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12일에 유신헌법 존치여부에 관한 국민투표가 있었다. 나는 근혜씨를 통해서 대통령에게 「헌법에 관한 찬반토론을 허용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해도 압도적으로 찬성이 많을 것이다」는 요지의 건의를 했다. 이 건의를 들은 박대통령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유신헌법 제정시 국민투표에서 90%이상의 찬성을 얻었으나 지금 야당에서는 트집을 잡고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계엄령을 해제한 가운데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자고 했더니 수석들이 유신의 정당성은 역사가 증명할 것이라면서 반대하여 그냥 두었었다. 자네의 이야기도 일리는 있는데 찬반토론을 허용하면 이 겨울에 내가 고무신․밀가루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지 않겠나』
박대통령은 나를 납득시키려고 일부러 자상한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냥 묵살하면 될 것도 대통령은 상대를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유신헌법 찬반투표에서 약 73%의 찬성률을 보이자 박대통령은 『잘 됐어. 90% 지지에서 내려갔지만 더 나왔으면 조작되었다고 할테니까…』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늘 긴장된 자세를 유지한 분이다. 집무실에서는 소파에 거의 앉지 않고 회의용 의자에 꼿꼿이 앉아 일을 보았다. 이 의자는 L자로 딱딱하게 생긴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서는 물론 차중에서도 낮잠을 자거나 졸지 않았다. 항상 정신을 칼날처럼 고추세우고 있었거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진해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때도 박대통령은 옥포 조선소나 마산 공단을 둘러보곤 하였다. 한번은 낚시 배를 타고 거제도 쪽으로 갔다. 육여사와 수행원들은 멀미가 나서 구토를 했다. 박대통령은 끄떡 않고 쌍안경으로 여기저기 둘러 보는데 내 눈에는 너무 「지독한 분」으로 비쳐졌다. 1975년 11월 7일에 해군 기동연습도중 함대함 미사일 발사시험이 있었다. 그 구축함에는 군 수뇌부 인사들이 배석하였다. 파도가 쳐 배가 일렁대자 배석자들은 하나, 둘씩 자리를 떠 아래로 내려가 멀미를 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박대통령과 몇사람만 남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갑판 위 의자에 얼어붙은 듯 앉아 시험장면을 시종일관 지켜보았다.
멀미에는 장사가 없다고 한다. 선장도 남의 배종에 타면 멀미를 한다고 한다. 자기 배에 있을 때는 운항에 신경을 집중시키느라고 멀미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것이리라. 박대통령이 멀미를 하지 않은 것은 그분의 정신집중력 때문이 아닌가 한다.
박대통령은 또 사람을 긴장시키기도 하고 감동시키기도 하며 그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무역진흥확대회의에 참석한 기업 대표들과 인사를 하는데 효성그룹의 사장과 악수를 하면서 『조홍제 회장께서 입원해 계시다면서요. 꼭 안부를 전해주십시오』라고 했다. 병상에서 대통령의 말을 들은 조회장은 기분이 좋아서 『적자를 봐도 좋으니 수출량을 늘리라』고 지시하더라는 것이다.
한때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었던 철학자 고 박종홍 교수는 박대통령을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내가 박대통령을 천재라고 하면 아부가 될 것이고, 그분은 적어도 수재는 넘는 사람이야』
핵심을 포착하는 능력
72년 가을 국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에 박대통령께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육여사께 『대통령께서는 축구시합 구경만 가시고 예술활동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다』는 음악인들의 불평을 전해 드렸더니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일 연주회는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아니라 국립합창단과 소년 합창단 등을 동원한 교성곡(交聲曲)이란 이름이 붙은 대합창제였다. 막이 오르자 음악연주 대신에 사회자가 대통령 업적을 칭송하는 시를 읊고 있었다. 청와대 정무비서실과 문공부 당국자들의 과잉충성이 발동한 것이다. 옆에서 보니 박대통령의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불쾌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람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박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런 연주회는 당장 그만 두라는 것이었다. 계획에 따르면 그 연주회는 지방순회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박대통령의 모처럼의 교향악단 참관은 그후로도 다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박대통령의 지능지수가 특출 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분의 놀라운 기억력과 판단력 및 통찰력은 천재성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늘 국정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지식이 관심에 비례한다는 말 그대로이다.
