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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좌 -24강 [전국비구니회관(법룡사)]
第五 文殊師利問疾品(문수사리문질품).
8, 속박과 해탈. 9, 보살행
8. 속박과 해탈
何謂縛(하위박)이며 何謂解(하위해)오
貪着禪味(탐착선미)는 是菩薩縛(시보살박)이요
以方便生(이방편생)은 是菩薩解(시보살해)니다
又無方便(우무방편)인 慧(혜)는 縛(박)이요
有方便(유방편)인 慧(혜)는 解(해)며 無慧(무혜)인
方便(방편)은 縛(박)이요 有慧(유혜)인 方便(방편)은 解(해)니
何謂無方便慧縛(하위무방편혜박)고 謂菩薩(위보살)이
以愛見心(이애견심)으로 莊嚴佛土(장엄불토)하며
成就衆生(성취중생)호려하야
於空無相無作法中(어공무상무작법중)에 而自調伏(이자조복)이
是名無方便慧縛(시명무방편혜박)이며
何謂有方便慧解(하위유방편혜해)오
謂不以愛見心(위불이애견심)으로 莊嚴佛土(장엄불토)하며
成就衆生(성취중생)호려하야
於空無相無作法中(어공무상무작법중)에 以自調伏(이자조복)하되
而不疲厭(이불피염)이 是名有方便慧解(시명유방편혜해)라
何謂無慧方便(하위무혜방편)은 縛(박)고 謂菩薩(위보살)이
住貪欲瞋恚邪見等諸煩惱而植衆德本(주탐욕진에사견등제번뇌이
식중덕본)은 是名無慧方便縛(시명무혜방편박)이며
何謂有慧方便解(하위유혜방편해)오
謂離諸貪欲瞋恚邪見等諸煩惱而植衆德本(위이제탐욕진에사견등
제번뇌이식중덕본)하야
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회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是名有慧方便解(시명유혜방편해)니라 文殊師利(문수사리)여
彼有疾菩薩(피유질보살)이 應如是觀諸法(응여시관제법)이니다
又復觀身(우부관신)의 無常苦空非我(무상고공비아)가
是名爲慧(시명위혜)요 雖身有疾(수신유질)이나
常在生死(상재생사)하야 饒益一切(요익일체)하되
而不疲厭(이불피염)이 是名方便(시명방편)이며
又復觀身(우부관신)하되 身不離病(신불리병)하고
病不離身(병불리신)이라 是病是身(시병시신)이
非新非故(비신비고)가 是名爲慧(시명위혜)요
設身有疾(설신유질)이나 而不永滅(이불영멸)이
是名方便(시명방편)이라
文殊師利(문수사리)여 有疾菩薩(유질보살)이
應如是調伏其心(응여시조복기심)하되 不住其中(부주기중)하며
亦復不住不調伏中(역부부주부조복중)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若住不調伏心(약주부조복심)이면 是愚人法(시우인법)이요
若住調伏心(약주조복심)이면 是聲聞法(시성문법)이라
是故(시고)로 菩薩(보살)이 不當住於調伏(부당주어조복)ㆍ
不調伏心(부조복심)이니
何謂縛(하위박)이며 何謂解(하위해)오?
무엇을 속박이라 하고, 무엇을 해탈이라 하는가?
貪着禪味(탐착선미)는 是菩薩縛(시보살박)이요.
아~ 禪味. 딱~ 앉아서 그냥 ‘세월아 가거라ㆍ오너라.’ 하고 그렇게 貪着
하고 있는 것은 보살의 속박이고
以方便生(이방편생)은 是菩薩解(시보살해)니다,
방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왕성하게 활동을 펴는 것은, 이것은 보살의 해탈이다. 아~ 근사하지요? 貪着禪味는 是菩薩縛이요 以方便生은 是菩薩解니라.
又無方便(우무방편)인 慧(혜)는 縛(박)이요,
방편 없는 지혜는 속박이고,
有方便(유방편)인 慧(혜)는 解(해)며, 방편이 있는 지혜는 해탈이다.
無慧(무혜)인 方便(방편)은 縛(박)이요,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고,
有慧(유혜)인 方便(방편)은 解(해)니,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탈이다.
