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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23 - 히타카츠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오며 한국과 인연을 생각하다!
2024년 1월 26일 이즈하라에 도착해 가네이시 성터와 최익현이 순국한 슈제지 절을 둘러 보고
이자카야에서 저녁을 먹고 1박한 후에 1월 27일 지온(祈園) 호텔을 나와 렌터카에 오릅니다.
이즈하라는 티아라 몰이 유명하다지만 우린 어제 면세점 다이렉스 미쓰시마에 들렀던지라
그냥 이즈하라를 빠져나와 가네다성터로 가는 길을 스쳐 지나니 만제키운하가
보이고..... 붉은 다리 만제키바시(万關橋) 를 거쳐 단풍가도 라고 불리는 숲길을 지납니다.
그러고는 히타카츠(比田勝) 에 도착해 미우다(三宇田) 해수욕장으로 가서 오른쪽 길로 언덕을 올라가니
日露友好の丘(일로우호의구) 로, 쓰시마 해전에서 포로가 된 러시아 병사들의 상륙한 곳이라고 합니다.
렌터카를 타고 내려가서 아름다운 해안과 섬을 지나 니시도마리 해수욕장(西泊 海水浴場) 을
지나 히타카츠로 돌아와서는 렌터카를 반납하고..... 시내에서 Chinguya(친구야)
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오다가 보니 Tokiseki(토키세키) 라고 이런 류의 상호가 보입니다.
히타카츠 터미널로 가서는 멀미약을 먹은후 니나호 NINA 부스에서 티켓을 받아 출국
심사를 거쳐 니나호 배에 오르니... 페리는 15시 50분 정각에 출항하는데 쓰시마섬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대한해협을 건너 17시 20분이면 부산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대마도는 동해의 입구 격으로 대한해협 (Korea Strait) 한가운데 에 있으니... 북쪽으로는 부산 해협(서수로
西水路, Western Channel, 조선해협) 남쪽으로 쓰시마 해협 (현해탄/玄界灘/겐카이나다) 이 지나는데,
일본에서는 남북 해협을 통틀어 쓰시마 해협이 정식 이름이고 부산해협(서수로) 을 조선해협으로 부릅니다.
쓰시마(對馬 대마도) 는 나가사키현에 속한 섬으로 제주도의 38% 에, 고도 400m 산지라 농지가 적으니
인구밀도가 낮다고 하니 도로에 교통량도 적은 편인데... 북쪽 와니우라만에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비
(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 가 세워져 있습니다. 사진은 해외 나들이/일본(日本) 님의 글에서 가져왔습니다.
1703년(조선 숙종 29년) 음력 2월 5일 부산항에서 출항한 배 3척 이 있었으니, 정사 한천석 (韓天錫),
부사 박세양(朴世亮) 을 비롯한 108명의 역관사 (通譯官) 일행이 탄 사선(使船) 과 쓰시마번의
책임자 야마가와 사쿠자에몬 (山川 作左衛門) 이 방문을 위해 보내준 자신의 배와 예인선 이었습니다.
출항때 날씨가 좋아 순풍을 타고 순조롭게 항해를 했으나 정오가 지난후 기상이 급변 하여 3척 모두 좌초
되었는데..... 쓰시마번과 마을 사람들이 구조와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생존자는 1명도 없었으니,
도착지가 눈앞에 보이는 와니우라(鰐浦:악포) 앞 바다에서 전원이 사망하는 해난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 역관사 일행은 조선통신사와는 별도로 쓰시마 까지 100명 정도의 규모로 구성되어 파견된 통신사 사절로
에도(江戶) 시대에 50회 이상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쓰시마번(對馬藩)의 경조사 시 또는 한일 외교상
의견 절충이 필요할때 일본을 방문하여 한일 선린외교(善隣外交) 의 실질적인 중계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사고 당일은 3대 쓰시마 번주(對馬 藩主) 요시마사(義成)의 장례와 5대 번주 요시미치(義方)의 승계를 축하
하기 위해 방문하던 중이었는데, 1991년 3월 20일 한일건립위원회 가 이국의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역관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조난 현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한국전망대 옆) 에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그 옆에 한국 전망대 로 가는 길에는 1930년대 초에 대한 해협을 지나는 선박을 감시하기 위한 거대한 도요
포대(豊砲台跡) 의 유적 이 있는데, 일본 해군은 진해에도 포대를 만들었으니 양 포대에 의해 대한해협을
지나는 배들을 통제할수가 있었는데, 들어가기전 입구에 불을 켜는 스위치를 찾아 올리고 들어가야 한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600차례나 침입하던 왜구는 여기 대마도 출신이 많았지만 반대로 대마도도
해적의 침입을 받았으니..... 11세기에 함경도에서 수백년간 살고 있던 여진족 해적들이
강원도 동해안과 일본 서해안에 해적질을 다녔으니, 일본 기록에는 1019년 3월
도이인(刀伊人 여진족) 들이 50척의 배를 타고 쓰시마(대마도對馬島) 에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고려 동해안과 일본을 약탈하러 다니던 이 여진족 해적들이 중도에 반드시 울릉도에 들르는 지라
1018년 울릉도에서 무자비한 약탈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후, 1022년에는 남아있던
우릉성주와 아들 부어잉다랑등 주민들이 모두 고려로 귀부하니..... 우산국은 완전히 멸망합니다.
