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9,26-31; 1요한 3,18-24; 요한 15,1-8
+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오늘 복음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초등학생 때부터, 노래가 재미있어서 크게 불렀던 성가 ‘나는 포도나무요’가 떠 오르는데요, 오늘 입당 성가로도 함께 불렀습니다.
이 성가를 작곡하신 원선오 신부님은 Vincenzo Donati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신부님이신데, 1962년에 우리나라에 오셔서 빈첸쪼 대신 원선오라는 한국 이름을 쓰셨고요, 20년간 선교활동을 하시며 500여 곡의 성가를 작곡하셨습니다.
1982년, 아프리카 케냐 선교를 자원하여 우리나라를 떠나셨고, 94년부터 수단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건강 때문에 2021년부터 케냐에 머물고 계신데, 올해 96세가 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계시는 동안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곡을 많이 작곡하셨는데, 오늘 입당 성가인 35장도 그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포도나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참’이 아닌 포도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자주 포도나무 또는 포도밭에 비유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5장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공정과 정의를 바랐는데, 피 흘림과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하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드신 적이 있는데요,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느님의 포도나무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포도나무를 대체하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 첫 구절의 의미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절박하게 표현한 구절은 없습니다. 가지는 나무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을 떠나서는 우리가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을 얻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열매’가 의미하는 바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감정이나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입니다. 2독서는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혀는 말의 근원이며 진리는 행동의 근원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바오로를 여전히 두려워하고, 그가 제자라는 것을,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를 진심으로 믿게 된 것은, 후에 그가 주님을 위해 고난받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그 사람의 진심은, 얼마나 말을 잘하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가 겪은 고난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의 진심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우리가 어떠한 고난을 겪는지, 그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의해 드러납니다. 고난 한가운데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요한복음이 탄생한 요한 공동체는 어떠한 상황이었을까요? 그들은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로서,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회당에 나가 유대인들 집회에 참석했고, 주일에는 따로 모여 성찬례를 거행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했습니다.
그러나 기원후 70년, 유대인들이 로마를 상대로 벌인 전쟁의 대가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교의 구심점이 사라지자, 바리사이를 중심으로 모인 유대교 주류파는,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통한 유대교 재건을 제1의 목표로 내세웠고, 이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내쫓는가 하면 살해의 위협까지 가했습니다. 이러한 요한 공동체와 유대교 주류파 사이의 갈등이 요한복음 전반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예전처럼 유대교인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옛 동료들과 결별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지를 말입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은, 그들에게 특별히 와 닿았을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대부분의 성경 말씀은, 고난과 박해 가운데 쓰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머무를 것인지, 예수님을 떠나 유대교 안에 머무를 것인지 결단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맞이하게 될 상황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우리도 크고 작은 박해와 어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외짝 교우로, 혹은 냉담 중인 가족들과 함께, 혹은 혼자 살면서 외로움과 어려움 중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초등학생일 때, 어머니가 저를 주일미사에 데려가려고 하면, 당시에 신자가 아니시던 아버지는 탐탁지 않아 하시며, “하느님을 믿으면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지금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신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밥도 나오고 쌀도 나옵니다. 저 여기서 먹고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통해, 우리 가족들도 당신의 새로운 가지로 삼아 주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물리적으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성당에 나와서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 안에 머무르라”는 말씀은,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무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되뇔 때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 안에 머무릅니다. ‘거룩한 독서’를 통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말씀 한 구절을 시시때때로, 되뇌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특별히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이 말씀을 되뇌셔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카르투시안 수도자의 말을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행동을 하기 전에 잠시 멈춥시다.
그래야 그 행동이 예수님과의 일치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합시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이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판단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판단이 되도록,
모든 것을 그분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그분께서 드리시는 기도가 우리 마음에서 샘솟게,
그분께서 노래하시는 찬미가 우리 목소리에서 흘러나오게 합시다.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 그분의 십자가가 되게,
우리 안에 있는 것이 그분의 생명, 그분의 기쁨이 되게 합시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 가톨릭성가 35장, 나는 포도나무요
https://youtu.be/BlPXoBc58tE?si=k4I0Way5mTA5OW3r
레오스 모스코스(1620-1690),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출처: Leos Moskos Christ on a Vine - True Vine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