何謂無方便慧縛(하위무방편혜박)고? 무엇을 방편 없는 지혜의 속박이라고 하는가? 謂菩薩(위보살)이 以愛見心(이애견심)으로 莊嚴佛土(장엄불토)하며, 이를테면 보살이 愛見心으로서 불토를 장엄하며,
成就衆生(성취중생)호려하야, 중생을 성취하려고 해서
於空無相無作法中(어공무상무작법중)에 而自調伏(이자조복)이,
空ㆍ無相ㆍ無作法중에서 스스로 調伏하는 이것이 是名無方便慧縛(시명무방편혜박)이며, 이름이 無方便慧속박이다. 방편 없는 지혜만 속박이다.
아,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愛見心. 그렇지요. 우리가 그저 정으로, 아주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이것은 곤란한 것이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또
何謂有方便慧解(하위유방편혜해)오?
무엇이 방편이 있는 지혜의 해탈이냐?
謂不以愛見心(위불이애견심)으로, 이를테면 不以愛見心으로
莊嚴佛土(장엄불토)하며, 成就衆生(성취중생)호려하야,
愛見心으로써 불토를 장엄하지 않고 衆生을 成就호려해서
於空無相無作法中(어공무상무작법중)에 以自調伏(이자조복)하되,
空ㆍ無相ㆍ無作法중에 스스로 調伏하되,
而不疲厭(이불피염)이 是名有方便慧解(시명유방편혜해)라.
疲厭하지 않는 이것이 방편 있는 지혜의 해탈이니라.
何謂無慧方便(하위무혜방편)은 縛(박)고?
무엇이 지혜 없는 방편의 속박이냐?
謂菩薩(위보살)이 住貪欲瞋恚邪見等諸煩惱而植衆德本(주탐욕진에사견등제번뇌이식중덕본)은, 이를테면 보살이 貪欲ㆍ瞋恚ㆍ邪見等 모든 번뇌에 머물러서 온갖 德本을 심는 것은
是名無慧方便縛(시명무혜방편박)이며, 이것은 이름이 無慧方便縛이니라.
지혜가 없는 방편의 속박이다. 이것 자세히 설명하면 참 재미있는 이야기인데요? 모두 돌아가셔서 복습할 때 잘 공부하시기 바라고요.
何謂有慧方便解(하위유혜방편해)오? 무엇이 지혜가 있는 방편의 해탈인가?
謂離諸貪欲瞋恚邪見等諸煩惱而植衆德本(위이제탐욕진에사견등제번뇌이식중덕본)하야, 이를테면 貪欲ㆍ瞋恚ㆍ邪見等 모든 번뇌를 떠나서 온갖 德本을 심어서 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회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은,
是名有慧方便解(시명유혜방편해)니라. 이것의 이름이 有慧方便解.
지혜가 있는 방편의 해탈이니라.
文殊師利(문수사리)여 彼有疾菩薩(피유질보살)이 應如是觀諸法(응여시관제법)이니다. 문수사리여 저 병든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할 지니라.
또 지혜와 방편입니다.
又復觀身(우부관신)의 無常苦空非我(무상고공비아)가 是名爲慧(시명위혜)요. 또 다시 몸의 苦ㆍ空ㆍ無我를 觀하는 이것이 지혜가 된다.
雖身有疾(수신유질)이나, 비록 몸에 병이 있지만, 그러나
常在生死(상재생사)하야, 항상 생사에 있어서
饒益一切(요익일체)하되, 일체중생들을 饒益하게 하되
而不疲厭(이불피염)이 是名方便(시명방편)이며,
疲厭하지 않는 것, 이것의 이름이 방편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몸에 병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는 모르고ㆍ자기는 어리석고ㆍ자기는 무식하고 하더라도, 보살심이 있어가지고서 ‘어떻게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이익을 줘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지칠 줄 모른 겁니다. 지는 캄캄하고ㆍ지는 어리석으면서도 그저 자비심 하나가 넘쳐나 가지고, 저 강물이 흐르듯이 가슴 속에 자비심이 흘러넘치면 이것 감당 못하는 겁니다. 남 돕고 싶어서 자기 공부할 겨를이 없습니다. 자기도 공부하고 싶지요. 그렇지만 여러 스님들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서 저 후원에서ㆍ저 사무실에서 열심히 돕고 있는 사람들... 그것 참 중요한 일이지요.
又復觀身(우부관신)하되, 또 다시 이 몸을 관하되
身不離病(신불리병)하고, 몸이 병을 떠나지 않고
病不離身(병불리신)이라. 병이 몸을 떠나지 아니함이라.
