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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하게 먹고 강의 잘하자
“올 여름에 그렇게 더웠는데도 세월이 가면 어쩔 수 없어.”
하고 큰스님이 추워진 날씨 이야기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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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이 대봉을 많이 가져오셨다. 회장스님이 ‘힘이 있어 보이고 싱싱해 보인다’고 말한 홍시는 비구니스님들이 절마당에서 약도 뿌리지 않고 길러낸 감이라고 했다.
“아따 이거 나 혼자 먹어도 될까? 욕심이 나는데. 든든하게 먹고 강의 잘하자.”
하고 큰스님이 커다란 홍시 한 개를 맛있게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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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만든 송차를 가져오신 스님은 이제 안거에 들어가니 해제하고 뵙겠다고 인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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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주 좋은 책 나오는데 잘됐네. 법성게 선해.”
하면서 큰스님이 주인에게 꼭 맞춰 돌아가게 된 책을 기뻐하셨다.
책상마다 올려진 <법성게 선해> 책은 큰스님이 대중스님들에게 법공양하신 책이었다.
*
예쁜 색깔로 끈을 꼬아서 금강저로 마무리한 팔찌를 비구니 스님이 자원봉사자들에게 주셨다. 산에 오를 때 완주를 다짐하며 손목마다 묶어주는 등산용 끈으로 만든 팔찌였다. 바즈라라고도 하는 ‘번뇌를 다 물리친다’는 작은 금강저를 보살님들이 모두 좋아하셨다.
*
전에 수염을 아주 길게 길렀던 스님이 절을 하고 나가시자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여기 오래 다니면 평범해져. 그런 것 같지? 정상적인 궤도로 들어서는 거야. 사람이 결국 정상적으로 사는 거야.”
큰스님은 사람들 얼굴을 잘 기억 못하시는데 이 스님이 수염을 깎으신 다음에는 항상 볼 때마다 기억하셨다.
*
용학스님과 함께 오신 비구니스님이 붉은 비단으로 싼 화엄경 사경집을 가져오셨다. 변상도도 확대해서 직접 그려넣으시고 노란 비단과 붉은 줄로 만든 책 제본도 단단했다. 큰스님은 화엄경 사경본을 열어보고 감탄하신 다음 말을 잇지 못하셨다.
마산 종문사에 모신 응찬스님이 20여년 전 운문사 학인 화엄반일 때 쓰기 시작한 사경집이라고 하는데 ‘인쇄한 것 같다’고 모두들 찬탄하셨다.
그동안 이 사경집에 대해서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마침 그 절에 가신 용학스님이 강의를 마치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으셔서 처음으로 대중앞에 풀어보게 된 사경집이라고 했다.
“절은 작은데 사람이 꽉차고.” 하면서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용학스님의 영상을 다 보고 있다고 전에도 말씀하신 큰스님은 영상으로 먼저 이 사경집을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응찬스님에게 화엄경강설집 한질을 선물로 보냈다고 하셨다.
“경전의 뜻을 알고 싶어서 민족사에서 나온 큰스님 열 권짜리 화엄경을 보면서 사경했습니다.” 하고 응찬스님이 큰스님을 뵈면서 말씀하셨다.
“이게 전부 신심으로 이렇게 되는 거야.”
하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야무지지예?”
하고 물으시는 용학스님에게 큰스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하셨다.
“처음부터 글씨를 잘 써야 이렇게 쓸 수 있겠지요?”
하고 여쭤봤더니 큰스님은 쓰다보면 알게 된다고 하시면서 염화실 사경반 진여화님의 예를 드셨다.
“여기 우리 진여화라고 있잖아. 처음엔 괴발개발 하더니 지금은 잘해.”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본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 56권 이세간품 4를 점안하겠다.
서문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힘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깊은 마음의 힘이니
모든 세상의 정(情)에 섞이지 않은 연고이니라.
더 올라가는 깊은 마음의 힘이니
모든 불법을 버리지 않는 연고이니라.
방편의 힘이니
모든 짓는 일을 성취[究竟]하는 연고이니라.
지혜의 힘이니 일체 마음의 행을 아는 연고이니라.
원하는 힘이니
모든 구하는 바를 만족케 하는 연고이니라.
실천하는[行] 힘이니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끊어지지 않는 연고이니라.
올라타는 힘[乘力]이니
모든 탈 것을 내지마는 대승을 버리지 않는 연고이니라.
신통변화의 힘이니 낱낱 모공 속에서
모든 청정한 세계와 일체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을
각각 나타내는 연고이니라.
보리의 힘이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하고 성불하여 끊어짐이 없게 하는 연고이니라.
법륜을 굴리는 힘이니 한 구절의 법을 말하여도
일체 중생의 모든 근성과 욕망에 맞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일체 지혜의 열 가지 힘을 얻느니라.
2017년 3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오랫동안 부처님 법이 전해졌다. 2600여년이 지난 이 시대에까지 우리가 눈으로 귀로 마음속으로 생활 속으로 불법을 만나는 것은 부처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아서 뒷사람들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다해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불법을 널리 전해야겠다는 신심이 우러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알듯이 열반경에는 한 게송을 듣는 것에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듣는 설산동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설산동자는 많은 사람들이 그 게송을 다 보도록 하려고 벽에다 쓰고 나서 나찰에게 몸을 바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불교 경전의 말씀을 생각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은 별 것 아닌 내용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모두가 생멸하는 법이다. 일체 것은 전부 무상하고 끊임없이 생멸 생멸 생멸을 반복하는 법이다’
그 한 마디에 설산동자는 몸을 바치고 싶은 감동을 받은 것이다.