박대통령에게 지만군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 저는 학교공부도 복잡해서 제대로 머리에 정리가 안 되는데 아버지는 그 복잡한 나라일을 어떻게 다 보십니까?』
『내 책상의 서랍들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로 분류돼 있다고 하자. 나는 정치 서랍을 빼내어 일을 볼때는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것을 닫은 다음, 경제 서랍을 빼내 일을 볼 때는 정치는 싹 잊어버리고 경제에 온 정신을 쏟는다. 그런데 너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서랍들을 한꺼번에 열어놓고 있으니 어느 하나도 제대로 공부하고 있지 못한 거야』 박대통령은 서랍을 빼고 닫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분이었다. 아침에 어느 장관에게 화를 냈다가도 다음 면담자를 맞을 때는 언제 그랬던가 할 정도로 냉정하게 돼 있었다. 변화하는 그 순간순간의 상황에 진지할 수 있는 분이 박대통령이었다. 박대통령은 기억력이 비상했지만 쓸데없는 것은 아예 외우려 하지 않았다. 라디오 주파수를 몰라 라디오에다가 KBS, MBC란 표지를 붙여 놓았다. 사소한 것에는 무관심하고 중요한 것에는 신경을 쓸 줄 아는 분이었다. 그러니 중요한 가닥이나 흐름, 그리고 사물의 핵심을 결코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포항제철 확장공사 계획을 박대통령께 보고하게 된 외지 담당 비서관이 계획안과 포철의 현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장사진과 브리핑차트를 들고 집무실에 들어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박대통령이 공장 사진을 보면서 「이 공장 옆에 있던 배수로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었다. 모든 것을 암기했던 그 비서관이었지만 대통령이 관심있게 보아 온 배수로를 알 턱이 없었다.
조카 구속토록 지시
그러나 이렇던 박대통령도 육여사 서거 후에는 자세가 좀 이완되는 듯한 기미를 보이게 된다. 박대통령을 내면적으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뒷받침하였던 육여사가 사라짐으로써 그의 정신세계가 허전해진데다가 국민들에 대한 생각도 변하였다.
『내가 혁명을 한 것은 목표가 있어서인데 그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국민들이 기다려 줄 수 없나…』하는 말을 가끔 하기도 하였다. 「국민들이 몰라준다」는 섭섭함과 「나도 나라를 위해 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하는 자기만족과 자신감이 박대통령을 변화 시켜간 중요한 심리적 동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박대통령이 현충사를 자주 찾아가 충무공과 「역사의 대화」를 자주 가진것도 당대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핍박까지 받은 충무공에게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켜 보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박근혜씨에 의하면 육여사의 서거이후 썰렁한 청와대 2층 내실에서 박대통령은 가끔 단소를 불었다. 텅빈 청와대를 울리는 애조띤 단소 소리는 듣기에 민망할 정도었다. 박대통령은 어느날 부속실 직원에게 『요사이 밤에 배가 고파. 내 방에 쿠키 좀 갖다 놓아』라고 했다.
바깥에서 보면 철권의 통치자였지만 밤에는 쓸쓸한 홀아비였던 것이 박대통령이었다.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박대통령이 속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분에게는 불행의 씨앗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기야 그분 성격에 재임중의 재혼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근혜씨가 대외적 활동을 줄이고 박대통령을 집안에서 도와드리는 일에 더 시간을 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박대통령은 근영씨와 둘이서만 저녁을 들게 되는 경우 근혜씨가 지방 행사를 끝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식사를 함께 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1973년 가을 어느날 지만군이 다니던 중앙고에서 하교하여 청와대로 돌아왔는데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상급생에게 얻어맞았다는 것이었다. 밴드부 연습실에 가서 연습이 끝나고 아무도 없을 때 북을 치다가 들켰던 것이다. 저녁무렵 육여사로부터 인터폰이 걸려 왔다.
