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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 답사(2017.9.30~10.6) 후기를 올립니다.
답사 2일째
둘째 아침. 어제 밤에 술을 마시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났다. 이번 답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은 서풍 성자산성을 답사하는 날이었기에 설렘이 큰 탓이었다. 개원시는 요동평원에 위치한 곳이라 주변에 산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개원시를 빠져나가 동쪽으로 차를 달리면서 차츰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답사에 이용한 차량은 57인승 2층 버스여서, 2층 앞쪽 큰 창문을 통해 주변을 넓게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개원에서 서풍으로 이어지는 넓은 평야는 과거 부여 땅. 과거에는 과연 어떤 작물들이 재배되었을까? 오곡이 잘 자란다는 [삼국지] <부여전> 기록이 떠올랐다. 기장, 수수보다는 조, 보리, 콩 등을 주로 재배했을 터. 하지만 기온 변화에 따라 때로는 목초지로도 이용되지 않았을까 한다.
서풍현 낙선향 서차구 유적은 부여 전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부여의 대표적 묘제인 토광묘에서 각종 금귀거리, 칼 등 약 1만점 정도가 출토된 바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동물 문양장식 등 초원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부여인들이 가축을 잘 기르며 명마를 생산한다는 삼국지 기록을 생각해보면 이런 유물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곳은 한때 말과 양, 소를 키웠던 땅이 아닐까? 이런 땅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구려는 늦어도 4세기 말에는 이곳을 확실히 점령했을 것이다. 378년 거란이 고구려 북쪽 변경을 침략해 8개 부락을 함락시켜 1만 명의 포로를 잡아갔던 곳이 철령, 개원, 서풍현에 이르는 지역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392년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후 즉시 거란을 정벌해 고구려 백성들을 되찾아오고, 거란에서 소와 말, 양을 대량으로 가져와서 풀어놓은 것도 고구려의 서북쪽인 이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런 곳에서 적을 방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진보산성 남쪽에는 비교적 고구려 성들이 촘촘하게 네트워크 방어망을 이루며 관방(關防) 체계를 이루고 있지만, 서풍 성자산성 주변에는 서쪽으로 18㎞ 떨어진 지점에 둘레 1.1㎞의 중소형 성인 개원 성자산성이 있을 뿐이다. 동북쪽으로 요원시지역에 공농산성, 용수산성, 요원 성자산성이 있지만, 이들 성들은 50㎞ 이상 떨어져 있다. 버스로 이동하는 도중 계속해서 고구려 사람들이라면 이 지역을 어떻게 경영했을까를 계속해서 생각하다가, 성에 가까워질 무렵 잠을 잤다. 그래서 정작 보아야 할 성 입구 주변 지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2시간쯤 달려 도착한 서풍 성자산성은 평지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위치하지 않고, 나지막한 여러 산들이 첩첩이 위치한 산중에 있었다. 다만 현대뿐만 아니라 고대에서 이용되었을 교통로가 성 앞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성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주변 지역 통제력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둘레 길이 4.4㎞ 되는 대형성을 왜 축조했을까? 게다가 본성을 지은 후 주 출입구인 서문 바깥에 외위성까지 건설한 이유는 뭘까? 외위성은 이번 답사에서는 전혀 확인할 시간이 없었고, 성자산성에 올라서 외위성 쪽을 둘러보아도 쉽게 성의 윤곽을 그려보기가 어려웠다. 언젠가 다시 와서 외위성을 답사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성자산은 중국에서도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어서, 성자산성 입구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자산성 안내 지형도를 볼 수 있었다. 이런. ㅈ.ㅈ. 이래서 인터넷만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중국의 성자산 안내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들과 서풍 성자산성 평면도가 그려진 논문을 볼 때는 이렇게 동서 고도차가 큰 지 몰랐다. 성자산 안내 사이트에는 성내에 있는 수많은 계단을 찍은 사진들이 없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와서 직접 봐야 한다.
산성 입구에 들어가기 전 큰 저수지 2곳을 보고 나니 이곳이 외위성 안쪽이라는 사실이 더올랐다. 그래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자산성 유원지 입구에서 성자산성 서문까지 대략 1㎞쯤 걸어 들어가니 성 문지에 도착했다. 처음 만난 문은 서문이 아니라 서문 옆 수문이 있는 곳이고, 서문은 수문보다 남쪽에 위치했다. 수문에서 서문까지 이어지는 성벽은 아주 잘 남아있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곧장 성안으로 들어갔다. 심정보 교수님을 비롯한 10여명은 서문쪽 성벽부터 답사했고, 나를 비롯한 10여명은 성 안쪽 길로 들어서 자연스럽게 2팀으로 나누어졌다.
답사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날씨, 산림풍경구답게 좋은 나무들이 많아서인지 공기도 맛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가 중국에서 만들어 놓은 동북고국 정권 연역표를 보고 기분을 좀 나빠졌지만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성 안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중간에 성자산신묘가 있었다. 신묘에는 도교식 산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산신도 옆 좌우벽에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수렵도와 해의 신, 오회분 4호묘에서 본 듯한 문양과 뱀 등이 그려져 있었다. 또 신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그린 그림이 그려진 것이 신선했다. 중국에서는 성자산산성을 부여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간 중간 고구려 토기들도 흔하게 만났다.
