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강론 >(12.7.일)
* 오늘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며 외치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기로 결심하면서, 오늘 미사를 봉헌합시다!
오늘은 제44회 인권주일,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하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인권주일에 관련된 우리나라 실화 몇 가지를 말해보겠습니다.
1.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
이분은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서 14세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고, 8년간 중국,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지를 떠돌며 아주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루 밤에 일본군 50명을 상대해야 하는 날은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평생 그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당신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1992년, 66세 때 할머니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공청회에서 처음으로 당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난 살아있는 증거입니다.”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진실을 얘기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매주 수요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단 한 번의 사과도 받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2012년 대만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난 한국 정부로부터 생활지원금을 받고 있지만, 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라며 자신의 배상금 전액을 그들에게 기부했습니다.
2019년 1월 28일, 93세의 나이로 선종하신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많은 사람이 “할머니, 이제 편히 쉬세요”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죽어도 이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2. 전태일 열사(생가 : 대구 중구 남산로 8길 25-16/ 대구대교구청 근처)
1948년 대구 출신인 전태일은 가난해서 초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16세에 서울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곳의 봉제 공장들은 다락방이었습니다. 천장 높이는 1.5m라 서서 허리를 펼 수 없고, 환기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15시간 이상 일했고, 하루 3끼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어린 여자 노동자 ‘시다’(대개 13~15세)의 상황은 더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전태일은 1969년 ‘바보회’ 모임을 만들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는데, “이 법만 지켜져도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동청과 신문사에 말해도 헛수고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심하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했을 때 나이가 22세였습니다.
엄마 이소선 여사가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고, 이 분신을 계기로, 내가 못다 이룬 사업을 꼭 이루어 달라”라는 아들 유언장을 공개했을 때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서울 광암 이벽의 집터 바로 앞 청계천에 전태일열사기념관이 있는데, 외관에 열사의 유서를 철판에 새겨 마감해놓았습니다.
3.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1929-2011)
아들이 분신할 때 52세였던 이소선 여사는 글을 배우지 못해, 한글을 배우며 노동운동에 합류했습니다. 1970년 11월 27일, 아들이 죽은 지 14일 만에 청계천 노동자들과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내 아들은 너희의 형이다. 너희는 모두 내 자식이다”라며 청계천 노동자들을 돌보았고, 1970년대에 노동자 권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경찰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노동야학을 운영하고, 젊은 노동자들에게 밥을 해주고, 아프면 약을 사줬습니다. 남의 집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자기 쌀을 힘든 노동자에게 덜어주었습니다. 1980년대 군부독재 때 도피생활을 하며 민주화운동을 계속했고, 1990년대에는 노동자 파업현장에 찾아가 “싸워 이기라”고 격려했습니다. 2003년, 74세 때 노동자 해고에 항의하며 명동성당 십자가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였고, 2011년 12월 3일, 82세 때 임종했습니다.
4.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당시 21세) 고문치사와 진실을 밝힌 의사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은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민주화운동 선배의 소재를 찾아내기 위해서였지만, 조사 시작 몇 시간 만에 물고문으로 숨졌습니다. 경찰은 그것을 은폐하려고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황당한 발표를 했습니다. 온 국민이 분개했지만, 진실을 밝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용기를 낸 분들은, 부검을 담당한 경찰병원의 오연상 의사와 황적준 의사였습니다. 그들은 시신 검사 후, 명백한 물고문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목에 선명한 멍자국이 있었고, 폐에 물이 차 있었는데, 경찰 고위층은 “심장마비로 써달라”고 요구했지만, 오연상 의사는 “이것은 명백히 고문에 의한 외인사입니다. 거짓 소견을 쓸 수 없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협박 전화, 미행, 신변도 위협받았지만, “의사로서 양심을 속일 수 없다”라며 진실을 지켰습니다. 결국 부검 소견서에는 ‘외인사(고문에 의한 질식사)’라고 명시되었습니다. 이 소견서는 경찰의 거짓말을 밝히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박종철의 장례식에 수만 명이 모였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장애인 이동권 투쟁, 삼성 반도체 노조 투쟁, 세월호 사건, 비정규직 노동자, 미혼모와 미혼부, 외국인노동자, 성소수자 문제도 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안전하고 자유롭게 미사 참례를 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아찔한 일입니다. 우리가 감추려 했던 여러 현실에 대해 차분하게 기도하면서 성탄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