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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끝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1922
「프랑스의 소설가 , 문학 평론가 , 수필가로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잘 알려져 있으며,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불리운다. 파리의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 에서 태어났으며, 유년시절에는 아버지의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랐지만, 후년에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젊은 시절 프루스트는 귀족과 상류 부르주아들이 드나드는 파리 사교계에서 활동하며 문학과 글쓰기에 관심을 키웠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그의 소설에 영감과 소재를 제공했다.」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
(1)
“시인들은 말하길, 아폴론은 아드메토스의 가축을 돌보았다.
인간들 역시 변장하고 내려와 광인 흉내를 내는 신(神)이다 ”- 에머슨
-알렉시 도련님, 그렇게 울지 마세요. 실바니아 자작님께서 말 한 마리를 주실 텐데요.
-큰 말일까, 베포? 그냥 망아지일까?
-카르테니오 나리의 말과 같을 걸요.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열세 살이 되시는 생일인데요!
말이 생긴다는 희망과 함께 열세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흐르는 눈물 너머로 알렉시의 두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발다사르 실방드 삼촌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전히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물론 발다사르 삼촌이 나을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이미 몇 번 만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모든 것이 이전과 달랐다.
-르그랑 선생님, 삼촌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저도 안다고 알리는 게 나을까요? 그러지 않는게 나을까요?
-그러지 않으셔야죠.
실바니아의 문장이 새겨진 녹색과 백색의 제복을 차려입고 현관에 서 있는 하인에게 짧은 외투를 건네준 알렉시는 어머니와 함께 가만히 선 채 옆방에서 들리는 바이올린 선율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삼촌은 몇 살이에요?
-유월에 서른 여섯 살이 된단다.
-어서오렴, 알렉시. 생일 축하한다.
발다사르가 키스를 하자 알렉시는 겁이 났다.
-말 두 필이 끄는 마차를 몰고 싶겠지?
발다사르가 말했다.
-내일 우선 말 한 필을 보내 주마. 내 년에 한 필 더 보내서 짝을 채우고, 그다음 해에 마차를 주마. 올해는 우선 말부터 타 보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렉시는 자기에게도 언젠가 죽음이 닥치리라는 생각을 했고, 삼촌의 늙은 정원사와 삼촌의 사촌누이 알레리우브르 공작부인은, 그나마 삼촌에 비해 살날이 많이 남은 자신과 달리, 설령 삼촌보다 오래 산다 한들 어차피 죽음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도 정원사 로코는 심지어 은퇴 생활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모아 두고도 더 벌기 위해 여전히 일했고, 장미를 잘 키워서 상을 받으려고 애썼다. 공작부인 역시 일흔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머리 염색을 했고, 여전히 젊고 건재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기 집에서 열리는 연회들의 우아함을, 그 자리에 준비된 식탁과 스스로의 재치가 지닌 더없는 섬세함을 칭송하는 신문 기사들이 나오도록 돈을 썼다.
(2)
“육신은 슬프구나, 아아....” -스테판 말라르메(시집(poesies)에 수록된 시 ”바다의 미풍“의 구절이다.
「육신은 슬프다, 아아! 나는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
도망쳐야 한다! 저 멀리로 도망쳐야 한다!
나는 느낀다, 미지의 포말과 하늘 사이에서
새들이 취해 있음을!
눈에 비친 오래된 정원도
바다에 잠기는 이 마음을 붙잡지 못하리.
오 밤이여! 내 등불의 황량한 빛도,
흰 여백이 지켜내는 텅 빈 종이 위에서도,
젖을 먹이는 젊은 여인도 그러하리라.
나는 떠나리라! 흔들리는 너의 돛대여, 증기선이여,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잔인한 희망들로 상처 입은 권태는
손수건의 최후의 작별을 아직도 믿는다!
그리고 아마도 폭풍을 부르는 돛대들은
난파 위로 바람이 꺾어버리는 것들일 것이다,
돛대도 없고, 섬도 없는 채로 사라진…
그러나 오, 내 심장이여, 선원들의 노래를 들어라! -편집자」
알렉시가 다녀간 다음 날에 실바니아 자작(발다사르와 동일 인물)은 다른 성으로 떠났다. 서너 주 동안 머물 계획이었고, 다른 손님들도 많을 테니 병의 고비 뒤에 흔히 찾아오는 무력감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을 것이었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다사르는 한 젊은 부인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가장 강렬한 즐거움을 누렸고, 그녀 역시 즐거워하였기에 그의 즐거움은 더욱 커졌다. ~~~~~발다사르가 실바니아로 돌아왔을 때쯤에는 불꽃처럼 타올랐던 잔인한 순간들은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그저 감미로운, 조금 차가운 추억으로 남았다.
(3)
열네 살이 되던 날에 다시 발다사르 삼촌을 보러 간 알렉시는 걱정과 달리 열세 살 때와 같은 감정의 동요를 겪지 않았다.
이제 병으로 쇠약해진 발다사르를 마주해도 알렉시의 내면에서는 그 어떤 것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발다사르가 곧 죽는다 한들 그의 안의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우리 주위에서 지속되는 모든 것에 그러하듯이 알렉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삼촌의 병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발다사르가 아직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을 이미 울어 버렸기에 발다사르를 망자처럼 대하며 잊어 가기 시작했다.
알렉시, 두 번째 말과 마차를 같이 주마. 발다사르의 말에 알렉시는 삼촌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너한테 마차를 줄 기회가 없을 것 같구나. 알렉시는 그것이 더없이 슬픈 생각임을 알았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알렉시의 마음속에는 이미 깊은 슬픔을 위한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 후 책을 읽던 알렉시는, 어느 흉악한 인물이 그를 극진히 사랑하는 한 사람이 죽어 가면서 베푸는 감동적인 애정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다. 책 속의 인물이 꼭 자신처럼 느껴진 알렉시는 자기도 그런 흉악한 인간일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날 신나게 말을 타고, 공부도 잘 해내고, 게다가 살아 계신 부모님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면서 그는 다시 양심의 가책을 벗어던지고 즐기기 시작했으며, 회한에 시달리는 일 없이 잠잘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실바니아 자작은 걷기마저 어려워져서 자기 성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했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찾아와서 온종일 그의 곁에 머물렀는데, 발다사르가 아무리 비난받아 마땅한 짓을 고백하고 어처구니없이 돈을 탕진한 일을 털어놓아도,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역설을 늘어놓고 충격적인 결점을 내보인들 친척들은 힐책하지 않고 친구들도 빈정거리거나 반박하지 않을 터였다. 마치 병자가 어떤 행동을 하고 또 무슨 말을 하든 그 행동과 말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 주자고 암묵적으로 약속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발다사르가 삶과 이별 중인 육체의 마지막 삐거덕거림을 듣지 못하도록, 자신들의 다정한 애무로 그 소리를 막아 내기를, 최소한 부드럽게 만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발다사르는 자기가 평생 동안 만찬에 초대하기를 가장 게을리 했던 한 사람, 바로 자신과 한참 동안 단둘이 누워서 매력적인 시간을 보냈다. 불편한 몸을 단장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 뒤 팔꿈치를 창틀에 괴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우수 어린 기쁨도 맛보았다. 발다사르는 스스로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마치 예술 작품을 손질하듯이 강렬한 슬픔 속에서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쳐 온 자신의 임종 장면을, 아직까지는 그를 가득채운, 하지만 멀어지기 시작한 탓에 흐릿하고 아름다워진 이 세상의 형상들로 채웠다. 이미 그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플라토닉한 연인이자, 누구보다 지체 높은 인사들과 최고로 영예로운 예술가들 그리고 유럽에서 제일 뛰어난 재사(재사)들 틈에서 몸소 군림하였던 살롱의 주인, 올리비안 공작부인과의 작별 인사 장면을 상상 속에서 그려보았다.
