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신금철
하얗게 센 남편의 머리카락에 빗질을 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싫다는 그의 말을 어기고 내 머리칼에 바르던 염색약이 남아 그의 머리칼에 들이댔다. 점점 하얘지는 그의 머리카락에 늘 마음 한구석이 애잔하다. 은빛 머리칼이 멋있기는 하지만, 그의 노화老化가 안타까워 염색을 권해도 손사래를 치며 마다한다.
그리 완강하던 남편은 한 번만 해보라는 나의 애교에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앞머리와 옆머리에 슬쩍슬쩍 염색약을 바르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행여 색깔이 잘못 나오면 원망을 들을까 봐 조바심이 나서 정해진 시간을 못 채우고 머리를 감으라 했다.
더럭 겁이 났다. 얼룩얼룩 부분 염색이 된 그의 머리칼은 마치 얼룩말의 등처럼 보였다. 나는 얼른 “시니어 모델처럼 멋있어요.”라고 선수를 쳤다. 거울을 본 남편은 멋있다는 내 말이 믿기진 않겠지만 화를 내지도 않아 콩닥거리던 가슴을 쓸어내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우연히 TV를 켜니 시니어 모델들의 활동 모습이 흥미로웠다. 젊은 사람들처럼 자신감이 넘치고 세련된 모습은 아니지만, 런웨이runway를 걸으며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모델들의 모습을 보며 무대 위에 슬그머니 남편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함께 TV를 보던 남편에게 시니어 모델에 도전해보라며 눈치를 살폈다. 남편은 ‘껄걸’ 웃으며 자기 같은 사람도 자격이 되겠냐고 했다.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나의 말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점점 나이 먹어 자신감이 줄어드는 그에게 잠시 위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막상 말을 해놓고 행여 그가 정말 모델의 꿈을 품을까 은근히 걱정되었다. 시니어 모델 도전기挑戰記를 듣는 그의 눈빛이 진지했다.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끈질긴 노력 끝에 꿈을 이루었다는 모델들의 표정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잠시나마 우려했던 나의 걱정은 기우杞憂였고, 모델 이야기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농담으로 끝났다.
모델이란 본보기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나 사물이다. 홍수처럼 새로운 광고 모델이 출시되고 있다. 표지 모델, 의상 모델, 제품 모델 등 경제성을 중시하는 상품 모델은 광고를 통하여 호기심을 자극한 후 최대의 수익효과를 누리는 데 가치를 둔다. 그러나 인물이 모델인 경우에는 외적 가치와 더불어 내적 가치를 함께 지니길 기대한다. 우상처럼 여기던 롤 모델이 내적 가치를 잃는 순간, 모델의 삶 전체가 추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모델에 대한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잣대는 공통의 의미를 지닌다. 상품이든 인물이든 진선미眞善美를 갖추어야 모델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삶을 돌아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삶을 비난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기에 모델의 삶도 모델이 되길 원한다.
대부분 한 사람쯤은 롤 모델을 마음에 두고 있다. 부富, 지위, 업적, 명예를 기준으로 롤 모델을 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생을 올곧게 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신사임당, 신사임당” 어릴 적 개구쟁이 남자 친구들이 부르던 내 별명이다. 감히 내가 신사임당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성이 신씨申氏였기 때문이었다. 신사임당의 존재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줄 몰랐던 시절이라 친구들이 내 별명을 부를 때마다 화를 내고 눈을 흘겼다.
차츰 나이 들면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신사임당만큼 존경받는 여인이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은근히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48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시와 그림 등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 위대한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율곡의 어머니, 지극 정성으로 부모를 섬긴 효녀, 현모양처였던 그분은 나의 롤 모델이 되었다. 물론 나는 그분의 삶에 근접도 못 하는 삶을 살았지만 늘 마음속에 그분처럼 살고 싶고, 그분을 존경하는 마음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다면 그는 반듯한 인생을 살아온 분이다. 삶을 돌아보니 나는 롤 모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불효했고, 직장생활을 핑계로 자식들에게 따뜻한 온기로 품어주지 못해 어미로서도 부족했다. 아내로서, 훌륭한 교사로서, 신자信者로서의 모범도 보이지 못했다.
본보기의 대상이 되는 롤 모델의 길은 쉽지 않으리라. 겉치레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외적인 상품 모델과 달리 많은 이들이 흠모하는 롤 모델의 삶엔 더 많은 땀과 눈물,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또한, 봉사와 희생과 사랑의 실천이 몸에 밴 인품에서 풍기는 사람다운 사람일 것이다.
늙음의 미학 제1장은 ‘비움의 미학美學’이라 했다. 이제 나도 늙음의 미학에 동참 해야 할 때에 다다랐다. 비록 롤 모델의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더 부끄러운 삶이 되지 않도록 노욕老慾을 버리고 자존심도 비우리라. 한적한 곳에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놓여있는 노둣돌처럼 누군가 발돋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볏한 말과 행동으로 분수를 지키며 겸손한 사람, 자명등自明燈을 걸고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며 차오르는 허영심도 다스려야겠지.
얼룩말처럼 변했던 남편의 머리칼은 다시 명주실처럼 하얗게 빛난다.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여 다시는 그에게 염색을 권하지 않는다. 가족들에게 존경받는 남편은 부지런하고, 드레진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사람이다. 소욕지족少欲知足하는 사람이니 ‘가장家長의 모델’로 만족할 것이다.
나는 흠과 티가 많은 사람이다. 누구의 롤 모델이 되기엔 부족했던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며 신사임당에 대한 존경을 마음 깊이 새기고 그분의 삶을 본받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리라.
밤하늘을 수놓는 별 중에는 유난히 반짝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별들도 있지만, 희미하나마 세상을 비추는 데 한 몫을 다하는 무명의 별들이 무수히 많지 않던가….
첫댓글 선생님께서는 제 롤모델이십니다. 선생님 글과 가정과 부군까지도 모두 부럽습니다. 진심으로요.
글을 공개하고보니 계면쩍네요.
회장님과 가까이 지내다보니 너그럽게 봐주시는 거라 위안을 삼습니다.
부족한 제 곁에 회장님이 가까이 있어 든든합니다.
선생님의 꽃수를 놓다도 그렇고
이 글도 그렇고 차분하면서도 굳건한 가족애가 디지털 세대인 요즘에 참으로 귀감이십니다. 안온한 표정도 주위를 편안하게 하구요. 합평할 때 보았지만 다시 봐도 좋네요.
감사합니다.
사유의 반경을 넓히지 못하고 가족에 대한 글로 맴돌고 있네요.
늘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작품을 읽으니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선생님이나 부군이신 교장 선생님이나 이 사회의 모델로 살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작품성도 수필의 한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몇 발자국 뒤에서 살아오면서 무얼 하면서 무엇을 목표로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았는지
돌이켜 볼수록 부끄럽습니다.
배우고 따른다 하면서도 제대로 된 씨앗을 내리지 못한 세월이 한스럽다는 생각입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아프고 또 아프기만 합니다.
선생님,
사랑이 묻어나는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깃든 의미를 깊게 새기겠습니다.
고스란히 삶을 드러내야할 글에 진정성을 위장할 때가 있습니다. 제 삶의 치부를 감추어 미화한 글을 보니 부끄럽습니다.
진솔한 삶과 글로 존경 받는 선생님의 참모습을 본 받고 저 또한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해 부실한 날개에 힘이 생길 때까지 염치없이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금철(수산나) 문득 문득 지난 날이 생각날 때마다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