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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세가 三家世家
폰 글로가우 · 폰 뉴엔부르크 · 폰 호엔촐레른
서(序)
슈바벤 땅에 에티코넨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연대기의 앞머리를 노르트가우의 작은 백작에게 내어주었고, 그 뒤로 열일곱 대의 이름을 차례로 적었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자는 한 가문이 어떻게 백작에서 공작이 되고, 공작에서 왕이 되고, 왕에서 황제가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을 아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것과 같다. 한 가문이 올라가는 동안 그 곁에서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견뎠는지를 함께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산의 높이만을 재고 골짜기의 깊이를 재지 않는 일이다.
여기 세 가문이 있다. 폰 글로가우, 폰 뉴엔부르크, 폰 호엔촐레른이다.
앞의 둘은 에티코넨과 싸웠고 졌다. 글로가우는 브뤼게와 토스카나와 괴팅겐을 잃었고, 뉴엔부르크는 멧츠와 부르군트와 베른과 수사를 잃었다. 그럼에도 두 가문은 오늘 이 자리에 있다.
세 번째는 다르다. 폰 호엔촐레른은 싸워서 진 것이 아니라 그냥 끊겼다. 그럼에도 그 이름은 오늘 이 자리에 있다. 이는 앞의 둘과는 다른 종류의 일이며, 나는 그것을 그 절에 이르러 따로 적겠다.
이 책의 양피지와 잉크는 세 이름의 곳간에서 나왔고, 필경사들의 품삯도 그러하다.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기고 사라진 자가 있고, 지고 남은 자가 있으며, 사라지고도 이름만 남은 자가 있다. 어느 쪽이 더 오래 사는지는 사람이 정하지 않는다.
제1절 폰 글로가우 一. 두 딸
주후 1076년 겨울, 베렌가르 '사자공' 루도핑거가 튀링겐 공작령을 상속하였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었으니, 장녀는 헤트비히요 차녀는 아델하이드였다.
아내는 폰 라인펠덴 가문에서 왔으며 그 이름 또한 아델하이드다.
그 시절 이 땅의 법은 아비의 것을 여럿에게 나누었다.
그리하여 베렌가르가 죽자 장녀 헤트비히는 아비의 으뜸 작위인 튀링겐을 받고, 차녀 아델하이드는 어미의 으뜸 작위인 슈바벤을 받았다.
그 차녀가 노르트가우 백작 게르하르트 에티코넨에게 시집갔다.
이 한 줄을 적으며 나는 붓을 멈춘다. 뒷날 슈바벤의 왕들이 튀링겐의 공작들과 칼을 겨눌 때, 두 편의 조상은 한 아비의 두 딸이었다. 언니의 것은 튀링겐이 되었고 동생의 것은 슈바벤이 되었다. 그것을 나눈 것은 원한이 아니라 법이었다.
헤트비히는 1111년 여름에 튀링겐을 물려받았고, 1140년 봄에 그 딸 마르켈라 알레라미치가 뒤를 이었다. 마르켈라는 폰 글로가우 가문에 들어갔으며,
1151년 가을 그 아들 마티아스 폰 글로가우가 튀링겐 공작이 되었다.
여기서 사료는 서로 어긋난다. 어떤 기록은 헤트비히가 마티아스의 아비와 혼인하였다 하고, 어떤 기록은 마르켈라가 그러하였다 한다. 나는 후자를 취하였으니, 마티아스가 헤트비히를 외할머니라 불렀다는 대목이 여러 문서에서 한결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언하지는 않겠다. 백 년 전의 혼인 문서를 들추어 다투는 것은 수도사의 일이 아니다.
주후 1160년, 나의 선배 형제들이 백 년 전 가문들의 근황을 적어두었다. 폰 라인펠덴은 살아 있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루도핑거는 하나가 남았으되 그는 혼인하지 못한 여인이었고, 다른 가문의 사생아 하나를 두었을 뿐이었다. 두 가문이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 두 이름이 있었다. 슈바벤에는 루돌프 2세 에티코넨이, 튀링겐에는 마티아스 폰 글로가우가 있었다.