“..... 해는 이미 저물었고, 사과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연보랏빛이었다. 수평선에는 푸른빛과 분홍빛의 구름이 빛바랜 화관처럼 가볍게, 회한처럼 끈질기게 떠다녔다. 우수에 젖어 줄지어 선 백양나무들은 성당처럼 장밋빛이 감도는 하늘에 체념한 머리만 남겨 놓은 채 어둠 속에 잠겼다. 마지막 햇살이 나무둥치는 비껴가며 가지들만 물들이는 광경은 마치 어두운 남간에 빛으로 만든 화관을 걸어둔 듯 했다. 산들바람에는 세 가지 냄새, 바다 냄새와 축축한 나뭇잎 냄새, 그리고 우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실바니아의 들녘이 그날만큼 관능적으로 저녁의 우울을 달래 준적은 없었다.
-난 당신을 많이 사랑했는데, 가련한 그대. 당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네요. 그녀가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나요, 올리비안? 나에게 준게 없다니. 내가 적게 원할수록 당신은 많이 주었고, 우리의 애정이 감각의 쾌락 없이 진실했으니, 내가 바랐을 것보다도 훨씬 많이 주었지요. 성모마리아처럼 신비스럽고 유머처럼 온화한 당신을 난 열렬히 사랑했고, 당신은 그런 나를 마치 요람속아기를 재우듯 달래 주었습니다. 나는 육욕의 쾌락을 항한 그 어떤 기대로도 흔들리지 않는 감수성, 예민한 통찰력을 지닌 애정으로 당신을 사랑했지요. 그 대가로 당신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정을, 맛있는 차를, 자연스럽게 장식된 대화를,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싱싱한 장미 꽃다발을 주었고요. 또 어머니처럼 다정한 그대의 두 손만이 고열로 뜨거운 나의 이마를 식혀 주고, 시든 나의 입술 사이로 꿀을 흘려 넣어 주고, 내 삶을 고귀한 이미지로 채워 주었답니다. 이제, 그대여. 내가 입맞춤할 수 있도록 그 손을 내게 주시오.“
발다사르를 이따금 잔인한 현실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단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가 여전히 감각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하지만 이미 카스투르치오를 향해 절대 꺽이지 않을 격정적 사랑에 빠진, 그래서 그가 잊으려고 애쓰는 시라쿠사 공녀, 피아의 냉담한 태도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끔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던 발다사르는 피아와 팔짱을 끼고 산책하면서 연적에게 모욕을 안겼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신과 나란히 걷는 중에도 피아의 깊은 시선은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음을, 오직 병자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 사랑을 감추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나마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외출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피아는 자주 찾아왔고, 병자에게 다정함을 쏟아 붓기로 그녀 역시 공모한 듯, 예전엔 제아무리 따스하더라도 도중에 끼어드는 무관심의 외침, 혹은 노여움의 고백 때문에 빛바래던 말조차 이젠 쉼 없이 훌륭한 애정을 쏟아냈다. 다른 누구보다도 피아가 건네는 온화한 애정 덕분에 발다사르는 점차 마음이 평온해졌고, 황홀한 기쁨마저 느꼈다.
어느날 그가 식탁으로 옮겨가려고 의자에서 일어설 때 하인은 주인의 걸음걸이가 훨씬 좋아진 모습을 보고 놀랐다. 연락을 받고 달려와서 병자를 살펴본 의사는 조금 더 지켜보자며 정확한 진단을 보류했다. 이튿날 발다사르의 걸음걸이는 더 좋아졌다. 그러자 친척들과 친구들은 큰 희망을 품었다.
이제 다 나으셨습니다. 죽음을 선고받았던 발다사르는 자신이 사면되었다는 소식에 흥분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죽음을 영원한 유배로 느꼈는데, 이제는 오히려 죽음에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알렉시의 어머니만이 아들을 데리고 하루에 몇 번씩 찾아와서 그의 마지막 나날에 약간의 위안을 더해 주었다. 어느 날 오후, 그녀는 발다사르를 보러 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거의 다 도착해서, 갑자기 무언가에 겁을 집어먹은 말이 돌연 주인을 내동댕이쳤고 바닥에 떨어진 그녀는 때마침 달려오던 다른 말에 밟히고 말았다. 결국 두개골이 벌어진 채 의식 없이 발다사르의 성으로 실려 오게 되었다. ~~~이틀째 되던 날 밤에 위험한 수술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아침에 열이 내린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을 때, 발다사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며 한참 동안 울었다.
(4)
알렉시의 어머니를 돌보느라 마음의 동요를 겪고 육체적으로 피로해진 발다사르는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다. 그는 고해 신부로부터 살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오전 10시였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발다사르의 성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올리비안 공작부인이었다. 발다사르가 이전에 그려본 자신의 임종은 그저 아름답게 꾸며진 것이었다. “...날씨가 맑은 날 저녁일 것이다. 해가 질 것이고, 사과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연보랏빛일 것이다. 수평선에는 푸른빛과 분홍빛의 구름이 빛바랜 화관처럼 가볍게, 회한처럼 끈질기게 떠다닐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안 공작부인은 오전 10시에, 하늘이 낮게 내려앉고 구름이 잔뜩 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 찾아왔다. 통증 때문에 지치고, 보다 고결한 문제들에 전념해 있고, 더구나 그동안 삶의 가치이자 매력이며 세련된 영광이라 믿었던 것들에서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 발다사르는 하인에게 몸이 안 좋아서 공작부인을 만날 수 없노라고 전하도록 했다. ~~~~상상력과 허영심의 눈을 감아버리고 자자, 아무리 그녀를 생각해 보려 해도 발다사르의 마음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발다사르는 죽기 일주일쯤 전에 보헤미아 공작부인의 집에서 무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피아가 다음 날 덴마크로 떠나는 카스트루치오와 함께 코티용 춤을 이끌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격정적인 질투를 깨워냈다. 그는 피아를 불러 달라고 했다. 알렉시의 어머니가 부드럽게 말렸다. 그러자 그는 왜 피아를 못 만나게 하느냐고, 왜 자기를 박해하느냐고 마구 화를 냈고, 결국 병자의 안정을 위해서 곧바로 피아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피아가 왔을 때 발다사르는 완벽하게 침착했지만, 그것은 깊은 슬픔에 젖은 침착함이었다. 그는 피아를 자신의 침대 쪽으로 당기면서 곧장 보헤미아 공작부인의 무도회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친척이 아니므로 당신은 내가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을 거요. 그래도 한 가지 청이 있소. 그날 무도회에 가지 마시오.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고, 각자의 눈동자 끄트머리에 죽음으로도 맺어질 수 없는 우울하고 정열적인 두 영혼이 드러났다. 그녀의 망설임을 알아챈 발다사르가 입술을 고통스럽게 꽉 다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 약속하지 않는 편이 낫겠소! 죽어 가는 사람에게 한 약속이라면 어겨선 안 되니까! 자신 없거든 차라리 약속하지 마시오. -약속할 수 없어요. 난 지난 두 달 동안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 영원히 못 만날 수도 있어요. 무도회에 가지 않으면 영원히 위로받지 못할지도 몰라요. -당신 말이 옳소. 당신은 그자를 사랑하니까. 또 누구든 죽을 수 있으니까.... 당신도 온 힘을 다해서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를 위해서 약간이라도 베풀어 주시오. 무도회에서 보내게 될 시간을 조금만 할애해서 그 시간을, 내가 의혹을 품지 않도록, 나와 함께 보내 주시오. 내 영혼이 잠시만이라도 당신과 함께 추억에 젖을 수 있게 해 주시오. 날 조금만 생각해 주시오.
