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온유하고 겸손하게 응대하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라는 격리의 시간(a time of quarantine)이 꽤 길었습니다. 다시 성전에 모여 미사를 조심스럽게 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4월24일에 쓰고 있습니다) 이 감염병의 파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여전히 예측이 어렵습니다. 그저 우리는 신앙생활이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성당에 가서 형제자매들과 친교를 나누고, 공동체와 함께 하는 감사의 미사를 매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그런데 감염병을 물리치고 사회의 모든 것이 정상화되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예전처럼 그렇게 정상화(?) 될 것인지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 삶의 방식이 많이 바뀔 것이라고 학자들은 예견하고 있습니다. 교황청에서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는 위원회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사회의 모습과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지, 그리고 그 변화가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연구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그저 예전의 모습과 방식을 고수하기만 한다면, 아마도 성당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위축되고 축소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위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의 교황직 수행에서 식별(discernment)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모든 신앙인은 식별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교회는 식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자주 강조합니다. 식별한다는 것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교회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화와 선교를 지향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과 오늘의 한국 교회 역시 식별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의 현실과 징표들을 섬세하게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들의 지난 신앙생활의 모습과 한국 사회 안에서의 교회의 지난 모습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 교회의 모습과 성당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새롭게 상상하고 새로운 전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일본에서 선교하고 있는 어느 메리놀 신부님은 한 칼럼에서 흥미 있는 지적을 합니다. 격리의 시간 동안 본당 미사와 모임이 취소되는, 신앙의 공백(?)을 경험한 신자들이 본당 미사가 재개되어 다시 돌아올 때,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신자들의 모습이 코로나 사태 이전의 본당 생활의 성적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의 본당 미사와 본당 생활에서 진정한 신앙과 공동체 의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면, 이 격리의 기간 동안의 공백이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울한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코로나 이전 시대에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격리의 시간 동안 본당에 나오지 않는 것이 습관적으로 익숙해져서,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본당으로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많다는 뜻입니다.
본당 안에서의 신앙생활과 본당 밖에서의 신앙생활이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참 신앙은 본당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언제나 삶의 모든 자리에서 표현되는 태도로서 드러납니다. 사실, 신앙은 신념과 확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신앙은 어떤 신념과 확신을 가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또 어떤 종교적 관행을 습관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태도는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과 태도가 거룩함의 길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타인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이기적 자기중심주의입니다. 현대인은 자기표현을 선호하고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경쟁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 열중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타인마저도 자신의 관점과 기준에서 판단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생각과 관습, 심지어 말과 옷차림으로 다른 이들을 끊임없이 판단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1항)
솔직히 고백하면, 성직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이 식별과 판단을 잘 구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저희들은 식별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고 또 스스로 사용합니다. 우리 성직자들은 식별이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타인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식별은 복음과 신앙의 관점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이고, 공동체와 자기 자신이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입니다. 식별은 타인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개념입니다. 식별의 행위 안에는 분석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행위가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맥락에서 식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개별적 타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타인을 규정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타인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뿐입니다. 남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타인에게 쉽게 화를 내고 타인의 허물에 대해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불평에 힘을 낭비하고 우월감에 빠지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72항) 자기 자신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어떤 사람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사람은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함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비의 희년’에 그토록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사랑과 자비의 태도로 드러난다는 사실 말입니다.
온유는 나약함이 아니라 내적 청빈이며, 타인을 대하는 신앙인의 거룩한 방식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온유함을 자꾸만 나약함과 어리석음의 모습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74항) 단호하지 못한 유약함, 자기주장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온유함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적 의미에서 온유함은 인간적 힘과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신뢰와 희망을 두는 영적 겸손함과 가난함의 태도입니다.(74항) 온유하다는 것이 기질적으로 부드럽고 성격적으로 유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타고난 성격과 기질이 괄괄하고 강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유는 타고난 성격과 기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적인 맥락에서 온유는 기질과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겸손함으로 드러나는 태도입니다.