『아까 지만이에게 왜 맞았느냐고 물었다면서요?』
『예』
『그런 건 왜 물어요. 모르면 어때? 내가 가슴이 얼마나 아픈데…』
학교에서는 뒤늦게 대통령 아들이 맞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발칵 뒤집혔다. 때린 학생을 정학시킨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육여사는 『제발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근영씨가 서울음대 재학중일 때 친구들과 함께 강화도 전등사로 놀러가고 싶다고 해서 박대통령이 마이크로 버스를 내게 하여 같이 타고 일종의 관광안내원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요즈음 아이들은 어째서 예절을 그렇게 모를까. 대통령이라고 부르기 어려우면 근영이 아버지 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니…』
육여사 차의 교통사고
1973년 봄 어느날 아침 육여사는 동아방송을 듣고 있었다. 육여사는 정부에 비판적인 방송을 주로 들었다. 뉴스시간에 「연희동에서 교통사고가 나 사람이 죽었는데 가해자가 권력층 인사라 경찰이 제대로 수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갔다. 육여사가 나에게 진상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내가 서대문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서장은 나의 신분을 못미더워하였다. 그래서 제2부속실에 놓인 시경3번 경비전화로 걸도록 했다. 걸려온 전화를 내가 받으니 서장이 실토를 했다. 가해자는 박대통령 누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아침식사시간 때 육여사가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박대통령은 대노하여 직접 서울시경국장을 불러 조카를 구속시키도록 지시했다.
스웨덴 왕실의사로 근무하던 한국인 의사가 있었는데 이분은 매년 비타민류 등 많은 의약품을 육여사에게 보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게 하였다. 1972년에 육여사는 많은 양의 약품을 경기도에 넘겨주었다. 그 며칠 뒤 신문에 「육여사가 보낸 비타민이 증발됐다」는 기사가 살렸다.
대통령지시로 내무부에서 진상조사를 해보니 경기도 지사 관사에 상당량이 전달되지 않고 보관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내무부의 건의에 따라 그 지사가 면직되었다.
육여사는 이 문제를 두고 여러 차례 나를 꾸중했다. 내가 경기도에 의약품을 인계할 때 단단히 주의를 주었더라면, 또는 육여사의 친서라도 같이 보냈더라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능력있고 아까운 사람이 잘렸다』고 미안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1973년 봄에 충청도에 사는 한 처녀가 육여사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시골에 와서 고시공부하는 서울학생을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태도를 돌변하여 「위자료를 줄테니 관계를 청산하자」고 한다는 요지였다.
육여사는 이 편지를 박대통령에게 갖다주었다. 박대통령은 법무부장관에게 조사를 시켰는데 이 여자의 편지 내용대로였다. 박대통령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할 법관으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을 제기하여 신직수 볍무장관에게 처리를 맡겼다. 그리하여 이 남자는 법관 임용이 되지 못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0.26사건 뒤 수십명의 변호사들이 김재규 변호를 자원했을 때 변호인단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변론을 자원했을까?
1974년 봄에 강원도 춘성군에서 양잠대회가 열렀다. 육여사가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 편으로 가평군을 지나다가 갑자기 뛰어든 소녀를 그 차가 들이받았다. 육여사는 사색이 되었다. 뒤따라오던 정소영 농수산부장관 승용차에 다친 소녀를 태워 병원으로 보냈다.