내가 지난 달에 명구집을 나눠드렸는데 법안스님이 읽다가 마음에 감동이 되는 구절을 이렇게 손수 써서 복사를 하고 여러 스님들에게 나누었다.
우리들도 모두 책을 다 가지고 있고 다 아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어느 순간 어떤 구절이 가슴을 꽝 울릴 때 그야말로 뭔가 마음에 우러나는 것이 있고 지혜의 눈이 열리고 ‘부처님 법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작은 일 같고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이것도 참 높이 살 만한 중요한 신행생활 중의 하나다. 자기 신심을 표현하는 내용 중에 특별히 이야기 할 만한 것이다.
나는 1988년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범어사에서 ‘일지경(一紙經)’이라고 하는 딱 이정도 되는 ‘한 종이 경전’을 만들었다.
부처님 말씀 중에 내가 또 감동 받은 내용들을 옮겨서 한 번 찍을 때 5천장씩 찍어서 범어사 일주문에 쌓아 놓고 누구든지 가져가게 했다. 새삼 그런 생각이 난다.
오늘 화엄경 강의 내용에도 법시가 나온다. 법을 보시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평생 그렇게 사셨고 또 그것으로써 오늘날 이렇게까지 우리들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불교가 자손만대에까지 전해진다. 오직 법시 덕분이다. 법을 보시하는 일뿐이다. 그런 이야기가 또 우리 강의 중에 나온다.
간혹 사구게라 해서 어떤 경전 속에서 말하자면 유의를 해서 읽어야할 내용들이 물론 있다. 그러나 법시를 하는 구절이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절에 얼마나 우리가 감동을 받고 마음을 담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二
十廻向品 第二十五之十
12, 第十等法界無量廻向
오늘은 346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刊) 위에서 여섯 번째 줄을 할 차례다.
열가지 회향중에 마지막 회향인 제십등법계무량회향(第十等法界無量廻向), 법계와 같이 한량없는 회향이다. 법계는 한량이 없다.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라. 함중묘이유여(含衆妙而有餘)하고 초언사이형출자(超言思而迥出者)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결국은 말과 생각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언사를 초월해서 멀리 벗어나는 것은 기유법계여(其唯法界歟)오직 법계뿐이다.
근사한 표현이다. 법계를 한마디로 그렇게 표현한다.
법계(法界)라는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
정신적인 것 물질 적인 것 육체적인 것 유정 무정 작은 먼지에서부터 저 멀리 태양의 몇 만 배 되는 별들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것들도 법계라는 말속에 다 포함된다.
(8) 知法界願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又以諸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如法界無起性廻向과 如法界根本性廻向과 如法界自體性廻向과 如法界無依性廻向과 如法界無忘失性廻向과 如法界空無性廻向과 如法界寂靜性廻向과 如法界無處所性廻向과 如法界無遷動性廻向과 如法界無差別性廻向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또 모든 선근으로 이와같이 회향하느니라.
이른바 법계의 일어남이 없는 성품과 같이 회향하며, 법계의 근본 성품과 같이 회향하며, 법계의 자체의 성품과 같이 회향하며, 법계의 의지함이 없는 성품과 같이 회향하며, 법계의 잊어버림이 없는 성품과 같이 회향하느니라.
법계의 공(空)하여 없는 성품과 같이 회향하며, 법계의 고요한 성품과 같이 회향하며, 법계의 처소가 없는 성품과 같이 회향하며, 법계의 변동이 없는 성품과 같이 회향하며, 법계의 차별이 없는 성품과 같이 회향하느니라.”
*
지법계원(知法界願): 법계를 알기를 원하다
*
법계와 같은 한량없는 회향 중에서 지법계원, 법계를 아는 원이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우이제선근(又以諸善根)으로: 또 모든 선근으로써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이와 같이 회향하나니
소위여법계무기성회향(所謂如法界無起性廻向)과 : 소위 법계는 기멸이 없는 성품이다. 법계는 늘 그 자리에 있다. 물론 그 안에서 온갖 기멸이 다 있다. 법계는 왕복이 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정은 일원이다. 한 근원인 법계의 근본자리에서 보면 법계는 무기성이다. 무기무멸이다.
어느 한 순간만 보고 어느 한 단면만 볼 때는 틀림없이 기와 멸과 생과 멸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조금 더 한 눈을 뜨고 보면 기멸 생멸이 없는 것이다.
달이 찼다 기울었다, 기울었다 찼다 하지만 달 자체는 차고 기우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태양빛을 제대로 받을 때는 만월이 되고 지구에 가려져서 태양빛을 받지 못할 때는 그믐이 된다. 그러나 달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와 같은 법계의 무기성과 같은 회향과
여법계근본성회향(如法界根本性廻向)과 : 법계와 같은 근본성품 그런 회향과
여법계자체성회향(如法界自體性廻向)과: 법계의 자체와 같은 회향
여법계무의성회향(如法界無依性廻向)과 : 법계가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것이다. 법계 안에서는 의지함도 있고 의지함이 없기도 하지만 법계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무의성이다.
여법계무망실성회향(如法界無忘失性廻向)과 : 법계 무망실성 회향과, 우리는 끊임없이 망실이 있고 그것을 경험하지만 법계 그 자체는 무망실성이다. 망실이 없는 성품이다. 앞에서 진여상회향을 우리가 공부했는데 거기에도 아주 대단한 표현들이 있었다. 최소한도 선근회향을 그 정도 해야된다는 뜻이다.
여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법계와 같은 회향을 해야 된다는 표현이다.