온유는 성격과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응대하는 신앙인의 방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 무엇을 대하든 항상 온유한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우리의 고유한 신앙과 확신을 수호해야 할 때도 우리는 ‘온유하게’ 해야만 합니다.”(73항) 온유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신앙인이 지녀야 할 태도와 방식입니다. 우리는 온유함을 통해 거룩함으로 나아갑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마음이 가난한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세계는 감염병이라는 난제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시대는 그 나름의 질문과 도전에 직면합니다. 지금의 시대가 가장 어려운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21세기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갈라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야기한 질문과 도전은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해, 종교와 신앙의 모습에 대해 다시 성찰해보기를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혼돈의 시기가 지나면, 망각의 습관에 빠져, 우리는 여전히 예전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혼란의 시간이 가져온 강렬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물리적 거리(사회적 거리)라는 말이 조금 무섭습니다. 타자와의 밀접한 접촉이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개인화되고 고립화된 현대의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얼마나 멀어질 것인지. 배타와 배제, 혐오와 분노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더 많이 성행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일시적이지만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의 모든 활동마저도 중지되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 공동체가 함께 미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본당에서의 활동들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와 함께 하는 미사와 본당 활동의 일시적 중단 앞에서, 우리는 지난 신앙생활을 잠시 반성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본당 밖에서의 신앙생활에 대한 토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미사와 본당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전례 성사와 본당이라는 공간 중심의 신앙생활은 일상 안에서의 신앙생활과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전례 성사로서의 미사와 삶의 성사로서의 미사는 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최후만찬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사의 은총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의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보편 사제직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사회적 삶 속에서 자신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성찰과 교육이 부족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자기들이 선 자리에서 자율적이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에 교회가 소홀했음을 반성합니다.
전례와 본당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은 지나치게 성직자 의존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신자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신자들의 신앙 근육과 면역력을 키우는 데에 교회가 조금 더 관심을 가졌었더라면, 공동체 미사 중단과 본당 공동체 생활의 일시적인 중지라는 어려움의 시기를 조금은 더 쉽게 건너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살짝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닮는 방식은 행복 선언 안에 담겨있습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미사와 본당 생활에만 충실한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미사의 은총을 통해, 공동체 생활이 주는 용기와 격려의 힘을 통해,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거룩함의 길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날마다 자신의 삶에서 스승님의 얼굴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63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거룩해진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의 성인임을 분명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는 것인지, 즉 어떤 모습이 거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 비추어 하나의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행복 선언은 그리스도인에게 신분증과” 같아서,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63항) “‘행복한’ 또는 ‘복된’이라는 말은 ‘거룩한’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64항)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복음 말씀은 “거룩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강력한 선언입니다.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시적 감흥을 주지만, 이 세상의 통상적인 일처리 방식과 명확히 반대”되기 때문에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65항)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 가지 맥락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당연히 물질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물질적인 욕심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소박한 삶”(70항)을 사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물질적 부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67항)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 안에서는 돈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됩니다. 이 자본주의 시대에 물질적 자본은 핵심 요소입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은 세상에서 물질적 가난과 소박한 삶을 말한다는 것이 공허한 외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뒤흔들고 자극하며 우리 삶에 참변화를 요구할 수 있도록”(66항)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수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끈질기게 노력해야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끊임없이 구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삶은, 우선 우리의 물질적 부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이기심과 나약함을 고백하면서 주님 은총의 힘을 구하는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겸손한 마음과 열린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속의 욕심과 욕망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 형제자매들을 향한 사랑을 담을 자리를, 또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누릴 자리를 남겨” 두는 일입니다.(68항) 물질적 부를 향한 탐욕, 자신만 성공하겠다는 공명심, 타인을 배제하고 배척하는 이기심, 기존의 생각과 규율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폐쇄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난한 마음에 끊임없이 새롭게”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68항)