육여사가 양잠대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경찰로부터 「소녀가 죽지 않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육여사는 화색이 도는 얼굴을 하고는 나에게 병원으로 가 보도록 지시했다. 나는 서울에 왔다가 박대통령 지시로 그날밤 다시 춘천으로 갔다. 춘천에 있는 병원에 갔더니 경기도 경찰국장이 나와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사표를 내야겠다』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국장이 잘못한 게 뭐가 있나. 그것은 대통령의 뜻도 아니다』고 안심을 시켰다.
그 소녀는 진단 결과 골절도 내출혈도 없음이 판명되었다. 이 소식을 전하자 육여사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죽었더라면 평생 가책을 받으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고 고민했다는 것이었다.
육여사는 며칠 뒤 그 소녀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하였다.
오기가 센 사람
1970년 가을인 것 같은데 박대통령은 2군 사령부 관할 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헬리콥터 편으로 날아가다가 헬기고장으로 논에 불시착하였다. 박대통령, 박종규실장, 경호원이 황급히 뛰어내리고 뒤따르던 경호헬기도 긴급 착륙하였다. 박대통령은 혼이 났을 터인데도 사고헬기 조종사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한 뒤 다른 헬기로 갈아타고 목적지까지 날아갔다.
박대통령의 성격상 또 한 가지 특성은 오기가 세다는 것이었다. 그 오기의 대상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야당 지도자일 경우도 있었고, 김일성 일 수도 있었으며, 내정간섭을 하는 미국일 경우도 있었다. 또는 우리의 가난, 그리고 결혼에 반대했던 장인일수도 있었다.
이런 대상에 대하여 박대통령은 과감히 도전하거나 맞서고, 때로는 눌러버렸다. 그런 대상을 가만두고 보지 못하는 강한 자아의 소유자였다.
그런 오기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은 부자나 빈자, 권력자나 약자를 인간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는 분이었다. 청와대 목수에게도 『수고 많습니다』고 존칭을 썼다. 박대통령의 예절바름은 그분이 유교적 양반 문화 속에서 태어나 사범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박대통령은 한국의 안보를 이야기 할 때 「고슴도치 이론」을 가끔 들고 나왔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려면 고슴도치처럼 단단하게 무장을 하여 힘세다고 함부로 건드릴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이 진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미국 국회의원 10여명이 서울에 도착, 대통령을 뵙자고 한다는 연락이 왔다. 박대통령은 그들을 진해로 불렀는데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당신네들은 데탕트라고 하여 코끼리 두 마리가 좋아져서 서로 몸을 비비고 있는 격인데, 그러는 사이에 잔디가 밟혀죽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이 바로 그런 잔디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1976년 8월18일에 일어난 판문점의 도끼만행 사건 직후인 8월20일 제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박대통령은 훈시를 하면서 「우리가 참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필요합니다」고 했는데 이대목은 연설원고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박대통령이 직접 써 넣은 구절이었다.
1974년 6월 현대조선소에서 23만t짜리 유조선 아틀란틱 배런호의 진수식에 참석하기 위해 박대통령이 울산에 내려가 있을 때였다. 행사당일 아침 국방장관으로부터 현대조선소 영빈관에 있는 박대통령에게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동해상에서 해군경비정이 북한 해군에 의하여 납치돼 북쪽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뭐하는 거요? 강릉에 있는 전투기를 출격시켜 폭격한 뒤 우리배를 끌고 오시오』라고 소리쳤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손이 분함을 못 참아 덜덜 떨리고 있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전화를 끊고는 『이제는 전화받지마! 받으면 혼선이 생겨!』라고 했다. 우리전투기들이 출격하기는 했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찾지 못했다.
늘 김일성을 의식
박대통령은 늘 김일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보다는 우리가 잘 살아야지」하는 오기가 대통령의 언동에서 자주 비쳤다. 8․15사건 이후 박목월 시인이 박대통령과 담소하다가 김일성 이야기가 나왔다. 박대통령은 담배개비를 손가락으로 탁 튕겨서 식탁 밑에 떨어뜨리더라는 것이다. 박목월씨는 박대통령이 얼마나 분하면 저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이야기를 나에게 한 적이있다.