*
여법계공무성회향(如法界空無性廻向)과: 법계는 공무성(空無性), 공해서 성품이 없는 회향이다. 그런 것과 같은 회향과
여법계적정성회향(如法界寂靜性廻向)과: 법계는 적정하다. 물론 그 안에서는 온갖 희로애락과 춘하추동과 천변만화의 모습들이 있지만 법계 그 자체는 적정성이다. 법계의 적정성과 같은 회향과
여법계무처소성회향(如法界無處所性廻向)과: 법계의 무처소성 회향과 법계는 어느 처소라고 딱 지적해서 말할 수 없다. 법계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무처소성회향과
여법계무천동성회향(如法界無遷動性廻向)과 : 법계는 옮기고 움직이는 것이 없는 성품이다. 당연히 법계는 무천동성 회향과
여법계무차별성회향(如法界無差別性廻向)이니라 : 법계의 무차별성회향과 법계의 차별이 없는 성품과 같은 회향이니라.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써 법계의 속성을 우리가 잘 알 수가 있다
(9) 一切衆生法師願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復以法施의 所有宣示와 所有開悟와 及因此起한 一切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願一切衆生이 成菩薩法師하야 常爲諸佛之所護念하며 願一切衆生이 作無上法師하야 方便安立一切衆生於一切智하며 願一切衆生이 作無屈法師하야 一切問難으로 莫能窮盡하며 願一切衆生이 作無礙法師하야 得一切法無礙光明하며 願一切衆生이 作智藏法師하야 能善巧說一切佛法하며 願一切衆生이 成諸如來自在法師하야 善能分別如來智慧하며 願一切衆生이 作如眼法師하야 說如實法不由他敎하며 願一切衆生이 作憶持一切佛法法師하야 如理演說하야 不違句義하며 願一切衆生이 作修行無相道法師하야 以諸妙相으로 而自莊嚴하고 放無量光하야 善入諸法하며 願一切衆生이 作大身法師하야 其身이 普遍一切國土하야 興大法雲하야 雨諸佛法하며 願一切衆生이 作護法藏法師하야 建無勝幢하야 護諸佛法하야 令正法海로 無所缺減하며 願一切衆生이 作一切法日法師하야 得佛辯才하야 巧說諸法하며 願一切衆生이 作妙音方便法師하야 善說無邊法界之藏하며 願一切衆生이 作到法彼岸法師하야 以智神通으로 開正法藏하며 願一切衆生이 作安住正法法師하야 演說如來究竟智慧하며 願一切衆生이 作了達諸法法師하야 能說無量無盡功德하며 願一切衆生이 作不誑世間法師하야 能以方便으로 令入實際하며 願一切衆生이 作破諸魔衆法師하야 善能覺知一切魔業하며 願一切衆生이 作諸佛所攝受法師하야 離我我所攝受之心하며 願一切衆生이 作安隱一切世間法師하야 成就菩薩說法願力이니라
“불자들이여,보살마하살이 다시 법을 보시하는 것으로써 펴서 보이고, 깨우쳐 주고, 또 그것으로 생긴 모든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느니라.
이른바 ‘원컨대 일체 중생이 보살법사(菩薩法師)가 되어 항상 모든 부처님의 호념(護念)하심이 되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가장 높은 법사가 되어 일체 중생을 온갖 지혜에 나란히 있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굽히지 않는 법사가 되어 모든 문난(問難)에 막힘이 없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걸림이 없는 법사가 되어 일체법에 걸림이 없는 광명을 얻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지혜의 장[智藏]인 법사가 되어 모든 부처님의 법을 교묘하게 설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여래의 자재한 법사가 되어 여래의 지혜를 잘 분별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밝은 눈과 같은 [如眼]법사가 되어 실상과 같은 법을 말하되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불법(佛法)을 기억하여 가지는 법사가 되어 이치대로 연설하되 구절과 뜻을 어기지 않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형상이 없는 도(道)를 수행하는 법사가 되어 여러 가지 묘한 모습으로 스스로 장엄하고 한량없는 광명을 놓아 모든 법에 잘 들어가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몸이 큰 법사가 되어 그 몸이 모든 국토에 두루 하여 큰 법의 구름을 일으켜 불법의 비를 내려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법장(法藏)을 보호하는 법사가 되어 이길 이가 없는 깃발을 세우고 모든 불법을 보호하여 바른 법으로 하여금 이지러짐이 없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법의 태양[法日]인 법사가 되어 부처님의 변재를 얻어 모든 법을 잘 연설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아름다운 음성의 방편인 법사가 되어 끝이 없는 법계의 곳집을 잘 설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법의 저 언덕에 이른 법사가 되어 지혜의 신통으로 정법의 창고를 열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바른 법에 편안히 머무는 법사가 되어 여래의 구경(究竟)의 지혜를 연설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법을 통달한 법사가 되어 무량하고 무진한 공덕을 능히 설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세간을 속이지 않는 법사가 되어 능히 방편으로써 실제에 들어가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마군을 깨뜨리는 법사가 되어 모든 마군의 업을 능히 잘 깨달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부처님이 거두어 주시는 법사가 되어 나와 나의 것에 섭수되는 마음을 여의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모든 세간을 편안케 하는 법사가 되어 보살의 설법하는 원력을 성취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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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중생법사원(一切衆生法師願) : 일체 중생이 법사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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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강의를 예습할 때 중요한 내용이다 싶어서 ‘내가 좀 힘주어서 설명을 해야지’ 싶으면 별을 친다. 처음에 하나 치고, 그 다음에 또 한 번 읽다가 또 마음에 들면 두 개 치고 어떨 때는 한 번 읽고 두 개 치기도 하고 세 개 치기도 하고 그렇게 늘 별을 치는데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보니 이 대목에는 별이 다섯 개가 붙었다.
나의 개인적인 소견이기는 하지만 ‘일체중생법사원(一切衆生法師願)’이라고 하는 이 제목 아래 내가 별을 다섯 개 달아놓았으니 좀 유의해서 살펴보자.