그후 울릉도는 왜구의 침탈을 당하는지라 사람이 살수 없으니 조선초인 태종 때에는 공도령(空島令) 으로
주민쇄환 정책을 펼쳐 450년간 무인도 상태로 있다가..... 1883년 고종대에 섬에 불법 거주한 조선인
60명과 일본인 120명을 쫓아내고 경상도와 전라도인 20가구를 이주시키니 현재 울릉도민의 조상 입니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갈 때 처음 상륙한 섬인 대마도를 뒤로 하고 푸르른 대한해협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일본이 독도(다케시마) 영유권을 주장하자, 그에 대해 반대로
한국은 “대마도는 우리땅” 이라며 여러 지방 의회에서 귀속 결의안을 의결했던 사실이 떠오릅니다.
일본 측 사서에서는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에 걸쳐 일본이 쓰시마섬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식의
기사가 여럿 나타나니.... 8세기에 저술된 《고사기》 의 야시마 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
이미 고대부터 쓰시마가 일본 본토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인식은 적어도 일본내에서 확고합니다.
1084년 《고려사》 에 선종 시기 '대마도 구당관' 이 사신을 보내어 감귤을 바쳤다고 하니, 고려시대
부터 쓰시마 도주는 이키나 탐라와 더불어 구당관이라는 작위를 받은 것이며.... 1368년
《고려사》 에 고려 공민왕 시기 '대마도 만호' 가 사신을 파견해 와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사가 보이니 만호는 고려의 무관직이고, 쓰시마는 진봉선 무역의 형태로 고려와 통교한 것입니다.
1419년 6월 말, 이종무의 조선군 2만이 대마도 정벌에 나서 첫 승전보고 (이 보고 직후 패전으로 200명
가까이 죽었다!) 에 태종은 기뻐하며 선지를 전달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해서 심고 거두는 데 적당하지 않아서, 생계가 실로 어려우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기는 것이다"
"혹 그 땅의 사람들이 전부 와서 항복한다면, 거처와 의식을 요구하는 대로 할 것이니,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도도웅와(소 사다모리) 와 대소 왜인들에게 깨우쳐 알려줄 것이니라." 1407년 태종이 실시한 공도(空島)
정책으로, 대마도가 진정 조선에 속하자면 대마도 주민들은 섬을 비우고 조선으로 모두 건너오라는 것입니다.
그후 임진왜란 시기 쓰시마의 독립성은 크게 약화되었으니.... 1587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하자 신종을 선언해 다이묘의 직함을 받았으나, 그 이전부터 조선으로 부터
예조참의 관직도 받은바 있었는데, 1589년 히데요시에게서 '조선을 정벌하라' 는 명을 받기도 했으나
같은해 창덕궁을 찾아 선조에게 술을 따르면서... 침략을 경고하는 의미에서 조총을 시연하기도 했습니다.
1590년, 조선 통신사를 조선 측엔 '축하 사절' 로 초청하고, 일본 측엔 '항복 사절' 로 하여 히데요시에게
알현시켰지만 끝내 전쟁이 발발하자, 쓰시마섬 5천 병사는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으로서
전쟁에서 본국인 일본 편에 서서 참전하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1만, 고니시 유키나가가 7천인데
비해.... 조그만 섬으로 인구도 매우 적은 대마도가 5천명이니 젊은 남자는 다 끌어낸 무리한 숫자 입니다?
