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강 유적지 탐방
임병식 rbs1144@hanmail.net
한고을이 수천 수백년 동안 지속해 왔다면 남겨진 유물이 없을 수가 없다. 그동안 내가 거주하는 고장은 역사적인 도시인데도 이렇다할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도 땅속에 묻힌 것이 발견된 것이 별로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곳은 전라좌수영이 있던 것이고, 쇠를 녹여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말이 떠올랐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간 말로만 전해진채 실체가 감춰진 놋강 유적지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어제 발견이 되었는데 실로 5,60년 만이다. 이것의 발견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의미가 크다. 400년이 훨씬 넘은 것으로서 임란유적과도 바로 연결이 될 수 있는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이 유적지는 그동안 땅속에 묻혀져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시에서 마을 안길 개설 공사를 발주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드러났다. 도로에 편입된 땅을 굴착을 하자 슬러그(쇠똥) 형태로 쌓인 유적이 무더기로 나온 것이다.
이 발견소식을 듣고 나는 바로 현장에 나갔다. 이른 아침에 최초발견자인 임용식 문화원장이 전화를 주었던 것이다. 그는 소식을 전하며 목소리가 흥분되어 있었다. 내용인즉 옛날 임진왜란 때 병장기를 만들던 제철유적지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전하면서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아마도 내가 평소 이순신장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행적을 더듬는 글을 쓰기 때문인지 몰랐다.
해서 바로 서둘러 현장에 도착했다. 가서보니 유적지에는 함께 발견하고 시청에 알린 남영식 선생이 먼저 와 있었다. 그도 얼굴표정에 흥분이 가득했다. 그 슬러그 더미는 주위에 비해 다소 봉긋하게 솟은 밭둑 밑에 켜켜이 쌓여 있어서 쉽게 눈에 띄었다. 길을 내기 위해 가로질러 절개를 해놓으니 훤히 드러나 보였다.
그곳은 누가 보나 쇳물을 받아내고 버린 스러그 더미가 분명했다. 그 사이사이에는 불에 그슬린 화덕으로 쓰였음직한 돌도 함께 보였다. 그렇다면 필경 부근에 노(爐)의 터도 있지 않을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 봉산동 일대는 전부터 지명이 놋강요로 불리어 지며 예전에는 대형 고로가 7기나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틀림없이 나올 확률이 있어 보였다.
하나 인근은 집 담장과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있어 대대적인 발굴계획을 세워 작업을 하지 않는 한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허리를 곱혀 조그마한 슬러그 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운 것이 또한 엄중한 시기의 역사적 무게까지 실려져서 그것은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첫째는 이순신장군이 이곳에 자주 발걸음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당신은 현장답사를 철저히 하기로 유명했는데, 이곳에서 병장기를 만드는 제철을 가공하는 것을 늘 생각하지 않았을까. 둘러보면서 땀 흘러 일하는 백성과 군인들을 격려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여러 가지 구상을 했을 터이다. 거북선 상판위에 꽂을 도추(刀錐)를 구상하고, 각 총통별로 쓸 쇠 탄환의 크기며 수량도 가늠하지 않았을까. 또한 종포에서 돌산도로 건너지른 쇠사슬을 만들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또 하나 스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게 전시에 앞서서 무기와 병선을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데, 장군은 1597년 음력 2월 26일 조정의 명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압송되었다. 여기에는첩자의 공작과 간신배들의 시기도 보태졌다.
그렇지만 장군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그해 음력 4월 초하루 풀려났다. 혐의를 벗은 것이 아니라 적의 준동이 멈추지 않고 있어서였다. 패전을 거듭하던 원균은 마침내 7월 16일 칠천량 전투에서 전선 150여척을 잃고 대패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때 맞추어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선 12척을 감춰두고 몸을 피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이 나중에는 명량대첩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군인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받은 선조는 기가 막혔으리라. 그의 심정의 일단이 드러난 표현이 있다.“무슨 말이 있으리요”라고 말이다.
