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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洞 鄭氏 家乘의 烈女(19세조 祐榮(우영)의 配)에 관한 記錄
다음은 영일정씨, 1세 감무공파 이어서, 6세 문정공파/ 8세 정숙공파/ 9세 판결사공파/ 11세 난년 진사공파(菊洞鄭氏)/ 17세 하언(대사간)파의 후손/ 19세 祖榮(조영)의 친 동생, 祐榮의 아내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다. 우리의 정 총리의 법률상 5대 祖考.妣 이기도 하다. 우리 후손은 열심히 위치를 찾는 노력을 기울여 보면 어떠 할가 생각하여 본다.
주인공은 충남 공주 이인 초등학교의 서쪽 5리, 달산리 한 야산에 부군과 함께 묻혀 있고, 정려각은 위치사료 불명이다.
原文;
弟生員君墓誌銘 / 형 조영(祖榮)이 먼저 간 동생 우영(祐榮)의 묘지명을 기록.
君 諱 祐榮, 字 汝受. 迎日之鄭 遠朔乎. 新羅 諫大夫, 諱 宗殷 中盛于.
麗季 平章事, 諱 思道. 我朝 知議政府事 諱 洪, 兵曹判書 貞肅公, 諱 淵 分派于. 貞肅之後 君, 其 十一世孫也. 曾祖 諱 堥 牧使, 祖 諱 夏彦 大司諫, 兩世俱 贈 吏曹參判. 考 諱 杆, 僉正, 至 同知中樞府事. 妣 貞夫人 安東金氏, 進士 養厚女也.
君以 (1769 영조 45년) 英宗 己丑 十二月 十五日生. 兒時 不喜讀書 及 冠自 勵數年 文藝 大進治功, 令赴擧宿儒 刮目 自以爲 不及也. 年二十一中, (1789 정조 13년) 正宗 己酉 司馬 後, 屢魁 泮試, 上召見輒 嘉獎 曰, 爾券 予 每見而 可知 命仰面 曰, 必有成矣 須勤 赴科試.
君 容貌秀頎眉目 淸朗, 性孝友 平生事爲 色辭未嘗, 或 違親志 父母於君 無所愚, 唯疾病是憂 嗜好意欲 壹視 其兄之爲 如一人也. 仁厚 沈重口無 擇言不喜與人 追逐非端士不交. 大諫公 文章才志 超邁時俗而 不肯 與世俯仰 脫棄名途 終於沈屈 及 君生先輩 有識 皆以爲 不食之 報於是在乎.
歲 (1797 정조 21년) 丁巳 六月 二十九日 忽罹感疾 卒, 得年 僅二十九. 後 其兄 祖榮 被選 泮試入, 上前 上問 爾弟安 在侍臣以夭, 對 上爲之愕然. 烏乎 生有美質 父母愛重, 君 上識其名 爲士友 所期待 如此, 人未三十 悲夫慟矣.
君配恭人 海平尹氏 議政 諱 斗壽之後 父 諱 成烈, 世推名士以 (1771 영조 47년) 辛卯 正月生 (1783 정조 7년) 癸卯嫁, 柔婉敬慎 動有懿度, 舅姑 深嘉之 君歿心誓下從, 外歛慽 容幽潛之處, 凡可死之物 無所不致 家人屢覺而 救境以此毁, (부군과 동년/ 같은 해 따라 자살)是年 十二月 初九日卒. 年少君二歲(27세) 夫死, 生之除 持志不易 積時月終, 容取盡 此 烈丈夫 之所難也 婦人能之 其善事, 舅姑睦娣姒 宜家人宜哉. 今上 ( 1812 순조 12년 壬申) 十二年 以烈行 聞旌閭.
君葬 公州 半灘之 月田里 向酉之原在, 先考 利仁墓 西南五里, 恭人 祔左同穴遂其志也. 余 不肖出後于 次子 宗君寔當嗣, 先君子而早亡 只一女而 無子, 先君 子命 不肖次子 堉爲君嗣. (1814 순조 14년) 歲甲戌 先君子下世, (다음해)乙亥 先夫人 繼卒, 不肖 冥頑如木石 苟活 至今 尙幸有堉也. 嗣君而 奉先祀 兄弟之子 猶而子, 君 亦 無憾於 冥冥也. 與堉生員 女嫡 平山申 命藻 今縣監, 內外孫 并有人之 相知莫如 兄弟而 兄弟之 辭不可溢, 只擧其略以誌.
墓銘 曰 爆然而盛 忽無迹 嗟哉, 人 不可無年 月之山兮, 君之宅 賢婦終焉.
先阡孔 爾川麓紆連 魂氣往于 晨昏慰 孝思於終天.
♠ 해설자 운권(雲權)의 붙임 말. ♣ 형 祖榮이 먼저 젊어 죽은 동생 祐榮에 관하여 기재 한 묘지명 이다.
음역 ;
제생원군묘지명 / 형 조영(祖榮)이 먼저 간 동생 우영(祐榮)의 묘지명을 기록.
군 휘 우영, 자 여수. 영일지정 원삭호. 신라 간대부, 휘 종은 중성우.