1603년,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쓰시마는 막번 체제에 편입되었는데 1607년에 에도 막부는 쓰시마에게 조선-
일본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후 에도 막부 기간 대 조선교섭권은 쓰시마가 독점
했으며, 1609년 조일관계를 정상화 하기 위해 광해군이 쓰시마 번주와 기유약조를 맺었으나... 조선이
쓰시마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과거에 비해 엄격화 하였기 때문에 쓰시마는 막부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됩니다.
또한 1635년 쓰시마가 1607~1609 관계 정상화 과정에 국서를 위조한 사건이 폭로된 것을 계기로,
막부는 오히려 쓰시마의 대조선 교섭권 독점을 인정하는 대신에 배후에서 그것을 감독하였으며
게다가 왜관 무역의 쇠퇴가 맞물리면서 18세기 중반 부터는 막부의 재정지원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1861년, 러시아 포사드닉 호가 이모자키(芋崎)를 점거하자 쓰시마번은 이봉 청원서를 제출해 쓰시마 전체를
막부 직할령으로, 규슈에 자신들 토지를 봉해줄 것을 요구하여 막부의 지원을 이끌어내고자 하였으나
막부가 쇄항노선을 결정하고 이봉 운동이 실패하자... 양이가 본토를 공격할 근거지로 쓰시마가 활용될수
있다는 주장을 부풀리는 한편 조선에 대한 식량 의존도 및 조선이 양이의 근거지가 될 수 있음을 피력합니다.
자신들이 식량을 의존하는 조선과 단교하기 위해서는 미리 그에 소요될 자금과 병기, 군함을 원조해
달라는 것이었으니, 쓰시마 번사 오시마 도모노조(大島友之允)는 1864년 '조선진출건백서'
에서 조선을 비하하며, 조선을 미리 도모하고 삼포개항 당시 무역 전성기 처럼 양국 사절이
가벼운 차비로 자주 왕래하며 수도에 가고 허례허식과 불필요한 비용을 감축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에도 막부는 표면적으로 쓰시마번에 재정을 원조하였으나, 실상 양이가 조선에 주둔했다거나
저들을 축출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며.... 조선 자체로서도 "약한 나라
라고는 해도 청조의 속국인지라 이를 복종시킨다는 것 역시 가능치 않다." 라고 전망했습니다.
막부는 "쵸슈의 양이와 쓰시마의 조선 처치는 표리를 이루는 역모" 로 보고 이를 수용할 의사가
없었으니, 1863~64년 쓰시마의 원조운동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이 과정에서 쓰시마가
전개한 정한론(征韓論) 은 이후 전개될 조일 관계에서 방편으로서의 조선 활용을 고착시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1868년 4월에 세워진 일본 정부는 쓰시마번주에게 조선과 새로 외교관계를 맺을 국서 전달
을 지시하였고.... 쓰시마 번주는 해당 서계 부터는 조선 국왕이 내린 도장 대신에 일본 조정이
내린 도장을 사용해, 조선이 쓰시마를 번신으로 대해온 굴욕과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다는 의견을 표명합니다.
즉, 일본의 국위를 손상시키는 ‘사교(私交)’ 를 근본적으로 변화하고자 한 것이니... 쓰시마 측은 일본의
번병으로서 임무(藩屏守辺) 를 다할 수 없고, 이를 해결키 위해서는 통교 상의 구폐(弊礼) 부터
속히 갱신해야만 한다며 조선이 고집을 부리면 은혜가 아니라 혁연히 응징해야한다고 재차 주장합니다.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 과 함께 일본은 쓰시마번을 이즈하라번(嚴原藩) 으로 개칭했으며.... 일본
외무성 관리가 쓰시마에 파견되었고, 1871년 폐번지현에 따라 이즈하라번은 나가사키현에 속하고
1872년 외무성이 대조선 외교권을 장악해 부산왜관을 접수하니 쓰시마와 조선의 종속관계는 청산 됩니다.