세 번째 의미는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치우치지 않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69항) 살아가면서 우리는 편파적이 되거나 그 어떤 것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러한 집착과 편파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 단순히 기계적인 중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에 대해, 즉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것들, 즉 물질과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인정욕망 등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거룩한 사람이란 물질적 가난과 소박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겸손하고 열린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세속의 것들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사랑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사람은 머리와 가슴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금 건조하게 말하면, 인간에게는 이성(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차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사유하는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당연히 지성의 힘과 성찰과 통찰의 능력에 우위성을 두었습니다. 거룩한 사람 역시 하느님에 대한 앎과 하느님에 대한 통찰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 안에서 인간의 의지적 행위와 삶을 중요시하는 추세가 발생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은 통찰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47항) 거룩함의 길에서 하느님에 대한 지성적 통찰보다 하느님을 향한 의지적 노력과 개인적 노력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인식과 성찰보다 의지와 실천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천중심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의 우선성
인간에게 지성(머리), 감정(마음), 의지(몸)는 중요합니다.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이성을 통해 아는 지식도 필요하고, 감정과 정서 안에서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행동과 의지를 통해 실천하는 것도 요청됩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교회 안에서 교리와 신학만을 중요시하는 일종의 지식인중심주의와 엘리트중심주의를 낳았습니다. 넓은 맥락의 영지주의 전통입니다. 감정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감각적인 신앙체험만을 추구하는 무분별한 열정의 태도를 낳았습니다. 의지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종교적 행위의 의지적이고 습관적 반복만을 중요시하는 형식주의적 신앙을 낳았습니다. 일종의 펠라지우스적 전통입니다.오늘의 교회 안에도 여전히 이 영지주의적 태도와 펠라지우스적 태도가 잔존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영지주의적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대판 펠라지우스적 태도에 대해서도 역시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펠라지우스적 태도를 지닌 이들은 “인간 의지가 순수하고 완벽하고 전능한 어떤 것이나 되는 양”(49항) 행동합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만을 믿고, 정해진 규범을 지키거나 과거의 특정한 가톨릭 양식에 완고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49항)
어쩌면 거룩함의 길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보다 하느님을 향한 행위와 실천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말과 생각보다는 행동과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말보다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또 하느님에 대해 입으로 숱하게 떠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행동과 삶이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즉 행동과 삶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습이 아니라면,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말은 빈 것이 되고 맙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에 있어서 행동과 실천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의지적 행위와 실천의 노력보다 앞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입니다. 조건 없이 선물로 주신 당신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 덕분에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은총의 선물은 인간 지성의 능력과 의지의 힘을 초월합니다.”(54항) 하느님의 “은총은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통상적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50항)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이 은총의 선물에 대하여 기쁨의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것뿐입니다.(54항) “교회는 우리가 우리의 공로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된다고 되풀이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언제나 먼저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52항) 결국 은총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의 지성과 의지의 한계를 인정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노예살이로 변질된 종교적 태도
인간의 의지적 노력만을 강조하는 종교인들은 자칫 관습주의자, 율법주의자, 형식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인들은 “율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 사회적 정치적 쟁취에 대한 환상, 교회의 전례와 교리와 특권에 대한 허식, 실질적인 일처리 능력에 대한 자만, 또는 자립과 자아실현 프로그램에 대한 집착”(57항)의 모습을 보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보다는 종교적 사업과 행사와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본당 안에서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할 때, 우리가 정말 그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분을 닮게 해서 기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복음 선포와 선교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사업과 행사와 프로그램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위험에 빠지곤 합니다.또한 우리는 본당에서 신심활동을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쩌면 신심 단체 활동을 더 오래한 신자들 사이에서 더 쉽게 발견되는 위험입니다. “이는 일부 그리스도인 단체들이 그들 고유의 특정 규범, 관행, 행동 방식 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일어납니다.”(58항) 레지오 마리에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지오의 규범과 교본과 전통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규범과 교본과 전통은 진정한 성모님의 군대가 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규범과 관행과 행동 방식을 준수하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규범과 관행과 행동 방식인지를 끊임없이 묻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복음의 기쁨과 은총의 선물로서의 행복과 자유를 잃어버리고(55항), “일종의 노예살이로 변질”(59항)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교리와 신학적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 규범과 관행과 전통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교리와 신학적 앎이 필요합니다. 규범과 관행과 전통을 준수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무슨 복잡한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단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두 가지 정식이나 명령을 전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두 얼굴, 아니 오로지 하나, 곧 수많은 다른 모습에 반영된 하느님의 얼굴만을 전해주십니다.”(61항)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으로만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거룩함(성덕)에 대한 오해들