국가지도자가 되어야 비로소 국가안보의 책임을 실감하게 된다. 박대통령은『둑 위에 선 사람이라야 한강물이 넘치는지 안 넘치는지 알 수 있다』는 말로써 그 책임의 중압감을 표현하였다. 일부 인사들은 박대통령이 김대중씨나 김종필씨를 자신의 경쟁상대로 의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본 박대통령은 늘 김일성을 경쟁상대자로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1968년 1.21 청와대습격사건에 대한 심야대책회의가 청와대에서 있었다. 이 회의를 주재한 박대통령은 관계장관들이 돌아가는 것을 본관현관 앞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그런 뒤 박대통령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하늘을 보았다가 땅을 보았다가 하면서 그 추운 겨울밤을 한동안 서성거리면서 골똘한 생각에 잠기더라고 한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는 한 과거의 정적들을 끝까지 돌봐주었다. 추석 등 명절이 되면 수첩을 꺼내놓고 선물이나 금일봉을 돌릴 대상자들을 직접 뽑았다. 지만군이 다닌 고교 교장에게까지 인사를 했는데 사적인 경우에는 대통령이란 직함을 안쓰고「박정희」란 이름만 썼다.
권력욕은 곧 일에 대한 욕심
박대통령이 권력욕으로 해서 3선개헌도 하고 10월 유신조치도 취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권력욕」을 깊게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권력 그 자체나 축재를 위한 욕망은 아니었다. 권력을 장악한 바탕에서 국가건설을 하자는 것이 그 권력욕의 핵심이었다. 박대통령의 권력욕은 일을 위한 욕심이었다. 박대통령은 사후에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윤보선씨와 대결했던 1963년 10월의 대통령선거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때 유세장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나는 즐겁지만은 않더군. 저많은 실업자들을 다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당선된다 해도 골치가 아프겠다는 걱정이 앞서더라』 사실 그 당시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업자들이었으며 그것은 박대통령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육여사는 박대통령이 군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소설을 썼을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박대통령이 일기를 쓰고 시를 지은 것으로 봐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언론인 최석 씨의 표현 그대로 혁명가였다. 최씨는 『혁명가를 정치가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리다』라고 글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대통령의 일생은 확실히 혁명가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박대통령과 함께 진해까지 기차여행을 하면서 나눈 이야기를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상기하면서 『그분으로부터 대단한 애국심을 느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도 직접 손을 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했었다.
MBC의 「제2공화국」에서 박정희 장군역을 맡았던 탤런트 이진수씨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기억한다. 택시를 타면 자신을 알아보고 택시비를 안 받는 운전사들이 더러 있었는데, 이것은 박대통령에 대한 민심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게 아닐까라는 얘기였다.
박대통령은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해야 조국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하더라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회상하는 것을 나는 들른 일이 있다. 88올림픽 유치의 구상은 박종규 당시 대한체육회장의 작품이고, 이 꿈을 받아들여 서울시로 하여금 유치선언을 하도록 한 것이 박대통령이었으며 10.26 뒤 잊혀진 올림픽의 꿈을 다시 살려낸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원로들의 박대통령 평
나는 5공화국 시절에 원로들이 박대통령에 대해 평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유달영씨(전 서울농대 교수)는 1965년 제2한강교 준공식장에서 박대통령이 『앞으로 한강에 이런 다리를 열 개쯤 더 만들어야 되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도저히 믿기지 않더라고 했다. 허정씨(전 내각수반)는 경주를 둘러보는 자리에서 『박정희씨가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었다』고 했다.
