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0년 홍콩 특파원으로 부임했을 때였다. 홍콩에 이사 오면 장만해야 할 가전제품 목록이 있는데 교민들은 이를 족보(族譜)라고 불렀다. 족보를 보면 TV는 소니 트리니트론, VTR은 내쇼날(파나소닉), 캠코더는 소니, 카메라는 니콘, 냉장고는 월풀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중에서도 소니 TV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좀 먹고 살 만한 집이라면 거실에 소니 TV가 있었다. 반면에 삼성·LG TV는 홍콩 상점에서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되지 않아서 족보도 바뀌었다. 디지털 TV에는 삼성과 LG가 1·2등을 차지하고, 휴대폰에 애니콜 등 한국 상품이 대거 들어갔다. 기술과 혁신의 상징이었던 소니 왕국이 한국 제품에 밀려난 것은 상당한 충격이다.
사실 소니의 기술 혁신에는 항상 세계 최초, 일본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당시 도쿄통신공업) 출발한 소니는 일본 최초로 테이프 리코더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했다. 1979년에는 혁명적인 제품으로 꼽히는 워크맨을 세상에 선보였다. 또 세계 최초로 CD플레이어를 만들었으며, 1994년에는 새로운 개념의 가정용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PS)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천하무적같이 보였던 소니지만 2008 회계연도에는 2900억엔(약 4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 초 약 1만6000명을 감원하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벌이는 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소니가 경쟁자로 끼워주지 않았던 삼성은 올 2분기에만 2조5000억원 영업이익에, 32조원 매출이라는 놀랄 만한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소니가 이렇게 추락한 원인은 한마디로 '자만하다가 망한 것'이다. 소니는 기술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가장 앞선 소니 기술로 만든 제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대표적인 예가 VTR 시장에서 베타 방식을 고집하다가, 시장에서 완전히 소외된 것이다. 소니 경쟁사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소니 베타 방식을 외면하고, VHS 방식을 택했다. 소비자들도 콘텐츠가 많은 VHS를 선택하면서 소니는 VTR 시장에서 눈물을 머금고 철수했다.
세계 최초 휴대용 음악기기인 워크맨의 몰락도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 카세트테이프와 CD 플레이어를 거쳐, 소니는 MD(미니디스크) 플레이어를 차세대 기기로 정했다. '광디스크' 기술 세계 1위인 소니는 미니디스크가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보고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소니만 빼고 나머지 모든 업체는 반도체에 음악을 저장하는 MP3를 택했다. 결국 휴대용 음악기기 시장은 미국 애플이 내놓은 아이팟이 워크맨을 대체했다.
애플은 소니와 다른 방식을 택했다. 소니는 기술의 우수성을 강조해서 광디스크에 수십만 곡을 저장할 수 있다고 선전한 반면, 애플은 인터넷상에 떠 있는 음악을 아이팟이 쉽게 다운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콘텐츠의 호환성을 강조했다. 또 애플은 아이팟이나 아이폰을 직접 만드는 대신 대만 업체에 위탁 생산하는 방식을 택했다.
디지털 세상의 변화 속도는 소니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소니만 만들 수 있는 제품은 사라졌고, 누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을 때 이를 복제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것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개발하려는 폐쇄적 사고방식도 무너지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전 세계 금융 불황 속에도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기쁠 때 더 잘해서 한 단계 더 나가야 한다. 1위를 탈환하는 데 수십년이었다면 3~4위 추락은 순식간이다.
[김영수·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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