관습적이고 정형화된 거룩함
거룩한 삶, 성덕의 삶, 성화의 삶. 우리가 그 무엇이라 부르던 간에 우리는 흔히 그런 삶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삶은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에 경건하고 엄숙한 모습이고, 때로는 딱딱하고 건조한 모습의 삶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도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으로 채우기 때문에 자아의 내밀한 특성과 개성을 상실하는 모습이라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영성적인 표현 방식을 빌리면, 성화의 삶은 자아(自我)를 버리고 무아(無我)의 경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만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나의 개성과 존엄성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왜곡되고 삿된 것들을 정화한다는 뜻이지, 나의 고유성을 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생생하고 더 주체적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활력과 생기, 기쁨을 앗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여러분은 아버지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시며 염두에 두시니 그대로 되면서도 여러분의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게 될 것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32항)
또 한편으로 우리는 흔히 성덕의 삶은 신적인 것,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들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이런 선입견 때문에 우리는 성덕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지, 인간 자체의 고유한 특성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오랫동안 우리는 거룩함을 금욕, 고행, 엄격주의 등의 외형적인 거룩함으로 좁혀서 이해해온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거룩함을 초월적인 것들과 자꾸만 결부시켰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경시가 은연중에 배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가장 신적인(거룩한) 것이 가장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강생의 신비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성덕은 여러분을 덜 인간답게 만들지 않습니다. 성덕은 여러분의 나약함이 은총의 힘과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3항) 거룩한 사람은 관습적이고 정형화된 사람이 아니라, 더 생생하고 더 인간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권위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거룩함
“한 사람의 완덕은 그가 지닌 정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로 가늠된다는 사실이 교회의 오랜 역사에 걸쳐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37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 안에는 “교리나 규율의 안정성”만을 강조하는 권위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교회 안의 이러한 권위주의자들은 “복음화 하는 대신에 남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은총의 문을 열기보다는 검열하고 검증하는 데에 자신의 힘을 소진해버립니다.”(35항)
이들은 “특정한 경험이나 일련의 추론과 지식에만 관심을 두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는 사람들입니다.(36항) 또한 이들은 “복잡한 특정 교리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사용해서 소박한 신앙인들을 주눅 들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37항) 이들은 “자신들의 설명으로 신앙과 복음 전체를 완벽히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절대화”합니다. 또 한편으로 이들은 자신이 지닌 지적 권위와 지위적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생각과 확신을 일상의 신앙인들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모든 물음에 척척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는 그가 올바른 길에 있지 않다는 표지입니다.”(41항) 거룩함은 교만함에 있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정직한 겸손에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고 있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가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며 무지한 대중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45항) 그것은 “위험스런 착란”입니다. 신앙의 앎(지식)은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기여야 합니다.(45항)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앎은 그저 위선과 교만에 불과합니다.
또 한편으로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고 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삶을 엄격히 감독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43항) 엘리트적인 권위의식으로 타인을 규정하고 판단하고 검증하고 검열하는 모습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타인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자신이 추측하고 판단하고 추론하는 것은 엄청난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좌초되어 우리 눈에도 악습이나 중독 때문에 실패한 삶처럼 보일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의 삶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42항)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며,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조적이고 율법적인 거룩함
“교회 안에는 교리와 그리스도교 생활의 수많은 측면들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길들이 정당하게 공존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합니다.”(43항) 거룩함은 풍요로운 다양성 안에서 더욱 빛납니다. “복음의 단순성”과 “단일한 교리”는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복음의 생생함은 지식과 교리로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46항) 교리는 복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교리가 복음을 다 포함할 수는 없습니다. 교리는 복음의 은총을 이해하려는 교회의 노력입니다. 교회의 노력은 늘 쇄신되어 넓고 풍요로워져야 합니다. 때때로 이 풍요로운 다양성이 혼란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추론보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42항) 교리의 풍요로운 표현들 속에서 복음의 생생함을 더욱 맛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질문과 의심을 배제하고 배척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은총은 인간적 질문들에 늘 열려있습니다. 신앙과 복음의 은총을 이해하려는 교회의 노력으로서의 교리 역시, 교회 구성원들의 숱한 질문들과 열린 대화와 토론과 합의의 산물입니다. 교회의 교리가 확립되던 초기 교회의 공의회의 역사가 이를 웅변합니다. 교리는 획일성의 닫힌 체계가 아니라 언제나 열린 체계입니다. “교리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교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표현은 물음과 의혹과 질문을 낳는 역동적인 힘이 없는 닫힌 체계가 아닙니다.”(44항) 물론 교회 공동체의 교리적 합의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삼위일체의 성령께서는 언제나 다양성 속의 일치를 지향합니다.
