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갈라디아서 2: 19 - 21
제목: 십자가, 그 이후
일시: 2012. 4. 15
장소: 라이프찌히교회
I.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고난주일과 죽음에서 다시 사신 부활주일이 지났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서 가장 핵심인 십자가 사건이 완성된 것이다. 이 십자가로 인해 큰 변화가 일어났다. 부끄러움에서 자랑으로, 고통에서 평안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고민에서 평화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율법에서 은혜로, 불의에서 의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류 최대의 변화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 후에 무슨 변화가 있는가? 오늘은 십자가, 그 이후에 우리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갈라디아서를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II.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로 이 말씀이 핵심이다. 십자가는 죽음과 생명이 있는 곳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이는 바로 나 자신이다. 십자가에서 다시 부활하신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주체가 달라진 것이다.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체자가 아니라, 주님이 내 인생의 주체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한다. 우리 안에 이 말씀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는 순간, 우리의 인생의 주권자는 주님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내 자존심이 죽었다. 십자가에서 내 육신의 정욕이 죽었다. 십자가에서 내 인생의 방향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는 것이다. 십자가, 그 이후의 중요한 변화는 주체자가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여기에 칼이 있다고 하자. 칼이 무슨 칼이냐 하는 것은 칼 자체에 달려있지 않다. 그 칼을 어떤 용도로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로스톡 같은 곳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쓰시칼을 종종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연어나 광어 우럭 등을 사서 회를 뜨기 위함이다. 그런데 조폭들이 회칼을 가지고 다니면 회를 뜨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위협하고 죽이기 위한 살인자의 칼이 된다. 만일 사람이 두부를 자르고 양파를 썰고 버섯을 넣고 파를 송송 썰어 넣어 된장국을 끓이면 요리사의 칼이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의사선생님이 사용하는 칼이 된다면 조폭은 사람을 해치는 칼로 쓰지만,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칼로 쓸 것이다. 얼마나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유용한 칼을 가지고 있는지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누가 칼을 가지고 사용하는가이다.
이전에 우리는 날카로운 우리의 혀를 사용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우리의 정욕과 야망으로 나의 인생을 마구 사용하고 허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기에 변화가 된 것이다. 사도바울이 다마스커스에 있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인생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인생이 되었다. 자신의 율법과 학식과 가문적 배경과 길리기아 다소에서 자란 문화적인 배경, 그리고 로마시민권이라는 정치적사회적 자랑거리들도 다 배설물처럼 버리는 가치가 바뀌게 되었다.
십자가, 그 이후에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임을 알아야 한다. 그 가치가 주님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의 가치가 바뀌면 인생의 계획도 바뀐다. 나의 시간과 물질, 그리고 인생의 모든 계획을 주관하시는 분이 주님이 되신다.
박운서(73세)를 아시는지요? 타이거박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1994년에 통상산업부 차관이 된 사람이다. 그는 공직을 퇴임하고 한국중공업의 사장으로 부실투성이의 공기업을 살리기도 했다. 이후 데이콤회장이 되어 적자투성이의 회사를 흑자로 만든다. 2004년도에 정년퇴직을 했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체에서는 그를 요청하는 콜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어느 날 사라졌다. 그가 간 곳은 필리핀에서 7번째로 큰 민도르라고 하는 섬이다. 그곳에는 정부군, New People's Army, 지주가 고용한 경호원, 그리고 원주민인 망얀(Mangyan)족속이 서로 갈등하면서 살고 있다. 그곳에서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아는가? 복음이 듣지 못한 그들을 위해 영적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2005년도 2월 목사인 아내가 지원해온 선교지 민도르섬의 로하스로 골프여행 차 왔다가 그곳에서 더 깊은 산속에 있는 망얀족을 보게 된다. 바나나와 고구마, 그리고 소금 정도로 살아가고 평균수명이 40세로 10명의 아이들을 낳아도 두세명 정도 살아남는 그들을 보고 나머지 인생을 그곳에 와서 그들을 위해 살고자 한다. 그는 먼저 그들을 먹고 살게 해야 되겠다 싶어 쌀농사를 짓게 된다. 아무 것도 모르던 사람이 농사를 배운다. 그리고 직파를 하던 것을 이양법을 가르친다. 모리아자립선교 재단을 설립하여 그 이름으로 땅을 5만평 사고 망고나무 밭을 3100평 사서 사람들을 고용해 농사를 한다. 그는 그곳에 알려진 유지이며 사람들의 소망이 되었다. 은퇴이후에도 많은 제안이 있어도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마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전히 “내가”살고 있는 것이지 아니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 것인지 십자가, 그 이후에 나의 인생을 주관하는 주권자가 누구인지 보아야 한다.