是病是身(시병시신)이, 이 병ㆍ이 몸이
非新非故(비신비고)가 是名爲慧(시명위혜)다.
이것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또 옛날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생각이다. 設身有疾(설신유질)이나 而不永滅(이불영멸)이,
설사 몸에 병이 있다 하더라도 영원히 그 병이 없어지지 아니할 줄 아는 것.
是名方便(시명방편)이라. 이것이 이름이 방편이다. 그까짓 것, 병 무시하고 사는 겁니다. 병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文殊師利(문수사리)여 有疾菩薩(유질보살)이, 병든 보살이
調伏其心(응여시조복기심)하되, 應如是 그 마음을 항복 받을지니
不住其中(부주기중)하며 亦復不住不調伏中(역부부주부조복중)이니,
그 가운데 머물지도 말고 또한 다시 不調伏. 조복하지 않는 다는 가운데서도 머물지 말지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若住不調伏心(약주부조복심)이면, 만약에 住不調伏心. 조복하지 않는다는 마음에 머물 것 같으면 是愚人法(시우인법)이요.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법이요. 若住調伏心(약주조복심)이면 是聲聞法(시성문법)이라.
만약에 조복심에 머물 것 같으면 이것은 聲聞法이다. “조복해야 된다ㆍ조복해야 된다.” 해서 딱 그 절차대로 그렇게 하는 것은 이것은 성문법이다.
是故(시고)로 菩薩(보살)은 不當住於調伏(부당주어조복)ㆍ不調伏心(부조복심)이니라. 조복한다느니ㆍ조복하지 않는다느니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아~ 참! 못해도 시원하네요. 법문은 시원해요. 참 좋아요.
그 다음에 보살행. 중도적 보살행입니다. 보살행의 중도. 조복과 불 조복.
9. 보살행
離此二法(이차이법)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니다
在於生死(재어생사)하되 不爲汚行(불위오행)하고
住於涅槃(주어열반)하되 不永滅度(불영멸도)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非凡夫行(비범부행)이요 非聖賢行(비성현행)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非垢行非淨行(비구행비정행)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過魔行(수과마행)이나 而現降伏衆魔(이현항복중마)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求一切智(구일체지)하되 無非時求(무비시구)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觀諸法不生(수관제법불생)이나 而不入正位(이불입정위)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觀十二緣起(수관십이연기)나 而入諸邪見(이입제사견)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攝一切衆生(수섭일체중생)이나 而不愛着(이불애착)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樂遠離(수악원리)나 而不依身心盡(이불의신심진)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三界(수행삼계)나 而不壞法性(이불괴법성)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於空(수행어공)이나 而植衆德本(이식중덕본)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無相(수행무상)이나 而度衆生(이도중생)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無作(수행무작)이나 而現受身(이현수신)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無起(수행무기)나 而起一切善行(이기일체선행)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六波羅密(수행육바라밀)이나 而遍知衆生(이변지중생)의
心心數法(심심수법)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六通(수행육통)이나 而不盡漏(이불진루)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四無量心(수행사무량심)이나 而不貪着生於梵世(이불탐
착생어범세)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禪定解脫三昧(수행선정해탈삼매)나
而不隨禪生(이불수선생)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四念處(수행사념처)나
不畢竟永離身受心法(불필경영리신수심법)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四正勤(수행사정근)이나 而不捨身心精進(이불사신심정진)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四如意足(수행사여의족)이나 而得自在神通(이득자재신통)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五根(수행오근)이나 而分別衆生(이분별중생)의
諸根利鈍(제근이둔)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五力(수행오력)이나 而樂求佛十力(이락구불십력)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七覺分(수행칠각분)이나 而分別佛之智慧(이분별불지지혜)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八正道(수행팔정도)나 而樂行無量佛道(이락행무량불도)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止觀助道之法(수행지관조도지법)이나 而不畢竟(이불필경)에
墮於寂滅(타어적멸)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行諸法不生不滅(수행제법불생불멸)이나 而以相好(이이상호)로
莊嚴其身(장엄기신)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現聲聞辟支佛威儀(수현성문벽지불위의)나
而不捨佛法(이불사불법)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隨諸法究竟淨相(수수제법구경정상)이나
而隨所應(이수소응)하야 爲現其身(위현기신)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觀諸佛國土(수관제불국토)가 永寂如空(영적여공)이나
而現種種淸淨佛土(이현종종청정불토)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雖得佛道(수득불도)하야 轉於法輪(전어법륜)하고
入於涅槃(입어열반)이나 而不捨於菩薩之道(이불사어보살지도)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니다 說是語時(설시어시)에
文殊師利所將大衆(문수사리소장대중)에
其中八千天子(기중팔천천자)가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러라
離此二法(이차이법)이, 이 두 가지 조복과 불 조복, 말하자면 떠나는 이것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니다. 이것이 보살행이니
在於生死(재어생사)하되 不爲汚行(불위오행)하고,
生死에 있으면서도 생사에 물든 행을 하지 않고
住於涅槃(주어열반)하되 不永滅度(불영멸도). 열반에 머물되 영원히 滅度하지 않는 것.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이것이 보살행이다.