-약속할 수 없어요. 무도회는 금방 끝나요. 먼저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어도 그 사람을 볼 시간은 많지 않아요. 무도회에 다녀오고 그 다음 날부터 매일 당신을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낼께요.
-그럴 수 없을 거요. 당신은 날 잊을 거요. 일 년 후에 어쩌면 그보다 더 뒤에, 슬픈 책을 읽거나 누군가 죽거나 비가 오는 날에 당신이 나를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큰 자비를 베푸는 일일 테지! 이제 난 다시는, 다시는, 영혼이 아니고서는 그대를 볼 수 없고, 그나마도 우리가 동시에 서로를 떠올려야 가능한 일이오. 난 항상 그대를 생각할 테니, 그대가 찾고 싶을 때면, 내 영혼은 언제든 그대를 향해 열려 잇을 거요. 하지만 손님으로 방문할 그대를 난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하겠지! 내 무덤의 꽃들이 11월의 비에 썩어 가고 6월의 태양 아래서 불타 버리는 동안, 내 영혼은 여전히 초조해하며 울고 있겠지! 아, 언젠가 나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보면, 혹은 나의 기일이 돌아오면, 조금이나마 나의 애정을 기억해 주시오. 그러면 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당신이 오는 길 위에 마법처럼 꽃이 만발할 거요. 죽은 나를 생각해 주시오. 하지만 어쩌겠소! 삶의 열정과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입술이 해내지 못한 것을, 죽음과 당신의 엄숙함이 이루어 내길 바랄 수는 없으리!
(5)
“ 아 고귀한 인간이 꺾이는구나. 편히 주무십시오. 다정한 왕자님. 천사들이 노래하며 당신을 안식처로 안내하리니” -셰익스피어. 햄릿
착란을 동반한 심한 고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알렉시가 열세 살 생일 때까지만 해도 쾌활하던 삼촌을 만났던 넓은 방, 자리에 누운 병자가 바다와 항만의 방파제, 목장과 숲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원형의 방으로 옮겨졌다. 발다사르는 이따금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 말들에는 지난 몇 주 동안에 그를 정화시켜 주던 고결한 생각들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발다사르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기를 조롱한다며 거친 욕설을 퍼부었고, 자신이 이 시대 최고의 음악가라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귀족이라고 되풀이했다. ~~~또 지난밤 자기가 두둘겨 팬 rduckf이 죽지 않았는지 가서 알아오라고 했고,....
발다사르는 열린 창문들 쪽으로 침대를 옮겨 달라고 했다. 방파제 위에서 밧줄을 당기며 배 한 척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는 선원들이 보였다. ~~~~발다사르는 바다 쪽 창문을 그만 닫고 목장과 숲 쪽의 창문들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의 눈은 들판을 향했지만 귀에는 여전히 세 돛대 범선에서 외쳐 대는 작별 인사 소리가 들려왔고 눈에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그물을 치는 수습 선원의 모습이 보였다. 발다사르의 손이 열에 달떠서 흔들렸다. ~~~~그 순간, 의사가 모두를 가까이 부르며 말했다. -운명하셨습니다.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
1. 비올랑트의 명상적이던 어린 시절
스티리아 자작 부인은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매력이 몸에 밴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남편인 자작은 대단히 활발했고 이목구비가 경탄스러울 정도로 반듯했다. ~~~부부는 사교계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영지에서 딸 비올랑트를 키웠다. ~~~어머니는 딸의 의지 결핍 때문에 근심이 많았다. 만약 남편과 함께 사냥을 하던 중에 뜻밖의 사고를 당해서 열다섯 살의 딸을 고아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을 것이다.
2. 감각의 쾌락
비올랑트가 접하는 사람은 오귀스탱 외에 그 고장의 몇몇 아이들이 전부였다. ~~~~어느날 조카를 만나러 오던 이모가 아는 청년을 하나 데려왔다. 그의 이름은 오노레였고, 열다섯 살이었다. 비올랑트는 그에게 별 호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오노레는 다시 찾아왔다. 그는 정원 오솔길을 함께 산책하면서 비올랑트가 알지 못하던 상당히 외설적인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입술이 가까이에 다가와서 자그마한 소리로 속삭이는 동안 비올랑트는 가만히 있었다. 그때 나뭇잎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오노레가 다정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비올랑트가 말했다. ‘이모예요.’ 그것은 바람소리였다.
다음해 여름, 비올랑트는 오노레를 떠올렸고, 그가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애정과 동시에 슬픔을 느꼈다. 기울어진 저녁 햇빛이 바다를 적실 때면 그녀는 일년 전 오노레를 따라가서 함께 앉았던 벤치에 홀로 앉아 그가 내밀던 입술을, 반쯤 감은 그의 초록빛 눈을, 마치 햇살처럼 움직이다가 그녀에게 따뜻하고 은밀하고 감미로운 밤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으로 욕망이 더 강하게 달아오르면, 자기 귀에 대고 금단의 언어를 속삭이던 오노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3. 사랑의 아픔
비올랑트는 사랑에 빠졌다. 몇 달 동안 로렌스라는 이름의 젊은 영국 남자가 그녀의 더없이 사소한 생각들의 대상이었고 또한 가장 중요한 행동들의 목적이었다. 사냥을 한 번 같이 나간 뒤로 어째서 그를 다시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외출하도록 부추기는지, 어째서 잠을 방해하고 휴식과 행복을 파괴하는지 비올랑트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빼앗겼지만, 로렌스는 그런 그녀를 무시했다. ~~~~결국 비올랑트는 다른 여자들을 이기고자 그 여자들의 매력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4. 사교계의 삶
사교계 사람들은 시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비올랑트가 나타나자 그 무리는 하나같이 그녀의 빛에 가려졌다. 가장 지체 높은 인사이건 더없이 거친 예술가이건 너 나 할 것 없이 비올랑트를 맞이하러 달려 나가고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자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에 자신에게 큰 슬픔을 안겼던 로렌스가 이제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자기를 무시하던 때보다 지금의 저열함이 그녀의 마음을 더 멀어지게 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분개할 자격이 없다. 이전에 내가 그를 사랑한 까닭은 그의 영혼이 위대해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그때 이미 난 그가 저열한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영혼의 위대함을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한 인간이 저열하면서 동시에 사랑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식고 나면 누구나 훌륭한 인간을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 저열한 남자를 향해 품었던 나의 연정은 참으로 이상하다. 온전히 머리에서 나왔으므로 감각에 의해 길을 잃었다는 변명 따윈 통하지 않는다. 플라토닉한 사랑은 대단한 게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머지않아 관능적 사랑이 더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귀스탱이 그녀를 스티리아로 데려가고자 찾아왔다.
