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월 2일,
최초의 달 탐사선 루나 1호 발사
소련은 1957년 10월 4일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성공하고 1958년부터는 달 탐사
계획인 루나계획을 실시하였다. 3번의 실패를 거듭한 후 마침내 1959년 1월 2일, 러시아어로 달을 뜻하는
소련의 무인우주선 '루나 1호(Luna 1)'가 달을 향해 날아올랐다. 루나 1호의 몸체 무게는 361.3kg, 속도는
초속 11.2km였다.
Luna Rocket Launch
지구 중력권을 벗어난 최초의 물체인 루나 1호는 이틀 뒤인 4일 오전 11시 59분에 달로부터
5,995km까지 접근하기는 하였지만 그대로 달을 지나쳐 태양계 바깥을 향해 날아갔다. 루나 1호는
최초의 달 탐사선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최초의 인공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비록 달 착륙은 실패하였지만 이후 루나 1호는 1억 4,800만km와 1억 9,700만km의 궤도를 돌며 450일
동안 태양 주위를 공전했다. 루나 1호(Luna-1)는 달 주위를 돌면서 나침반이 동작할 수 있는 자기장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다음으로 1959년 9월 12일에 발사된 루나 2호는 달 표면의 고요의 바다라고 불리는 지점의 서부에
달과 충돌하면서 최초로 달에 인공물을 보내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달에 충돌시킬 계획으로 발사된
것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계획은 성공한 것이었다.
루나 3호는 같은 해 10월 4일에 발사되었으며, 10월 6일에 달에 도달하여 최초로 달의 뒷면을
촬영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소련은 두 차례 더 탐사선을 발사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소련은 유인
비행에 중점을 두면서 달 탐사 위성 발사는 잠시 중단되었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의 성공에 자극 받은 미국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달 탐사선 발사에 착수했지만,
소련이 루나 3호까지 성공하는 동안에 미국은 파이어니어 4호로 달에 근접하게 탐사선을
지나치게 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소련의 루나 1호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거리였다.
미국이 레인저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 소련은 달 탐사 계획을 재개했다. 소련은 보스토크 로켓을 몰니야
로켓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탐사선을 보다 큰 것으로 변경한 다음 1963년부터 로켓을 발사했지만
연거푸 실패하였습니다. 하지만 1966년 2월 3일에, 루나 9호를 발사하여, 미국이 서베이어 계획에
따라 착륙 시도를 하기 전에 먼저 무인 달 착륙을 성공시키게 되었다. 미국의 서베이어 계획은
달에 연착륙, 그러니까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며 하강하여 탐사선을 살려서 착륙시킨 뒤에 달의 토양을
조사하는 계획이었다. 미국은 1966년 5월부터 1968년 1월까지 7기를 발사하였으며, 5기가 착륙과
관측에 성공했습니다.
소련은 이후 한 번의 실패를 겪은 뒤, 1966년 4월 3일에 루나 10호를 쏘아 보내 최초로 달의 위성궤도에
올려 보냈다. 루나 10호는 2개월에 걸쳐 달을 돌면서 관측을 진행했고, 달에는 자기장이 없거나 매우 약하다,
달 표면의 암석은 현무암과 유사하다, 달에 대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달의 중력 분포에 지역적인 편차가
있다는 사실들을 밝혀냈다.
루나 11호는 달 주변 환경과 표면 토양의 구성을 조사했고, 루나 12호는 달 표면을 궤도상에서 촬영했다.
루나 13호는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토양의 경도를 조사했다. 이후 두 번의 실패가 이어졌다. 1968년
4월 7일에는, 루나 14호가 유인 비행을 위한 우주선의 통신 등의 추적 실험에 동원되었다. 여기까지는
소련이 미국에 앞서고 있었습니다.
소련이 루나 14호까지 성공시키는 동안, 미국에서는 루나 오비터 계획을 서베이어 계획과 함께 진행했다.
루나 오비터 계획은 달의 지도를 제작하는 목적으로, 1966년 8월부터 1967년 8월까지 5기를 발사하여
모두 성공하였고, 달 표면의 99%에 이르는 지역을 촬영한 고해상도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이 레인저, 서베이어, 루나 오비터라는 세 개의 계획으로 탐사선을 보내어 각각의 목적을 달성한
것과는 달리, 소련은 루나 계획 하나로 모든 목적을 달성한 것이 이 시기 미국과 소련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후 달 계획은 미국의 아폴로 계획과 소련의 소유스 계획(유인 달 착륙 계획으로 코를료프에 의해 주도)
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1966년 소련의 로켓 천제 세르게이 코롤료프(Korolyov, Sergey Pavlovich, 1906년
12월 30일 ~ 1966년 1월 14일)가 사망하면서 소련의 우주 개발은 난항을 겪게 되었고, 1969년 7월
미국의 암스트롱이 달에 먼저 착륙함으로써 그 동안 소련이 기울여온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세르게이 코롤료프
우크라이나 출신인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세계에서 첫 번째로 발사된 ‘스푸트니크 1호’ 위성과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존재하게 만든 인물이다. 코롤료프는 1931년 제트 추진력 연구 그룹에 참여하였고
이후 1933년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엔진 개발에 성공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제트 추진력 연구소의
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1938년 대숙청에 희생되어 6년간 구속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 시베리아의 굴락에서
수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풀려나면서 로켓 개발자가 되었고 1947년 소련에 강제 이주 당한 독일인
기술자들이 V-2의 개량형으로 개발에 성공한 R-1 로켓보다 두 배 이상의 비행 거리를 가진 R-2로켓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1953년에는 1,200km의 중거리 탄도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고, 마침내 1957년
그는 여러 개의 엔진을 하나로 묶어 발사하는 클러스터링 기술을 처음 활용한 R-7 발사체를 쏘아 올렸다.
A "geophysical" version of the R-2 rocket lifts off from Kapustin Yar
launch site.
소련은 코롤료프가 개발한 R-7 로켓을 이용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로켓을 우주로 쏘아 올렸고, 최초로
우주에 사람을 보냈으며, 최초로 달에 구조물을 보냈다. R-7 로켓은 꾸준한 개선 작업을 통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무려 1,500회 이상 발사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