열반 다 안다 말이야, 그렇지만 열반에 그렇게 오래 연연해하지 않아. 이것이 보살이야.
非凡夫行(비범부행)이요 非聖賢行(비성현행)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범부행도 아니요 현성의 행도 아닌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非垢行非淨行(비구행비정행)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垢行.
더러운 행도 아니요, 청정행도 아닌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過魔行(수과마행)이나 而現降伏衆魔(이현항복중마)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지나간 마군의 행도 아니고, 또 현재에 온갖 마군을 항복 받는 이것이 보살행이다.
求一切智(구일체지)하되 無非時求(무비시구)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일체 지혜를 구하되, 無非時求. 때마다 구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혜를, 계속 끊임없이 지혜를 업그레이드 시켜야 됩니다. 끊임없이... 계속 상승시켜야 됩니다. 높이고ㆍ높이고ㆍ또 높여야 됩니다.
雖觀諸法不生(수관제법불생)이나, 諸法不生을 비록 관하기는 하나
而不入正位(이불입정위)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正位에 들어가지 않는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觀十二緣起(수관십이연기)나, 12연기를 비록 관찰하지만
而入諸邪見(이입제사견)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모든 사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雖攝一切衆生(수섭일체중생)이나, 일체 중생을 포섭하지만
而不愛着(이불애착)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애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雖樂遠離(수악원리)나, 비록 즐거움을 遠離. 멀리 여의는 것으로 즐거워 하기는 하나 而不依身心盡(이불의신심진)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몸과 마음이 다함을 의지 하지 않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三界(수행삼계)나, 비록 삼계를 행하나
而不壞法性(이불괴법성)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於空(수행어공)이나, 비록 空. 공의 이치를 행하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而植衆德本(이식중덕본)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온갖 德의 근본을 심을 줄 아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이 좋은 말이네요.
어제 중도 송(13강). 거기에 나온 말이기도 합니다.
雖行無相(수행무상)이나, 비록 無相을 행하나
而度衆生(이도중생)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일체 중생들을 제도를 하는 이것이 보살행이다. “다 아무것도 없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중생들을 위해서 자비심을 베푸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無作(수행무작)이나, 비록 無作을 행하나
而現受身(이현수신)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受身을 나타내는, 몸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無起(수행무기)나, 비록 無起를 행하지만
而起一切善行(이기일체선행)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일체 선행을 일으키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그러니까 空ㆍ無相ㆍ無作이런 것을 가지고 차원 높게 해석하는 것이, 이 유마경입니다.
다른 어떤 사전적인 해석은, 이런 것은 거의 소승 교리로 설명해놨습니다. 유마경설명하고 다르지요.
雖行六波羅密(수행육바라밀)이나, 비록 육바라밀을 행하나
而遍知衆生(이변지중생)의 心心數法(심심수법)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중생들의 心心數法을 환히 아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그러니까 육바라밀을 행하려면 이것 전부 心王心所(심왕심소)ㆍ五位七十五法(오위칠십오법)ㆍ五位百法(오위백법). ←이런 것을 환히 알아가지고, 인간의 속성들을 꿰뚫어봐야 제대로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보살이다.
