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애국동지대표회를 덴버에서 열다
박용만 체류 시의 덴버 풍경. 돔 지붕의 건물은 당시 법원. J.W.Henry
"그윽히 생각하건대 오늘날 우리 한국은 세계에 수치당한 나라이오. 오늘날 우리 한인은 세계에 한을 품은 백성이라. 사천년 영광이 땅에 떨어졌으니 이것을 뉘 아니 회복코자 하며 이천만 생명이 하늘을 부르짖으니 이것을 뉘 아니 슬퍼하리오.(중략)
그러나 천백의 사람이 서로 흩어지고 수삼 년에 소식이 서로 격절하여 비록 비상한 사변이 이왕 있어서도 온 사회가 이미 공동한 의논이 없었고 또한 절대한 기회가 앞에 당하여도 매양 동일한 방책이 없었으니 이는 사회의 결점이요 국사의 방해라.
이에 우리 덴버 지방에 있는 무리들의 의향이 이로부터 일어나고 의논이 이로조차 동일하여 어느 날이든지 기회 있는 대로 북미에 있는 우리 한인들이 한번 큰 회를 열고 매사를 의논코자 위선 이곳 동포께 물으매 열심히 상응하고 또한 부근 각처에 통하매 기쁨으로 대답하여 본년 1월 1일 하오 8시에 덴버에서 임시회를 열고 각 동포가 이를 의론할 새 첫째 회명은 '애국동지대표회'로 명하고 둘째 회기는 본년 6월 초 10일로 정한 후 그 동안 약간 일을 정돈하고 이제 비로소 한 글장을 닦아 위선 태평양 연안과 미국 내지 각처와 몇 하와이 군도에 계신 각 동포에게 고하나니, (하략)"
이것은 박용만이 쓴 애국동지대표회 발기취지서다. 망해가는 나라의 국권을 회복시키려면 각 지역 운동단체의 연대는 필수적이었다. 애국동지대표회는 해외에 산재한 운동세력을 한 데 묶어내는 최초의 시도였다.
끝없이 달리는 대륙의 중부 평원은 로키 산맥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 로키 산맥의 동쪽 산자락에 번성하기 시작한 도시가 콜로라도 주 덴버다.
덴버는 19세기 중반 금을 찾으려고 로키 산맥 쪽으로 몰려든 소위 골드러시 때 생긴 도시다. 인근엔 탄광이며 광산들이 많았다. 게다가 사탕무 농장과 철도회사에서도 일손이 딸리는 때였다. 하와이를 떠난 동포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내려 다시 기차를 타고 로키 산맥을 넘어 덴버에 몰려들었다.
1905년 2월 19일 사이베리아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내렸던 박용만의 다음 동선(動線)은 이렇다. 한 달 반쯤 있다가 로스앤젤레스로 내려가 먼저 와 있던 옥중동지 신흥우를 만나 장래를 의논했다. 다시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오클랜드로 올라와 동포들과 사귀며 일대의 노동시장을 익혔다.
9월 27일 숙부 박희병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여섯 살짜리 이관수, 열 살짜리 유일한, 열한 살짜리 이종희를 데리고 왔다. 이 소년들의 부모들이야말로 근래 한국을 휩쓸고 있는 조기교육의 선구자들이 아닌가.
열 살짜리 유일한을 미국에 데리고 온 박용만의 숙부 박희병
박희병은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 있는 유니온 퍼시픽 철도회사를 통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한국에 나와 있던 네브래스카 주 출신 선교사들이 추천서를 써주었기 때문이다. 도착 사흘 만에 네브래스카 주의 커니시로 떠나는 숙부와 박용만은 동행했다. 박용만과 박희병은 구직을 위해 커니 시로 오는 한인들에게 철도회사의 일자리를 쉽게 구해줬다. 그리고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싶은 유학생들에겐 일자리와 입학을 주선해주었다.
네브래스카 주는 캘리포니아 주와 달랐다. 동양 사람이 아직 적어 캘리포니아처럼 인종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기독교 전통을 잘 지키며 외지에서 온 타인종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친절하게 맞이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중고등학교까지는 학비를 받지 않았다. 빈 손들고 미국에 온 젊은 한인들에겐 그야말로 천사의 땅이었다. 그 때문에 한인 유학생들 중 절반 이상인 60여 명이 네브래스카 주로 몰렸다.
