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 2장 1-6절
설교제목 : 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검은 외투를 입은 여인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가장 긴 밤의 시간인 동지를 지나 대림절 마지막 주를 맞이했습니다. 4주간의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는 이 나라와 세계에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 듯합니다. 이 평화는 우리 자신임과 동시에 주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임하시고, 새로운 구세주의 탄생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가능할 것입니다.
다음의 그림은 로렌조 모나코(Lorenzo Monaco, c.1370-1425)가 1421년에 그린 “동방박사들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입니다. 로렌조는 1370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나 피렌체로 가서 아뇰로 가디(Agnolo Gaddi)의 견습생을 지냈고, 1387년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수도원에서 있는 노빌리 경단 제단화를 그리다고 1391년 12월에 이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피렌체의 여러 수도원의 제단화를 제작했습니다. 로렌조는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전환의 시기에 피렌체에서 활동한 화가였습니다. 그가 그린 이 그림은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제단화로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에 대한 색채와 형태에 대한 설명도 있지만 특별히 부각되는 부분은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 마리아와 손을 모으고 가부좌를 한 예수 상과 그 주위에 핑크색 톤으로 그려진 건물과 그 안에 소들의 모습이 있는 영역입니다. 모든 인물들은 그를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회색톤의 돌 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 제단화의 중심은 왼쪽 영역입니다. 르네상스로의 전환기에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치열한 격전지는 피렌체였습니다. 그곳에서 로렌조는 아기 예수를 떠받치고 있는 검정 외투를 입고 있는 여성상인 마리아의 중요성을 표현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검정색은 모든 색이 감추어져 있고, 죽음 후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신비한 능력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가 회색의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은 단단하고 강력한 물질적 토대 위에 있다는 것을 대변합니다. 이런 어둠과 고통 뒤에 나타날 구세주의 탄생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과 우리 시대에 자신 안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감추어져 있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을 실어나를 수 있는 이런 여성원리가 필요합니다. 수용성, 공감능력, 자신과 세계에 대한 관계성, 대지성과 삶에 대한 사랑, 자연과의 조화 등과 같은 태도가 경쟁적이고 호전적이며, 목표지향적인 우리 세계를 다시 재조정할 수 있는 여성적인 요소입니다. 대림절 마지막 시간에 우리 안에 검은 외투를 입은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탄생이 일어나는 순수한 그릇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별을 보는 자
마태복음 2장은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예수의 탄생의 시기와 장소를 소개합니다.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롯이 다시 유대사회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입니다. 떡을 만드는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빵집에서 나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특이한 빵을 파는 빵집에서 가서 빵을 사려는 꿈을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꿈 속에서 꿈의 자아가 빵집을 찾아간 것을 생명과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받기 위해 무언가를 찾는 상황임을 시사합니다. 특이한 빵은 일반적이지 않고 낯설고 독특한 자양분을 주는 내용입니다. 더 살펴보니 꿈 꾼이는 어떤 무당을 찾아가서 생명력을 복원하려 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현대인의 꿈에서 이런 빵집은 고통 속에서 생명을 구원할 자를 만나는 곳임이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6절 후반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다스린다’라는 표현을 관주에는 ‘먹일’이라고 달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빵집에서 구세주의 빵, 우리의 영혼에게 귀한 것을 먹이고 생명력을 다시 일으키고 다시 살게 할 분을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찾아옵니다. 동방에서도 박사들은 ‘마기Magi’로 별을 연구하는 점성술사들이었습니다. 별을 보며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내다보는 자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연구하며 현재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고자 했던 마법사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모든 영혼은 하늘의 별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이런 이유로 오래전부터 별을 향해 투사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죽으면 별로 돌아간다는 관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별은 인간의 영혼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별은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도 별을 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더 이상 하늘의 별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현재의 지상적 만족과 쾌락을 탐닉하며 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먹고 즐기고 편하고 본능적 삶에만 경도되어 살게 되면, 그것은 동물적 삶일 수 있습니다. 별을 본다는 것은 더 크고 위대한 세계를 보는 것이고, 합리적 세계를 넘어서 비합리적 세계를 주시하는 것입니다. 별 보기는 다가올 시간이 무엇이 펼쳐질지를 직감하고 분별하여 그것을 준비하는 태세를 갖추게 합니다. 별은 또한 개인의 고유한 운명입니다. 오늘 우리 세계는 고유한 자신만의 운명의 길을 따르기보다 집단의식이 규정한 모든 사람이 달려가는 길로만 모든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갑니다. 고유한 개성은 사라지고, 집단이 규정된 가치로만 자신을 규정하며 살고자 합니다. 자신 안에서 고유한 별을 찾지 못한 자는 자신의 고유성과 위대성을 외부에 있는 인물에게 투사하고 권력상이나, 영웅상들을 흠모하고 추종하고 찬양하기도 합니다.
우리 위로, 우리 아래로 어떤 별을 보며 살고 있으신가요? 어떤 운명의 배열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시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비로소 더 큰 세계가 우리 위로 아래로 펼쳐져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과 보조를 맞추어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경영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을 찾는 자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들을 보던 중, 어느날 왕의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이 주목하며 찾았던 것은 왕의 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았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2).” 새로운 질서와 평화를 가져올 왕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별들 중에 왕의 별을 보고 왕의 탄생을 확신하고 그 왕을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이 대목은 ‘나ego’가 왕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중심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운명을 넘어서 그 운명을 이끌 전체 우주와 정신의 중심이자 통치자이자 조절자가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경배하기 위해 먼나먼 길을 따라 왔습니다. 오늘 이런 동방박사들의 모습은 자기애와 자아가 만든 왕국 속에 유폐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이 갖추어야할 진정한 태도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아를 찾는 여정이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를 찾는 여정인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찾는 여정을 넘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경배하는 여정이 인간의 핵심가치임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전반기 인생은 나를 찾는 길이라면, 후반기 인생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과의 연합을 위해 나아가는 여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어쩌면 그 왕의 별을 찾는 시간일 것입니다. 권력의 이름으로 왕이 되려는 자는 진정한 구세주의 출현은 두려움과 당혹감일 수 밖에 없습니다. 너나없이 왕이 되려는 세상, 그 권력을 투사하여 권력충동을 실현하려는 세상에서 결코 그것으로는 우리의 세계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구세주의 별을 찾아 경배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왕은 어디에서 있습니까?
동방박사들이 왕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는 소식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납니다. 헤롯왕도,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당황하였습니다. 왕은 대제사장과 율법교사들을 불러모아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날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의 기록대로 “유대 베들레헴”임을 일러줍니다. 미가 5장 2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새로운 왕은 당대의 큰 도시,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왕국에서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유대 베들레헴, 작은 족속,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십니다. 우리의 통상적 집단적 가치를 깨는 방식으로 새로운 왕, 그리스도가 태어나신다는 것입니다. 왕은 어디에서 태어나실까요? 기존의 가치 체계나 나의 경도된 의식에서는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작고 소외된 곳에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탄생 이야기에서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듯, 더럽고 지저분하고 동물의 배설물이 가득한 곳에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본능상이 있는 충동의 영역에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나의 내면의 깊은 후미진 곳에서 새로운 왕은 탄생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탄생의 역설이자 신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잘 것 없는 작은 것 속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신다는 이 역설의 신비를 마음에 품고, 열등하고 하찮게 취급했던 것들 속에서 태어나시는 새로운 왕을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