二. 튀링겐의 여덟 대
마티아스로부터 튀링겐 공작위는 곧게 내려갔다.
1185년 겨울에 그 아들 하트비히가, 1216년 여름에 그 아들 에리히 1세가 뒤를 이었다. 사람들은 에리히 1세를 '자비공'이라 불렀다. 그 별호가 어디서 왔는지 전하는 이야기는 남지 않았으나, 그런 이름은 거저 붙지 않는다. 1234년 정월에 그 아들 에멜리히가, 1258년 정월에 그 아들 에리히 2세가 이었다.
일곱 대에 걸쳐 아비에게서 아들에게로 갔다. 이것은 이 시대에 드문 일이다.
1273년 시월, 에리히 2세의 딸 아말리에가 튀링겐 공작이 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1278년 팔월, 아말리에가 살해당하였다.
사료는 그 이상을 적지 않았다. 누가 죽였는지, 어디서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에 대하여 내가 손에 넣은 문서는 한결같이 침묵한다. 나는 튀링겐의 수도원 두 곳에 사람을 보내었으나 돌아온 것은 같은 침묵이었다. 다섯 해 동안 공작이었던 여인이 죽었고, 그 죽음의 모양은 남지 않았다.
작위는 아말리에의 고모이자 에리히 2세의 누이인 쥬타 폰 글로가우에게 갔다. 쥬타는 뒤에 슈비츠 백작 니콜라우스 빌룽과 재혼하였는데, 이 사람은 작센 공작령에 대한 오래된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쥬타가 죽으면 튀링겐은 그 여동생의 딸 발푸르가 에초넨에게 가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튀링겐의 기록이 끊긴다.
이 연대기는 슈바벤의 책이다. 슈바벤의 사람이 슈바벤의 후원으로 슈바벤에서 쓴다. 그러므로 슈바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어둡다. 튀링겐의 여든 해가 그러하다. 나는 그 어둠을 억지로 밝히려 하지 않겠다. 없는 것을 지어내는 붓은 있는 것마저 의심받게 한다.
三. 괴팅겐과 임스트
주후 1358년 유월, 튀링겐 공작 안드레아스 폰 글로가우 앞에 슈바벤 왕 카를만 1세의 사자가 섰다.
명분은 헬렌 에티코넨이라는 여인이 괴팅겐에 대하여 지닌 권리였다.
사람들은 이 공작을 '무비공(無備公)'이라 불렀다. 채비를 갖추지 못한 자라는 뜻이다. 그 별호가 언제부터 붙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나, 별호란 대개 붙고 나서 그것을 증명하게 되는 법이다.
그해 십일월 도르트문트에서 큰 싸움이 있었고, 이듬해 시월 에르푸르트가 떨어졌다. 1360년 오월, 안드레아스는 졌다. 헬렌 에티코넨이 괴팅겐 백작이 되어 카를만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같은 피붙이로서의 충성이었다.
앞서 나는 이 집안이 일곱 대에 걸쳐 아비에게서 아들에게로 곧게 내려갔다고 적었다. '자비공'이라 불린 이가 있었고, 이제 '무비공'이라 불린 이가 있다. 한 가문의 별호가 자비에서 무비로 옮겨 가는 데 백사십 해가 걸렸다.
이백 년 전 한 아비가 두 딸에게 나누어준 것 가운데, 동생의 몫이 언니의 몫을 베어 물기 시작한 것이 이때다.
안드레아스의 뒤는 그 아들 에멜리히 2세 폰 글로가우가 이었다.
1382년 이월의 문서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그에게는 막내딸이 있었으니 이름은 발푸르가였고, 슈바벤 왕 헤리베르트 1세의 차남 하르트만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해 이월에 그 약혼이 취소되었다.
아비가 괴팅겐을 잃은 지 스물두 해 만에, 그 딸이 슈바벤의 왕자에게서 물려짐을 당한 것이다. 전쟁에서 진 집안의 딸을 두고 값을 다시 매기는 일은 이 시대에 드물지 않다.