다음 해 여름 박용만과 숙부는 덴버로 이주했다. 사람들이 홍수처럼 몰려드는 붐타운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좀 벌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시내 중심 지역인 아라파회 거리에 방이 여럿 있는 건물을 전세 냈다. 몰려들 한인들을 대비해서 직업소개소 겸 숙박소를 차린 거였다.
현지 회사들은 중간에 소개소를 통해 일꾼들을 구했다. 임금도 소개소에 지불했다. 소개소는 임금에서 10%의 컴미션을 뗐다. 박용만은 한인들 몇 백 명의 중간 보스 가 된 셈이었다. 한 일 년 같이 일하던 숙부는 다음 해 여름 갑자기 위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박용만과 그의 숙부 박희병이 운영하던 직업소개소 건물. 이미경
박용만의 일편단심은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운동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고민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래알 같은 단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내는 게 급선무 아닌가. '애국동지대표회‘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1908년 6월 10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가 덴버에서 열릴 참이었다. 전당대회는 미국 각지에서 사오천 명의 대의원들을 불러들인다. 그들에게 한국의 존재를 드러내고 국외에도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면 꿩 잡는 김에 알은 거저 얻는 게 아닌가.
대회는 순조롭게 추진되지 않았다. 우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안창호계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다. 그래서 실제 참석 인원은 36 명밖에 되지 않았다. 연해주에서는 헤이그에 고종의 밀사로 갔던 이상설과 또 지역연고가 없어 보이는 이승만을 대표로 위임했다.
민주당의 전당대회 기간에 맞추려했지만 이승만이 제때 오지 못하고 그의 일정에 맞추다 보니 한 달이나 연기됐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법정통역으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이 연기돼 마침내 7월 9일 이승만이 도착했다. 다음날 임원선거가 있었는데 회장에 이승만, 국문서기에 박용만, 영문서기에 윤병구가 선출됐다.
덴버의 유니언 역. Darkshark0159
로키산맥 쪽에서 기적소리가 들렸다. 들릴락 말락 가냘픈 휘파람소리였다. 기차는 아직도 산속을 빠져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약 이십분쯤이면 기차는 유니언 역에 들어설 것이다. 박용만은 대합실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벌써 말씀은 드렸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오시는 이승만 씨는 현재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이십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으로 구속된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법정통역 일 때문에 그간 샌프란시스코에 계셨지요. 이번 회의를 위해 잠시 틈을 내 들리시게 된 겁니다. 올해 춘추가 서른셋, 그러니까 저 보다 여섯 살 많은 연상이지요. 조국에서 독립협회 활동을 하시다가 오래 동안 감옥에서 고생하신 분입니다. 제게는 옥중 동지이자 형님뻘이지요. 예를 다해 환영해 드리도록 합시다.”
그러고서 한참 서성거리고 있는데 고막을 찢는 기적소리와 함께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박용만을 둘러싼 사람들은 마치 헤쳐모여 구령이라도 받은 듯 즉각 일렬횡대의 대열을 만들었다. 그 중에는 군복을 차려 입은 사람도 몇 있었다. 미국의 대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을 때 입는 교련복과 같은 것이었다.
이승만은 많은 승객들이 내린 다음 나타났다. 개찰구 앞에서 기다리던 박용만이 그를 대열 앞으로 인도해 나왔다. 군복을 입은 장정 한 사람이 구령을 외쳤다.
“이승만 동지를 향해 경례!” 그러자 한 줄로 똑바로 서 있는 20 여 명의 장정들이 일제히 거수경례를 하면서 “이승만 동지를 환영합니다.”라고 대합실이 떠나가게 고함을 질렀다. 이어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졌다.
뜻밖의 환영에 이승만은 상기된 얼굴이었다. 마치 서양 선교사의 한국 말투처럼 "반갑습네다." 인사했다. 더듬거리듯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승만은 대열의 맨 왼쪽서부터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용만은 그 옆에서 차례로 소개를 했다. “네브래스카에서 오신 김장호 씨입니다." 군복을 입은 그는 구한말 군인 출신.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왔다가 미국 본토로 건너왔다.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에 있는 군사고등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이승만은 두 손으로 김장호의 손을 잡았다. "이분은 캔자스에서 오신 이명섭 씨입니다."
