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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아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사장과 9일 일산 한 카페에서 신년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은 됐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평양을 찾아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고 ‘4.2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돌아와 수인(囚人)이 된 늦봄 문익환 목사(1918~1994). 아니 시인 문익환. 1989년 벽두에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는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를 쓰더니, 실제 저지르고 말았다.
“문목(문익환 목사)이 89년에 평양 방문 후에 서울에 오셔서 “통일은 됐어”라고 완료형으로 얘기를 해서 참 많은 사람들이 놀래고 어처구니 없어 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참 맞는 말이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아들 배우 문성근(66)은 문 목사 방북 30주년 소회를 “너무 아쉽다”고 했다. 문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서명한 ‘4.2공동성명’은 이후 6.15공동선언 등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실제로 4.2공동성명의 정신대로 남북관계가 흘러왔다면 통일은 이미 된 거나 마찬가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너무 아쉽다.”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사장은 9일 <통일뉴스>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아쉬움부터 토로했다.
“어떻게 보면 89년부터 2010년 그 사이에 우리가 마무리를 했어야 하는데, 마무리를 못하고 미-중 패권경쟁 시대의 틈바구니에 또 끼이는 상태가 됐으니까. 정말 통탄스럽다”는 것.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부터 본의 아니게 ‘시민정치운동’에 ‘공익근무’해온 그는 판문점선언 시대를 맞아 다시 본의 아니게 남북 문화교류의 일선에 서게 됐다. 당장 문 목사 방북 30주년을 기념해 4월 2일 즈음 가극 ‘금강’의 평양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포옹에 이어 후대들인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성근 부이사장의 포옹도 가능한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내가 남쪽에서 살아온 삶이 뭔가를 대표할 수준이 못되기 때문에 말씀드리기는 그렇다”면서도 “그 행사 때 김 위원장께서 대표단을 접견해주면 그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한가닥 기대감을 내비쳤다.
오히려 정치 일선을 떠남으로써 몸에 맞는 옷을 입을 수 있었을까. 올해 8월 첫선을 보이는 평창 남북평화영화제의 조직위원장과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남북영화교류특별위원회 위원장, 6.15남측위원회 문예본부 준비위원장까지 도맡고 있는 실정.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공동응원가를 만드는 밀린 숙제부터 개성공단이나 비무장지대(DMZ)에 대규모 영화 촬영장을 만드는 일이나 남쪽 감독이 북쪽에 가서 영화를 찍는 일, 평창 남북평화영화제를 원산에서 공동개최하는 일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는 “남북관계가 다시 두 번째 기회를 맞으니까 문화예술계 전반에 계신 분들이 나한테 뭔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있고, 나는 문목 때부터 문화예술이 동질성 회복에 가장 좋은 접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이 일은 그냥 문목의 유업으로 알고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민족통일까지 가려면, 문화통합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며 “다른 체제로 70년 넘게 살아와 이질화된 걸 극복하는 데에는 문화예술이 가장 효과적이다. 영화가 대표적이랄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02년 6월 문 목사의 부인 봄길 박용길 장로와 동생 문동환 선생의 안내로 문 목사가 나고 자란 중국 용정 명동촌을 방문했을 때 벌써 ‘노무현 대통령’을 시대정신으로 설파하던 그는 이제 ‘문화통합’이라는 새로운 기치를 들고 벌써 저만큼 앞선 걸음을 떼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이자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인 기해년 새해를 맞아 9일 오전 10시 경기도 일산의 한 카페에서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사장과 나눈 신년 인터뷰 내용이다.
“민(民)이 움직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 문성근 이사장은 남북 문화교류의 길목을 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 통일뉴스 : 지난해가 늦본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이었고, 올해 문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았다. 오랜 시간이라면 오랜 시간일 수 있는데, 소회가 있다면? 그때는 좀더 젊은 때였지 않나.
■ 문성근 부이사장 : 89년이니까, 그래도 서른 여섯이었다.
소회라면 너무 아쉽다. 문목이 89년에 평양 방문 후에 서울에 오셔서 “통일은 됐어”라고 완료형으로 얘기를 해서 참 많은 사람들이 놀래고 어처구니 없어 했다. “시적 통찰이다” 이렇게 찬양하는 분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때는 그 말씀을 이해하는 분들만 하셨던 건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참 맞는 말이었다.
그때 4.2공동성명에 포함된 정치군사회담과 다방면에 걸친 교류.접촉을 병행추진한다는 것, 그리고 고려연방제 전에 연합 단계를 도입할 수 있다는 의미,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참가하고 단일기에 공동응원가 쓰고,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 이후에 보면, 6.15공동선언이 4.2공동성명의 축약이고, 10.4선언은 교류협력.경제협력에 대한 확대 버전이고, 판문점선언도 재확인 겸 발전이지 않나. 그러니까 결국은 근본적으로 그 합의 테두리에서만 움직이게 돼 있는 거다.