『혁명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안목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도로, 항만, 도시계획을 해놓은 것을 보면 우리보다 나았어』
곽 상훈 전 국회의장과 박순천 전민주당 총재가 말년에 박정희대통령을 지지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데 대하여 오해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름대로 소신있는 생활을 해 온 두 야당인이 사리사욕으로 그런 변신을 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격이 대쪽같아「한국의 간디」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었던 곽씨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5.16때는 일본에 있었어. 그때 나는 민주당에 실망하고 있었는데 5.16이 나자 주변에서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귀국했어. 우석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박의장이 한번 뵙자 한다는 연락이 왔어. 그래서 만났는데 그분이 열의를 갖고 말하는 표정이 믿음직했지. 특히 그의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았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지』
박순천씨는 육영수여사 추모사업회 이사장까지 맡아 일했는데 어느 날 박대통령과 이야기하다가 육여사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었다. 박이사장이 육여사의 아름다운 자태와 긴 목에 관해 이야기하니까 박대통령은『그 학 같은 목이 1cm만 짧았더라도 안 죽었을 것입니다』고 하더란 것이다. 박이사장은 『대통령이 얼마나 아내를 생각했길래 그런 이야기가 나오겠는가』라고 했다. 이호 씨는 1973년 8월에 김대중씨가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하여 납치되었을 때 일본주재 대사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지 서울로 귀임했을 때 박대통령을 찾아가 『각하께서 어떻게 그런 짓을 했습니까』라고 다그치듯 말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이대사, 제가 정말 몰랐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이야기 합니다』고 하더란 것이다.
신현학 전 총리는『박대통령은 만날 때마다 커 보이는 인물』이란 표현을 했다. 어떤 국정문제에 대해서도 한 수 위에서 통찰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총리가 옳다고 건의한 것을 박대통령이 거부하면 『나보다 경륜과 정보가 나으신 분이니까 다른 배려가 있으시겠지』하는 생각에서 승복하게 되더라고 했다.
신현학 부총리의 고집
박대통령을 친근하게 모시는 우리의 눈에는 대통령이 그토록 무서운 분이라는 인상을 받을 때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가끔 장관들이 대통령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당하고 집무실 바깥으로 나와 얼이 빠진 것처럼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면 절대권력자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떤 장관은 얼굴이 창백해져 경호원에게 자기 승용차를 불러달라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대통령이 말을 너무 많이 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부하들이 대통령의 의중을 먼저 알게 되면 그쪽으로 맞춰가 며 일을 하거나 보고를 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육여사의 존재가 소중했던 것은 싫은 소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9년에 신부총리는 긴축재정을 펴기 위해 박대통령이 그토록 애착을 갖고 추진해 온 농촌 취락구조 개선사업 예산을 대폭 줄이자고 건의하였다. 박대통령은 『그것은 그냥 놔둡시다』고 했다. 신부총리는 다른 보고를 하다가 또 이 문제를 제기했다. 박대통령은 『이 일은 내 숙원사업인데』라고 또 거절했다. 신부총리는 세 번째로 또 예산삭감을 건의하여 결국은 관철시켰었다.
1978년 12월 개각을 앞두고 박대통령은 신현학 보사부장관을 불렀다. 대통령은 『경제를 너무 성장 위주로 끌고 나오다가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있소. 그러니 신장관이 경제를 맡아주시오』라고 하더란 것이다. 박대통령은 신장관에게 『지금 집무실을 나가면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시더냐고 물을텐데 경제기획원장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하더란 것이다. 신장관이 집무실에서 나오니 과연 김실장이 그런 질문을 던지더라고 한다.
