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7: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 여기서는 앞절에서 언급된 문장의 어순을 바꾸어 다시한 번 그들이 중요시하는 정결 관습이 사람이만든 것,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구속력을 가질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관습이 하나님의 계명과 대립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유대인들의 유전은 원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에워싸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유전이 도리어 율법을 왜곡하고, 경화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유전들과 하나님의 계명이 상충되는 구체적 예증 제시를 위한 문제제기라고 할수 있다. 예수는 단정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잘 저버리는도다 - '잘 예언하였도다'와 대응되는 표현으로서 그릇된 종교라서 집착해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을 비웃는 독설적 발언이다.
이말은 그들이 너무 쉽게, 간단히 하나님의 게명을 포기향다는 뜻이다. 사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이 서로 충돌될 때에는 거침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따랐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을 피해가는 수단으로서 사람의 전통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 앞에 경건해지려는 위선자들의 특징이다. ...[막 7:10]"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 사람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언행을 구체적 예증을 통해서 반박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믿고 있는 모세의 계명을 예로 들고 있다. 예수는 그들의 주장에 내적 모순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의 말과 그들의 믿음을 대비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십계명의 제 5계명으로서 히브리성경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바로뒤에 이어지는 내용과 동일한 강조점을 두고있으나 후자가 효에 대한 소극적.강압적 명령이라면 본문은 적극적이고 당위적인 명령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모세는...하라하고'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차이는 원저자와 그 저자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에게 반포한 기자라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두 표현은 공히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는 신적 권위를 내포한 말이라 할수 있다.
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효'를 주제로 한 저주문이다. 맛소라 사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본문은 앞에서 언급한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과 부모에 대한 불공경의 대가를 극명하게 대조시켜 강조하고 있다. 비록 부모를 '훼방'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며 심지어 사형까지 시키도록 명하셨다는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범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여 간접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유전을 통한 불효롤 죄로 평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부모 공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당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막 7:11]"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 - 직역하면 '나로 인해 당신이 유익을 얻게 될 그무엇'이란 뜻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부모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어떤 선물을 가리킨다.
부모를 농락하고 속이는 파렴치한 변명임을 곧 알게된다. 고르반. 이 말은 히브리어 '코르반'의 음역으로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 전승을 통해 그 뜻을 알수 있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 드림' 곧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리키는 매우 신앙적 의미였었다. 마가는 본서의 이방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음역과 더불어 설명구까지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는 '도론', 즉'선물'이라는 뜻으로 표기한다.
본문 내용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의 납골당의 비문에서 같은 형태의 용법이 발견되었다.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 표현이다. 물론 예수 당시의 이 말이 순전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봉양의무를 하나님께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을 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올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다른 계명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이다.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해서는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예수 당시에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 고르반의 폐단을 계속 고집하였다고 한다. ...[막 7:12]"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제 아비나 어미에게...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 이 구절은 계명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한다.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모두가 꼭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했을 때 모세가 준 계명을 어겼음이 명백함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돌아갈 대가는 10절에서 언급한바처럼 반드시 죽게 될 것 뿐이다. ....(막 7:13)"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 여기서 '폐하며 '저버리다'는 뜻보다 그 의미가 더욱 강하며 '파기하다'. '아예 무시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예수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기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말은 그들의 언행에 대한 결정적 모순을 지적하는 말인데,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충성을 위해 만들어내고 지킨 율법적 관습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여 파기시킨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이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뭇했고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망각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실로 사람을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분명해지는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봉사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수가 율법주의자들의 언행을 비판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다.
오늘날에도 교회 전통이나 교리 그리고 권위에 집착하여 교회가 실천해야 할 이웃 사랑, 사람에대한 봉사와 세상에 대한 봉사를 소홀히 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교회들은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위선되고 거짓된 종교 형태가 단지 부모 공경에 관한 제 5계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고 밝히신다.
'행하느니라'는 말은 능동태 현재 시상으로서 그들의 행동이 습성화되고 중복되고 있음을, 그들의 그릇된 신앙 행위가 거듭 노출되고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막 7:14]"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 여기서 이야기의 대상이 바뀌고 있다. 제자들의 식사 현장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의 논박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부터는 더이상 바리새인들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는 다시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정결에 관한 주제가 계속되고 있으므로 제시된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연속적인 이야기로 보아도 좋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 이 말은 예언자적 발언으로서 각성을 촉구하는 호소라고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논증된 바처럼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 올바른 신앙 실천을 촉구하는 호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문일 수도있다. 이제까지는 잘못된 관습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지금부터는 그 비판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자신의 이야기 곧 내적 성결이라는 대주제를 설파하기 위해 경청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