부처님의 소원은 무엇인가? 보살의 소원은 무엇인가?
불보살의 소원이 바로 이 단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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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부이법시(復以法施)의 : 다시 법시, 법을 보시하는 일, 법을 펴는 일, 법을 공양 올리는 일, 법공양이다.
비록 작은 활동이지만 나는 법공양실을 만들어 놓고 인연닿고 힘닿는 데까지 법공양을 해오고 있다. 일지경부터 법공양을 시작한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근래는 그 범위도 달라졌고 법공양을 만들어 내는 기술도 달라졌다. 복도 많이 쌓여서 책도 엄청 많이 찍고 있다. 오늘도 부산대학교 불교 법당에서 와서 책을 가져가고 여러 스님들도 가져가서 신도들에게 나누고 인연 있는 도반들에게 나눈다. 얼마나 심부름을 많이 하는지 모른다. 그것도 법시의 한 부분이다. 갖다 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걸 받아서 사경을 하든지 읽는다든지 하는 것이다.
소유선시(所有宣示)와: 소유선시와
소유개오(所有開悟)와: 소유개오, 이것은 법시의 기능이다.
법공양 책, 사경책을 한 권 갖다 주는 것은 아주 미미한 법공양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뭔가 가르쳐 보이는 것이 있다. 소유선시다. 그 속에 선시하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얼마만치 많이 이해하고 지혜의 눈이 열리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지식과 경험과 지혜에 따라서 물론 각자의 몫이지만 그 속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 있고 그다음에 소유개오 깨닫는 것이 있다. 이것이 법시의 기능이다.
금강경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보통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해석을 한다. 육조스님이 이 구절로 깨달음을 얻었고, 우리 전통 불교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구절이다.
내가 어릴 때 오대산 상원사 선방에 갔더니 이 글귀가 걸려있었다. 아무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는 선방이라고 해도 최소한 그 구절만은 숭상하고 살자는 구절이다.
요즘에 어떤 스님이 이 구절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내가 깜짝 놀라서 며칠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이해하려고 해 봤다.
응(應), 응대한다, 만난다, 누가 부르면 ‘응답한다’고 할 때 그 응(應)자다.
응자에 ‘응당,반드시’ 라는 의미가 물론 있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해석이다.
이 스님은 ‘무엇을 응하느냐’ ‘무소주(無所住)를 응한다’고 하였다.
응(應) 무소주(無所住), 무소주를 응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 그 마음을 낸다.
그 마음이 무엇인가? 일체 것이 무소주다. 어느 것도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다 흘러가고 변해간다.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다. 끊임없이 변해가고 흘러가는 것을 우리는 상대하고 있다. 사람도 그렇고 춘하추동 계절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감정도 그렇다. 모두 무소주다. 끊임없이 무소주를 우리는 상대하고 있다. 근사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소주하는 마음을 낸다’ 내 마음도 무소주다. 머무는 바가 없고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스님은 ‘무소주하는 마음을 낸다’고 해석을 했다.
내가 그것을 듣고는 ‘근사한 해석이다. 상당히 일리 있는 해석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어떤 법시든 간에 법시, 법보시에는 선시 펼쳐보이는 것이 있고 거기에서 나름대로 깨닫는 것이 있다. 개오하는 바가 있고 느끼는 바가 있다.
모두가 다 같이 받은 책이지만 오늘 일지경을 만들어 온 법안스님은 여기서 느끼는 바가 있는 것이다. 책을 선시해서 펼쳐 보였으니까 스스로 읽고 여기서 느낌이 있는 것이다.개오한 바가 있다. 그 나름대로 감동이 있고 느낌이 있고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이 법시의 기능이다. 우리가 이것에 유의해야 된다. 그래서 내가 별을 다섯 개 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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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인차기(及因此起)한 : 이것으로 인해서 법시로 인해서, 법은 펼쳐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책을 놓고 공부하는 것은 선시(宣示)다. 여러분들이 거기에 감동이 있는 것은 개오(開悟)다. 끊임없이 이것의 반복이다.
어디에 가서 강의를 하든지 법문을 하든지 간에 사실은 이것이 전부다.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염불을 했다. 의식을 하는데 염불을 했다 하면 염불을 해보이는 것은 선시이고 거기에서 나름대로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개오다.
일체선근(一切善根)으로 : 이것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체 선근으로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여시회향한다.
그 관계 속에서 선근이 있다. 거기에서 마음에 감동이 있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 문제는 오늘로부터 이렇게 바꿔서 살아야되겠다’ 고 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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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원일체중생(所謂願一切衆生)이 : 소위 원일체중생이
성보살법사(成菩薩法師)하야 : 성보살법사하야
상위제불지소호념(常爲諸佛之所護念)하며 : 상위제불지 소호념하며. 법시를 통해서 선시와 개오가 이루어지는데 거기에서 그 나름의 선근이 생겼고 선근이 생겼을 때는 그 선근을 가지고 어떻게 회향하느냐?
일체 중생이 보살법사가 되어서 항상 모든 부처님의 호념하는 바가 되기를 원한다.
모든 중생들이 내가 이렇게 한 시간 강의를 듣고 감동을 받았듯이 또 경을 읽다가 한구절에서 감동을 받았던지 육조스님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구절에서 마음이 열렸든지 간에 그것으로써 보살법사가 되어서 모든 부처님의 호념하는 바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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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원일체 중생이
작무상법사(作無上法師)하야: 무상법사가 되어서, 무상법사는 가장 높은 법사다. 일체 중생이 모두 가장 높은 법사가 되어서
방편안립일체중생어일체지(方便安立一切衆生於一切智)하며 : 방편으로 일체 중생을 일체 지혜에 안립시키기를 원하며 안립(安立) 안존(安存) 안좌(安坐)는 전부 같은 뜻이다.