차례로 소개가 끝나갈 즈음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또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오우, 미스터 윤이로군요. 나도 정말 반갑습네다."
윤병구였다. 이승만이 1904년 11월 29일 호놀룰루에 내렸을 때 부두에 마중 나온 사람이었다. 또 3년 전 이승만과 함께 당시 미국 대통령 시오도어 루즈벨트를 찾아가 면접한 사람이었다. 미국이 주선한 러일강화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청원서를 가지고서였다.
고함과 박수소리는 대합실의 풍경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말없이 키스를 하거나 조용히 악수를 나누는 게 서양식 풍경 아닌가. 취재를 위해 대합실에 나와 있던 덴버타임즈 기자도 그 시끌벅적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인상의 강열함 때문이었든지 기자는 그 날짜(7월 11일자) 기사에 고강도 제목을 붙였다. ‘Korean Patriots Gather in Denver to Prepare for War(한국의 애국자들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덴버에 모이다)’. 이것은 너무 선동적인 제목이 아닌가. 그 제목 밑에 박용만의 얼굴을 크게 실었다. 그리고 사진 밑에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이승만’이라고 설명을 붙였다. 박용만을 이승만으로 혼동한 엉뚱한 착오를 일으킨 거였다.
덴버타임즈가 이승만으로 소개한 박용만
“오늘(9일) 도착한 이승만씨는 한국과 미국에 잘 알려진 애국투사 지도자이다. 그는 언론인이었는데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구국운동 주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주목받고 있다.”
덴버타임즈의 이승만에 대한 기사내용이었다. 비록 혼동을 일으켜 이승만 대신 박용만의 사진을 크게 실었지만 어쨌든 이승만은 '애국동지대표회'의 간판스타로 집중조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간판스타가 문제였다. 마땅히 참석해야 할 유력인사나 단체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스티븐스 저격사건’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1908년 3월 23일 의사 장인환과 의사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침략을 옹호하는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했다. 장인환은 대동보국회 소속이었고, 전명운은 안창호계의 공립협회 소속이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1908.3.24일자)
구속된 두 의사들의 법정통역으로 멀리 동부에서 공부 중인 이승만이 선정됐다.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은 두 단체의 통합을 주문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하나로 통합된 단체의 수장은 자기가 맡겠다는 거였다. 그 말은 두 단체 모두로부터 거센 역풍을 맞았다.
그러자 이승만은 통역이나 하는 것은 신사의 체면을 깎는 비천한 짓이고 크리스천 으로서 살인자를 옹호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한 때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 이승만과 함께 일했던 김현구의 ‘이승만 약전’에 나오는 얘기다. 이승만에게 학을 뗀 사람이라 좋지 않게 적었을 수도 있다. 청년 이승만의 자서전에도 스티븐스 사살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하얼빈(주(註)-그 이후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은 이 두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 사람들을 흉도들이고 최악의 악당들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됐다. 나는 그때 캘리포니아 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한국에서나 교회에서나 한국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서전의 이 구절을 보면 한국 사람들의 분노와 복수심은 2차적인 것이라는 여운을 남긴다. 외려 그로 인한 나쁜 이미지를 우려하는 인상이다. 그리고 재판이 자주 연기되고 가을학기가 시작되자 이승만은 학교가 있는 동부로 떠나고 말았다. 두 의사는 생명을 던졌지만 이승만은 공부를 던질 수 없었다. 휴학을 해서라도 두 의사의 의거를 뒷바라지할 성의가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대한인국민회의 조직을 꾸려내고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기 위해 박용만은 다니던 대학을 6개월 휴학하지 않았던가.
‘스티븐스 저격사건’은 잠자던 한인들을 강타했다. 유능한 변호사 세 사람을 선임하고 미주, 하와이, 조선, 만주 할 것 없이 주머니를 털어 재판비용 $7,390을 모금했다. 미국 변호사 중 아일랜드 출신 카글린은 두 의사의 무료변호를 자청했다.
'애국동지대표회'에 공립협회측은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장,전 두 의사의 변호자금 모금위원이었던 새크라멘토 대표 김성권도 참석하지 않았다. 또 윤병구를 대동하고 유럽을 순방한 후 미국으로 돌아와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자세히 들은 이상설도 참석하지 않았다. '애국동지대표회' 간판스타 이승만에게 뭔가 찜찜함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