-이제 절대적인 지위를 얻지 않으셨습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옛날의 비올랑트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 지위를 이제 막 얻었어. 오귀스탱. 몇 달 동안만 그 힘을 누리게 해 줘.
그런데 오귀스탱이 예견하지 못했던 사건이 일어나면서 비올랑트는 한동안 고향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비올랑트가 가장 존귀한 왕족 스무 명, 무수한 대공들, 그리고 한 천재의 청혼을 거절한 뒤 더없이 매혹적이고 5백만 두카드에 이르는 재산을 지닌 보헤미아 공작과 결혼한 것이다. 오노래의 귀환 소식 때문에 결혼식이 바로 전날 무산될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오노래는 병을 앓느라 얼굴이 추하게 변했고, 비올랑트는 그의 정다운 인사가 끔찍했다. 이전엔 꽃 피어난 육신을 향해 그렇게 열렬히 달려들었는데 어느새 육신이 너무나 덧없어서 울었다. 보헤미아의 공작 부인이 되 그녀는 스타리아의 비올랑트와 마찬가지로 매혹적이었다. 공작의 막대한 재산은 오로지 비올랑트라는 예술 작품을 빛내 줄 액자를 꾸미는데 쓰였다. 한때 예술 작품이었던 그녀는 진귀한 사치품이 되었다. 원래 지상의 모든 것은 위에서 끌어당기는 힘, 이를테면 무게 중심을 버티게 하는 고귀한 노력 없이는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 비올랑트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오귀스탱은 놀랐다. 그리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공작 부인께서는 어째서 비올랑트 아가씨가 그토록 경멸하던 것들만 얘기하시는지요?’
비올랑트가 답장을 썼다. ‘내가 보다 훌륭한 것에 마음을 쓰면, 바로 그 훌륭함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하는 사교계 사람들이 나를 덜 좋아하니까. 그래, 아, 오귀스탱. 난 권태로워.’
오귀스탱이 찾아와서 권태의 이유를 알려 주었다.
-음악, 사색, 자선, 소독, 들녘처럼 아가씨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권태로운 겁니다. 아가씨는 지금 성공에 사로잡혀 있고 쾌락에 묶여 계십니다. 인간은 자기 영혼이 가장 깊은 성향을 따라야만 행복할 수 있답니다.
-오귀스탱은 그리 살아 보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아?
-생각해 보았고, 그러면 살아 본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무미건조한 삶에 싫증이 나시기를 바랍니다.
비올랑트의 권태는 날이 갈수록 커졌고, 이제 그녀는 이전처럼 활기차지도 않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교계의 부도덕이 그녀를 괴롭히며 잔인하게 상처를 입혔다. 병을 앓아서 이미 싸울 힘을 잃은 몸이 혹독한 기후 때문에 끝내 쓰러지는 셈이었다. ~~
얼마 후, 비올랑트는 매일 밤 남편에게 말했다.
-모레, 내 고향 스타리아로 가요. 거기서 떠나지 말고 계속 살아요.
하지만 이곳에는 그 어떤 연회보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연회가 있었고, 그녀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유난히 아름다운 드레스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상상하고, 창작하고, 홀로 생각 하면서 t라고, 헌신해야 한다는 깊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으므로 고통스러웠다. 심지어 사교계에서는 기쁨의 그림자조차 맛볼 수 없었는데, 이제 그 욕구들마저 무뎌져 버렸다. 그녀로 하여금 다르게 살도록, 사교계를 포기하고 진정한 운명을 실현하도록 해 줄 힘은 전부 사라졌다. 그녀는 무한하도록 만들어졌으나 서서히 줄어들어서 거의 무에 이른, 호화롭고 개탄스러운 삶을 살았다. 어쩌면 그녀가 완수할 수 있었을, 하지만 하루하루 멀어져 간 고귀한 운명은 이제 삶에 우수에 젖은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었다. 충만한 자비심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면 그녀의 마음을 씻어 낼 수도, 세속적인 마음을 채우고 있는 인간의 불평등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기심과 허영과 야심이 쌓아놓은 수많은 둑이 그 물길을 가로막았다.
비올랑트는 이제 선량함을 우아하기 때문에 좋아했다. 여전히 돈을 쓰고 가슴 아파하고 시간을 내서 자선을 베풀었지만 마음을 전부 내주지는 않았고, 따로 떼어 내어 준 마음 한 부분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아침이면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몽상에 젖었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밖으로부터 관조함으로써 깊어지지 않고 사물의 외관에 머무는, 마치 거울 앞에서처럼 관능적으로 교태를 부리며 자기 모습에 경탄하는, 그런 망가진 정신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럴 때 손님이 찾아온다면 몽상과 독서를 방해받더라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마침내 자연마저도 타락한 감각으로 음미하기에 이르렀고, 이제 계절의 매력은 그녀의 우아함에 향기를 더하고 색조를 부여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었다. 겨울이 매력적인 이유는 추위를 맛보는 기쁨 때문이었고, 사냥의 즐거움을 누리느라 가을의 슬픔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때때로 혼자서 숲속을 거닐며 진정한 기쁨의 자연적 근원을 되찾고자 했지만,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를 거닐 때조차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우아하게 차려입는 즐거움이 홀로 있는, 몽상에 젖는 기쁨을 오염시킨 것이다.
-내일 떠나면 어떻겠소?
공작이 물었다.
-모레 떠나요.
비올랑트가 대답했다.
언제부터인가 공작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슬퍼하는 오귀스탱에게 비올랑트가 말했다. ‘조금 더 늙으면 갈게.’ 오귀스탱이 대답했다. ‘아! 정말로 그곳 사람들에게 젊음을 바치려고 하시는군요. 아가씨는 절대 스티리아로 돌아오지 못하실 겁니다.’ 비올랑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젊을 적에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우아함의 절대적 지위를 누리고자 사교계에 머물렀고, 늘어서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 내고자 사교계에 머물렀다. 전부 헛일이었다. 그녀는 결국 지위를 잃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되찾기 위해서 애썼다. 오귀스탱은 비올랑트가 사교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한 가지 힘이 있었다. 처음엔 허영심이 그 힘을 키워냈지만, 그 다음에는 바로 그 힘이 그녀의 염증, 경멸, 심지어 권태마저 무너트렸다. 그 힘이란 바로 습관이었다.