그때 89년 4.2공동성명 9항을 보고, 나는 경탄했다. 서명자가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문익환과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이었다. 양자는 이 합의가 향후 있을 당국자 간의 논의에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 ‘건의한다’고 돼 있다. 아, 그거 보고 정말 놀랐다. 민간 차원의 합의였고, 당국 간에 이걸 재확인하라, 그리고 가자!
그걸 안 하고 ‘어’ 하는 사이에 30년이 지난 거다. 그런데 그냥 30년만 지났으면, 30년 지나서 다시 복원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89년은 분단을 강제했던 동서냉전이 붕괴 기미를 보이던 시점이다. 그러니까 냉전이 끝나면 우리는 분단돼 있을 필요가 없으니 어떻게 우리가 가까워질 거냐는 방법론을 토론하러 간 거였다.
그런데 그 좋은 국제정세가 대략 2010년에 끝나지 않나. 미-중 패권경쟁 시대로 들어가면서 동서냉전이 새로운 미-중 열전 시대로 이행된 거다. 어떻게 보면 89년부터 2010년 그 사이에 우리가 마무리를 했어야 하는데, 마무리를 못하고 미-중 패권경쟁 시대의 틈바구니에 또 끼이는 상태가 됐으니까. 정말 통탄스럽다.
이명박근혜 정권은 정말 반민족적인 매국세력이었다. 그런데 이제 지금이라도 해야 되는데 아슬아슬하고 참 그렇다.
□ 본론으로 들어가서, 지난해는 한반도에 특별한 해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평가하고 올해를 어떻게 전망하나?
■ 북으로서는 ‘어떻게 하면 미국이 협상에 나올 거냐’ 그 방법론을 찾아 몇 십 년을 보냈지 않나. 이제 그 협상장이 만들어진 거다. 북은 북대로 그 협상 조건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힘든 세월을 보내온 거고, 남은 남대로 분단을 정치에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권을 운영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오래 노력을 해온 거다. 남북 시민과 인민의 노력으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노력에 깊은 존경과 지지를 보낸다.
양쪽 정상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미국인데,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미국은 트럼트 대통령을 제외하면 여야, 월가, 군산복합체 몽땅 다 반대하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로서는 남북이 이런 새로운 대화국면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해왔듯이, 이것을 이어나가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노력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민과 정부가 같이 가야 되는데 지금은 완전히 정부 주도로 가고 있지 않나. 민들이 정부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저들은 지금 할만큼 다 했으니까 민이 움직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인 근거는, 다른 나라들은 국제정세나 각국의 이익에 따라서 남북문제를 보는데 우리에게는 기본인권에 관한 문제이지 않나. 문 대통령 말씀은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김대중 대통령 말씀은 “ 삼국통일 이후 1300년간 단일통일국가로 죽 유지해왔는데 60여년간 남의 힘에 의해 분단됐다”,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 같이 살아야 한다. 이게 당위이고 기본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지점을 강하게 세계 여론에 강조하고 호소하는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 좀더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 종로5가 기독교 쪽에서 4월 27일 판문점선언 1주년 때 휴전선 155마일을 인간띠로 잇자는 걸 제안하겠다고 하더라.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인도에서 600만 여성이 나와서 인간띠를 했다고 들었다. 또 발틱 3국이 그걸 한 적이 있다. 89년 발틱 3국을 관통하는 620㎞를 인간사슬로 이어서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해 성공했다.
세계 여론에 우리가 호소하는 일이 필요하다. 인간띠잇기는 기본인권에 대한 접근이고, 사회과학적 접근도 필요하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중국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라는 것이 미국의 가장 견제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남북이 교류협력을 시작해서 경제공동체를 이루어 간다면 도리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지 그렇게 미국을 배척하고 중국에 가까워질 리가 없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이 그것을 걱정했고, 그래서 베트남 전쟁 끝났을 때 물론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화 됐지만 베트남은 중국과의 오랜 갈등요인이 있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밀착하지 않지 않나. 우리도 그렇다. 우리 역사에 중국하고 좋은 일이 뭐가 있었나. 그러니까 사회과학적으로도 그렇게 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 미국에게 그런 점을 우리가 많이 강조했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문화예술을 하다보니까 우리 한류가 이렇게 폭발할 것이라고는 사실 우리 종사자들도 생각을 못했다. 99년에 ‘스크린쿼터 사수투쟁’ 할 때도 이런 일이 올 거라고 생각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더라. 한국 영화사를 보면 폭발하는 결정적인 전환이 87년 6월항쟁이다. 6월항쟁 이전까지는 정부가 시나리오를 검열했다. 그러다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한국영화가 발전했고 그러면서 한류가 터지는 거다.
