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선교단 2004년도 <테마가 있는 겨울여행>
1. 일 시: 2004년 2월20일(금)-21일(토) 1박2일
2. 목적과 방향성
(1) 순교자들과의 만남: 개신교 및 천주교 성지를 탐방하면서 믿음을 위해 죽어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직접 돌아보며 복음의 소중함을 새삼 느껴본다.
(2) 자신과의 만남: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자 예배를 인도하는 예배자로서 오늘 어떻게 믿음을 지켜가야 할지를 생각하고 나누며 자기 신앙의 현주소와 방향을 찾는다.
(3) 너와의 만남 : 1박2일간의 시간을 통해 샬롬안에 그 동안 미뤄왔던 이야기들도 나누고 신입단원들과 더 친해지고 서로를 깊이 섬기는 기회로 삼는다.
3. 일 정
구 분 |
2월20일 (금요일) |
2월21일 (토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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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출발 (아침식사대용 간식) |
기상 및 예배 |
10시 도착 |
양화진 방문 (30분설명, 1시간 자유) |
아침식사 (조리) |
12시 |
점심식사 |
전체 자유시간 |
1시 출발 |
충남 해미로 이동 (2시간 +a) |
점심식사 (중간쯤 휴게소?) |
3시경 도착 |
해미읍성과 여숫골 순례 (2시간) |
양지로 이동 |
해미에서 30분거리... |
천송펜션으로 이동 (장보기)
#후발대 합류 |
기독교순교자 기념관 방문 |
6시경 도착 |
저녁식사(직접조리) 및 프로그램 |
기도회 |
서울로 출발 (5시경 서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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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담당: 최성만 총무
*조리 담당: 최태준, 장보기: 유상준^^
맞나? 총무에게 확인하려무나~ㅋㅋ |
저녁식사는 옵션~! |
4. 교통편
-교회 봉고로 이동 (15인승)
-운전: 최승일 전도사, 최성만 총무
5. 예산 (15인 기준)
-식대: 30만
-교통비: 10만
-장소사용료: 15만(대략)
-간식비: 10만
-예비비: 10만(혹시몰라서...)
총액: 75만
*임의로 조금 수정했음....숙소가 변경될 거 같으니....**
6. 성지정보
양화진
http://www.yanghwajin.co.kr
위 치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8
명 칭 : 서울외국인묘지공원
1. 소개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과 그 주변지역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적과 사연이 담겨있는 곳이다.
양화진에 인접한 한강 연안과 잠두봉(蠶頭峰)은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적벽(赤壁)이나 다름없는 절승지지(絶勝之地)라하여 중국의 사신을 비롯하여, 풍류객들이 자주 머물던 풍치절경(風致絶景)의 사적지였다.
그리고 인접하여있는 망원정(望遠亭)은 세종 임금의 형 효령대군과, 성종 임금의 형 월산대군이 별장으로 사용한 수려한 정자가 있는 곳이었다. 동교동의 궁말(궁동)에는 조선조 제2대 정종 임금이 그 아우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으로 이거한 곳이며, 연산군이 연희궁으로 다시 꾸며 놀이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양화진은 예로부터 국가 경영 측면에서 송파진 한강진 과 함께 삼진(三鎭) 중의 하나로 나루터의 구실뿐만 아니라 외침과 민란에 대비하여 상비군이 주둔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양화진(楊花鎭)은 오늘날수도(首都) 방위를 위하여 중앙정부가 한강 연안에 설치한 군사기지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후 양화진은 구한말에 이르러 대원군의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천주교 신자의 목을 자르는 절두산(切頭山)이란 험한 흉터로 변한 수난사건의 현장으로 변하였다.
2. 시설개요
개설허가 : 1893. 10. 24
묘역면적 : 13.224㎡
무덤의 수 : 514기(2001년 10월 현재)
최초의 피장자 : J.W. 헤론
확인된 국적별 묻힌 이 : 미국(235), 백러시아(54), 영국(30), 프랑스(25), 한국(20), 호주(12), 캐나다(7), 스페인(4), 벨기에(4), 덴마크(3), 일본(1)
###감동깊은 비문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B. 헐버트)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R. 아펜젤러)
'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난 안식을 얻었습니다' (G.A.테일러)
'친구를 위하여 저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K.젠슨)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D. 언더우드)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켄드릭)
해미읍성, 여숫골
(태조 왕건 촬영지)
- 3000명 이름 모를 순교자들의 터 www.haemi.or.kr -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진영(사적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년동안 천주교신자들을 무려 3천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까지 수십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외의 수천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옥고 후 옥사하였으며, 충청도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5(을해)년과 1827(정해)년 기간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 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에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를 1천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박취득(라우렌시오)등 수십 명 뿐이다.
한국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http://www.wmc.or.kr/wmck_100y.htm
경기 용인군 추계리 산 84-1
양지에는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순교자 기념관’이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세레교인으로 ‘혹세무민’ 죄로 2년간 옥고 끝에 1893년 순교한 백홍준 장로, 천황숭배를 거부하다 7년간 옥고 끝에 순교한 1944년 순교한 주기철 목사, 6․25당시 교회당을 비우라는 공산당에 맞서다 총살당한 박영근 목사.
조선조 말엽인 1884년 이 땅에 기독교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도하다 숨진 순교자수는 2천6백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초기에는 ‘혹세 무민’ 한다고, 일제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이라며, 6․25때에는 반공산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짓밟힌 들꽃처럼 소리 없이 죽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가 번창하는 나라가 될 수 있었을까.
이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89년 11월 건립된 기독교순교자기념관. 유명 무명의 수많은 순교자들 중 지금까지 알려진 2백2명의 순교자 유물들이 그들이 희생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경기 용인군 추계리 산 84-1.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양지 톨게이트에서 빠져 42번 국도를 타고 이천 방향으로 4㎞가량 더 달리면 그곳이 나온다. 국도 한곁에 순교자기념관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소로로 접어들어 5백여m가량 오르면 큰 바위에 새겨진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니라’는 글귀가 순례자들을 반긴다. 순교자 기념공원의 입구다. 공원을 지나며 전봇대에 적힌 산상수훈의 구절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하얀색의 순교자기념관이 삼나무들 사이로 보인다. 기념관 입구엔 50㎝ 높이 자연석으로 된 ‘순교자기념비’들이 발길을 잡는다. 유족들이 세운 이 비석들엔 순교자의 이름들과 그 밑에 주옥같은 성구들이 적혀 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8). 구절구절 순교자들의 숨결이 느껴지며 가슴이 뜨거워진다.
첫댓글 으아악~~~안돼요~~저23일날 온단 말이에요~~ ㅜ.ㅜ.
음..... 혜란이 누나는 너무 안타까운데... 근데 사진 한개두 안보여요~T^T)zzz
사진은 나중에 다시 링크해 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