려계 평장사, 휘 사도. 아조 지의정부사 휘 홍, 병조판서 정숙공, 휘 연 분파우. 정숙지후 군, 기 십일세손야. 증조 휘 무 목사, 조 휘 하언 대사간, 량세구 증 리조참판. 고 휘 간, 첨정, 지 동지중추부사. 비 정부인 안동김씨, 진사 양후녀야.
군이 (1769 영조 45년) 영종 기축 십이월 십오일생. 아시 불희독서 급 관자 려수년 문예 대진치공, 령부거숙유 괄목 자이위 불급야. 년이십일중, (1789 정조 13년) 정종 기유 사마 후, 루괴 반시, 상소견첩 가장 왈, 이권 여 매견이 가지 명앙면 왈, 필유성의 수근 부과시.
군 용모수기미목 청랑, 성효우 평생사위 색사미상, 혹 위친지 부모어군 무소우, 유질병시우 기호의욕 일시 기형지위 여일인야. 인후 침중구무 택언불희여인 추축비단사불교. 대간공 문장재지 초매시속이 불긍 여세부앙 탈기명도 종어침굴 급 군생선배 유지 개이위 불식지 보어시재호.
歲 (1797 정조 21년) 정사 륙월 이십구일 홀리감질 졸, 득년 근이십구. 후 기형 조영 피선 반시입, 상전 상문 이제안 재시신이요, 대 상위지악연. 오호 생유미질 부모애중, 군 상지기명 위사우 소기대 여차, 인미삼십 비부통의.
군배공인 해평윤씨 의정 휘 두수지후 부 휘 성렬, 세추명사이 (1771 영조 47년) 신묘 정월생 (1783 정조 7년) 계묘가, 유완경신 동유의도, 구고 심가지 군몰심서하종, 외감척 용유잠지처, 범가사지물 무소불치 가인루각이 구경이차훼, (부군과 동년/ 같은 해 따라 자살)시년 십이월 초구일졸. 년소군이세(27세) 부사, 생지제 지지불이 적시월종, 용취진 차 열장부 지소난야 부인능지 기선사, 구고목제사 의가인의재. 금상 ( 1812 순조 12년 壬申) 십이년 이렬행 문정려.
군장 공주 반탄지 월전리 향유지원재, 선고 이인묘 서남오리, 공인 부좌동혈수기지야. 여 불초출후우 차자 종군식당사, 선군자이조망 지일녀이 무자, 선군 자명 불초차자 육위군사. (1814 순조 14년) 세갑술 선군자하세, (다음해)을해 선부인 계졸, 불초 명완여목석 구활 지금 상행유육야. 사군이 봉선사 형제지자 유이자, 군 역 무감어 명명야. 여육생원 여적 평산신 명조 금현감, 내외손 병유인지 상지막여 형제이 형제지 사불가일, 지거기략이지.
묘명 왈 폭연이성 홀무적 차재, 인 불가무년 월지산혜, 군지댁 현부종언.
선천공 이천록우련 혼기왕우 신혼위 효사어종천.
♠ 해설자 운권(雲權)의 붙임 말. ♣ 형 祖榮이 먼저 젊어 죽은 동생 祐榮에 관하여 기재 한 묘지명 이다.
해설문 ;
군(君/묘지명을 쓴 형, 祖榮의 친 동생인 祐榮)은 이름이 우영, 자는 녀수이다. 먼 옛날 영일지방을 본관으로 한 정씨이다. 신라 때, 간의대부 벼슬을 한, 이름이 종은으로 중간시조의 선조이다. 고려 말에는 평장사 벼슬을 한, 이름이 사도인 선조가 있다. 나(이글을 쓴 祖榮)의 조선에는 지의정부사 벼슬을 한, 이름 홍이 있고, 이어 병조판서인 정숙공 이름 연으로, 이 때 후손이 갈라졌다. 군은 정숙공의 11세 손이다.
증조의 이름이 무로, 벼슬은 목사. 조는 하언, 벼슬은 대사간. 증조와 조는 2세대의 추증이 되어 2분 다 이조참판이다. 고는 간, 첨정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이며, 비는 정부인 안동김씨로 양후의 딸이다.
군(우영/ 祐榮)은 (1769 영조 45년) 영종 기축 12월 15일 생으로, 어려서 공부를 아니하다가, 약관의 나이 이후 크게 벼슬길에 나아가고자 힘써 공부를 하여 학식과 덕을 갖추었으나, 과거에는 합격하지 아니하게 되던 중, 열심히 공부 한지 21세가 지나, (1789 정조 13년) 정종 기유 사마가 되어, 성균관에 먹고 자고하는 학생의 시험에서, 전체 중에 4등이 되다. 임금이 군의 성적을 본 후 바로 좋구나 하고는, 말 하기를 매번 나에게 보여 알려 주라면서, 얼굴을 들라 명하고는 모름지기 부지런히 공부하여 꼭 과거에 성공하라 말 하다.