동북아를 기본으로 해서 지금은 한류가 남미, 아프리카까지 가는데 이 힘이 우리도 예상을 못한 거지만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더라. 거기에는 촛불로 정권을 바꾸는 국민의 힘이 있는 거다. 이해찬 총리 말씀처럼 아시아쪽 정치에서 개혁세력이 살아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는 없다는 거다.
그 분은 정치인으로서 분석하는 거고, 저는 문화 쪽으로 보자면, 중국은 공산당 일당지배를 전제로 한 자본주의화를 시도하고 있는 거여서 그 체제를 바꿀 생각이 없다. 그들은 단계적으로 선출해서 올라가서 집단지도체제를 만드는, 자체 내 민주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대의제도보다 우리 제도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이나 포퓰리스트가 국가지도자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중국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인정 여부를 떠나서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공산당이 국가를 만든 거라서 그대로 가는 거다. 그러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중국은 체제상 안 되고, 일본은 60년대에 이미 사회변혁을 국민이 포기했다. 그래서 이를테면 ‘오타쿠’라고 탐미적인 문화는 있어도 에너지가 넘치는 인류보편적이면서 굉장히 개성이 강한 그런 문화는 없다.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보편성을 가져야 한류처럼 외국에 퍼져나가는 건데, 그런 면에서 경쟁력은 우리가 압도적이다.
그렇게 보자면,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한국이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도리어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변화를 추동하는데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 저렇게 무역전쟁을 해서 힘으로 굴복시키려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나. 그런 면에서 한국의 효용성을 미국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지난번에 문 대통령이 유럽 가셨을 때 반응이 아주 냉담하지 않나. 미국은 대통령이 자꾸 이야기하고 해서 어느 정도 입력이 됐는데, 그냥 닫혀있다. 그리고 너무 먼 나라 이야기니까 자세히 공부도 안했고, 관심도 없다.
“해답은 문화에 있다”
▲ 1989년 문익환 목사는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났다. [사진출처 - 통일맞이] |
□ 올해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이해서 통일맞이나 문화계에서 어떤 구상을 갖고 있나?
■ 먼저, 통일맞이를 이야기하자면, 작년이 문목 탄생 100년이었다. 생신인 6월 1일에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수유리집을 사립박물관으로 해서 ‘통일의집’을 개관했다. 그리고 6월 2일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구에서 따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다오’ 행사를 서울역에서 가졌다. 노래패 우리나라가 문 목사 헌정공연을 만들어서 몇 군데 순회공연을 했다. 심포지엄도 했다.
북쪽에서 축사를 보내오고 했는데, 작년은 어떻게 보자면 남북관계가 재개되는 첫해였기 때문에 일단 당국자 간의 합의를 처리하는 데도 북쪽이 정신이 없어 민간 차원의 일들이 많이 진척되지 않았다. 이제 정상 간의 합의가 진행되는 부분이 맥락이 잡혔기 때문에 북쪽도 조금 여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통일맞이 일도 문화계 전반에 대한 일도 조금더 진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지난 10.4선언 행사 때 (평양에)가서 이해찬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통일맞이 이사장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만났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한 거다. “내년이 문목 방북 30년이다. 기념행사도 갖고 가극 금강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평양 공연을 하면 어떻겠느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그 자리에서 흔쾌하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렇게 합의를 했다.
실무적으로도 내가 논의를 했다. 그래서 기념행사와 공연을 갖는다. 4월 2일 즈음해서 하기로 합의가 된 거다. 앞으로 실무적인 논의가 더 필요하다.
□ 금강 평양 공연의 취지에 대해 더 설명해달라.
■ 그 공연은 어떻게 보면 통일맞이를 태동시킨 공연이기도 하다. 문목이 89년에 새통체(새로운 통일 운동체) 통일맞이를 제안했지 않나. 늘 강조하셨던 것이 “너무 오랫동안 따로 살았는데 마음을 합쳐 가는데 가장 효과적인 게 문화예술이다” 그렇게 생각하셨다.
그 말은 독일통일 이후에 확인된다. 독일이 느닷없이 통일되는 바람에 동독 주민들이 일종의 2류 국민이 됐고 간극이 해소가 안 된다. 5,6년 지나고 나서 독일 지성계 전체가 “해답은 문화에 있다” 이렇게 컨센서스가 이뤄졌다고 한다.