雖行六通(수행육통)이나, 비록 六通을 행하나
而不盡漏(이불진루)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漏를 다 하지 않은 것. 번뇌를 다 하지 않은 것.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四無量心(수행사무량심)이나, 비록 四無量心을 행하나
而不貪着生於梵世(이불탐착생어범세)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梵世에 태어남을 貪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禪定解脫三昧(수행선정해탈삼매)나, 비록 禪定ㆍ解脫ㆍ三昧를 행하지만 而不隨禪生(이불수선생)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禪을 따라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보통 무슨 몇 聖天(성천)에 태어나고ㆍ몇 聖天에 태어나고, 그런 소승교리 많잖아요. 그것을 부정하고 반박하는 내용들입니다. 거의가 그런 내용들입니다. 시간이 많으면 소승교리 하고 딱딱 배대 시켜서 그것을 부정하고 잘못된 소견이라는 것을 꼬집는 그런 것을 이야기해서 분석하면 좋은데 그만 이쯤 하겠습니다.
雖行四念處(수행사념처)나, 비록 四念處를 행하나
不畢竟永離身受心法(불필경영리신수심법)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畢竟에 身受心法. 그것을 영원히 떠나지 않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四念處 = 身受心法이잖아요.
雖行四正勤(수행사정근)이나, 비록 四正勤을 행하나
而不捨身心精進(이불사신심정진)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身心精進을 버리지 않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수행사여의족)이나, 四如意足을 비록 행하지만
而得自在神通(이득자재신통)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神通에 自在함을 얻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五根(수행오근)이나, 비록 五根을 행하지만
而分別衆生(이분별중생)의 諸根利鈍(제근이둔)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중생의 諸根利鈍을 분별하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五力(수행오력)이나, 五力을 비록 행하지만
而樂求佛十力(이락구불십력)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부처님의 十力을 즐겨 구하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七覺分(수행칠각분)이나, 비록 七覺分을 행하지만
而分別佛之智慧(이분별불지지혜)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부처님의 智慧를 분별하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八正道(수행팔정도)나, 八正道를 비록 행하지만
而樂行無量佛道(이락행무량불도)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無量佛道. 팔정도뿐 만이 아니고, 無量佛道를 즐겨 행하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行止觀助道之法(수행지관조도지법)이나,
止觀과 助道의 法을 비록 행하지만 而不畢竟(이불필경)에 墮於寂滅(타어적멸)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필경에 寂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대개 止觀이나 37조도품은 寂滅에 떨어지는 것이고,
寂滅을 향한 그런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 아주, 그것하고 연관 시켜서 논문을 써도 아주 좋은 논문이 될 수 있는 소재입니다.
雖行諸法不生不滅(수행제법불생불멸)이나,
비록 諸法이 不生不滅한 것을 행해, 그렇지만
而以相好(이이상호)로 莊嚴其身(장엄기신)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相好로써 그 몸을 장엄할 줄 아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몸이 없는 줄은 잘 관찰해요. 鑒無身而具相(감무신이구상)이라고 그랬지요?
無身을 잘 관찰하지만 그렇지만 相을 갖출 줄 알아라. 그대로 해놨네요. 相으로써 장엄할 줄 아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現聲聞辟支佛威儀(수현성문벽지불위의)나, 비록 聲聞ㆍ辟支佛의 위의를 나타내긴 하지만 而不捨佛法(이불사불법)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불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隨諸法究竟淨相(수수제법구경정상)이나,
비록 諸法이 究竟에 가서는 공상. 텅 비다 이 말입니다. 淸淨相.
淨相이라고 하는 것은 空이라는 뜻입니다. 공상이라고 하는 것을 따르지만, 그러나
而隨所應(이수소응)하야 爲現其身(위현기신)이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應하는 바를 따라서 나타내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空만 자꾸 이야기 하고 더 이상 딴 생각 아니 하면, 이것은 문제가 있는 思考(사고)다 하는 것입니다. 원만 하지 못한 것이지요.
中道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원만과ㆍ조화와ㆍ융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원만ㆍ조화ㆍ융화. 中道의 목표는 그겁니다. 원만한 삶ㆍ조화로운 삶ㆍ또 융화로운 삶.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지극히 치우쳐버리면 그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ㆍ가장 값진 불법을 공부하는 불자의 思考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불자의 思考는 가장 열려있어야 되고ㆍ가장 트여있어야 되고ㆍ가장 밝아야 되고ㆍ가장 조화로워야 되고ㆍ가장 융통자재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원칙을 함부로 무너뜨리자는 뜻은 아니고요. 규칙과ㆍ청규와ㆍ원칙은 잘 살리면서, 그러면서 융통자재하고ㆍ조화롭고ㆍ그래서 화목하고.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목이 우선입니다. 옳고 그른 것, 아무 의미 없습니다. 잘하고 잘못 한 것, 별 의미 없습니다. 화목이 우선입니다.
