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시집’에 대하여
나태주 시선집 <손바닥에 쓴 서정시> (분지출판사)
글 ․ 사진 / 윤승원(수필문학인,『문학관에서 만난 나의 수필』저자)
페이스북을 열었더니, 안현심 시인이 올린 따끈따끈한 최근 문단소식이 눈길을 끌었다. 충청남도 공주에 사는 나태주 시인이 한국시인협회장에 추대됐다는 소식이었다.
나태주 시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다시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라는 내용의 시 <풀꽃>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는 시인이다.
▲ 안현심 시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나태주 시인의 새로운 소식
워낙 유명한 시인이므로, 필자는 나태주 시인이 어느 문학단체의 장에 당선됐다는 소식은 새삼스러울 것도, 놀랄 일도 아니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책장에 꽂혀 있는 아주 작은 시집이 “저를 예뻐해 주셨잖아요. 다시 한 번 펼쳐 봐 주세요!”하질 않는가.
아니, 시집이 내게 손짓을 하다니,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시집이 내게 말을 걸다니, 사실, 이런 <책의 손짓>과 <책과의 대화>는 처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책장의 책들이 조용히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이미 수차례 경험했다.
법정 스님이 입적했을 때, 내 책장의『무소유』를 비롯한 수많은 법정스님 책들이 말을 걸어 왔고, 수필가 박연구 선생이 별세했을 때도 그분의 대표작『바보네 가게』등 수많은 책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시집이 앙증맞게 말을 걸어온 것은 드문 일이다. 이 세상에서 몸집이 가장 작은 시집(가로10cm 세로15cm)이다. 워낙 작은 책이라 다른 책들 사이에서 눈에 잘 띄지 않아 책장 칸막이 너른 공간에 눕혀 잘 모셔놨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시선집(가로 10cm, 세로15cm) - 책의 크기는 비록 작지만 80여편이 넘는 시가 담겼다.
체구는 비록 가장 작은 친구지만 내 책장에서는 진객(珍客) 대접을 받는다. 이사하면서 한 트럭분의 책을 정리할 때도 이 작은 친구는 나를 졸졸 따라왔다.
아니다. 따라온 게 아니라 모셔왔다. “제발 나도 좀 데려가~” 라고 애원해서 이 시집을 이사 올 때 버리지 않고 데려온 게 아니라 ‘귀엽고 예뻐서’ 모셔왔다.
그렇게 ‘귀한 손님’으로 이 친구를 모셔온 까닭은 다름 아니다. 이 작은 시집에 실린 80여 편의 시 중에서 유독 2편의 시를 접어놓았다.
1993년에 이 시집을 샀으니까 필자가 현직 경찰관으로 충남지방경찰청에서 근무할 때다. ‘문경서적’에서 샀다. 문경서적은 충남도경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서점으로 틈이 날 때마다 들르는 단골 서점이었다.
▲ <문경서적>에서 판매한 책이라는 흔적이 남아 있다.
▲ 책을 사면 책 구입날짜를 책의 맨 앞 장에 적어놓는다.(1993.1.25.구입)
▲안현심 시인이 발행인으로 돼 있는 분지출판사에서 나태주 시인의 시선집이 나왔다. 값 2,200원(1992.12.20)
심신이 몹시 고단했던 경찰관 시절이었다. 심신이 고단하면 사우나탕이나 어디 조용한 수면실로 가야하는데, 나는 가까운 서점으로 달려갔다. 서점에 가서 시집과 수필집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다. 희한하게도 시와 수필이 나의 누적된 피로를 풀어주었다. 마약 성분(?)이라도 책 속에 들어있었던 걸까?
다시 나태주 시집 이야기로 돌아가자. 80여 편의 시 중에서 유독 2편의 시를 접어놓은 이유는 뭘까? 그 당시 왜 요 페이지를 접어 놓았을까? 기억을 더듬으면서 다시금 책을 펼쳐 읽어보는 것도 책을 읽는 또 다른 맛이다. 그 맛을 좀 보자.
국민학교 선생님
아이들 몽당연필이나
깎아주면서
아이들 철없는 인사나 받아가면서
한세상 억울한 생각도 없이
살다 갈 수만 있다면
시골 아이들 손톱이나 깎아주면서
때 묻고 흙 묻은 발이나
씻어주면서 그렇게
살다 갈 수만 있다면.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이 두 편의 시는 어려울 것이 없는, 쉽게 읽히는 시다. 쉽게 읽히는 시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치원생 손자에게 읽어주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재미있고 맛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시는 이렇게 어머니의 행주치마처럼 정감이 넘치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고 평소 생각해 왔다. 나태주 시인의 시가 다 그렇다. 대체 무슨 뜻인지 해석이 안 되어 고개를 갸우뚱해 가면서 읽히는 난해한 시는 한 편도 없다. 많은 국민들이 나태주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심신이 파김치가 되어 휴식 공간을 찾아야 할 현직 경찰관이 서점에서 이 작은 시집을 발견하고 잠시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면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까? 아니다.
약국에 가서 피로회복에 좋은 드링크 한 병 사 먹는 값보다 더 싼 시집이었다. 이사를 아무리 다녀도 내 책장에서 도저히 밀어낼 수 없는, 잘 모시고 다녀야 할 진객(珍客)이다. ■
2020.2.16.
첫댓글 저도 시집에게 말을 걸어 봅니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은 만명의 스승을 모시는 것과 같다는 명구를 어느 서점 현판에서 보았습니다. 좋은 책을 만나는 즐거움은 좋은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책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 전에 책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보는 것도 좋은 습관입니다. 감사합니다.
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킨 사례보다 책이 사람을 변화시킨 사례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책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책을 한 권 만드는데 수백그루의 나무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나무의 효용가치를 생각할 때 책처럼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저자는 그래서 책을 잘 만들어야 하고, 독자는 그래서 책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저는 시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만 시는 온 세상의 물정과 인간, 그리고 자연데 대한 상상력을 응집해 놓은 언어의 에끼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집을 보면 시가 가장 첫 부분을 차지합니다. 시는 난해하기 때문에 시에는 시를 지은 배경이나 연유를 적어 놓기도 합니다. 시는 인간의 보편성을 함축해 놓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읽힙니다. 나태주 시인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문경서점도 제가 전일 자주 들리던 서점입니다. 두 편의 시를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태주 시인은 충남 서천 출신인데 공주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오래 근무하면서 교장으로 퇴임한 후 공주문화원장을 지냈습니다. 공주에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문학관'도 있습니다. 그분은 국내에서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시집을 내고 있는 저명 시인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