이를테면 ‘고 트라비 고’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코미디 영화다. 트라비는 독일의 국민차다. 굉장히 사기가 어렵다고 한다. 아무튼 그걸 사가지고 있는 동독사람이 통일된 후에 그 차를 타고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 로드무비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서 서독사람들이 동독사람들의 심리와 사고구조와 정서상태 이런 것을 굉장히 이해를 많이 했다는 거다.
통일 이후에 보도된 것들을 보면 동독사람들이 회사에 이력서 내고 인터뷰를 할 때 그렇게 화를 냈다는 거다. “내가 상품이냐. 나를 뭘로 보고 이러냐” 펄펄 뛰었다고 한다. 워낙 기본이 다른 데서 오는 오해나 이런 게 많은 거다. 실제로 문화예술 특히 영화, 드라마가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단은 그런 것을 문목이 생각하고 만들었고, 그것을 백프로 이해하고 있던 문호근이 ‘그러면 남북관계 개선되고 이럴 때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만든 게 금강이다. 그래서 본인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2004년 참여정부 때 한 번 공연했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군중 씬’(mob scene) 같은 것, 아예 한 부분을 북쪽 공연단체가 맡아서 한다든지 남쪽에서 무대 설계 상세도면을 보내면 그쪽에서 제작을 한다든지 그래서 좀더 공동창작의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면 더 근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금강 공연을 위해 배우를 모집 중인 것으로 안다. 배우를 뽑아서 공연을 준비하고, 평양에서 공연하고 순회공연하려면 시일도 촉박한 것 같다. 잘 추진되고 있는 건가?
■ 지난해 10월에 합의해서 올해 초에 공연하는 것은 굉장히 촉박한 거다. 특히 우리나라 뮤지컬이 워낙 산업화 돼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인데, ‘남북교류에 나도 뭔가 하고 싶다’는 의사를 가진 분들이 많아서 연출과 스탭진은 빠른 시일 내에 아주 탄탄하게 잘 구성됐다. 그래서 오디션 공고가 나갔고, 6,7백명이 응모를 했다고 한다. 1월 중순에 오디션을 하고 1월 말부터 연습해서 4.2 즈음에 공연 가는 걸로 예정돼 있다.
그리고 남쪽 순회공연도 여러 도시들에서 관심을 보여서 확정해 가고 있는 단계에 있다. 성남시가 2016년에 금강을 공연했다. 그때는 남북관계가 풀릴 거라는 전망을 못하고 있을 때인데도 준비하는 단계로 성남시가 했다. 그래서 성남시와 서울, 경기도 등은 확정돼 있는 상태고 몇몇 지자체는 협의를 진행 중이다. 아껴써야 되지만 제작비도 공연하는데 지장 없을 수준으로 모였다.
이게 진전이 되면 통일맞이 주최로 북쪽 가극을 초청해서 남쪽 순회공연을 구성을 했으면 좋겠다. 북쪽도 남쪽과의 교류를 위해서 춘향전 같은 걸 만들어둔 게 있다. 문목 입장으로 보면, ‘피바다’나 ‘꽃파는 처녀’를 초청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북쪽 인민들이 이런 가극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다.
□ 통일맞이의 다른 사업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 문목이 김일성 주석과 합의한 사항 중에서 단일팀 같은 것은 다 진행되고 있는데, 딱 하나 공동응원가를 아직 못 만들었다. 겨레말큰사전은 2005년인가 참여정부 때 시작됐다. 그런데 공동응원가를 만들자 했는데 참 복잡하다. 작사, 작곡 문제가 있고 정서의 문제가 있고,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어쨌거나 방북 30년이니까 올해에는 숙제를 마저 했으면 좋겠다.
사실 남쪽에서는 이미 몇 사람이 만들었다. 그런데 좀더 규모를 키워서 공모도 하고 해서 여러 곡을 만들어 다 들어보고 투표를 받고 몇 개를 고르면 될 거 아니냐.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서로 왔다갔다 하면서. 이번 달도 남자 핸드볼 단일팀이 독일에서 경기를 하던데, 또 아예 올림픽도 같이 하자고 하는데, 올해 꼭 좀 성공시켜야 되겠다 다짐을 하고 있다.
그 다음에 4월 2일 즈음에 통일의 집에서 방북 30년 특별전 같은 것을 구상하고 있다. 북쪽에 일단 문목이 다니면서 방명록에 써놓은 글들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서 요청했다. 다큐멘터리나 사진은 많이 나왔기 때문에 방명록 영인본을 만들고 싶다. 북에서 사진을 찍어서 우리한테 주면 우리가 4월 2일 쯤에 개관 파티를 할 예정이다.