박대통령은 당시 경제성장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던 남 부총리와 김정렴비서실장이 안정론자인 신장관의 부총리 내정 사실을 알면 견제가 들어올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신부총리가 79년에 들어와서 기존의 경제정책을 크게 수정하는 안정화 정책을 펴 나가자 남 전 부총리(당시 대통령 특보)를 비롯한 성장론자들과 이견이 생겼다. 박대통령은 특별보좌관들에게 남 전 부총리와 신현학 부총리를 한 자리에 초빙하여 경제정책에 대한 토론을 해보라고 권유했었다. 이 토론회에서 신부총리는 『나를 보고 긴축론자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서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반론했고 남 전 총리는 『날 보고 성장론자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조목조목 반론을 펴 경제전문가가 아닌 특보들이 듣기에는 두 사람의 정책이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 같더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장관에게 인사권을 많이 위임하여 차관 이하의 인사에는 거의 간여하지 않았다. 어느 장관에게 『차관으로 ○○○가 어떨까』하고 부탁하고는 매우 미안해하더라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무슨 생각이 나면 관련 장관을, 직접 전화를 걸어 찾기도 했다. 국회 회기중에는 장관이 국회에 나가 있는 수가 많아 연락이 늦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 장관들은 한결같이 『국회 때문에 일 못해 먹겠습니다』고 불평을 하곤 하였다. 이런 일들도 박대통령에게 「국회=비능률」이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10월 유신의 한 이유는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10월 유신 뒤에는 여당에 대주던 운영비를 크게 줄였고 갖가지 경축.기념행사도 줄였다.
무서웠지만 무자비하지는 않았다
박대통령은 매서워 보였지만 근본은 마음이 약한 분이었다. 1971년 10월 어느 날 박대통령은 국방과학기술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신설동 부근을 지나다가 서울사범대학생들이 경찰을 상대로 투석하는 시위현장과 맞닥뜨렸다. 대통령 승용차에 돌이 떨어지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경호원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차에서 내리더니 한참 걸어 사범대 사무실로 찾아갔다. 학생처장에게 『학생들 지도를 잘 하라』고 주의를 주고 경호원들에게는 『손에 흙 묻은 놈들은 모조리 붙들어라』고 했다.
1백여명의 학생들이 동대문서에 붙들려 와 있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그날 안으로 모든 학생들을 훈방 시키도록 했다.
나는 박대통령이 반정부세력을 다루는 방식이 무자비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회초리를 들고 엄포를 놓는 식이 아니었던가 한다.
박대통령은 매섭고 차가운 면이 있었지만 다른 나라의 독재자나 혁명가처럼 무자비하지는 않았다. 유교적인 양반문화가 몸에 밴 그분은 천성이 그럴 수 없는 이였다. 박대통령은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가로 기록될 것이다.
박대통령은 말년에 김형욱과 최덕신씨의 배신에 마음을 많이 상했던 것 같다. 김 형욱씨가 미 의회에서 반정부적인 증언을 하자 『개도 주인을 알아보는데』라면서 분해 하였고 최덕신씨가 친북한 인사로 돌변하자 『그 사람이 천도교 교령을 할 때는 안되는 일도 되게 하면서까지 봐 주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인덕이 없는 모양이다』고 나에게 탄식조로 말했다.
1979년 어느날 밤 박대통령은 신직수 법률담당 특보, 유혁인 정치담당 비서관 등을 초대하여 1층 식당에서 식사와 술을 함께 했다. 박대통령은 술이 거나해지자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러더니 모비서관을 붙들고는 귓속말로 말하더란 것이다.
『저 뒤에 가보니 보초가 없어 풀밭에다 소변을 보고 왔는데 자네도 마려우면 지금 나갔다가 와』
지금도 당시의 그 비서관은 그날 밤의 박대통령의 소탈함과 인간적인 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새까만 부하인 나에게 막걸리를 권하면서 젓가락으로 휘휘저어주던 때의 박대통령은, 절대권력이 바꿔놓지 못한 소박한 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민족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박정희대통령. 그 분이 비명에 가신 지 어언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세를 주도해 온 한 정치지도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때가 되면 사가들의 춘추필법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박대통령과 함께 한 시대를 살아온 이 나라의 국민들은 애증의 갈림길에서 각자의 인식과 사정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11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그분의 묘소에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가 하면 그에 못지 않게 비난의 소리도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최근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그분이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뽑힌 것을 보면 그분에 대한 평가가 차츰 올바르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분은 분명히 과(過)보다는 공(功)이 많은 대통령이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정말 그립습니다.박정희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