군은 눈썹과 눈이 수려 한 용모로서, 청렴하며 명랑한 성품으로 여색에 들지 아니하여, 혹시 양친의 뜻을 거역 할까 하는 점에, 부모님은 걱정을 아니 하며 오직 아프지나 아니 하는 데만 염려 하고, 좋아 하는 것을 바라는 점은 일반인과 다른 것이 없다 형은 말하다. 어질고 후덕하여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말을 가려 신중히 하고 선비가 아니라도 잘 어울려 지내다. (할아버지) 대사간공이 문장이 좋고, 항간의 세속에 부화 뇌동 아니하며 세상을 살아 갔으니, 이점은 군의 선배와 같고 모범이 되고, 거짓이 아닌 다 참된 삶의 지식으로 이런 영향과 보답을 받아서 이렇게 된 것이라 하다.
군은 해로 (1797 정조 21년) 정사년 6월 29일 갑자기 질병에 걸려 죽으니 나이 29세이다. 이후 형 조형이 반시에 들어가 성균관에 있을 때, 임금을 마주하니 임금이 군의 안부를 묻기를, 너에 동생이 죽다니 하고 놀라 하다. 아하! 슬프도다, 군은 좋은 성품과 부모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임금도 사대부 벗과 같이 이렇게 (위의 안부) 알아 주거늘, 어찌 인생 30이 못 되어 죽었나, 참으로 애통하고 안타까운 사람이로다.
군의 배우자는 공인 해평 윤씨, 의정부의 관직에 오른 이름이 두수인 분의 후손이며, 이름이 성렬인 세상의 추앙을 받는 명사의 딸이다. (1771 영조 47년) 신묘 정월생으로, (1783 정조 7년) 계묘년(13세)에 시집오다. 외모는 아름다운 자태로 유연하며 행동거지는 삼가며 공경스럽다. 매우 아름다운 것일가 ! 군이 죽으니 굳건한 심정으로 뒤 따라 자결하다. 슬픔을 거둘 길도 마다하고 깊이 얼굴을 묻어버렸구나, 무릇 한 남자의 아내, 며느리로서 설자리가 없음을 심사숙고 하였는지, 이런 삶을 택하느니 이와 같이 죽는 것이 낳다는 결심인가 하다. 이 해 12월 초 9일에 죽으니, 죽은 군(남편)보다 2년(세) 적은 27세(만 26)에 죽다. 살아 생전에 지조로 보아, 이런 생애를 택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니, 대장부로서도 어려운 것이로다. 부인으로 그런 삶은, 능히 시부모와 시누이 형제를 잘 섬기는 일개 필부의 의당 한 일이 아닌가!
1812 순조 12년 임신 마침내 임금이 행실이 열녀와 같다는 소문을 듣고 동네 문 앞에 정려를 세우게 하다.
군의 장지는 (충남)공주 (탄천면에서 이인면으로 이관)반탄의 (달산)월전리 (시신이 머리는 동, 발은 서쪽)서향 (낮은 산야)언덕에 있고, (杆/간)선고의 (당시 이인역의 동백나무가 우거진 골짜기)이인묘에서 서남 5리 거리이다. (배우자)공인은 (낭군을 따라 죽은 지조를 따라)같은 묘에 함께 묻혔다.
(이글을 쓴 형 祖榮)/ 나는 낳아 준 아버지(杆/간)의 1자로 백부(樹/수)에 입적하여, 차자인 군(조영의 아우이고, 이글의 주인공, 祐榮/우영)이 대를 이어 종사를 하고 있으나, 자식이 일찍 죽어 없어, 나(祖榮)의 2자 육(堉)을 군(동생 祐榮)의 종사로 하다. 갑술년에 아들이 어려서 사망하니, 다음 해 을해년에 선부인(祐榮의 배우자, 堉의 養母)도 이어 사망하다.
내가 목석처럼 무딘 사람의 말 일지 모르나, 다행인 것은 (양)아들 堉이 선군의 대를 이어서 봉제사를 하게 된 것이다. 형제들의 자식은 같은 자식이라 하니, (동생 祐榮)/ 군은 슬퍼 아니하고 영원히 잠들 수 있겠구나! 堉은 생원이고 딸은 지금 적실로 현감인 평산신씨(平山申氏) 명조(命藻) 에 출가 하다. 자손은 내외손의 형제에 형제의 자식이 넘쳐나 그 수를 알수가 없을 정도여서, 다만 간략히 말하여 기록하여 둔다.
묘의 명을 새긴다. 폭포수 같이 왕성하게 살다 홀연히 흔적도 없이 살다간 군이 한탄스럽구나 ! 인생의 해도 달도 없는 나이도 먹지 아니하는 영원한 곳으로, 어진 부인과 함께 군은 세상의 삶을 마치고 잠들다. 군이 잠든 묘가의 산록과 옥천에 혼백의 기운이 감아돌고, 부모에 효도하고, 아내를 사모하는 군의 일생 영혼을 세상을 끝내고 감에 위로 하노라.
♠ 붙임 글 ; 兄 祖榮이 同生 祐榮의 靈魂을 慰勞 하는 墓誌銘이다.
글 쓴이 운권의 붙임 글; 국동정씨의 가승을 번역 중 발견하고 이 글을 올림니다.
첫댓글 아깝습니다. 오호통재라 오호애재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