그리고 1415년 삼월, 임스트에서 싸움이 있었다.
슈바벤 왕 하르트만 1세가 칠천으로 돌격하여 이천사백을 들이쳤고, 그 가운데 이천이 쓰러졌다. 중군은 왕이 몸소 이끌었다. 그날 튀링겐 공작 에멜리히 4세 폰 글로가우가 죽었다. 사료는 '살해'라는 말을 썼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옮긴다.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살해가 아니라 전사라 부르는 것이 관례이나, 이 기록을 남긴 자는 다른 말을 골랐다. 그가 왜 그 말을 골랐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그것을 골랐다는 사실만을 적어둔다.
에멜리히 2세와 에멜리히 4세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이름 하나가 내 손에는 없다.
四. 브뤼게의 백 년
같은 이름을 쓰는 다른 무리가 북쪽에 있었다. 플란더렌의 글로가우다. 이들이 튀링겐의 글로가우와 어느 대에서 갈라졌는지, 나는 끝내 찾지 못하였다.
먼저 브뤼게의 내력을 적는다.
1255년 십일월, 슈바벤 공작이 브뤼게 백작 카를만 잘리어에게 전쟁을 걸었다. 명분은 알마리히 에티코넨이 지닌 희미한 권리였다.
알마리히는 외가에서 브뤼게에 대한 권리를, 친가에서 울름에 대한 권리를 함께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1257년 팔월, 알마리히가 브뤼게 백작이 되었다.
1307년 유월 알마리히가 죽고 그 아들 군터 에티코넨이 이었다. 이 사람은 뒷날 슈바벤의 대장군이 되었고, 프로방스 전쟁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332년 팔월 호엔바스에서 그는 적의 편에 서 있었고, 그곳에서 사로잡혔다. 브뤼게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무렵 플란더렌 공작 마르크바르트 2세 폰 글로가우가 등장한다.
그는 1300년에 태어났다. 쌍둥이로 났다 하며, 성을 쌓고 재물을 불리는 데 밝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였으며,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평을 들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대단히 높이 여겼고,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들에 마음을 두었다. 그는 프로방스 공작 레오폴트 1세 에티코넨의 누이 가운데 하나를 아내로 맞았다.
1340년 구월, 남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보던 마르크바르트가 슈바벤 왕 아달베르트 1세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법이 정한 땅을 되찾겠다는 명분이었다.
1342년 칠월, 플란더렌 군이 남하하였다. 슈바벤 왕은 우익에서 슈타이어마르크 백작 볼프강 에티코넨을 내리고, 식객으로 있던 하르가니 쿨름바이드를 그 자리에 세웠다.
그해 팔월 십육일 낭시에서 두 군대가 맞부딪쳤다. 슈바벤이 만이요 플란더렌이 만사천이었다. 슈바벤에서 칠천이 쓰러지고 플란더렌에서 구천이 쓰러졌다. 죽은 자의 수로는 플란더렌이 더 잃었으나, 남은 자의 수로는 슈바벤이 더 잃었다. 싸움은 슈바벤의 대패로 끝났다.
1344년 정월, 아달베르트 1세 대부터 이어져 온 브뤼게 쟁탈전이 끝났다. 마르크바르트 2세가 이겼고 카를만 1세가 졌다.
같은 달, 브뤼게 백작이었던 군터 에티코넨이 슈바벤 왕국의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 뒤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1353년 십이월, 카를만 1세가 다시 전쟁을 걸었다. 이듬해 정월, 프로방스 공작 레오폴트 1세가 처남의 부름에 응하여 마르크바르트의 편에서 싸움에 나섰다. 에티코넨의 피를 받은 자가 에티코넨의 종가를 상대로 창을 든 것이다.
1354년 십이월, 브뤼게의 슬로이스가 떨어지고 마르크바르트의 손자 필리베르트가 사로잡혔다. 이듬해 정월 브뤼게가 떨어졌고, 오월에 백작령이 마르크바르트의 손에서 넘어갔다.