안립은 안존한다, 그 가운데 딱 자리를 잡는다. 말하자면 어떤 위치를 차지한다는 의미도 되겠다.
모든 중생들이 보살 법사가 되었으면 무상법사가 되었으면 그래서 일체 중생이 일체지에 안립하기를 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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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원일체중생이
작무굴법사(作無屈法師)하야: 굴복함이 없는, 굴함이 없는 법사가 되어서
일체문난(一切問難)으로 : 일체 문난에, 이런 질문도 있을 수가 있고 저런 질문도 있을 수가 있고 배 아파서 따지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들거나 소견이 달라서 얼마든지 질문이 있을 수가 있다.
이 자리는 누구하나 질문도 안하고 대답도 않고 질문 관계가 없는데 사람이 많기 때문에 개인적인 질문을 다 받아주다 보면 강의가 연결이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차단한 상태에서 개인적으로 꼭 질문할 것이 있으면 메모해서 종이로 질문하라고 해 놓았다.
그런데 무굴법사란 것은 무엇이냐, 누가 어떤 경우로 인해서 묻더라도
막능궁진(莫能窮盡)하며 : 막능궁진이다. 대답이 부족하거나 지식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대답이나 지식이 딸리거나 하는 것이 없다. 딸리지 않기를 원한다. 중요하다.
예를 들어서 법사가 되어서 법문하다 보면 별별 질문이나 힐난도 있을 수가 있다. 무굴법사라는 것은 거기에 전혀 굴하지 않는 아주 당당한 법사를 말한다.
어떤 질문에도 다 대답해줄 수 있는 법사 그런 법사가 되었으면 모든 중생들이 이 화엄경과 인연을 맺은 모든 중생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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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작무애법사(作無礙法師)하야 : 걸림없는 법사가 되어서
득일법무애광명(得一切法無礙光明)하며: 일체법에 대해서 걸림없는 광명 얻기를 원하며 무애법사 무굴법사 무상법사 보살법사 다 좋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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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원일체 중생이
작지장법사(作智藏法師)하야: 작지장법사가 되어서 지혜가 꽉 차 있는 지혜창고의 법사 지장법사 참 좋은 표현이다. 지장법사가 되어서
능선교설일체불법(能善巧說一切佛法)하며: 어떤 불법도 예를 들어서 소승교면 소승교 금강경이면 금강경 선법문이면 선법문 일체 불법을 아주 잘 능숙하게 이야기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부처님 앞에 밥은 내려 먹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을 우리 어릴 때 많이 들어왔다.
‘아무리 니가 잘났어도 부처님 앞에 밥 내려먹는 것은 기본이다’라는 말이다.
스님들이 아무리 참선을 하고 경을 강의한다 하더라도 천수경 외우고 49재하고 불공하는 의식은 일단 외우고 잘 마스터 하고 나서 그다음에 참선을 하던지 경을 공부하던지 해야된다고 경고하는 말이다.
‘부처님 앞에 밥은 내려 먹을 줄 알고 법사가 되든지 뭐가 되든지 해야 된다’ 어른들의 좋은 표현이다. 그런데 요즘은 밥 내려 먹을 줄 모르는 스님들이 많다. 나도 거기에 허점이 많지만 능선교설일체불법(能善巧說一切佛法)에 이런 것도 다 포함이 된다. 나는 법화경 화엄경 금강경 이런 것만 좋아해서 그 외 것은 어둡다. 특히 유식은 관응스님한테 몇 번 배웠지만 워낙 교리가 복잡하고 딱딱해서 어둔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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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원일체중생이
성제여래자재법사(成諸如來自在法師)하야 : 모든 여래와 같은 자재한 법사가 되어서
선능분별여래지혜(善能分別如來智慧)하며 : 여래의 지혜를 잘 능히 분별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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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작여안법사(作如眼法師)하야 : 눈과 같은 법사가 되어서,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다.
설여실법불유타교(說如實法不由他敎)하며 : 여실한 법을 설하되 불유타교 하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고 결국은 자기 스스로 또 자기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이뤄서 어떤 이치에 맞춰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
이치를 도외시하고 글만 외워서 ‘부처님 말씀이 그렇다’ 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막힌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고 자기 내면에서 어떤 지혜에 의한 안목으로 남을 가르칠 수가 있어야 된다. 여안법사라고 했는데 자기 눈으로 자기가 세상을 보지 남의 눈을 빌려서 보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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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원일체중생이
작억지일체불법법사(作憶持一切佛法法師)하야 : 일체의 불법을 다 기억해서 가지는 법사가 된다.
지금 불교의 역사가 얼마나 긴가, 그동안 일어났던 온갖 조사스님들의 감동적인 사건들이나 그 만남들 그 대화들 그런 인연들 그런 것들을 다 기억해서 가진다. 경전에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전까지도 다 기억해 가져서
여리연설(如理演說)하야 : 이치와 같이 연설해서
불위구의(不違句義)하며 : 불위 구의하기를 원한다. 구절과 그 구절의 의미를 어기지 않기를 원한다.
청량스님 소초를 보다 보면 수많은 경전과 논서들 그런 것들을 다 그 화엄경 구절의 적절한 뜻이 있으면 전부 인용해서 거기에 딱딱 맞춰서 설명을 보태 나간다. 그런 것이 참 중요하다. 여러분들도 법문할 때 순박하게 경문 구절만 가지고 설명하면 신심도 나고 순수하고 좋긴 좋다. 그러나 간혹 한 번씩은 그 뜻을 부연설명 하고, 뜻을 이해하기 좋은 다른 경전의 말씀이나 다른 예화 같은 것들을 적절하게 잘 이용할 줄 알아야 된다.