1945년 8~9월 GHQ 가 일본열도에, 미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섰는데 미국은 쓰시마섬은 일본의 영토로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했으나 19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반환영토가 확정될때까지,
반환 영토에 대한 협상은 일본측이 내놓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를 제외한 한반도와 부속도서
를 한국에 반환한다' 를 바탕으로 미국과 일본이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고 한국은 협상 당사국이 아니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쓰시마섬 영유권 주장은 독도 협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조치인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1952년에 선포된 이승만 라인(평화선) 에서 쓰시마섬은 제외되었으며....
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일본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SCAPIN) 제677호'
를 하달했으니..... 미국은 다시금 쓰시마섬은 일본 영토로,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했습니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쓰시마섬은 원래 우리나라 땅이다. 1870년 일본이 점령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무조건 돌려줘야 한다" 고 반환을
요구하는데, 광복 직후에는 일본으로부터 대마도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주장이 매우
흔했고, 이에 힘입어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영유권 주장 및 반환 요구성명을 60차례나 발표 합니다.
1950년 3월 30일, 이에 관해 미국 정부가 조사해 다음과 같이 결과보고서를 내는데.... 미국은 한국
측의 근거가 일본 측의 근거 보다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으니, 서기 500년 이전
까지는 한국이 우위, 중간엔 독자적 세력이고 1668년 이후부터는 일본이 실효지배했다고 보았습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라인(평화선)이 선포되었고 여기에 쓰시마섬은 제외되어 있으며, 이후 독도
해역에서 일본 어선 나포, 일본 어민 감금,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등 독도를 영유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지만, 쓰시마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이후 정부 차원에서 하지 않고 있습니다. 1982년 6월 30일,
가요 '독도는 우리땅' 이 발매되었으니... 가사 중 '대마도는 일본땅,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2005년 1월 14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하자,
이에 반발해 한국 지자체들의 반발로서 대마도 영유권 주장이 일어나니.... 2005년
3월 17일, 울산시 의회가 '일본 독도 영유권 야욕 규탄 및 대마도 반환 요구 결의안' 을 통과시킵니다.
2008년 7월 21일, 국회 차원에서 50여명이 "대마도 반환 촉구 결의안" 을 발의했고 2009년
12월 25일, 일본 정부가 문부성 고교 지리·역사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을 반영하자.... 이에 반발해 한국 정부-지자체들의 반발로 대마도 영유권 주장이 강화됩니다.
2022년 5월 4일,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한 고지도가 발견되었으니 조선국도 무비지(朝鮮國圖
武備誌) 라는 이름으로..... 1785년 하야시 시헤이의 기법을 이용해 19세기에
제작한 것이며 수십절로 접힌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몸 속이나 옷가지 깊이 휴대하는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철저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쓰시마가 한국
영토라고 부를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방증하며, 가장 완벽한 예시가 바로 제주도인데,
고려 대 까지만 해도 제주는 탐라성주가 별도로 다스리는 탐라국이었지만.....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탐라성주직을 폐지하고, 제주도를 전라도에 편입한 뒤 제주목사를 파견했습니다.
울릉도는 고려시대 부터 직접 관할하고 있었는데..... 11세기 여진족 해적의 침공 때문에 우산국이 박살
나고 그 주민들이 육지부로 피난해 오면서 사회 자체가 붕괴했기 때문이며, 쓰시마 영유권을 주장
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쓰시마에 왜 정식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마도주가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조선의 벼슬을 받았으니 한국 영토라는 논조는.... 도리어
조선국왕이 중국 황제의 신하로서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조선의
직할령 편입을 주장했던 19세기 말 청 조정 및 조야의 일각과 흡사한데..... 실제로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에서 “과거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고대부터 이어지는 일본의 전통적인 영토 인식인 야시마에도 쓰시마가 포함되으니 고대부터 일본어족
화자들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1420-1860 무렵 대마도주는 조선과 일본 양쪽에 번신을
자청했으므로, 이 시기 조선의 고지도들은 대마도를 당연히 표현하니 1557년 "조선방역지도" 등 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에 니나호는 히타카츠를 출발한지 1시간 30분 만에
부산에 도착하니 입국 절차를 밟은후 터미널로 들어와서는 딸 부부
가족과 헤어져서는 구름다리를 건너서 부산역을 통과해 지하철을 타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