노공이 손자의 몸값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전한다.
"백작령은 도로 오는 것이나 아이는 그렇지 않다."
이 말이 참으로 그의 입에서 나왔는지 나는 보증하지 못한다. 다만 브뤼게는 그의 대에 돌아오지 않았다.
1357년 시월, 마르크바르트 2세의 외손녀 게르베가 폰 글로가우와 카를만 1세의 차남 로타르 에티코넨이 약혼하였다. 브뤼게를 빼앗긴 지 두 해 반 만이다.
그로부터 일흔 해가 지난 1426년 십이월, 필리베르트 폰 글로가우가 벤첼 폰 글로가우에게서 플란더렌 공작위를 빼앗아 필리베르트 2세라 칭하였다. 두 사람 모두 어미가 에티코넨 가문에서 났다. 한 가문의 두 사람이 다투었고, 두 사람의 어미가 같은 가문에서 왔다.
五. 남쪽의 글로가우
세 번째 무리는 남쪽에 있었다.
에르멘가르트 폰 글로가우는 1292년에 났다. 대모라비아 왕 페르디난트 1세 폰 바이마르가 왕위에 오른 뒤 그에게 토스카나 공작령을 내렸다. 1306년 정월 슈바벤 공작의 장손 아달베르트 에티코넨과 약혼하였고, 열 해가 지난 1316년 정월에 혼인하였다.
1349년 시월, 에르멘가르트가 죽었다. 그 아들 카를만 1세가 어미의 토스카나 공작령을 물려받았으니, 피렌체와 시에나와 루카가 함께 딸려 왔다.
한 여인이 시집오면서 가져온 것이 아들의 대에 슈바벤의 것이 된 것이다.
또 하나의 갈래는 슐레지엔에 있었다. 브레다 여백작 우르술라 폰 슐레지엔글로가우는 슈바벤 공작 페르디난트 1세 에티코넨의 후처였다. 1311년 시월에 아들을 낳았고, 1315년 사월 상처가 곪아 죽었다.
이 집안의 이름은 오래 살아남았다. 1405년 십일월, 슈바벤 왕 하르트만 1세가 피사 공화국의 도제에게 전쟁을 걸었으니 명분은 알베리히 폰 글로가우가 피옴비노에 대하여 지닌 권리였다. 이듬해 사월 미란돌라에서 적의 태반이 무너지고 도제의 장남이 사로잡혔다. 1407년 삼월, 시에나 백작 알베리히 폰 글로가우가 피옴비노 백작령을 손에 넣었다.
이 사람은 한동안 슈바벤 왕의 대장군이었다. 1413년 오월, 그 자리가 슈바벤에 머물던 식객 에리히 폰 몬테풀치아노에게 넘어갔다. 에리히의 무예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 만한 것이었고, 알베리히의 그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1418년 유월, 슈바벤 왕 헤리베르트 2세가 영지를 정리하며 루카 백작 페르디난트 폰 슐레지엔글로가우에게 토스카나 공작령을 내렸다.
에르멘가르트가 죽은 지 예순아홉 해 만에, 토스카나는 글로가우의 손으로 돌아갔다.
제2절 폰 뉴엔부르크 一. 처가의 창
주후 1190년, 상부르군트 공작 폴크하르트 2세 폰 뉴엔부르크가 헨리케 에티코넨을 아내로 맞았다. 헨리케는 슈바벤 공작의 삼촌 게를라흐 에티코넨의 딸이다.
열일곱 해 뒤인 1207년 유월, 슈바벤 공작 안드레아스 2세가 폴크하르트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명분은 빌헬름 에티코넨이 멧츠에 대하여 지닌 권리였다.
하로트링겐 공작 루트비히 보존과 그 아내가 슈바벤 편에 섰다.
1209년 정월 몽벨리아드에서 결판이 났다. 슈바벤이 만으로 사천을 쳐서 칠백만을 살려 보냈고, 스스로는 천삼백을 잃었다. 그 싸움에서 폴크하르트 2세가 사로잡혔다.