어떤 스님들은 또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가지 치다가 볼 일 다보는 스님도 있다. 구절 하나가지고 가지치면 그 구절에서 또 비슷한 것을 인용하고 거기서 또 인용하고 또 인용을 해서 계속 가지를 쳐 나가다가 나중에는 ‘내가 뭐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왔지?’ 이럴 때가 가끔 있다. 여러분도 그런 경우가 더러 있을 테지만 법문할 때 너무 그렇게 하면 안된다. 지나쳐도 안되고 너무 순수하게 하면 맛이 없다. 가끔 양념을 쳐야 된다. 또 너무 많이 양념을 쳐서 본래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참 불교에는 주문이 많다. 제대로 하려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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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원일체중생이
작수행무상도법사(作修行無相道法師)하야 : 무상도를 수행하는 법사가 되어서
이제묘상(以諸妙相)으로 : 여러 가지 미묘한 상으로 무상도를 수행하는 법사가 되어야 되는데 왜 여기는 묘상이라고 했다. 무상이라야 묘상 아름다운 상이 되는 것이다.
제묘상 아름다운 상으로써
이자장엄(而自莊嚴)하고 : 스스로 장엄하고
방무량광(放無量光)하야 : 한량없는 광명을 놓아서
선입제법(善入諸法)하며 : 모든 법에 잘 들어가기를 원한다.
아주 의미심장한 내용인데 잘 음미해 보길 바란다.
무상도를 수행하는 법사가 되어서 모든 묘한 상으로써 스스로 장엄해서 한량없는 광명을 놓아서 모든 법에 잘 들어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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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원일체중생이
작대신법사(作大身法師)하야 : 대신법사가 되어서 대신법사도 중요한 말이다.
몸이 수미산만하고 금정산만하고 다른 사람보다 몸이 세 배 네 배 되고 그런 것이 대신 법사가 아니다.
기신(其身)이 : 그 몸이
보변일체국토(普遍一切國土)하야 : 일체 국토에 두루해서
흥대법운(興大法雲)하야 : 큰 법의 구름을 일으켜서
우제불법(雨諸佛法)하며 : 모든 불법을 비내리기를 원한다.
내가 거기 주(註)를 ‘방송’이라고 달아 놓았다. 요즘 방송이라고 하는 매체, 인터넷이라고 하는 매체, 유튜브라고 하는 매체, 까페 또 홈페이지 등등 그런 것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대신법사가 가능하다. 어떤 스님은 전국에 현수막이 지금 세 곳인가 네 곳에 걸려있다고 한다. 서울에도 초청을 받아서 어느 절에 현수막이 몇 달 걸려 있고 또 광주나 어디 다른 도시에도 현수막이 걸려있고 마산에도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런 것이 대신 법사다. 일체 국토에 두루한다. 방송이라든지 인터넷, 유튜브를 활용하는 것이 전세계에서 다 보고 다 들을 수 있는 더 큰 몸을 가진 법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법운을 일으켜서 제불법을 비내리기를 원한다. 가능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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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만불사는 지금 한 10만평 가까운 땅을 확보해서 큰 절이 되었는데 그렇게 크게 하기 전에 서울에도 포교당이 있었고 대구와 부산에도 포교당이 있었다.
내가 초기에 다니면서 법문해달라고 할 때 대구에서도 해주고 서울이나 부산에서도 해주었다. 그 스님은 부산에서 법문을 하면 신문에 소위 ‘찌라시’라고 하는 간지(間紙)를 동래나 금정구 최소한 두 개 구에 수 만장을 찍어서 넣었다.
“이렇게 수만장 찍어서 신문에 넣는데 그 경비가 얼마 들며 그런다고 몇 명이나 더 옵니까?”하고 내가 물었더니 “한 서넛이 더 오지.”라고 했다.
“한 서너 사람 더 온다고 왜 그렇게 합니까?” 했더니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 아무 일도 없을 때 신문에 간지를 넣어서 돌리면 나를 미친사람으로 본다. 그런데 어디에서 어떤 스님을 초청했든지 초청한 그 기회에 불교를 알린다’라고 했다.
자기는 그런 뜻으로 신문에 간지를 넣는 것이지 사람들이 보고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광고의 의미를 가지고 간지를 넣기는 했지만 그 기회에 신문을 통해서 불교를 선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10만평이나 되는 땅을 확보해서 저렇게 큰 불사를 한 것이다.
그런 마음이 중요하다.
‘이런 기회에 불교를 알린다, 안그러면 이 지역에 불교 알릴 기회가 언제 있느냐’ 하면서 수만장 간지를 돌린다. 몇 만장을 찍어 돌리면 한 두서너 사람이 더 오지만 ‘안그러면 불교 가지고 그렇게 광고할 기회가 없지 않느냐, 나는 그것이 목적이고 사람 오고 안오고는 인연에 맡긴다’ 그런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도 사실은 대신법사의 한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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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작호법장법사(作護法藏法師)하야 : 호법장 법사가 되어서
건무승당(建無勝幢)하야 : 이길 수 없는 깃발을 세워서
호제불법(護諸佛法)하야 : 모든 불법을 보호해서
영정법해(令正法海)로 : 정법의 바다로 하여금
무소결감(無所缺減)하며 : 결감하는 바가 없기를 원한다.
