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노애락을 노복같이 부려 쓸 수 있는가?
이 몸과 마음의 나는 내가 아니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생멸없는 나는 누구인가? 를 자문하면 가장 먼저 올라오는 해답이 놀랍게도 이 몸이 내가 아니라는 자각이다. 처음부터 내가 아닌 것을 태어나서 부터 호적에 올리고 부지런히 공부해서 성공하고 출세해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여기서 내가 아니네? 라는 자각이 올 때 굉장한 당혹감을 느낀다.
그간 부질없는 고생을 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70억 인구가 이 몸을 나로 알고서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일하고 공부하며 싸우고 있다. 지금 우리가 <생멸 없는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을 묻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로또 복권이 문제가 아니다. 이미 이 땅에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났고, 온갖 어려운 삶을 경험하면서 참 나를 찾아서 위대한 질문을 하는 당신이 우리시대 진정한 구도자다.
대종경에 희喜노怒애愛락樂에 대한 두 가지 법문이 있다. 희노애락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때와 곳에 맞게 잘 부려 써라. 그러면서 중도에 어그러지지 않게 하라. 하셨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자신에게 다시 물어야 진리와 하나 될 수 있다. 또한, 범부중생들은 희노애락에 끌려 다니면서 고통하고 사는데 부처님은 희노애락을 노복처럼 부리고 살면서 자신과 남에게 유익을 준다고 하셨다.
우리가 살면서 감정을 사용하는데 희喜는 좋아하고 노怒는 싫어하고 없애려 하거나 참는다. 그러면 무의식에 쌓이고 어느 날 폭발한다. 감정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다. 기쁨과 분노(喜怒)는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누어질 수 없다. 한국인들은 왜 유독 분노를 참으라고 했을까? 자신에게 물어보자.
이조 오백년이 유교의 영향으로 유무식, 남녀노소, 선악귀천, 반상을 나누어 차별하는 시대가 있었다. 화를 내면 상놈이라 하고 시정잡배만 못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서삼경을 공부한 양반들도 살다보면 화가 난다. 그런데 화를 내면 인격이 추락하니까 근엄하게 참았다. 이런 문화가 깔려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참고 쌓아놓는 것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반면에 한국인은 감정을 참고 사는 것이 미덕이 되어서 쌓인 화가 종종 터져 나오니 이것을 <홧병>이라고 이름 지었다. 화가 나도 이를 표현하지 않고 밖으로는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인격자로 여겼다. 결국 위선자로 살았다. 화를 내는 것을 수행이 덜 되었다고 스스로 손가락질을 하며 이를 참고 살았다.
첫댓글 죄송합니다. 지난 주말에 160차 행복한 가족 캠프를
치루느라 깜박 했습니다. 이제야 올립니다.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희노애락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때와 곳에 맞게 잘 부려 써라.
그러면서 중도에 어그러지지 않게 하라. 하셨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자신에게 다시 물어야 진리와 하나 될 수 있다. .>
금신 스승님!
죄송합니다.
행복 캠프에 참여하지 못해서요,
아직도 완쾌 되지 않아 苦鬪 중입니다.
용서를 빕니다.
저는 어느 때나 진리와 하나 될 수 있을까요?
중생의 탈을 언제나 벗을 수 있을까요?
아득하기 짝이 없네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