□ 문 목사 25주기 기념행사는 확정돼 있나?
■ 올해 25주기 묘소참배는 1월 19일 오전 11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진행한다. 하루 전인 18일 오후 6시 30분 서울시청 시민청 바스락홀에서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한다. 다큐는 95년에 만들어진 거다.
□ 2004년 문 목사님 10주기 때 북에서 대표단이 내려와 서울에서 공동행사를 가졌던 기억이 난다. 올해는 방북 30주년이고 4.2공동성명 기념일 즈음에 금강 공연단과 함께 방북을 추진하고 있는데, 사견이지만 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게 된다면 굉장히 역사적인 장면이 될 것 같다.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포옹에 이어 후대들인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성근 부이사장의 포옹도 가능한 것 아닌가. 대를 이어 통일에 관한 협의를 하면서 파트너인 민화협이나 조평통과 민간교류 합의서 같은 것을 작성한다면 역사적인 새로운 매듭이 지어지는 것 아닌가. 꼭 정치인이나 통일운동가가 아니더라도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부담없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좋은 생각인데, 내가 남쪽에서 살아온 삶이 뭔가를 대표할 수준이 못되기 때문에 말씀드리기는 그렇다. 그 행사 때 김 위원장께서 대표단을 접견해주면 그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넘어서 사실 생각을 안 해봤는데, 연구해 보겠다.
삼지연관현악단 여가수들, “발성이 달라졌다”
▲ 늦봄 문익환 목사 10주기를 맞아 북측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마석 모란공원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봄길 박용길 장로와 문성근도 눈에 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영화계에서도 남북교류와 관련된 직책을 맡은 것으로 아는데, 올해 계획은?
■ 제가 영화진흥위원회 산하에 남북영화교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평창 남북평화영화제 조직위원장도 맡게 됐다. 또 최근에 6.15남측위에서 문예본부 활성화 안이 나왔다. 사실 6.15문예본부가 있기는 있었는데 작가회의 쪽만 다녔고 문예본부가 별로 뭘 안했다. 그런데 이번에 심양에서 6.15남측위와 6.15북측위가 회의를 하면서 문예부문의 논의구조를 좀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화부분도 좀 참여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있었고, 새롭게 꾸리기 시작하는 거다. 나보고 준비위원장을 하라고 해서 일단 주섬주섬 이미 활동하던 데들 다시 모이고,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금강산 신년모임을 30,31일 하는데 그때 문예본부도 동참해서 부문별 모임을 갖고 기본적인 논의를 할 참이다. 문예본부 안에 장르별 대표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그동안은 문단 중심으로 남북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께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해서 강하게 변화를 촉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송월 단장이 이끄는 삼지연관현악단이 와서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충격을 줬다. 그런데 의상이 달라지고, 남쪽 가요를 넣어 선곡이 달라졌다고 주로 이야기하는데, 더 근본적인 변화는 발성이 달라진 거다.
서울공연 때 현송월 단장은 맨 마지막에 나왔고, 현 단장은 과거 발성이다. 그 전에 8명의 여가수가 번갈아 나왔고 곡마다 발성이 조금 다른 게 있지만, 사회주의는 가사 전달에 방점을 찍기 때문에 발성을 입 앞으로 내민다. 그래서 쨍쨍한 소리를 내고 그래야 멀리 전달이 된다. 그런데 그걸 ‘이선희 발성’ 정도로 뒤로 끌고 간 거다. 그러니까 가사 전달이 그 앞보다 훨씬 약화된다. 그런데 듣기가 편해진다. 북이 발성을 바꾼 것은 정말 놀라운, 굉장히 큰 변화다.
이를테면 영화 같은 경우가 당대회에서 “영화가 시대의 변화를 못 따라간다” 질타를 받았다고 한다. 올해 신년사에도 “시대와 현실을 반영하고 대중의 마음을 틀어잡는 영화와 노래를 비롯한 문예작품들을 훌륭히 창작”해야 된다고 했다. 대중의 마음을 잡는다는 게 중요한 이야기다.
전해듣기로는 당의 고위 정책담당자도 “남북합작영화에 관심이 있다. 평양의 세트장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평화가 진전돼 안착이 되면 DMZ 안에 평화공원을 만들고 거기에 대규모 촬영장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정도의 언급까지 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굉장히 전향적인 거다.
과거 민주정부 10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나가 있어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든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걱정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맨 먼저는 사람이 덜 만나고 컨텐츠를 교환하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는 학술교류 같은 게 가능하다. 사람이 덜 만나고 할 수 있는 건 많다. 촬영 장소만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고, 최종단계가 남쪽 배우, 북쪽 배우가 같이 하는 거다. 그것까지는 당장은 생각 안한다.
