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 단종 소나무
평창군 북부 오대산 남쪽에서 나온 평창강과 횡성군 태기산 남쪽에서 나온 주천강이 영월 한반도지형에서 만나 서강이 된다. 이 서강이 영월읍으로 들어가기 전 검각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를 만나 한 바퀴를 기라죽이 휘도니 바로 청령포이다. 또 이 서강이 곧 영월읍에서 동강을 만나 남한강의 이름을 얻는데, 이곳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이고 청령포는 그 머리다.
아니다, 잠시나마 비운의 왕 단종(1441~1457)이 머문 곳이니 봉황의 머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처 날아오르지 못했고 지금도 엎디어 있다 생각하니, 열여섯에 생을 마감한 왕의 유배지였구나 하면서 가슴이 절절하다.
1452년 11살의 단종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재위 1년만인 1453년 10월 10일 숙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그렇게 모든 권력을 장악한 수양은 1454년 1월 단종과 송현수의 딸을 역시 강압적으로 맺어준다.
1455년 윤유월 11일이다. 마침내 단종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으니, 이제 대임을 영의정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며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물론 이것은 단종의 뜻이 아니다. 역시 수양대군과 그 측근들의 강압이었다.
상왕이 된 단종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의 집에 머물렀다, 역시 강압적인 연금상황이었다.
세조 3년(1457) 6월 1일로 정한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의 단종 복위 거사가 밝혀져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6월 21일 단종은 영월로 유배길에 올랐다. 아직 후사도 얻지 못한 정순왕후와도 왕심평대교에서 눈물로 헤어졌으니, 그 뒤 다리 이름도 영원히 건너간 다리,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영도교가 되었다.
관리 3명, 군졸 50명이 호위하는 삼엄한 유배 행차는 광나루를 건너 여주, 양평, 원주, 신림, 주천을 지나 배일치를 넘어 이레 만에 서강으로 내려섰다. 여기서부터는 실핏줄 같은 강변길이다. 서강이 크게 두 번 구부러지며 험상궂은 바위산 세 개가 선돌로 서 있는 그곳을 지나 마침내 단종은 청령포에 이르렀다. 청령포는 폭우에 물이 불으면 위험한 곳이다, 평상시에도 배가 없으면 오갈 수 없으니, 생각에 따라 창살 없는 감옥인 셈이다.
그해 10월 단종은 사약을 받았다. ‘조정 대신들이 노산군을 처형하라고 주장해 세조가 이를 윤허했는데, 사약이 내려지자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실록의 기록이다.
‘유배길에도 호송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번에는 사약을 들고 왔다. (중략)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 했다. (중략) 통인이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중략) 그때 단종의 나이 16세였다.’ 이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권 4의 내용이다.
이렇게 죽음만이 아니라, 관련된 여러 일이 정사와 야사가 다르고, 허구의 소설, 드라마처럼 해석도 분분하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곡학아세, 곡필, 허구가 아닌, 냉정, 냉철함과 판단이 필요하다. 충신과 난신, 영웅과 악인 등의 이분법은 오히려 비정한 권력의 속성을 감춰주고, 역사발전의 도움도 아니다. 하지만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으며 지켜본 관음송과, 머물던 어소를 향해 허리 굽혀 자란 충절송 앞에서는 그저 평안과 안식의 염원만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