[어느 아가씨의 고백]
“감각의 욕망은 우리를 멋대로 끌고 다닌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양심은 회한으로 혼란스럽고 정신은 산만하게 흩어진다. 기쁨 속에 나선 사람도 슬픔 속에 돌아오며, 저녁의 쾌락은 아침을 비탄에 빠트린다. 감각의 기쁨은 처음엔 유쾌하게 해 주지만 종국엔 상처를 입히고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1)
“우리가 가짜 환희에서 망각을 구해도, 쓸쓸하고 달콤한 라일락 향기는 취기 속에 더 순결해져 돌아온다.” -앙리 드 레니에
마침내 벗어날 순간이 다가온다. 분명 내가 서툴렀다. 방아쇠를 잘 못 당겼다. 하마터면 죽는 것도 실패할 뻔했다. 단번에 죽는 편이 더 나았을 테지만, 어쨌든 총알을 빼내지 못했고 심장에 합병증이 왔다. 오래가지는 않으리라, 그래도 아직 일주일! 일주일은 더 갈 수 있다! 그 일주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 끔찍한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뿐이다. 몸이 이렇게 엉망이 아니라면, 일어나서 이곳을 나설 의지력만 있다면, 나는 레주블리로, 내가 열다섯 살 때까지 여름을 보낸 그곳 정원으로 가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거기만큼 내 어머니로 충만한 장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어머니가 있을 때는 그 존재가 그곳을 가득 채웠고, 사라진 뒤의 부재는 더욱 그러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대의 부재는 사라진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가장 분명하고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강렬하며 가장 충실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4월 말이면 나를 레주불리에 데려다 놓고 이틀 뒤에 떠났다.그런 다음 5월 중순에 와서 이틀 동안 머물다가 갔고, 6월 마지막 주에 다시 데리러 왔다.
(2)
순수를 잃은 나의 영혼에 어떻게 추억의 맑은 샘물이 다시 솟아올라서 더렵혀지지 않고 흐를 수 있었을까? 이 아침 라일락꽃의 향기는 어떤 힘을 가졌기에 역한 냄새가 풍기는 안개를 지나오면서 물들지도, 약해지지도 않았을까? 아! 내 안에서, 동시에 멀리서, 내 밖에서, 열네 살의 내 영혼은 여전히 눈을 뜬다. 지금 나는 그것이 더 이상 내 영혼이 아님을, 다시 내 영혼이 되도록 하는 것은 이미 나를 벗어난 일임을 알고 있다. 그 시절에 나는 열네 살의 영혼을 그리워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시절의 내 영혼은 그저 순수했고, 장차 가장 고귀한 과제를 완수할 수 있도록 나는 그 영혼을 강하고 능력 있게 단련시켜야 했다. 어머니와 함께 레주블리에서 햇살이 춤추고 물고기들이 노니는 물가를 하루 중 제일 더운 시간에 거닐고 아침과 저녁에 들판을 쏘다니고 나면, 비록 어머니가 나에게 주는 사랑과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은 내 욕망을 감당할 만큼 아름다운 미래는 아니더라도, 나는 자신 있게 스스로의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서 요동치는 힘, 의지의 힘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상상 혹은 감정의 힘이 자기를 실현해 줄 운명을 요란스럽게 불러 대면서 내 마음의 벽을, 마치 그 문을 열고 뛰쳐나가 나의 밖으로, 삶으로 달려가려는 듯이 계속 두드려 댔다.
수레국화, 토끼풀, 개양귀비여 너희들을 꺾은 까닭은, 너희들 때문에 울고 웃는 이유는, 그때 내가 품고 있던 모든 희망, 지금은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시들고 부패해 버린, 너희들처럼 꽃피어 보지도 못한 채 먼지로 돌아가 버린 그 희망을 함께 묶어서 꽃다발을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3)
“욕정의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서 그대들 육신을 낡은 깃발처럼 펄럭이게 하는구나.” -보들레르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나는 건강이 급작스럽게 나빠져서 많이 앓았다. 부모님은 기분 전환의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나를 사교계에 내보내기로 했다. 젊은 남자들이 나를 찾아오는 일도 잦아졌는데, 그중에 타락하고 사악한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행동거지가 상냥하면서도 대담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부모님도 곧 알게 되었지만 나를 힘들게 하지 않고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만나지 않을 때도 늘 그를 생각했고, 가능한 한 그와 닮으려고 애쓰느라 나 자신마저 타락하고 말았다. 그는 나의 허를 찌르며 나쁜 짓을 하도록 부추겼고, 마음속의 나쁜 생각에 맞서고 그것들을 원래의 자리인 지옥의 어둠 속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의지라는 유일한 힘을 가지지 못했던 나는 그냥 지켜보는 데에 익숙해졌다. ~~~
이전에는 온종일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것들, 풀숲을 노랗게 물들이는 햇살 자락, 비가 그친 뒤 미처 마르지 않은 나뭇잎의 향내 같은 것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움과 쾌활함을 전부 잃었다. 숲도 하늘도, 강도 나를 외면하는 것 같았고, 어쩌다 홀로 마주 서서 애타게 질문을 던져 보아도 숲과 하늘과 강은 예전에 나를 황홀하게 해 주던 희미한 응답을 더 이상 속삭이지 않았다. 강물과 나뭇잎과 하늘의 목소리가 예고해 주는 천상의 손님들은 원래 우리 스스로가 자신 안에 머물면서 정결해졌을 때에만 찾아오는 법이다. ~~~
나는 과오를 저지르면 마음을 달래고자 사교계 모임에 갔고, 그곳에서 마음이 편해지면 다시 과오를 저질렀다. 순수는 이미 잃어버렸고, 지금의 후회가 미처 오지 않았던 그때, 내 인생을 통틀어 스스로 가장 무가치했던 그 끔찍한 시간 동안에, 나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전에는 건방지고 분별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오히려 나의 상상력이 잿더미가 되자 사교계 취향에 부합했는지,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사람들은 존경스레 어머니를 대하는 나의 다정한 태도만을 보고, 그 당시 어머니에게 가장 큰 죄를 짓고 있던 나를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딸로 여겼다. 나의 생각이 생명을 잃자 사람들은 나의 지혜를 칭송했고 나의 재치에 열광했다. 이미 메마른 나의 상상력과 고갈된 나의 감수성은 사교계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하는 정신적 삶의 갈증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갈증을 풀어주는 샘물이라고 믿는 것이 가짜이고 거짓이듯이, 그들의 갈증 자체가 가짜이고 거짓이었다. 그 누구도 내 삶의 은밀한 죄를 알아채지 못했고, 나는 오히려 이상적인 숙녀의 표본이 되었다.