호법장, 법의 창고를 보호하는, 법의 창고를 보호하는 법사가 되어서, 호법 참 중요하다. 우리가 불교를 빙자해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법회를 열던지 강의를 하던지 사람을 하나를 모아놓고 하든지 둘을 모아놓고 하든지 열 명을 모아놓고 하던지 그 기회는 절대 놓치면 안된다.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이나 백 사람이나 그 기회에 어떻게 하더라도 불법을 이해시켜야 된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름을 한 번 서로 부르고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름을 귀에 한 번 스쳐가도록 해 줘야 된다. 그것이 불자된 도리이고 불자의 기본이다. 불교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 안된다.
내가 몇 번 이야기 했지만 ‘우리는 부처님 밥 먹었잖은가. 부처님 밥 먹었으면 밥값을 해야한다’ 거기다 대고 무슨 뭐 공자나 맹자나 노자나 장자나 기타 자기가 좋아하는 문학적인 그런거나 읊조리라고 부처님 밥 먹고 사람 모아놓고 그래서 그 금쪽같은 시간을 그렇게 허비해 버리면 안된다. 그것은 아니다.
호법장 법사가 되어야 한다.
법장을 보호하는 법사가 되어서 건무승당 하는 것이다. 불법을 이길 사람, 불법을 이길 이론이 뭐가 있는가. 건무승당이다. 이길 수 없는 깃발을 세워서 모든 불법을 보호해서 정법의 바다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된다.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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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원일체중생이
작일체법일법사(作一切法日法師)하야 : 일체 법의 태양, 일체 법의 태양과 같은 법사가 되어서
득불변재(得佛辯才)하야 : 부처님의 변재를 얻어서
교설제법(巧說諸法)하며 : 모든 법을 아주 능숙하게 설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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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작묘음방편법사(作妙音方便法師)하야 : 묘음 방편 법사가 되어서
선설무변법계지장(善說無邊法界之藏)하며 : 무변법계의 장을 잘 설명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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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작도법피안법사(作到法彼岸法師)하야: 법의 저 언덕에 이르는 법사가 되어서
이지신통(以智神通)으로 : 지혜와 신통으로써
개정법장(開正法藏)하며 : 정법의 창고 활짝 펼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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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작안주정법법사(作安住正法法師)하야 : 정법에 안주하는 법사가 되어서
연설여래구경지혜(演說如來究竟智慧)하며 : 여래의 구경지혜 최고가는 지혜를 연설하기를 원한다. 얼마나 여래에 대해서 불법에 대해서 이야기 할 거리가 많은가. 불교에 얼마나 좋은 내용이 많은가. 하긴 본인에게 그렇게 큰 감동이 없으니 이 좋은 구절이 있는데도 남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크게 나지 않는다.
개정법장하야 정법의 창고를 활짝 펼치기를 원한다. 정법에 안주하는 법사가 되어서 여래의 구경지혜를 연설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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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작요달제법법사(作了達諸法法師)하야 : 제법을 요달하는 법사가 되어서
능설무량무진공덕(能說無量無盡功德)하며 : 무량 무진한 공덕을 능히 설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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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 중생이
작불광세간법사(作不誑世間法師)하야: 세간을 속이지 아니하는 법사가 되어서
능이방편(能以方便)으로 : 능히 방편으로 하여금 실제에 들어가게 하기를 원한다.
이 말도 기가 막힌 말이다.
자칫하면 세간을 속이는 법사 노릇을 하고 있을 수가 있다.
세간을 속이는 법사, 겉은 근사하면서 속은 그 내용은 영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건 세간을 속이 것이 되고 세상사람을 속이는 법사가 되는 것이다.
영입실제(令入實際)하며 : 실제에 들어가게 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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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작파제마중법사(作破諸魔衆法師)하야 : 마구니 무리들을 깨뜨리는 법사가 되어서
선능각지일체마업(善能覺知一切魔業)하며 : 잘 능히 일체 마업을 깨달아 알기를 원한다.
마중 마업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화엄경 강설 56권을 받았는데 이세간품 58권에 마업이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마구니라고 하는 것도 있고 또 사리마업(捨離魔業), 마업을 떠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내용도 58권에 가면 있다.
그것을 내가 조금 읽어드리겠다.
화엄경 강설 58권 137쪽부터 나오는데 ‘보살은 열가지 마의 업이 있다’고 하였다.
마의 업이 무엇인가. 무엇이 열가지인가.
이른 바 보리심을 망실하고 모든 선근을 닦음이 마의 업이다.
보리심 없이 선근을 닦으면 마의 업이라는 것이다.
선근 그 자체는 물론 훌륭하고 좋다. 그러나 화엄경의 차원에서는 그것 가지고 안된다 는 것이다. 보리심이 개재가 되어야 한다.
내가 늘 말한다. 요즘 불자들은 어디가서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전세계적으로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 그런데 거기에 불교가 빠져버리면 참 섭섭하다. 불교인이 가서 하면서 스님이 가서 하면서 불교가 빠져버리고 거기에 뭔가 필요한 것만 돕고 온다.
물론 필요한 것만 돕고 오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필요한 것만 돕고 오는 것도 훌륭한 보살행은 보살행이지만 그러나 불자가 가서 스님이 가서 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이 빠져버린다면 참 섭섭한 일이다. 여기서는 마의 업이라고까지 했다.
맹자(孟子) 같은 이도 ‘도선이불이선(徒善而不而善) 한갓 착하기만 하는 것은 선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나쁜 마음으로 보시하고 성난 마음으로 계율을 지니는 것이 마의 업이라고 하였다.
보시하는 것보다 더 바라면서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나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이다. 꼭 상대를 해쳐야만 나쁜 마음이 아니라 대가를 지나치게 바라면 그것도 나쁜 마음이어서 마의 업이다.
또 성난 마음으로 계율을 지니면 마의 업이다.
