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듣기 (도움말·정보), 문화어: 쓰딸린/스딸린/스타린, 1879년 12월 21일~1953년 3월 5일)는 옛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인이다.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수반을 역임했다. 1950년 6.25 전쟁을 기획했다는 주장도 있다.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로도 불렸다. 그의 수많은 가명중 하나인 스탈린이라는 가명은 '강철'을 뜻하며, 본래 이름은 이오세프 주가슈빌리(그루지야어: იოსებ ჯუღაშვილ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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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그루지야의 소도시 고리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러시아 정교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는 스탈린에게 기독교 신앙이 있어서가 아니라, 러시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던 정교회 성직자가 되는 것이 최선의 진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심이 그다지 깊지는 않았고 교회에까지 간섭하는 제정 러시아의 독재를 목격하면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20세를 전후로 러시아의 외곽 도시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편집] 정치 활동과 집권과정
그 뒤 볼셰비키의 사회 민주 다수당의 공작원으로 은행 강도 등 범죄행위에 가담한 사실이 적발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유형 생활중 블라디미르 레닌과 교우하게 되었고, 1913년에는 레닌의 권유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라는 논문을 작성했다. 재차 북시베리아로 유형에 처해졌다.
1917년 사회주의10월혁명 전까지 스탈린은 정계에서 주목을 받는 존재는 아니었으나 1918년 이후 민중감독관에 임명됨과 동시에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군사지휘권을 받았으며, 1920년엔 소련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편집] 집권기간
스탈린의 폭력적 정치수단, 지나친 러시아주의 그리고 관료주의적 성향은 스승인 레닌에 의해 비판되기도 하였다. 레닌은 특히 그의 유명한 유언장에서 "스탈린에 최고 지도자 자리를 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으나, 1924년에 이르러 이미 거의 모든 내부 정치 조직체는 스탈린의 지배권하에 들어갔고, 1920년대 말에 스탈린은 레닌 이후 소련 공산당의 두뇌로써,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레닌의 신경제정책을 5개년 경제개발계획으로 대체해 공업기술화와 특히 농업 생산물의 공동생산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후에 공산주의의 한 취약점으로 꼽히게 되는 강제 노동 생산 즉, 생산성없는 경제활동의 첫 장을 열었다.그러나 강제 노동 생산은 러시아의 산업화와 근대화의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가난과 억압을 받던 러시아 민중들에게 옛 소련의 산업화는 그들에게 부강한 나라건설이라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엄청난 학살극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스탈린은 혁명에 방해가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한 처형을 단행하였다. 그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에조프를 내무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여 1936~1939년 기간 동안 제일 큰 위협인 군대를 제거한다. 1937년 6월 2일에는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영웅이며 소련군 건설의 1등 공신인 참모총장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 이하 8명의 장군을 나치와 손잡고 스탈린에 대해 음모를 꽤했다는 죄로 처형했다.[1]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5,000명이 넘는 고급장교가 처형됐다. 이 숙청으로 5명의 소련군 원수 중에서 3명, 15명의 군사령관급 장성 중에서 13명, 85명의 군단장급 장성 중 57명, 195명의 사단장급 장성 중 110명, 406명의 여단장급 장교 중 220명이 처형됐다. 혁명에 방해가 되는 군부의 장성들과 고위 장교들을 두하체프스키 원수가 받은 죄목에 뒤집어 씌워 처형했다. 소련 내무 인민위원회 위원 에조프가 스탈린에게 바친 사형자 명단은 책으로 383권으로, 책에 기록된 사형자 수는 모두 4,500만 명이 넘는다.[1]
[편집] 숭배 강요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스스로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러시아 정교회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로 찬양받았다. 그러는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흉상·동상·초상 들을 각지에 많이 건립하고 개인 우상숭배를 강요하여 스스로 예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1]
[편집] 만년과 독살설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인 니키타 흐루쇼프 등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4일 만인 3월 5일 숨졌다.[1] 공식 발표된 사망 원인은 뇌일혈이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독살됐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1]
[편집] 암살 의혹
2000년대 이후 스탈린 전문가들은 스탈린의 독살설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2003년 3월 5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나우모프와 미국 예일대학의 소련연구가인 조나단 브렌트는 공동저서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에서 독살설을 주장하고 있다.[1]
나우모프와 브렌트에 의하면 스탈린 독살의 용의자로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1] 스탈린 사망 후 베리야는 "내가 그를 해치우고 모든 사람을 구했다"며 자랑한 내용을 흐루쇼프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이 책은 정치국원 4명이 모두 공모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1]
1953년 스탈린 사망 당시 의료진의 보고서 초안에는 스탈린이 숨지기 전 광범위한 위장 출혈을 보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3개월 뒤 공개된 공식 보고서에는 병명에 관련된 내용이 삭제되었다.[1] 당시 크레믈린에서 근무하던 경비병 한 명도 베리야로부터 병세에 대해 함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1] 스탈린의 음식에 과다 복용할 경우 장기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항응혈제 '와파린'이 섞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1] 한편 독살설 외에 침실에서 목졸려 죽임당했다는 설도 있다.[출처 필요]
사후 시신은 미이라화 되어 보존되다가 1992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후 화장되었다.