같은 달 멧츠가 넘어갔다. 빌헬름 '찬탈자' 에티코넨이 멧츠 백작이 되었다.
혼인한 지 열일곱 해에 처가의 창에 찔려 포로가 된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적으며 이 세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결을 보았다. 뉴엔부르크와 에티코넨은 세 번 맺어지려 하였고 세 번 어긋났다. 그 첫 번째가 이것이다.
여기서 상부르군트의 기록이 아흔 해 가까이 끊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은 슈바벤의 눈으로 쓰인다. 그 눈이 부르군트의 산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세 세대가 걸렸다.
二. 두 방계
1303년 사월, 브레이스가우 백작 디트마르 폰 뉴엔부르크가 아비의 작위와 어미의 작위를 함께 받아 두 백작령의 주인이 되었다. 그 어미는 하일비파 에티코넨이니, 안드레아스 2세의 차남 아마데우스의 손녀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 한 줄 뒤로 사료에서 사라진다.
알트마크 백작 아말베르가 폰 뉴엔부르크는 이 집안의 여인이었다. 1315년 유월, 슈바벤 공작의 사생아 알마리히와 약혼하였다.
열다섯 해가 지난 1330년 십일월에야 혼인이 이루어졌다.
1338년 이월, 아말베르가가 슈바벤 왕 아달베르트 1세의 편에서 싸움에 나섰다. 상부르군트 공작 발터 폰 뉴엔부르크를 상대로였다. 같은 가문의 사람이 같은 가문의 사람과 맞선 것이다.
그러나 몇 해 뒤 아말베르가는 슈바벤 편에서 빠졌다. 그의 주군은 브란덴부르크 공작이었고, 주군의 사정이 그를 물러나게 하였다.
가문은 하나이나 주군은 여럿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어느 편에 서는지를 정하는 것은 핏줄이 아니라 서약이다.
三. 발터 폰 뉴엔부르크
발터는 1298년에 났다.
그는 혼인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으며, 하느님을 두려워하였고, 사람들과 어울리되 절제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 세가에 이름을 남긴 자들 가운데 병법에서 가장 뛰어났다.
사료를 적은 이는 이 가문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폴크하르트 2세 시절부터 이미 두각을 드러낸 가문이며, 프로방스 공작령과 이웃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발터는 전 프로방스 공작 만프레트 1세의 차녀를 아내로 맞았다. 곧 프로방스 공작 레오폴트 1세의 둘째 누이다.
1323년 십일월, 슈바벤 왕과 프로방스 공작이 다툴 때 발터는 처남의 부름에 응하여 프로방스 편에 섰다.
프로방스와 상부르군트와 하로트링겐이 손을 잡았고, 그리하여 이 싸움은 여럿이 하나를 에워싸는 모양이 되었다.
1326년 유월, 아달베르트 1세는 봉신들의 군대만으로는 힘에 부친다 여겨 롬바르디아의 용병대장 빅토르를 사들였다.
그해 시월 십일, 엠브룬에서 두 군대가 만났다. 슈바벤이 만이천이요 상부르군트가 만이었다. 발터는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싸움이 끝났을 때 슈바벤은 만이천 가운데 삼분의 이 넘게 잃었고, 지휘관 둘이 돌아오지 못하였다. 용병대장 빅토르도 그중 하나였다. 슈바벤 군은 싸움을 시작한 자리로 물러났다.
두 달 뒤인 그해 십이월 초하루, 알본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슈바벤이 사천이요 상부르군트가 육천오백이었다. 슈바벤의 장수들은 두 달 전 자기들을 무너뜨린 그 진법을 그대로 흉내내었다. 상부르군트 육천오백 가운데 오천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나 사료는 이렇게 덧붙인다. 대세를 따오기에는 부족하였다고.
병법으로 두 번 이긴 자가 나라의 무게로 졌다. 이것이 발터 폰 뉴엔부르크의 생애를 요약하는 한 줄이다.