(4)
“영영......영영
되찾지 못할 것을 잃어버린 모든 아들을!“ -보들레르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에, 예전부터 불안하던 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한 삼촌에게서 어머니가 나의 결혼을 꼭 보고 싶어 한다는 말도 들었다. 분명하고도 중요한 의무가 나에게 부과된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좋은 혼처라고 건네준 첫 번째 청혼을 받아들였다. 나의 약혼자는 총명하고 상냥하면서도 활력을 지닌 청년으로, 분명히 나에게 더없이 다행스러운 영향을 끼칠 사람이었다. 게다가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살기로 했으므로,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가장 잔인한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고해 신부님을 찾아가서는 지난 과오를 전부 고백했다. 그런 다음 약혼자에게도 고백해야 하는지 물었다. 자비롭게도 신부님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 주었고,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나의 맹세를 대가로 죄를 사해 주셨다. 어찌나 기쁘던지, 영원히 불모지가 되었다고 믿었던 내 마음속에 뒤늦게 다시금 꽃들이 피어났고 열매를 맺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원래 순결한 상태보다 잃어버린 순결을 되찾기가 더 힘겨운 일이라면, 그때 나는 정말 어려운 미덕을 실천했다. 내가 이전과 비교할 수없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음을 주변에서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고, 나의 이마가 새롭게 태어났음을 알 길 없는 어머니 역시 원래 순결하던 그대로라고 믿으며 매일 키스해 주었다. 하지만 사교계에서는 다른 데 정신을 파는 것 같다고, 말을 안 한다고, 우울해 보인다고 부당한 비난을 들었다. 그래도 나는 화내지 않았다. 가책이 사라진 나의 양심과 나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이 관능적 쾌락을 충분히 선사했기 때문이다. ~~~
5월의 투명한 저녁에는 작은 슬픔의 기운조차 드리우지 못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내 마음속에 그대로 비쳤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분명 나의 지난 과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채로 아팠었지만, 마치 어머니와 나의 영혼 사이에 신비로운 유대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거의 완쾌되었다. 의사가 말했다. 두 주만 잘 넘기면 다시 악화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미래를 약속받은 것 같은 감미로운 느낌에 눈물을 쏟았다. ~~~
얼마 남지 않은 나의 결혼을 위해서 다 함께 건배를 했다. ~~~~어머니가 다정하게 말했다. 악에는 아무리 작은 자리도 내어 주지 말아야 한단다. 하지만 샴페인이 너무나 시원했기에 나는 두 잔을 더 마셨다. 그러자 머리가 무거워졌고 잠시 쉬면서 흥분한 신경을 달래고 싶었다. ~~~자크가 다가와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면 말했다. -같이 가겠소? 내가 쓴 시를 보여 드리고 싶은데.~~~~-그래요. 좋아요. ~~~우리는 두 문의 열쇠를 돌려서 잠갔다. 그러자 그가 나를 껴안더니 내 뺨에 숨결을 내뿜으며 두 손으로 나의 몸을 더듬었다.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는지는 모르겠다.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뒤로 쓰러졌고, 발코니 난간 두 기둥 사이에 머리가 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말한 대로, 나는 죽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잘 겨냥했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게 서툴렀다. 결국 총알을 빼내지 못했고, 심장에 합병증이 왔다. 아직 일주일을 이런 상태로 버텨야 한다. ~~~~차라리 어머니가 이전에 내가 저지른 다른 죄악을 보았더라면, 그날 거울 속 내 얼굴의 쾌락만은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다..... 어머니는 못 봤으리라..... 그냥 우연의 일치였다.... 어머니는 내 모습을 보기 직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어머니는 보지 못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원하셨을 리 없다.
[질투의 끝]
(1)
“선한 것은 우리가 요구하든 말든 주시고, 악한 것은 원해도 주지 마시길 - 내가 보기에 이런 기원은 아름답고 확실하다. 여기에 고칠 곳이 있다면 감추지 말고 말하라.” -플라톤(알키비아데스의 구절)
나의 나무, 나의 나귀,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 나의 고향, 나의 하나님, 나의 이방인, 나의 연꽃, 나의 조가비, 나의 사랑, 나의 풀꽃, 이제 그만 가요. 난 옷을 입어야 해요. 8시에 봄므가에서 봐요. 8시 15분이 지나기 전에 와야 해요. 난 배가 많이 고프답니다.
연인이 오노레를 내보내고 문을 닫으려는 때 그가 다시 “목!”이라고 말하자, 그 한마디에 곧바로 얌전히 목덜미를 내미는 그녀의 과장된 정중함에 오노레는 웃음을 터뜨렸다.
-설사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의 목과 내 입, 당신의 귀와 내 콧수염, 당신의 손과 내 손 사이에는 특별한 우정이 있소. 우리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더라도 분명 우정만큼은 끝나지 않을 거요. ~~~
시계가 7시 30분을 알렸다. 오노레는 그녀의 집을 나섰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신 되씹었다.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 나의 고향..... 그러다 잠시 넘추었다. 그래 나의 고향!.... 나의 조가비, 나의 나무.“ 그들이 사랑에 빠지고 난 뒤 곧 쓰기 시작한 이 표현들. 아무 뜻도 없어 보이지만 그들 스스로 무한한 의미를 부여한 이 말들을 소리 내어 말해 보면서 오노레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만찬을 위한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오노레의 생각은 그녀를 다시 만날 순간에 저절로 멈추었는데, 그것은 공중 곡예사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아직은 멀리 있는 그네에 미리 손을 가져다 대는 것과 같았고, 하나의 악절이 자기를 감싸 버릴 화음에 미리 가닿는, 그 화음을 가능하게 하고 불러들이는 힘을 통해서 화음과 자기 사이에 놓인 거리를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과 같았다. 오노레는 지난 일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삶을 빠르게 지나왔으니, 아침이면 벌써 그녀를 만날 오후 시간을 향해서 서둘러 갔던 것이다. ~~
오노레가 먼저 알레리우부르 공작 부인의 집에 도착했고, 몇 분 뒤 손느 부인이 도착했다. 그녀는 집주인과 다른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고, 오노레에게는 인사를 건네는 대신 이미 대화중이던 사람에게 하듯이 손을 잡았다. . 만일 그들의 관계가 사교계에 알려져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필시 둘이 함께 왔으면서 같이 들어서지 않고자 한 사람이 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들어왔으리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오노레와 손느 부인은, 지난 일 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설령 이틀 만에 만났더라도, 다정한 인사의 바탕이 되는 갑작스러운 재회의 기쁨을 느꼈을 리 없다. 어차피 두 사람은 상대를 생각하지 않은 채로 단 오 분도 버틸 수가 없었으므로, 사실상 헤어진 적이 없으니 다시 만나는 일도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옛 이야기 속에서 변장한 채 인간 세계에 내려와 있는 신들을 닮았고, 혹은 형제처럼 친근한 애정이 환희를 부추기는, 그렇지만 그 때문에 신비의 기원과 공통의 고귀한 혈통에서 나오는 경의가 훼손되지는 않는 그런 천사들 같았다. ~~~
오노레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생각했다. 나는 저 여인을 언제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그는 여태껏 처음 시작할 때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열정적 사랑이 금방 끝나 버린 적이 너무도 많았음을 떠올렸고, 결국 지금의 사랑 역시 언젠가 끝나리라는 분명한 사실이 그의 사랑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녀를 영원히 사랑하게 해 주소서. ~~~오노레의 눈 속에서 근심을 알아챈 프랑수아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뭐죠? ~~~
오노레는 만일 프랑수아즈가 다른 사랑들을 받아들여서 삶을 서서히 다른 쪽으로 옮겨 가는 날이 온다면 그녀를 붙잡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질투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에게 더 점잖고 더 영광스러운 경의를 바칠 수 있을 남자를 직접 골라줄 수도 있으리라, 프랑수아즈를 다른 여자로, 자신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정신적인 매력만을 교묘하게 맛볼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면, 그녀를 다른 남자와 공유하는 일은 더 고결하고 훨씬 쉬워보였다. 너그럽고 부드러운 우정의 말, 각자가 지닌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자비의 말들이 나른한 그의 입술 위에서 부드럽게 맴돌았다.
10시가 되자 프랑수아즈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마차까지 배웅하러 나간 오노레는 무모하게도 어둠 속에서 키스까지 한 뒤에 다시 들어왔다.~~~
세 시간 후에 오노레도 통킹에서 막 돌아온, 그날 만찬에서 귀국 축하를 받은 뷔브르 씨와 함께 걸어서 귀가했다. 오노레는 그에게, 프랑수아즈와의 거의 같은 시기에 남편을 잃은 미망인으로 프랑수아즈보다 훨씬 아름다운 알레리우브르 공작 부인에 대해 물었다. 알레리우브르 공작 부인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수아즈가 알게 되어서 슬퍼하는 일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한번 가져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알려진 게 거의 없지요, 뷔브르가 말했다. ~~~ 오노레의 집 앞에 도착해서 대화가 막 끝나려던 무렵, 뷔브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 딱 한 사람이 있군요. 오늘 그곳에 있었으니 인사를 나눴을 거요. 손느 부인 말이오. 혹시 마음 있다면, 그 부인은 아주 쉽지요. 물론 나는 아무런 마음이 없지만!