평화체제가 안착이 되면 대규모 촬영장을 만드는 것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사극을 하나 찍으려면 부안, 문경, 속초 다 다녀야한다. 아주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다. 중국 경우에는 당.명,청 궁전을 그대로 200만평, 300만평 세트장을 세운다. 그게 낭비가 아니고 관광지가 돼서 돌아간다.
우리 경우에 워낙 국경이 가까워서 서울역에서 개성이 60킬로다. 교량 하나 놓으면 인천공항에서도 개성이 60킬로다. 개성공단은 계획된 천만평에서 백만평만 쓴 거다. 거기 산도 있고 강도 있고 좋은데, 거기도 상관 없고, 아예 휴전선과 개성공단 사이에다 대규모 촬영장 겸 관광위락시설 등을 만들어놓아도 좋을 것이다.
북쪽이 관광업에 대한 노하우를 얻는 것도 있고, 우리의 경우는 굉장히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다. 자동차로 30분이면 간다. 거기 가서 촬영부터 마지막 후반작업까지 다 끝내버린다. 그러면서 서로 기술교류도 하고. 남쪽 경우에는 CG나 이런 것은 할리우드 것 받아서 할 정도로 발전이 돼 있다.
또 하나, 남쪽 영화인데 유실된 필름이 북쪽에 있다. 이게 왜 그러냐면, 우리가 영상자료 보관의 필요성을 잘 인식 안 해서 74년에 영상자료원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50년대, 60년대 필름이 망실된 게 많다. 그런데 그 망실된 작품 중에 상당량이 북쪽 국가영화문헌고에 있는 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워낙 영화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영상자료를 거기는 처음부터 모았다. 거기에 ‘남조선 영화’ 섹션이 있는 거다.
그 안에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 3’ 필름이 있다는 설이 있고,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 ‘만추’는 분명히 있다고 한다. “이건 민족자산이니까 우리 공유 좀 하자”, 북쪽에서 돈 한푼 안 들고 그냥 디지털 복사해서 넘겨주면 우리가 상영회를 한다. 북에서 우리가 퍼받는 게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심사안이기 때문에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우리가 말을 하면 들은 척을 안했다. 이번에는 이야기하니까 듣고 관심있어 했다. 우선 필름을 공유하고 이를테면, 부산영화제와 평양영화제가 자매결연을 맺어서 상호 돕자는 거다. 평창영화제에 북쪽 영화를 출품하고 개막식은 평창에서 하고 폐막식은 금강산에서 한다든지, 원산 갈마지구가 완공되면 평창과 갈마지구에 페리가 뜨면 공동개최를 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베를린 영화제에 ‘원 코리아’ 섹션을 만들자. 베를린 영화제 측도 동의했다. 금년 2월에는 너무 촉박해서, 영화를 출품할 수는 없고 심포지엄은 할 수 있다고 해서 진행하고 있다. 독일은 분단국이었기 때문에 거기 가서 유럽 문화계에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같이 살아야 하는데 너네 너무 째려보지 말고 우리 좀 도와주라” 이런 거를 베를린 영화제에서 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우선 영화제부터 교류하면 된다. 영화제는 작품만 오가고 한두 사람만 오가면 된다. 심사위원하고 발제자 정도. 북쪽도 부담이 없을 거다. 그게 좀 진행이 되고 나면 평양 세트장 활용과 로케이션 촬영도 가능할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강하게 북쪽에 제안하고 싶은 게 뭐냐면, 남쪽의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촬영감독하고 녹음감독 딱 두 사람만 데리고 평양에 가서 북쪽 영화사가 만드는 영화에 대본 작성 때부터 같이 참여해서 만드는 것이다. 남쪽 감독이 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이데올로기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업부터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남쪽 감독과 같이 해보면 단숨에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그게 불편하면, 남쪽의 세계적인 감독이 자기가 쓴 대본을 가지고 가서 북쪽 배우들하고 북쪽 스탭들하고 작업하는 거다. 물론 촬영과 녹음은 데리고 가야 한다. 촬영과 녹음은 완전히 상황이 너무 다르다. 나머지는 다 북쪽 인력을 가지고 영화를 한번 해보는 거다. 사람이 계속 만나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은 걸릴 것 같지만 그런 구상들을 하고 있다.
□ 평창 남북평화영화제는 올해 시작되나? 왜 8월인가?