한편, 임금은 유서에서 “근자에 경을 직첩에서 물러나게 하고 죄를 지은 채 종군하도록 체벌한 것은 사람(선조)의 꾀가 두터웁지 못한데서 비록한 일”이라고 사과한다. 그러면서 “특별히 경을 상중(喪中)임에도 일으켜 세운다”고 했다. 이는 충무공 행록에 기록된 글이다.
장군은 음력 8월 3일 진양 수곡면 원대리 손경례의 사랑채에서 머물고 있을 때 다시 3도수군통제사의 직첩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남해안을 돌면서 군량미를 모으고 병장기를 수습하면서 보성에 이르러서 여수에 머물고 있는 우사 이몽구를 불렀다.
원균이 패퇴하면서 전선과 군량미를 불질렀다는 말을 듣고 이몽구도 전라좌수사의 병장기를 불살아 버렸다는 보고를 받은 터였다. 이때 군기를 지참하지 않고 온 그를 장군은 장 80대를 쳐서 다스렸다.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손수 놋강을 둘러보고 격려하면서 어렵게 장만한 병장기를 우매한 자들의 부족한 판단력으로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소실시키고 말았으니 얼마나 울화가 치밀었을까.
나는 슬러그가 발견된 현장에 서서 장군이 그 당시 비통해 했을 심정을 헤아려 보고 있었다. 그러한 데는 아마도 여기서 나온 철근이 중요한 무기를 만드는데 긴요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서였다.
나는 집어든 슬러그 조각을 보면서 이것은 한갓 버리진 쓰레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새겨볼 수록 얼마나 귀중한 군사유적이며 또한 유물인가. 그리고 나라를 지키고 구해내기 위해서 백성과 군인이 혼연일체가 되어 분투협력한 역사적 장소인가.
사철의 원료는 이곳에서 가까운 봉강동 서당 산에서 물량을 확보했다고 알려진다. 인근의 산에는 연료가 된 소나무도 풍부했을 테니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실로 그 규모가 3천 평에 이르렀다고 하니 대단위의 제철 작업소인 셈이다.
이런 곳이 말로만 무성했다가 처음으로 그 실체인 슬러그 더미가 드러났으니 유적지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마땅히 잘 보호하여 역사적 교육장으로 널리 홍보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나는 현장에 서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2017)
첫댓글 전라남도 여수시 봉강동 일대에서 그간 구설로만 전해 오던 임난 제철유적지를 발견하였으니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아 감격스럽습니다.
앞으로 쇠 가마솥과 유물이 더 많이 발굴되어 국난극복, 역사현장으로 박물관을 지어
국내외에 알리면 관광 상품 그리고 애국심 고취에 크게 기여하리라 생각합니다.
말로만 떠돌던 역사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니 감격스러웠습니다.
길을 내면서 우연히 발견이 되었는데, 언적배기 밭을 파보면 상당량의 스러그와 다른 놋강도 나올 확률이 있어 보였습니다. 잘 발굴하여 역사유적지로 보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확한 장소를 모르지만 봉산동이라니 떠오르는 지명이 작은섬 야도입니다 우리말로는 불무섬인즉 그 또한 제철작업을 연상케하는 지명이 아닐 수 없다 여겨집니다 의미심장한 유적발굴에 기대가 큽니다 여수는 여말부터 구국충절의 고장이었으니 이러한 유적이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을 잘 활용하면 여수의 문화자산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스러그를 다 파해치면 상당량이 될것으로 추측됩니다.
선생님의 유적지 탐방수필은 늘 압권입니다.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된 유적지를 탐방하고 글을 쓰시면 어떤 글이 나올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 봅니다.
이순신장군이 쓴 난중일기를 보면 쇠를 이용한 것들이 보이는데 아마도 여수 놋강에서 만든것을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적선을 전복시키기 위한 철쇠와 거북선위의 쇠못, 방장기를 만든 재료도 모두 쇠지요.
말로만 전해오던 그 유적지가 발견되었으니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