손느 부인이 연회에서 늘 일찍 자리를 뜨는 거 알고 있소?
-남편과 사별한 뒤로 오빠 집에서 산다고 들었습니다. 문지기가 소문 낼 텐데 한밤중에 들어가진 못하겠죠.
(2)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선하고 악한 천사이며, 우리 곁을 걷는 운명의 그림자이다.”-보문트와 플랫처
그날 이후 오노레의 삶이 바뀌었다. 뷔브르가 건넨 많은 말 중에서도 유독 그 말, 지금껏 별 생각 없이 자주 들었고 또 자기 입으로 직접 해 본 적 있는 그 말이 이제는 혼자 있는 낮동안, 그리고 밤새도록 그의 귓가에 쉼없이 들려왔다. ~~
그날 이후 오노레는 한 시도 프랑스아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엿보았고 초대받은 곳마다 함께 갔고, 상점에 갈 때도 따라가서 한 시간 동안 문 앞에서 기다렸다. ~~~고통에 시달리는 시간도 점점 뜸하게 찾아왔으며, 설령 찾아오더라도 짧아졌다.
(3)
“우리는 영혼을 끝까지 신뢰해야 한다. 사랑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인 관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보다 아름답고 한 단계 더 높은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에머슨
결혼 전에는 갈레즈 오를랑드 공녀로 불렸으며, 이미 1부에서 프랑수아즈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손느 부인의 살롱은 오늘날까지도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살롱으로 꼽힌다. ~~
손느 부인의 살롱에는 올해에도 작년에도 많은 손님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전에, 그러니까 오노레 드 탕브르가 세상을 떠난 뒤로 삼 년 동안 살롱은 닫혀 있었다. 사실 오노레가 서서히 본래의 안색을 되찾고 이전처럼 유쾌해졌을 때 친구들은 기뻐했고, 그가 늘 손느 부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최근에 시작되었다고, 바로 그 새로운 사랑의 힘으로 오노레가 병을 닫고 일어섰다고 믿었다. 그런데 병을 떨치고 일어선 지 채 두 달이 안 되었을 때 오노레는 부아드볼르뉴 대로에서 달려오는 말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고, 결국 말에 깔린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사고가 일어난 날은 5월의 첫 화요일이었다. 그리고 그 주 일요일에 의사가 복막염을 확인했다. 월요일에 종부 성사를 받았고, 오노레는 바로 그날 저녁 6시에 숨을 거두었다.
-죽어야 한다면, 죽고 나면 질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기 전에는? 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질투하는 것은 오로지 쾌락이고, 나의 육신이 질투하고 잇을 뿐이고,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행복은 내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바라는 것인데, 누가 제일 잘 해낼까? 내 육신이 사라지면, 영혼이 육신을 이기면, 이전에 많아 아프던 때처럼 내가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조금씩 떨어져 나오게 되면, 그래서 더 이상 미친듯이 육체를 갈망하지 않고 그만큼 영혼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질투하지 않으리라. 그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리라. ~~~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까지 그는 꿈꾸는 동안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무언가 엄청나게 무거운 것이 가슴 위에 놓인 듯했다. 그는 자비를 빌었고, 가슴을 짓누루는 무언가를 치울 힘조차 잃어버렸다. 가슴 위의 모든 것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놓여 있던 것 같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기분 탓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 ~~~
깔아뭉개진 인간의 삶! 그가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말에 부딪혀서 쓰러지며 이대로 깔아뭉개지겠구나! 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또한 그날의 산책이 떠올랐다. 그렇게 에움길을 돌아서 그의 생각은 또다시 자신의 사랑으로 향했다. 그는 생각했다. 나를 짓누르던 그것이 나의 사랑이었을까? 만일 사랑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내 성격이었을까? 나였을까? 삶이었을까? 그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렇다, 죽어서도 난 내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내 육신의 욕망, 관능의 욕구, 질투에서는 벗어나리라. 그래서 말했다. 하나님, 제가 완전한 사랑을 알게 되는 그 순간을 허락하소서. 하루빨리 그때가 오게 하소서.
일요일 아침 저녁에 의사가 복막염을 확인했고, 월요일 오전 10시 무렵에 고열이 시작되었다. 오노레는 프랑수아즈를 보고 싶어 했고, 불타는 눈길로 프랑수아즈를 불렀다. 당신의 눈동자도 빛나면 좋겠소. 그대에게 여태껏 그 무엇보다 훨씬 큰 쾌락을 주고 싶소. ....그대에게 주고..... 그래서 괴롭게 하겠소. 그러다 돌연 격한 분노에 휩싸이며 얼굴이 파리해졌다. 당신이 왜 싫다고 하는지 알겠군. 오늘 아침에 당신이 어떤 짓을 받아들였는지 알겠어. 어디서, 누구한테서였는지도. 그래. 그자는 날 불러다 놓고 싶겠지. 내가 뭔 뒤에 서서 자기랑 당신이 뭘 하는지 보고 있길 바랄 테지. 난 다리가 없으니 달려들지 못할 테고. 그렇게 즐기는 동안 내가 속수무책으로 있으면 쾌락은 더 커지겠지. ~~~~하지만 그 전에 나 자신부터 죽고. 자, q하! 난 죽었어!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베게 위에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차차 마음이 평온해지자,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뒤에 프랑수아즈가 누구와 결혼할지 다시 그려 보았다.그러는 동안 오노레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가 밀쳐 내는 얼굴들, 프랑수아드 구브로의 얼굴과 뷔브르의 얼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영원히 되살아나는 그 얼굴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오에 종부 성사를 받았다. 의사는 오후를 넘기지 못하리라고 했다.~~~
파리가 와서 내 침대 시트를 건드릴까? 아니, 아직 아니다.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다른 하나보다 중요해 보이지 않다니! 구브로가 정말 프랑수아즈를 가지게 될까? 파리가 내 시트를 건드릴까? 아! 프랑수아즈를 누가 갖느냐 하는 문제가 조금 더 중요하다. 하지만 스스로 두 사건의 중요도를 정확히 가늠해 보노라니, 결국 둘 중 어느 것도 자기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맙소사, 나한테는 두 가지 문제가 다 마찬가지구나! 슬프다. 이어서 그는 슬프다. 라고 말하는 것이 그저 습관에 의한 행동일 뿐임을, 자신은 이미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고 그 변화가 슬프지 않음을 깨달았다. 희미한 미소가 번지면서 그의 입술이 열렸다. 자, 이제 바로 프랑수아즈를 향한 나의 순수한 사랑이다. 난 이제 죽음 가까이에 있으니 더 이상 질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프랑수아즈를 향한 나의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 순간 시선을 든 오노레는 자기 침대 곁에 서서 기도하는 하인들, 의사, 그리고 친척 노부인 들을 보았고, 그들 가운데 프랑수아즈도 있었다. 오노레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기심과 관능을 버린 순수한 사랑, 스스로 너무도 온화하고 광대하고 신성하기를 바라던 그 사랑으로, 그는 프랑수아즈와 똑같이 늙은 친척들과 하인들과 의사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랑은 자신과 비슷한 영혼을 지닌, 그렇게 하나로 이어진 모든 인간들을 향했다. 하지만 프랑수아즈에게 만큼은 그 사랑을 이미 주었으므로 더 이상 내어줄 수 없었다.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만을 향한 사랑, 그녀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좋아한다는 생각까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수아즈는 침대 발치에서 서서 눈물 흘리며 연인과 함께 사용하던 말들을 속삭였다. 나의 고향, 나의 형제, 오노레는 그렇지 않다고 깨우쳐 줄 의지도 힘도 없었기에, 자신의 고향은 그녀 안에 있지 않다고, 하늘과 온 땅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미소지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나의 형제들이라고 되풀이했고, 자기 눈동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프랑수아즈에게 향하는 까닭은 오로지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머지않아 닫히게 될, 이미 더 이상 울지 않는 그녀의 눈에 연민이 일었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그는 의사보다, 늙은 친척들보다, 하인들보다 프랑수아즈를 더 많이 사랑하거나 다르게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게 질투가 끝났다.■