그래 부처님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처음에 “너희들 화목하냐?” 그것부터 물었잖아요. “너희들 화목하냐?” 공부 잘하고 못하고 문제 아니다 말입니다.
화목하게 지내느냐? 안 지내느냐? 화목하게 지낼 줄 모르면 공부 아무리, 하늘을 나는 공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공부의 목적이 뭔데요? 사람과 사람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계 설할 때에ㆍ포살할 때에
“너희들 화목하냐?” 하는 것부터 묻는 이것이 너무너무 큰 교훈입니다.
대중생활에 있어서도 특히 잘잘못 너무 따질 필요 없습니다.
그저 화목이 우선입니다. 좀 봐 줘야 됩니다. 봐 주고 화목하고요. 자기잘못 자기가 더 잘 아니까요. 그리고 먼저 情을, 가르치는 사람은 교실에 들어갈 때, 情을 가슴에 담뿍 담고 가세요. 情을 담뿍 담고 가가지고, 先情後敎(선정후교)라. 저는 ??를 정말 좋아해요. 먼저 정이고 그 다음에 가르침입니다.
情이 있고나서 그 정에 의해서 말 한마디ㆍ한마디가 나가야 그것이 가르침이 먹혀들어갑니다. 귀에 들어간다고요. 先情後敎. 참 좋은 말이지요.
佛書(불서)만 좋다고 자꾸 그럴 것이 아니라 가끔 儒書(유서)도 봐야 됩니다. 가끔 그런 기가 막힌 말이 있습니다.
雖觀諸佛國土(수관제불국토)가 永寂如空(영적여공)이나,
비록 모든 부처님의 국토가 영원히 空하고 적멸해서 공과 같은 줄을 잘 관찰해 알아, 而現種種淸淨佛土(이현종종청정불토)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며,
그렇지만 가지가지로 청정한 불토를 나투는 것이, 이것이 보살행이다.
雖得佛道(수득불도)하야 轉於法輪(전어법륜)하고 入於涅槃(입어열반)이나, 비록 佛道를 얻어서 法輪을 굴리고 열반에 들어가나, 그러나
而不捨於菩薩之道(이불사어보살지도)가 是菩薩行(시보살행)이니다.
보살의 도를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다. 그렇지요. 法輪굴리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 다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보살이 행할 바를 버리지 않는 것. 보살도를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일이다.
성불해서 뭐하자고요? 보살행하자고요. 보살행하자고 성불하는 겁니다.
이것이 보살행이다.
說是語時(설시어시)에, 이 말을 할 때에 文殊師利所將大衆(문수사리소장대중)에, 문수사리가 거느린 대중.
其中八千天子(기중팔천천자)가, 그 가운데 8000천자가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러라.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더라.
유마경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Q ........................
(질문 내용은 잘 안 들려서 녹취 못하겠습니다. 답변을 보시면 질문 내용이 유추 되리라 봅니다.)
Re 불교의 특징은 수행에 있습니다. 그런데 또 너무 수행일변도로만 나가고,
사회에ㆍ제반문제에 도외시 한다고 하는 것도, 그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마경의 특징이 조화 아닙니까? 말하자면 세상과 출세간의 조화를 정말 아름답게 표현하고, 불교의 다양한 문제들을 아주 깊이 있게 말씀하시면서 그 중에서 궁극은 조화입니다. 조화는 중도라고도 할 수가 있고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이 출세간법을, 출세간인 보다도 더 정말 멋지게 표현한 것이 유마경이잖습니까? 우리는 “불교의 특징은 수행에 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수행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일까?’ 제 강의 중에 “열심히 포교하고ㆍ전법하고ㆍ신도들을 이끌어서 기도하고ㆍ불교로 안내하는 그런 과정에서 내 수행이 된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이라고 하는 이 화두를 놓치지 않는 상태에서 열심히 세상과 더불어ㆍ 또 중생과 더불어 함께할 줄 아는 거기에서 답이 나오리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행을 잘못 알고, 그저 세상을 등지고 정말 세상하고 관계없이 그렇게 사는 세월을 오래 보내다 보니까 세상을 몰라요.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세상을 모르고 우리끼리는 좋아봐야 그것 무슨 의미 있습니까? 그것은 附佛法外道(부불법외도)라고 부처님이 꾸짖은, 정말 “불법 안에 붙어 그저 기생하고 사는 외도에 불과하다.” 그런 표현을 부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가 불법 안에 기생하고 사는 기생충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대승 법을 몰랐으면 모를까 안 이상은 정말 부처님의 정법대로 대승 법을 사회에 펴면서, 그러면서 힘자라는 데까지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시궁창에 좀 때를 묻히고, 진흙을 묻혀가면서 나도 더러 빠져 가면서, 因泥溺水(인니익수)라고 하잖아요.