1338년 정월 초하루, 아달베르트 1세가 다시 전쟁을 걸었다. 명분은 뉘른베르크 백작 휘하의 벤첼 에티코넨이 부르군트 백작령에 대하여 지닌 권리였다.
그해 이월, 대모라비아 왕 페르디난트 3세 폰 바이마르가 발터의 부름에 응하여 참전하니 신성로마제국 안에 포위의 형세가 갖추어졌다. 같은 달 알트마크 백작 아말베르가는 슈바벤 편에 섰다.
1338년 오월 삼일 샹베리에서 상부르군트 육천이 팔백만 남기고 무너졌다.
1340년 유월, 프로방스 공작 레오폴트 1세가 발터를 도우러 왔다. 1341년 오월과 칠월, 라우산네와 발다혼에서 상부르군트 군이 거듭 꺾이며 대부분 흩어졌다.
1342년 삼월 십일일, 발터가 졌다. 벤첼 에티코넨이 부르군트 백작이 되어 아달베르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四. 베른과 수사
1362년 사월, 상부르군트 공작 미카엘 2세 폰 뉴엔부르크 앞에 슈바벤의 사자가 섰다. 명분은 고첼로 에티코넨이 베른에 대하여 지닌 권리였다.
1362년 구월과 시월에 세 번 연이어 졌다. 1363년 팔월부터 시월까지 성이 차례로 떨어졌다. 1364년 정월 바이블링겐에서 상부르군트 군은 전멸하였다.
같은 달 고첼로 에티코넨이 베른 백작이 되었다. 친족으로서 헤리베르트 1세에게 충성하였다.
멧츠에서 백오십 해, 부르군트에서 스물두 해, 베른에서 다시 스물두 해. 상부르군트는 그렇게 조금씩 깎여 나갔다.
이 가문의 마지막 기록은 한 여인의 것이다.
수사 공작 마리아 폰 뉴엔부르크는 1381년 사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만프레트 1세로부터 작위 박탈 전쟁을 선고받았다. 그해 오월 만프레트 1세가 병으로 승하하고, 장남을 건너뛰어 삼남 고트샬크 에티코넨이 제위에 올랐다.
1382년 이월, 고트샬크 1세가 마리아에게서 수사 공작위를 거두고 안할트 백작으로 낮추었다.
같은 달, 슈바벤 왕 헤리베르트 1세의 차남 하르트만 에티코넨이 튀링겐 공작 에멜리히 2세의 막내딸 발푸르가와의 약혼을 물리고, 안할트 백작 마리아 폰 뉴엔부르크에게 청혼하였다.
이듬달 삼월, 마리아가 거절하였다.
사자가 돌아가 그 말을 전할 때 마리아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공작의 관을 벗긴 손이 이제 반지를 내미는구나. 그 손을 잡으면 내게 무엇이 남겠느냐."
마리아는 상부르군트 공작 베르톨트 폰 뉴엔부르크와 혼인하되, 자식이 어미의 가문을 따르는 조건으로 하였다. 곧 뉴엔부르크의 이름을 지키는 혼인이었다.
같은 달 하르트만 에티코넨은 에스테르곰 공작 마르가레타 아르파트와 약혼하였다.
한 달 사이에 세 번의 약혼이 오갔다. 그 가운데 두 번은 깨졌다.
이 세가에서 에티코넨에게 '아니오'라고 말한 자로 이름이 남은 사람은 마리아 폰 뉴엔부르크 하나뿐이다.
제3절 폰 호엔촐레른
一. 촐레른의 여남작
주후 1209년 오월, 슈바벤 공작 안드레아스 2세의 넷째 아들 알베리히 에티코넨이 촐레른 남작 우르술라 폰 호엔촐레른과 약혼하였다.
당시 이 가문의 형편을 사료는 이렇게 적는다. 우르술라가 호엔촐레른의 마지막 남작이 될 수 있으며, 그의 삼촌 에기놀프 폰 호엔촐레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가문이 끊긴다고.
곧 이 혼인은 사라져 가는 집안의 문 앞에서 맺어진 것이다.
