그리하여 이 세 개의 관념을 하나로 뭉쳐놓은 기초에 의해 세워진 이론은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구별하는 척도가 사라지고, 저급한 쾌락의 예술이 최고의 예술로 여겨지게 되었다.
제 8장
예술이라는 것이 인간이 도달한 최고 최선의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이라면, 쾌락을 주는 예술에 만족해 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예술의 경우 우리는 현대 예술이야말로 참된 예술일 뿐만 아니라 최상의 예술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인류가 어느 시기를 진정한 예술 없이 지내고 쾌락에만 봉사하는 예술을 해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인류 전체가 아니고 유럽 사회의 상류 계급만이었다.
이 결과 그런 예술을 누리던 계급의 타락이 초래되었다. 현대 상류 계급 예술이야말로 진정하고 유일한 전세계적인 예술이라는 그릇된 확신에서 나온다. 우리가 가진 예술이 예술 전체이며 진정하고 유일한 예술인데, 한편으로 인류의 3분의 2를 점하는 민족은 이 최고의 예술을 모른 채 살다가 죽어 간다. 우리는 자신들이 고백한 미학설대로 예술은 최고의 정신적 쾌락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도 유럽의 99퍼센트 사람들은 이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노동만 하다가 죽어 가며, 우리는 이 예술이 정말로 참되고 유일한 예술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라면 이는 만인에 의해 향유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이론에 대해서는 이런 반박을 한다. 지금은 비록 만인이 다 공유하진 못하지만, 이것은 예술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릇된 사회 기구의 탓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 자신조차도 자기 말을 믿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세련된 예술은 대중을 노예로 부리지 않고서는 존속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사회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을 해방한다면 이런 예술은 만들지 못할 것이다.
현대 예술의 옹호자들은 민중 전체가 현대 예술을 만들고 있는 상류 계급 사람들처럼 교양을 갖추면 이것도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당시 부유한 사람들만이 누리던 상태를 계속하기 때문에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예술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딜레마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도덕한 사람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중의 권리를 부정해 버린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솔직하게도 예술은 우리 상류 계급만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예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예술은 그렇게 생각되어 왔으며 또 지금도 그렇게 생각되어진다.
제 9장
유럽 사회 상류 계급의 무신앙은, 인류의 종교적 자각에서 흘러나오는 최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적 활동 대신에 사회 일부 인사에게 최대의 쾌락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즉, 일부 인사에게 쾌락을 주는 것만이 선별되어 예술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곡해는 예술 자체를 악화시켜 거의 파멸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 결과 예술이 그 고유의 무한히 복잡하고 깊은 종교적 내용을 상실한 일이다. 두 번째 결과는, 예술이 좁은 범위의 사함들만을 염두에 두어 형식미를 잃고 조작해 낸 듯한 불명료한 것이 되어 버린 일이다. 세 번째는 예술이 순진한 면을 잃고 머리로 꾸며 낸 까다로운 것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첫 번째 결과가 생긴 이유는, 참다운 예술 작품이란 아직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인간의 삶 속에 새로운 감정을 가져올 경우에만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자각이란, 세계에 대해서 새로이 태어나는 인간의 태도 표시일 뿐 다른 것이 아니므로, 종교적 자각에서 나오는 감정은 무한히 다채롭다. 그러므로 유럽 상류 계급의 무신앙은 내용적으로 가장 빈약한 예술로 그들을 이끌어 가고 말았다. 상류 계급 예술은 종교성을 상실한데다가 민중적인 요소도 버렸기 때문에 그 내용이 더욱 빈곤해지고 예술이 전달하는 감정의 범위도 좁아졌다. 권력 있고 유복한 사람들에 의해 경험되는 감정의 폭이란 근로 대중의 고유의 감정에 비해서 훨씬 좁고 빈약하고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상류 계급의 배타적 예술이 민간 예술에서 분리되어 나가던 최초에 예술의 주요한 내용을 이룬 것은 오만의 감정이었다. 르네상스기와 그 이후의 예술 작품의 주된 제재가 교황이나 국왕, 공후 등 강자의 찬미에 있었던 때도 그랬다. 그 후에 성욕의 요소가 예술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여, 지금에 와서는 부유 계급 예술 작품에서 빠뜨릴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 이 후 삶의 애수로 부유 계급의 예술의 내용을 이루는 제 3감정이 들어오게 되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도 가장 저급한 감정으로 인정되는 육욕이 신시대의 모든 예술 작품의 주요한 대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부유 계급의 무신앙과 이렇게 터무니없는 난잡한 생활의 결과로, 이들 계급의 예술은 그 내용이 빈약해지고 오직 허영과 삶의 애수 그리고 특히 색욕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