중생제도를 위해서 물에도 들어가고 진흙에도 들어간다. 진흙에 들어가면 진흙에 젖게 돼있고ㆍ물에 들어가면 물에 젖게 돼있어요. 함께 젖어 가면서 끝내는 정말 바람직한 삶의 길로 인도할 줄 아는 그런 자세가 있으면, 그 다음에 다른 기타 어떤 사회적인 큰 문제들을 접할 때도 우리가 거기에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좋은 대안을 마련해서 잘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찍이 그런 훈련을 못 쌓았기 때문에 정작 일이 터진 뒤에 그것을 대처하려고 하다 보니까 아주 모호 암담하고, 한다는 것이 너무 서툴고, 또 힘껏 노력은 기울였는데 내용을 모르고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까 功而無功(공이무공)ㆍ勞而無功(노이무공)입니다. 노력만 있지 공이 나타나지 않는 그런 사례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대승 법을 이렇게 배우고, 또 이해가 좀 되고 수긍이 된다면, 이런 ‘대승의 가르침에 관심을 더 기울여서 대승적인 삶을 사는 것이 답이다.’
라고 생각 합니다.
Q ................................
Re 平等心(평등심). 참 어려운 것이지요.
말이야 누가 모르겠습니까? 말 몰라서 질문한 것은 아닐 텐데요.
우리가 지금 이런, 근래에 보기 드문 이런 훌륭한 법석을 짧은 시간이지만 마련했습니다. 여기에서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아마 ‘이 기분ㆍ이 마음이면 더 이상 平等心을 어디서 달리 찾을 것이 없지 않겠나? 이 마음만 잘 유지 한다면 平等心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더 이상 저도 어떻게 말할 길이 없습니다. 이 기분만 잘 유지하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如如(여여)! 아~ 그것 참 어려운 것인데요. 그 如라고 하는 것이 여러 번 나왔습니다. 그것을 眞如라고도 말했고ㆍ그냥 如라고도 말했고ㆍ또 如如라고도 말했고ㆍ제 호에 또 如자가 들어있고 그래서 책임은 있는데, 하지만 저도 생각하면 애매모호한 그런 어떤 경지. 그것을 아득하게 그저 마음속에 그리고 있을 뿐이지 달리 어떻게 말로 표현할 길은 없습니다.
그대로ㆍ그냥그대로ㆍ지금 이대로. 여기에서 한 생각 삐끗하면 이미
“이대로” 가 아닙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한 생각 삐끗하면 이것이 벌써 “如如가 아니다.” 그 경지는 참 어려운 경지이기 때문에 설명가지고 될 일이 아니고, ‘잘 사유하고 명상해서 느껴보시고, 또 나아가서 깨달아야할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如如의 경지를 제대로 느끼고ㆍ깨닫게 되어서 자기 인격이 된다면, 더 이상 다른 불법의 문제는 거기에서 다 해결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Q ...................................
Re 不二不異(불이불이)! 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강원에서 계속 대중들과 예배하고ㆍ예불 드리고ㆍ상강례하고 그러면서 평생을 살아왔는데요. 이번 이 법회에서 정말...
울림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스님들의 그 신심과 법열이 표출돼서 그런가? 우리 상강례 할 때, 또 곧 하강례를 하겠습니다만, 그 때 제가 느낀 그 기분이 글쎄 ‘우리가 뭐가 너와 나의 차이가 있을까? 거기에 무엇이 네가 다르고, 내가 다른 것이 있을까?’ 이제 그것이 얼른 이해가 안 되시거든 다음 하강례 기다려 주십시오. 거기서 느껴주십시오.
下講禮(하강례)
看經功德殊勝行(간경공덕수승행)
無邊勝福皆廻向(무변승복개회향)
普願沈溺諸有情(보원심익제유정)
速往無量光佛刹(속왕무량광불찰)
十方三世一切佛(시방삼세일체불)
諸尊菩薩摩訶薩(제존보살마하살)
摩訶般若波羅蜜(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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