[Review]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준비작(습작) 정도로 평가되는 네 개의 단편 모음집이다. 마르셀 프르스트(1871~1922)는 이 단편집을 1896년에 발표하였을 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발표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지나간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미래의 삶속에서 의미 있는 시간으로 다시 조명 된다’ 는 작가의 작품 세계가 이 단편들에서 곳곳에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마르셀 프루스트는 상류사회의 소소한 일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네 편의 단편소설 모두 상류 사회를 배경으로 한 가련한 인간의 일생을 통하여 절망 가운데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 2년간의 시한부 인생을 둔 서른 살 먹은 삼촌, '발다사르'를 향한 열세 살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인칭 소설로,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이 현실을 받아드리면서도 또 다른 삶,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자 그를 찾아오는 발길들도 차츰 무관심으로 바뀌었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정, 그리고 지난 연인에 대한 애정과 질투만 되살아났다.
“발다사르는 자기가 평생 동안 만찬에 초대하기를 가장 게을리 했던 한 사람, 바로 자신과 한참 동안 단둘이 누워서 매력적인 시간을 보냈다. 불편한 몸을 단장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 뒤 팔꿈치를 창틀에 괴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우수 어린 기쁨도 맛보았다.”(본문)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는 괴로움, 짜증 섞인 태도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침대를 창문 쪽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바다 방파제 위에서 밧줄을 당기며 배를 끌어내는 선원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순간 그는 창문을 그만 닫고 목장과 숲 쪽의 창문들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의 눈은 들판을 향고 있었지만 귀에는 항구에서 외쳐대는 작별 인사소리를 듣고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그물을 던지는 수습 선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운명한다.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 열다섯 살에 자작이었던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비올랑트’는 이모의 권유로 사교계에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명성을 얻으며 관능적 탐닉에 빠졌다. 옛날 고향에서 순수한 정을 나누었던 ‘오귀스텡’이 찾아와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이미 그녀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허영심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녀는 돈이 많은 보헤미아 공작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난날의 감각적 타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삶에서 권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음악, 사색, 자선, 소독, 들녘처럼 아가씨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권태로운 겁니다. 아가씨는 지금 성공에 사로잡혀 있고 쾌락에 묶여 계십니다. 인간은 자기 영혼이 가장 깊은 성향을 따라야만 행복할 수 있답니다.”(본문)
<어느 아가씨의 고백> 열다섯 살에 권총 자살을 시도한 소녀가 다시 목숨을 건지고, 부모님의 권유로 사교계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타락하고 사악한 남자와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곧 회의에 빠지고 남은 것은 도덕적 순결을 잃은 여인으로의 깊은 죄의식뿐이었다.
“이전에는 온종일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것들, 풀숲을 노랗게 물들이는 햇살 자락, 비가 그친 뒤 미처 마르지 않은 나뭇잎의 향내 같은 것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움과 쾌활함을 전부 잃었다. 숲도 하늘도, 강도 나를 외면하는 것 같았고, 어쩌다 홀로 마주 서서 애타게 질문을 던져 보아도 숲과 하늘과 강은 예전에 나를 황홀하게 해 주던 희미한 응답을 더 이상 속삭이지 않았다.”(본문)
그러던 중 좋은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이며, 지난날의 과오도 고해성사를 통해 해결되었다. 그러나 결혼은 앞 둔 축하연회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몇 잔 먹고 그만 옛 애인의 꼬임에 다시 빠지고 만다.
<질투의 끝>이 소책자의 제목이기도 하다. 불륜 관계에 있는 ‘오노레’와 미망인 ‘손느 부인’(프랑수아즈) 사이에서 벌어지는 질투와 사랑의 내용이다. 오노레는 손느 부인과 사귀면서도 사교계에서 알고 있는 또 다른 미망인을 은근히 생각한다.
“오노레는 만일 프랑수아즈가 다른 사랑들을 받아들여서 삶을 서서히 다른 쪽으로 옮겨 가는 날이 온다면 그녀를 붙잡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질투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에게 더 점잖고 더 영광스러운 경의를 바칠 수 있을 남자를 직접 골라줄 수도 있으리라, 프랑수아즈를 다른 여자로, 자신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정신적인 매력만을 교묘하게 맛볼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면, 그녀를 다른 남자와 공유하는 일은 더 고결하고 훨씬 쉬워보였다.“(본문)
어느 날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친구로부터 손느 부인과 한번 사귀어 보라는 말을 듣게 되자 오히려 질투심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오노레는 거리에서 달려오는 말에게 부딪혀 큰 사고를 당했고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녀에 대한 애착으로 주변 사람들을 질투했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뒤에 프랑수아즈가 누구와 결혼할지 다시 그려 보았다.그러는 동안 오노레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가 밀쳐 내는 얼굴들, 프랑수아드 구브로의 얼굴과 뷔브르의 얼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영원히 되살아나는 그 얼굴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본문)
그러나 마지막 순간 비로소 그녀에 대한 질투심은 사라지고 진정한 사랑임을 입술로 고백하며 숨을 거둔다. 이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질투는 타인에 의한 감정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또 사라지는 감정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소책자이지만 마르셀 푸르스트만의 문학적 언어를 맛볼 수 있는 책이다.
“희미한 미소가 번지면서 그의 입술이 열렸다. 자, 이제 바로 프랑수아즈를 향한 나의 순수한 사랑이다. 난 이제 죽음 가까이에 있으니 더 이상 질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프랑수아즈를 향한 나의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본문)
이 소설 발표 후 마르셀 푸르스트는 평생의 역작으로 알려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1권<스완의 집 쪽으로-1913년>, 제2권<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1919년>, 제3권<게르망트 쪽-1920~1921년>를 연달아 발표했으나, 1922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망 후 완성작 제4권<소돔과 고모라-1923>와 퇴고를 끝내지 못한 제5권<갇힌 여인-1923년>, 초고 상태로 남은 제6권<사라진 알베르틴-1925년>, 제7권<되찾은 시간-1927년>이 사후에 출판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총 7권이 모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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