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참된 행복과 소유의 올바른 관계를 아시나요?”
인간의 행복과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누가복음12:16-33)
물론 물질의 부요함은 육신의 많은 편리함과 만족함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행복은 물질의 부요함이 기준이 아니라, 영혼의 부요함을 말씀합니다. 영혼의 부요함은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편4:7-8) 탈무드에 보면 누가 진짜 부자인가를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두 사람이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그 지역에서 손꼽는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몹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좀 일찍 도착한 부자가 먼저 랍비의 방에 들어간 뒤 1시간만에 나왔습니다. 그 다음 가난한 사람이 들어가 5분 만에 랍비의 방을 나왔습니다. 그러자 가난한 사람이 항의했습니다. ‘부자와의 상담 시간은 한 시간이고, 왜 나와는 단 5분에 끝나야 합니까? 이래도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랍비는 자상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습니다. ‘오해를 푸십시오. 당신은 자기 스스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곧 알았지만, 부자는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1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석가모니는 2가지의 행복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행복이고, 또 하나는 욕망의 끊음에서 오는 행복인데 석가모니는 욕망의 끊음에서 오는 행복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겼지만 일반인이 이루기 어렵기에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행복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불교 승려는 두가지 불행이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진 불행과, 내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지 못한 불행이라고...
성경은 참된 행복과 소유와의 관계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6:6-10). 또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1:5)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소유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무리 비싼 관상어라 할지라도 물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고 고상한 나무라 할지라도 흙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법입니다. 인간 역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해야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만물의 “창조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순간 죄를 짓게 되었고 그 빈자리를 불행을 가져다주는 사탄이란 존재가 대신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이런 근본적인 것에 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에 뿌리 뽑힌 나무같이, 물 떠난 물고기같이 좋은 육신적인 소유와 정신적인 부를 가져다가 부어도 만족이 없고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세상의 크고 작은 실패를 만났을 때 인간은 세상의 불공평을 탓하며 착하게 살아온 자신을 위로하는 술잔을 권해 보지만 고민과 갈등 속에서 왜 끊임없는 저주와 실패의 쳇바퀴가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찾아오는지 근본적인 해답은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복음(福音)”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당장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멸망과 실패의 근원인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됩니다. 저주와 재앙을 가져다주는 더러운 죄의 사슬, 욕망의 사슬에서 비로소 해방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참 행복과 참 소유의 축복을 누리는 삶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은 하나님 앞에 소중한 사람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10:9-10)
나의 영원한 배경은 무엇입니까?
과연, 없다고 생각하십니까?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기록이 분명히 나오고, 그곳에 누가 가게 되는지 또한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고, 죄를 짓지 않으면 천국에 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죄를 짓고, 안 짓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버린 창세기 3장 사건이후 원죄(原罪)에 빠져 한 사람의 의인도 없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로마서3:10,3:23)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에 가게 되고,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은 사탄(마귀), 귀신의 무리와 함께 어쩔 수 없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3:20)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천국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인간에겐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베드로전서1:9)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즉, ①구원은 과거 문제 해결입니다.(에베소서2:1) 과거의 모든 죄와 허물, 상처가 다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②구원은 현재 문제 해결입니다.(에베소서2:2) 예수 믿으면 죽은 후 천국 가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현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현재 사탄의 손아귀에서, 사주팔자와 운명, 죄의 저주와 재앙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③구원은 내세 문제 해결입니다.(에베소서2:6)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 땅을 떠나는 날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더 이상 지옥의 권세가 나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 구원의 길이 바로 복음(福音)입니다.복음의 내용은 인류의 근본 문제인 죄와 사망과 사탄의 일을 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린도전서15:1-4)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영원히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한복음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요한복음5:24) 천국 시민권을 얻어 그 이름이 천국 호적인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세상의 국가 시민권은 여러 가지 조건이 있지만 천국 시민권은 조건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에베소서2:8)
예수님은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10:2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의 언어 “참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사탄이 인간에게 던진 첫 번째 단어가 ‘참으로(뤼얼리, really)’였다. 외국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중요한 대화속에 들려지는 사실 확인의 용어 ‘뤼얼리’는 우리나라 에서도 ‘진짜?’라는 단어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이아몬드 진짜 보석에는 색깔을 입히는 페인트칠을 하지 않는다. 보석 그 자체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는 틀림없는 진짜이기 때문이다. 진짜, 진본(眞本), 진품(眞品)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는 어센틱(authentic)이다. 사람들이 진짜를 찾는 이유는 그만큼 가짜가 활개를 치고 거짓이 사실처럼 횡행하기 때문이다. 거짓을 포장해서 진짜인 것처럼 속이는 문화가 이제 고도화된 산업화의 바람을 등에 업고 현실에 드러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의 발전속에 딮페이크(AI를 활용하여 인물의 이미지를 합성하는 기술)를 통해 안면 인식기술을 발전시킨 중국의 기술을 활용해 화상통화를 통한 보이스피싱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제 핸드폰에 보여지는 지인의 얼굴도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과연 진실은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지 2023년의 단어로 메리엄-웹스터가 선정한 단어가 어센틱(진짜, authentic)이다. 진실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진정성을 찾는 노력도 가미해야 하는 어려운 시간을 우리는 맞이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에 대한 대중의 갈망이 진짜임을 내세워 신뢰를 얻으려는 노력이 나타나는 반증인 것이다. 이것은 전쟁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진짜와 거짓을 뒤바꾸어 적군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선택을 틀리게 하는 용도로도 사용한다. 인간의 정신적 취약점을 자극해서 불안정하게 하거나 마비시켜서 틀리게 판단하므로 아군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전쟁 개념을 인지전(認知戰-Cognitive Warfare)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골로새서1:15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라고 하였는데 고린도후서4:4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인데 시편8:5에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는 아닌데 그리스도와 같은 영향력을 가진 형상이니 곧 그리스도 적(的)이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적인 형상이다. 몸(body)을 가진 존재인 인간에게만 가능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직분은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첫 인간 아담에게는 이러한 그리스도적 조건이 충분하였다. 선지자(prophet)직의 주된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었다. 선지자를 일컫는 히브리어 ‘나비’는 어원적으로 ‘영감을 받아 말하는 자’ 또는 ‘부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로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골3:10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아담에게는 창세기 2장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지식 곧 그리스도 적 선지자직의 가치가 모두 존재했다. 경작, 지키게 하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 임의로 먹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각 생물의 이름을 지음, 여자라 부름등의 표현은 아담의 선지자직을 보여주는 사실적인 진짜 증거이다. 그런데 사탄이 아담과 한몸인 하와에게 인지전을 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절대 진리의 인간에게 ‘참으로’라는 거짓 단어를 던진 교활하고 간교한 사탄의 한마디는 오늘까지 존재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선지자직을 누리지 못하는 아담은 결국 하나님을 떠났다. 그리스도가 예수로 오시는 그 날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