좀 더 올라가서 점장대를 만났다. 점장대는 비교적 큰 편이었고, 15단 정도 돌을 쌓아 만든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점장대에 올라서 성 밖을 보려고 했는데,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곳에 군대를 지휘하기에 좋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엄청난 기와 파편들이 나왔다. 점장대 위에 큰 기와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점장대에서 사진을 찍은 후, 계속해서 등산을 했다.
온갖 기암괴석이 있는 살만달령(薩滿達岭)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약간은 엄준한 곳이었지만, 그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광은 참으로 멋졌다. 특히 일선천(一綫天) 이라는 바위는 마치 성벽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여서 기억에 남는다. 살만달령을 지나 성의 동벽(북벽이 아니다)에 올랐다. 해발고도가 700m가 넘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고구려시대에 쌓은 성벽이 잘 최대 3~4m 정도 남아있었다. 기단 부분을 보축한 흔적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낙엽이 쌓여 성의 전체 높이는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아래쪽으로 더 많이 성벽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 돌로 성벽을 쌓다니 참으로 대단한 옛 사람들이다.
동벽 중간 고산봉에서 앞서 따로 올라간 일행들과 조우를 했다. 우리 쪽이 많이 늦었다. 답사를 다소 서둘렀지만, 그래도 볼 것은 다 봐야했다. 고산봉 정자에서 내려다본 성자산성 풍광은 아름다웠다. 성자산 정상에 올라 동쪽을 보니 그쪽에도 산이 많았지만, 중간 중간 사람이 살 수 있는 평지도 보였다. 동쪽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이 높은 곳에 성벽을 쌓았단 말인가? 하긴 적이 언제 어디로 쳐들어올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서풍 성자산성은 부여의 후기 도성이라는 설이 있다. 346년 부여가 동쪽의 읍루나 물길(백돌말갈), 또는 백제(실제로는 고구려)에게 쫓겨 서쪽 연나라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후보지 가운데 유력한 곳이 이곳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한, 위 시기 유물은 없고 오직 고구려 유물만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가 부여의 성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지만, 부여가 먼저 사용한 흔적과 고구려가 후대에 사용한 차이를 구별해내기는 어렵다. 현재까지 부여 때 도성의 흔적이 이곳에서 찾아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여 후기 도성의 또 다른 후보지인 농안, 장춘(서풍 보다는 북쪽) 보다는 이곳이 지리적 위치에서 조금 더 유력하다. 만약 이곳이 부여의 후기 도성이었다면, 공격보다는 방어에 우선순위를 둔 수도였다고 생각된다. 성을 둘러보면서 방어력이 높은 성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확답하기는 이른 듯하다.
중국에서는 이곳을 고구려 시대 부여성이라고 비정하고 있다. 그래서 부여성에서 서남쪽으로 바다까지 천리에 걸쳐 쌓았다는 천리장성의 시작을 이곳으로 보는 견해도 나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다음 성까지 연결된 장성의 흔적은 없다. 나는 이곳을 천리장성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고구려시대 부여성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668년 2월 부여성이 함락되자, 부여주 안에 40여 성이 모두 항복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부여성은 부여주를 관할하는 성으로 주변에 성들이 많아야 하는데, 이곳은 그런 기록과 부합되기 어렵다. 발해 멸망 당시 부여부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고구려의 부여성은 이곳이 아닌 부여 초기 수도 지역인 길림시 용담산성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정상에서 서둘러 내려와서, 현지인들이 황주관이라 부르는 샘에 도착에 샘물을 마셨다. 경롱천(璟瓏泉)이라고 적혀있는데, 중국에서는 당태종과 관련된 전설을 적어놓고 있다. 당태종이 무슨 홍길동이나 되는 양 대련시부터 이곳까지 안 온 곳이 없는 듯이 전설이 내려오지만, 대부분은 전혀 근거 없는 황당한 이야기들일 뿐이다.
내려오면서 등반할 때 보지 못한 수문에서 서문 사이에 잘 쌓은 성벽과 서문지를 보고 내려왔다. 그리고 중간에 성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크게 뛰쳐나온 큰 심석과 성 안쪽 성벽도 성 바깥처럼 잘 쌓은 협축(夾築)성벽의 모습을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내려왔음에도, 서풍 성자산성 답사는 4시간이 넘었다. 가을 산행코스로도 추천할만한 멋진 산에 고구려 산성이 있어서 눈이 매우 즐거운 날이었다.
답사를 마치고 서풍현으로 이동해 식사를 했다. 식당에 도착한 시간은 3시 10분경. 늦은 점심을 먹고 출발한 시간이 4시가 넘었다. 이제부터 버스 안에서 잠을 잤다. 4시간을 이동해 저녁 8시가 넘어 길림시에 도착해 식사를 하고, 9시 45분에 호텔에 도착했다. 늦게 호텔에 도착했지만, 이날도 그냥 잘 수는 없었다. 고구려 관방체제를 공부하는 신광철 선생과 함께 오늘 본 성자산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12시가 넘어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