약혼은 열네 해를 끌었다. 1223년 유월에야 혼인이 이루어졌다. 그 열네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은 없다. 신부의 나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1235년 십일월 안드레아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장남 아달베르트가 슈바벤 공작을 이었고, 나누어 물려주는 법에 따라 노르트가우 백작령은 넷째 아들 알베리히에게 갔다.
에티코넨이 처음 일어선 땅이다. 게르하르트 노르트가우백의 땅이다.
그 땅이 촐레른 여남작의 지아비에게 넘어갔다.
二. 이름이 끊긴 자리
우르술라는 호엔촐레른의 마지막 남작이었다.
삼촌 에기놀프에게 끝내 후사가 없었고, 우르술라 자신은 에티코넨 가문에 시집갔다. 그가 낳은 아이들은 아비의 성을 따랐다. 그리하여 촐레른의 남작 자리와 함께 폰 호엔촐레른이라는 이름은 그 대에서 끝났다.
문서로 보자면 이 세가의 세 번째 절은 여기서 마쳐야 옳다. 한 여인이 마지막이었고, 그 마지막이 다른 가문의 성으로 갈아입었다.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절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
三. 이름을 자처하는 자들
작위가 끊긴 뒤에도 촐레른의 땅에는 사람이 살았다.
우르술라의 대에 이르기까지 이 집안에서 갈라져 나온 갈래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작의 관을 쓰지 못하였고, 대를 거듭하며 신분이 낮은 집안과 혼인하였다. 이 땅의 법은 그러한 혼인에서 난 자식에게 귀족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 대나 네 대가 지났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귀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촐레른에 살았고, 밭을 가졌고, 방앗간과 나루의 삯을 걷었다. 다만 궁정에 불려 가는 일이 없었고, 서약을 바칠 주군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서기가 그 이름을 적을 일이 없었다.
백 년이 넘도록 그들의 이름이 적힌 문서를 나는 찾지 못하였다. 전쟁도 없고 혼인도 없고 죽음도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적히지 않은 것이다. 큰 기록에 오르지 않는 삶이 없는 삶은 아니다.
땅의 이름만은 남았다. 1422년 구월과 시월에 촐레른과 카를스루에 사이에서 큰 싸움이 있었고 슈바벤이 크게 이겼다. 그 싸움터의 이름에 촐레른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위하여 양피지와 잉크를 보내온 이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호엔촐레른의 갈래라 여긴다. 문서로 그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들이 내놓은 기록을 살펴보았으나, 우르술라의 대까지 곧게 이어지는 줄을 찾지 못하였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오늘 귀족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호엔촐레른의 이름으로 이 책의 값을 치렀다.
한 사자가 은을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공의 문서에 우리 이름을 적어 달라는 것이 아니오. 다만 그 이름이 있었다는 것만 적어 주시오."
나는 그 청을 물리지 않았다. 이 절이 이것이다.
논찬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세 가문의 일을 적고 나서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여기에는 승리가 거의 없다. 글로가우는 괴팅겐과 브뤼게와 토스카나를 내주었고,
뉴엔부르크는 멧츠와 부르군트와 베른과 수사를 내주었으며,
호엔촐레른은 내줄 것조차 없이 한 여인의 대에서 끊겼다. 이 세가는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이다.
그런데도 세 이름은 오늘 여기 있다.
내가 이 책의 앞머리에서 적은 두 가문을 떠올려 보라. 폰 라인펠덴은 1160년에 살아 있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루도핑거는 하나가 남았으되 그는 혼인하지 못하였다. 두 가문은 작위를 잃어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끊겨서 끝났다.
멸문이란 백작령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본다. 작위는 사람에게 붙어 다니는 것이지 사람이 작위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토스카나는 글로가우에서 에티코넨으로 갔다가 예순아홉 해 만에 글로가우로 돌아왔다.
튀링겐은 루도핑거에서 글로가우로 옮겨 갔다. 브뤼게는 잘리어에서 에티코넨으로,
에티코넨에서 글로가우로, 다시 글로가우에서 에티코넨으로 옮겨 다녔다.