III. 칼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말이 칼이지 그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가? 독일은 요리는 못해도 요리하는 주방기구는 발전되어 있다. 식탁에 보통 슈티첼썰고 햄도 썰는 칼이 있다. 그것으로 버터나 쨈 같은 것도 바를 때 사용한다. 그런데 빵을 자를 때는 빵칼로 잘라야 한다.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빵칼이 있음을 알았다. 가끔 부엌에서 빵칼 가져오기 귀찮으면 그냥 식사용칼로 썬다. 그러면 빵이 썰리는 것이 아니라, 빵이 찢어진다. 빵칼은 톱처럼 생겨서 오돌도돌한 것으로 썰어야 잘 된다. 칼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라서 다 잘 알지 못하지만, 돼지나 소의 훈제한 넓적다리를 써는 것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찐덕한 치즈를 자를 때 쓰는 칼도 다를 것이다. 중국식으로 할 때는 4각형 넓적한 것으로 해야 맛이다. 그리고 마늘도 판으로 딱 눌러 버린다. 다른 것은 섞어 써도 개인적으로 분명하게 구분 지었으면 하는 것은 있다. 식칼로 과일을 써는 것과 과도로 요리용처럼 쓰는 것이다. 사과에서 마늘냄새가 나면 아주 불쾌하다. 우리가 통칭하여 칼이라고 해도 칼의 종류가 다양하다. 생긴 것도 다르고 그 용도도 다르다.
십자가 이후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해서 우리의 개성이 없어지는가? 주님이 우리의 주권자가 되시면 우리의 개성이 말살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하나님은 각자를 향하신 계획을 가지고 있으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각인의 개성과 특성을 그대로 살려서 쓰신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이삭은 이삭대로 야곱은 야곱대로 쓰셨다. “대로”쓰신 것이다. 바울은 바울대로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요한은 요한대로 사용하신 것이다. 십자가 이후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개성과 모습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 개성들, 어디 안 간다. 한 가정의 자녀들을 보라. 뭐 저런 것이 하나 나왔나 싶다. 한 가정에 자녀가 여럿이라도 각각 특징이 있고 다 다르다. 각 개인의 개성이 있는 것이다. 굳이 고치려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못 고친다. 아니 고칠 필요가 없다. 그 개성 역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가지고 있는 그 개성을 극대화하라.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는 개성을 가지고 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의 가풍과 정신에 맞게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20절 중반에 보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는 표현이 있다. 비록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권자로 계신다 해도 이전에 있던 그 육체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내 육체라는 것은 이제 어떻게 사용되는가? 죄짓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정욕과 야망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제는 먹는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그 이후의 변화이다. 십자가 그 이후의
우리의 변화는 내 개성과 삶이 그대로 있어도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거기 있어도 이제 삶의 동기가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바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과정을 거친 거듭난 자는 새롭게 되어야 한다.
헐랭이라고 하기보다 대범하다고 해 주어라. 깐깐하고 까칠하다기 보다는 섬세하다. 나사가 빠졌다고 하지 말고 여유가 있다고 하자. 복잡하다가 아니라 조직적이고 치밀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 아니라, 활력이 넘친다. 말이 많아 수다스럽다가 아니라 자상하고 애교가 넘친다. 구두쇠처럼 짜다가 아니라 검소하고 청빈하다. 무디다고 하지 말고 무던하다 라고 하자. 잘 잊어 먹냐고 하지 말고 뒤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절대 안 잊어 먹어 사람이 틈이 없다고 하기 보다 믿음성이 가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눈물이 많으면 정이 많다고 할 일이지 그것을 약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오르막길이 좋은 것이냐 내리막길이 좋은 것이냐?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어떠한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경제지표가 올라가면 좋은 일이겠다. 그러나 자동차가 내려가는 길로 가면 얼마나 수월하겠는가!
IV. 십자가, 그 이후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변화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의는 십자가의 의가 되고 율법이 변하여 은혜가 된다.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주님이 주권자가 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죄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십자가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통치자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개성과 특성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이제 삶의 동기가 바뀌었고 가치가 바뀌었다. 이제 세상에 대해 죽고 율법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서 우리는 살아간다.
이 한주간도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어 말씀하시고 삶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축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