[편집] 평가와 비판
[편집] 평가
아돌프 히틀러의 숙적이면서도 사상적인 측면에서 그를 연구하기도 했다 한다.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 이해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해석, 즉 레닌주의에 기반해 있었으며, 정치, 경제, 학문 그리고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이에 따라 활동하도록 강요하였다.
스탈린의 생전에 편찬된 《볼셰비키당사》의 제4장 〈변증법적유물론과 사적유물론〉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문서임과 함께 이후 북조선 조선로동당정권의 주체사상의 핵심적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고향 그루지야에서는 독립의 영웅으로 칭송된다. 그루지야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이 "아돌프 히틀러의 파시즘을 종식시키고 구 소련을 수퍼파워로 만든 인물"로 칭송하고 있다.[2]
[편집] 비판
집권 과정, 집권 이후에 많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파시스트 또는 전체주의자라는 비판도 있었다. 나오미 울프는 히틀러를 연구했다고 하였다.[3]
스탈린은 생전에도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관료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소련을 관료국가로 만들었다"면서 강도높게 비판당하였으며, 사후에는 생전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숙청들로 인해 더욱 거세게 비판당하였다.
[편집] 기타
[편집] 러시아 정교회와의 관계
그가 즉위하던 시기는 러시아 정교회가 탄압을 받던 시기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때 정교회가 소련에 충성을 다짐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해 주었다. 최근 일부 성직자들에 의해 정교회를 탄압했던 스탈린이 성자로 등장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측의 지지파와 반대파의 대립으로 파문을 겪고 있다.[4]
[편집] 한인강제이주
스탈린은 1937년부터 1940년대까지 러시아에 거주하던 한국인(고려인),독일인,체첸인등을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등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이는 스탈린의 소수민족에 대한 불신때문에 벌어진 일로서, 이주과정에서 추위,굶주림등으로 사람들이 죽었으며 정착이후에도 공산당 간부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굶주림에 시달렸다. 한인 공산주의 지도자들도 스탈린정권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했다.[5]
[편집] 한국 전쟁
스탈린이 사망한 다음날 저녁 공산군들은 모든 전선에서 불꽃과 신호탄을 하늘에 올렸으며 각 병사는 스탈린에 대한 고별인사로 동시에 공중을 향하여 조총 사격을 하였다.[6] 스탈린의 사망은 동서해빙과 외부 세계에 대한 소련 지도층의 새로운 접근 방식과 태도 변화를 초래했다.
1953년 3월 19일 소련 각료회의는 한국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은 소련과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익에 배치된다며 이른 시일 내에 정전협상을 마무리지을 것을 결정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드디어 전쟁 종결과 평화 달성의 주도권을 잡을 시기가 왔다며 좋아했다. [7]
[편집] 가계
그의 아들 중 야코프가 독일군에 붙잡혔을 때, 나치 정권은 포로교환을 조건으로 석방한다고 하였으나 스탈린은 자신에게는 아들이 없다면서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 카챠
- 아들 : 야코프 스탈린(1904 ~ 1943)
- 나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