전에 보면, 계율을 청정하게 잘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못 지키는 사람보고는 아주 비난하고 화를 낸다. 그러느니 차라리 계를 안 지키고 저렇게 화 안내는 게 낫겠다고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도 그런 것이 다 마의 업이라고 하였다.
또 나쁜 지혜에 있는 이를 싫어함이 마의 업이다. 소견이 나쁘다고 그 사람 생각이 나쁘다고 그 사람을 싫어하면 그것도 보살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마의 업이다.
또 깊고 깊은 법에 대하여 인색한 마음을 내어 들을 만한 사람에게도 법을 말하지 않는 것, 교화받을 만한 사람에게 법을 설하지 아니하면 그것도 마의 업이다.
만약 재물과 이익으로 공경하고 공양 받으면 비록 법의 그릇이 아니라 하더라도 억지로 법을 말할 것 같으면 그 사람도 마의 업이다. 이익되고 잘해주고 도움이 된다고 해서 법의 그릇도 아닌데 억지로 법을 소개해 줄 것 같으면 그것도 마의 업이라고 하였다. 화엄경은 아주 차원이 다르다.
또 바라밀법을 즐겨듣지 아니할 것 같으면, 설사 설한 것을 듣는다 하더라도 수행하지 아니하고, 비록 또한 수행한다 하더라도 마음에 게으름을 내거나 또 게으름을 내는 까닭에 뜻이 하열해서 가장 높은 깨달음의 법을 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그것도 마의 업이다.
선지식을 멀리하고 악지식을 가까이 하여 이승을 좋아하여 태어나기를 즐기지 않으면 악의 업이다. 이승을 좋아하여 태어나기를 즐기지 않고 열반을 숭상하여 욕심을 여의고 고요하려 함이 마의 업이다.
선지식을 멀리하고 악지식을 가까이 하는 것 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승을 좋아하여 태어나기를 즐기지 아니하면 그것도 마의 업이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 남방불교가 회오리를 치고 있는데 전부 여기에 다 해당된다.
이승은 전부 태어나기를 싫어하고 고요한 열반만을 좋아하며 그렇게 가르친다.
이승이 성문 연각이다.
성문법, 연각법 지금 남방불교를 좋아하면 그건 마의 업이다.
또 태어나기를 즐기지 않는 것도 마의 업이다.
화엄경은 보살불교이기 때문에 수생해서 태어나서 얼른 중생들을 도와야 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열반했을 때 속환사바 하라고 한다.
대승불교 선불교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속환사바 하소서’ 이번에 인환스님 열반하신 데도 보니까 누가 ‘속환사바하시라, 빨리 사바세계에 돌아오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승불교는 그것이 안목이다.
그런데 소승불교는 안 태어나는 것이 목적이다. 더이상 이 세상에 안오는 것이 목적으로 되어 있다. 지금 온갖 남방불교가 아주 회오리바람 불듯이 하는데 그 교리는 안 태어 나는 것이 목적이다. 다만 대승불교 풍토에서 그런 이야기는 드러내놓고는 안할 뿐이다. 그런데 그 속의 내용은 그것이고 태어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 화엄경의 입장에 근거해서 이야기 하면 그 사람들은 전부 마의 업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화엄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승은 마의 업을 짓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던지 그건 개인사정이고 알기는 알고 있어야 된다.
화엄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다. 마의 업에 그 이야기를 넣어 놓았다.
또 보살들이 사는 곳에 와서 성내는 마음을 내어 나쁜 눈으로 흘겨보고 허물을 찾아내어 잘못을 말하는 것은 마업이다. 보살불교 대승불교 하는 사람의 허물을 찾아내어 잘못을 이야기한다.
‘저렇게 훌륭한 이야기를 하면서 보니까 지도 별것도 아니구만. 뭐도 하고 뭐도 하고 뭐도 하면서’라고 말하면서 또 그들로 하여금 재물을 공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의 업이다.
‘아 그 사람한테 가지말라, 그 사람 말뿐이고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사실은 허물투성이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공양올릴 것 없다, 가서 절도 하지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화엄경에 근거해서 보면 그것도 마의 업이다.
또 바른 법을 멀리하고 정법을 비방해서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이 화엄경 같은 이런 거 공부 안하려고 하는 거야. 비록 듣더라도 문득 훼방하고 ‘화엄경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라면서 비방을 하는 것, 법을 말하는 사람을 보고 존중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자기 말이 옳고 다른 말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 다 마의 업이다.
이런 등등 내용이 여기 아주 자세히 나와 있고 내가 또 거기에 마음 맞는 구절이 있어서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많이 해 놓았다. 나중에 화엄경강설 58권을 받으면 자세히 보시기 바란다.
또 여러분들이 민족사에서 나온 한문 화엄경 네 권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뒤에 가면 58권째인데 이세간품6권에 해당되는 것이 마의 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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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작제불소섭수법사(作諸佛所攝受法師)하야 : 모든 부처님이 섭수해주는 법사가 되어야한다. 부처님이 인정해주고 부처님이 잘 감싸주는 그런 법사
이아아소섭수지심(離我我所攝受之心)하며 : 아와 아소에 섭수하는 마음을 떠나서 떠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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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작안은일체세간법사(作安隱一切世間法師)하야: 일체 세간을 편안히 하는 안은하게 하는 법사가 되어서
성취보살설법원력(成就菩薩說法願力)이니라 : 보살의 설법 원력을 성취하기를 원함이니라. 이것이 불보살의 소원이다. 사실은 요 한 단락이 불보살의 소원이고 ‘모든 중생들이 이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비원이 구절구절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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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체 건안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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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바 보리심을 망실하고 모든 선근을 닦음이 마의 업이다...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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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