그것들은 관과 인장과 문서일 뿐, 그것을 쥐는 손이 바뀌어도 관은 관대로 남는다.
복된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상의 나라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평화는 전쟁으로 얻어지고 다시 전쟁으로 잃는 것이라 하였다.
이 세 가문의 이백 년이 그 말의 주석이다. 얻은 자는 지키기 위하여 또 싸워야 하고, 잃은 자는 되찾기 위하여 또 싸워야 한다.
그 사이 사람들은 태어나고 혼인하고 죽는다.
남는 것은 후자이지 전자가 아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혼인이다.
세 가문은 모두 에티코넨과 거듭 혼인하였다.
폴크하르트 2세는 에티코넨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열일곱 해 뒤 그 처가에 사로잡혔다.
마르크바르트 2세는 에티코넨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그 처남이 자기 편에서 싸워 주었으나 손자는 사로잡혔다.
1426년 플란더렌에서 다툰 두 사람은 어미가 모두 에티코넨이었다.
알베리히 에티코넨은 촐레른의 여남작을 맞아 노르트가우를 얻었다.
나는 이 세가 전체에서 혼인이 전쟁을 막은 사례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딸을 보내며 평화를 산다고 믿는다. 그러나 딸은 평화의 값이 아니라 권리의 씨앗이다.
시집간 딸이 낳은 아들은 어미의 땅에 대한 권리를 지니게 되고,
그 권리는 한 세대나 두 세대를 잠자다가 창이 되어 돌아온다.
빌헬름의 멧츠가 그러하였고, 알마리히의 브뤼게가 그러하였고, 고첼로의 베른이 그러하였고, 헬렌의 괴팅겐이 그러하였다.
혼인은 전쟁을 미루는 것이지 없애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이 노래하기를,
트로이아가 불탄 뒤 그 재 속에서 나온 자들이 바다를 건너 새 성을 쌓았다 하였다.
이긴 그리스인들의 왕은 제 집에서 죽었고, 진 자의 후손이 로마를 세웠다.
나는 이교도의 노래를 함부로 인용하는 자를 좋아하지 않으나, 이 대목만은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지고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해졌다 하였다. 그 강약은 하루아침의 승패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만 더 적겠다.
마리아 폰 뉴엔부르크는 공작위를 빼앗겼고, 그것을 빼앗은 가문의 왕자에게서 청혼을 받았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자기 가문의 사람과 혼인하되 자식이 제 가문의 이름을 잇도록 하였다.
그는 아무것도 되찾지 못하였다. 안할트 백작으로 살다가 이름 없이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뉴엔부르크라는 이름은 오늘도 있다.
그리고 호엔촐레른이라는 이름도 오늘 있다.
그것을 쥔 자들의 몸에 그 피가 흐르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문서는 그렇다고 말해 주지 않는다.
앞에서 나는 멸문이란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일이라 적었다.
이제 한 줄을 덧붙여야겠다. 그 반대도 참은 아니다.
피가 이어졌다 하여 이름이 남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남았다 하여 피가 이어진 것도 아니다.
우르술라의 아이들은 그의 피를 받았으나 그의 이름을 버렸고, 촐레른의 지주들은 그의 이름을 들었으나 그의 피를 증명하지 못한다.
하나는 피만 남았고 하나는 이름만 남았다. 어느 쪽이 그 가문인가.
나는 답하지 않겠다. 다만 오백 년 뒤에 이 책을 펼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호엔촐레른이라는 이름을 읽을 것이다.
그 이름을 이 양피지에 남긴 것은 남작의 관을 쓴 자가 아니라 그것을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자들이다.
나는 이 세가를 쓰라고 나에게 양피지를 보내온 이들의 뜻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를 남기고 싶어 했을 것이다.
나는 그 대신 그들이 어떻게 남았는지를 적었다.
후자가 더 어려운 일이며, 더 드문 일이며, 결국 더 오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긴 자가 쓴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잉크는 진 자들과, 이긴 적조차 없는 자들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