■ 올해 8월에 제1회 영화제를 하는 거다. 다른 영화제들 일정을 고려하고 계절도 보고 8월로 잡은 거다. 남북이 궁극적으로 같이 가는 영화제는 시도된 적도 없다. 그런데 이번 평창 겨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해서 남북관계가 확 급진전된 됐다. 그 감격을 기념하고 유지 발전시키자는 거다.
그 다음에 강원도 입장에서는 강원도는 분구지역이다. 분단에 의해서 쪼개진 도고, 워낙 분단의 피해를 많이 본 지역이어서 도민들이 그 점을 굉장히 절절하게 많이 느끼기 시작한 거다. 금강산 막혀서 피해를 봤고, 평창에 북이 참가함으로 해서 덕을 봤고, 이런 걸 보면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도민들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도민의 협조가 있을 수밖에 없는 영화제가 된다.
우리 영화 쪽에서는 남북평화를 주제로 한 영화제가 없는데 일종의 교두보가 돼서 북쪽 영화와의 교류협력을 만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영화제가 되지 않겠는가. 궁극적으로 원산에 굉장히 큰 일종의 관광해변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영화제를 같이 가지고 가서 거기서 공동으로 하면 그쪽도 그냥 앉아서 홍보가 될 수 있는 측면도 있고 그러니까 장기적으로 좋을 것이다.
“공익근무는 충분히 성공했다”
▲ 시민정치운동에 '공익근무'를 마쳤다는 문성근 부이사장은 이미 남북 문화통합의 '공익근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 지난해 개관한 통일의 집은 잘 운영되고 있나?
■ 늘 돈이 문제다. 개보수할 때 많은 분들이 후원을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됐고,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 후원회원들 모집도 꾸준히 하고 있고, 가족들이 부담하는 부분도 있다. 한 달에 그래도 천여명 정도씩 온다. 학생들이 공부 차원으로 오기도 하고, 관객들이 있어서 뿌듯하게 생각한다.
□ 수유리 인근에 여운형 선생 묘도 있고 지역을 잘 연결하면 좋을 텐데.
■ 강북구가 그 생각을 한다. 4.19묘역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민주통일 순례길’을 강북구가 구상하고 있고 서울시도 구상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지나면 큰 그림이 만들어질 것 같다. 통일맞이가 주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 기념사업회 성격의 단체는 일반적으로 단체와 유족이 갈등이 있더라. 통일맞이는 가족과 단체가 일원화 돼 있나?
■ 그거는 좀 미묘한 측면이 있는데, 원래는 문호근이가 열심히 했고 문호근이 가고 제가 관계하게 됐다. 기념사업회와 가족과의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를테면 안창호 선생은 흥사단을 만들어 놓고 가셨고, 문목은 통일맞이를 두고 가셨는데, 대중의 뿌리깊은 조직체를 만들어놓고 가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이라는 것은 민주화와 통일운동 했던 사람들의 공동사업이어야 한다. 이건 가족사업일 수 없다’는 생각이 저는 강하다. 통일의 집은 일단 재산이 있기 때문에 사단법인이나 교회나 이런 것은 유한하고 가족은 대대로 무한하기 때문에 그 건물을 가족소유로 두는 게 맞다. 그래서 가족이 깊이 관계되는 통일의집을 만든 건데, 통일맞이의 경우에는 조직체의 존속과 운영은 민주와 통일운동 진영의 일종의 책무다. 민주와 통일운동을 했던 분들이 유지해야 되는 일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이후 정치적 행보를 할 계획은 없나?
■ 전혀 없다. 연기가 내 본업이니까. 그동안 일종의 시민정치운동을 하다보니까 본업을 거의 도외시하고 그쪽에 매달리게 된 세월이 한 16년이 됐더라. 2001년부터니까, 공익근무는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한 것 아니냐. 에너지도 떨어질 때 됐고 그러니까 본업에 충실할 생각이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다시 두 번째 기회를 맞으니까 문화예술계 전반에 계신 분들이 나한테 뭔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있고, 나는 문목 때부터 문화예술이 동질성 회복에 가장 좋은 접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이 일은 그냥 문목의 유업으로 알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민주정부 10년 때도 나한테 그런 주문을 해서 그런 일들을 그때도 조금 했었는데, 솔직히 북에서 응답이 없어서 아무런 실적을 낸 적이 없다. 이번에는 북쪽이 조금 변화한 모습이 감지돼서 좀 기대를 하는데, 여전히 체면을 구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성사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그 크기에 비해서 성사되는 일이나 이런 것들이 충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또 망신을 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그냥 해야 되는 일이니까 해볼 참인 거다.
□ 민주정부의 재집권을 바랄 텐데,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것처럼 앞으로 그런 일에 또 나서야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굳이 그렇게까지 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민주진보진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을 본다. 첫 번째는 소득주도 성장이 효과를 좀 내야 된다. 두 번째는 남북관계 개선이 남쪽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는 것을 국민들이 체감해야 된다. 합치면, 경제가 나아져야 하는데 그 최고의 수단은 남북관계 개선이고 그 다음은 소득주도 성장일 것이다.
세 번째는 민주진보진영의 정당들이 시민참여형 정당으로 바뀌어서 지지자와 정당 간의 일체감이 커져야 된다는 거다. 그래야 이 정권이 연장돼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활동가들이 늘어난다. 그게 내가 이야기했던 ‘시민참여형 네트워크형 정당’이라는 거다. 다른 표현으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정당이다. 그것을 위해서 2010년부터 국민의명령 운동을 했던 거다.
그 제안이 문재인 대통령의 2012년, 2017년 대선공약이 됐고, 민주당내 전당대회가 열리면 당대표 선출 때마다 후보들이 그 공약을 했다. 지금 이해찬 대표가 박주민 최고위원에게 그걸 맡겨서 해나가고 있다. 내가 주장했던 것들이 정치권의 공식의제로 채택이 됐고 불가역이다.
그런데 지금 ‘연애인 팬덤(fandom)’ 현상이 정치권으로 옮겨오면서 굉장히 복잡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정치권이 이 사람들의 심리나 행태를 잘 모른다. 연애인 사생팬클럽의 행태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그러니까 시민참여의 형태에 부정적인 효과가 두드러지고 있다. 그래서 속도를 늦출 위험성은 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은 대세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의제는 다 채택이 됐다.
나는 직업정치인이나 직업행정가가 될 욕망이 아예 없는 사람이어서 언제까지나 발런티어, 시민자원봉사자 행태를 보였다. 물론 출마도 했고 최고위원도 했지만 그것은 운동의 흐름에서 거기까지 가버린 거다. 일단 내 바람이 채택이 된 걸로 내 임무, 공익근무는 충분히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 문재인 정부도 촛불정신에 비하면 고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 지금은 경제 불평등 해소,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 그 첫 단계인 거고 통일단계까지는 수십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남북 교류협력의 안착과 경제불평등 해소,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대중들이 너무 표피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나 지금은 정권이 2년차 들어가다 보니까 일종의 피로도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우리가 갖는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인 것이지 않나. 우리 국민이 조금 참을성을 갖고 지켜보자. 이게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은 97년 IMF 전후에 완전히 다른 나라가 돼버린 거다. 97년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최악의,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구조 속에서 어떻게 개선을 해나갈 것이냐. 97년 이전이라면 훨씬 쉬웠을 건데, 훨씬 더 어려워진 환경 속에서 우리가 좀 나아지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걸 느끼고 응원해주는 수밖에 없는 거다.
□ 남북이 경제공동체에 더해 문화공동체, 민족적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특히 민주진보진영도 민족문제, 민족정체성에 소홀한 편인 것 같다. 개천절 공동행사의 경우 민주진보진영이 관심을 안 갖는 것 같다.
■ 자칫 ‘국뽕’ 같이 느낀다. 극우 같은 느낌이 드니까. 나는 정치운동하면서 제일 많이 느꼈던 게 뭐냐면, 이론은 현실에서 뽑아야 하는데 우리 지식인들은 외국에서 받아온 이론을 여기에 적용을 시키려 한다. 안 맞는 거다. 우리의 역사적인 배경과 국민적 특성이 있는데, 여기 맞춰야 되는데 그걸 못한다.
이를테면 ‘그래스루츠’(Grassroots, 풀뿌리 민중)라고 해서 인터넷과 SNS 이후에 여러 정치형태가 전 세계적으로 바뀌고 있다. 사실은 그걸 그동안 우리가 선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인식을 안 하고 자꾸 외국은 이렇다는 걸 소개한다. ‘포데모스’(Podemos, 스페인 좌파정당)가 어떻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이들이 문제다. 이를테면 국민의명령이 제안했던 제안서의 경우, 서구나 미국에서 변화하고 있는 정책들을 그대로 우리가 미리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렇게 해석해주지 않는다.
어쨌든 일단은 경제통합의 실이익을 국민이 느끼게 해야 한다. 두 개 국가체제를 인정하자는게 아니라, 당장은 관심이 경제에 집중돼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민족통일까지 가려면, 문화통합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문목이 통일맞이를 만든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다른 체제로 70년 넘게 살아와 이질화된 걸 극복하는 데에는 문화예술이 가장 효과적이다. 영화가 대표적이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