교리와 규범은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교리와 규범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교리와 규범은 그리스도교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리스도교 지혜가 이웃을 향한 자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46항), 교리와 규범은 사랑의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교리와 규범 그 자체의 엄격한 준수와 적용만으로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교리와 규범의 경직된 적용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권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닮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거룩한 사람은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람이 아니라 유연하고 열린 사람일 것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우리 삶이 성화와 복음화의 여정(삶이 바로 사명)
지나온 생의 시간을 돌아보면,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저 견디고 버티면서, 생의 여정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그저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반응하면서 살아온 것이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습니다. 지나온 생의 시간, 앞으로 남은 생의 시간들, 그 모든 생의 여정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제 머리 안으로 문득문득 다가옵니다. 우리의 생은 주님을 향한 순례의 여정이라고 말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실제로는 별다른 의식없이 그냥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서늘해질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온 생애를 하나의 사명으로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매순간에 또 여러분이 해야 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늘 성령께 여쭈어 보십시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23항)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 말씀이 갑자기 뭔가 통렬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씀도 아니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말씀도 아닙니다. 매우 단순한 말씀이고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씀이 강하게 와 닿습니다. 사실, 우리 생의 진리는 그리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세속의 번잡함에 휩싸여 잊고 있었거나, 아니면 말로는 늘 표현했지만 습관적인 말의 반복이어서 그 깊은 의미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할 때 삶의 거룩함과 신비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생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고 신비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결합하고 일치할 때, 우리의 생은 진정으로 거룩하고 신비한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승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곧 자기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오늘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할 수 있는 인격적인 신비를 형성”(24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과 지향은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고 증거할 수 있는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신비입니다.
신앙인의 전 생애 여정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고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성사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그 신비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분명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자신을 변모시켜 주시고 새롭게 해 주시도록 스스로를 내어 맡기십시오.” “빛을 비추어 주시는 그분의 초자연적 은총에 언제나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24항) 내어 맡기는 태도, 열려 있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과 그분께 활짝 열려 있는 것을 세속적 맥락에서 설명하면, 겸손과 개방성입니다. 즉, 언제나 신앙인에게 필요한 태도와 자세는 겸손함과 개방성입니다. 참된 신앙은 완고함과 엄격함이 아닙니다. 최근 성탄절 강론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완고하고 엄격한 신앙이 그리스도교를 점점 쇠퇴하게 하고 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겸손하고 열린 태도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생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은 신앙의 신비로 변해갈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를 이루기 위해 당신의 온 삶을 투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그분을 세상에서 반영해야 하는 우리 신앙인 역시 당연히 하느님 나라 건설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임무에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25항) 그 임무는 “만민을 향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25항)를 위해 노력하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전하고 신학적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닙니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교세를 확장해서 성사 생활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 안에는 교리를 전하고 신학을 가르치고 많은 이들이 성사의 은총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단순히 종교의 영역 안으로만 좁혀질 수는 없습니다. 전례와 성사 생활이라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 행위를 넘어섭니다.
전례와 성사생활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와 정의가 흘러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는 때때로 모함과 왜곡이 따르고 분열과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발생하는 불편함과 힘듦과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종교의 영역에서만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할 과제이며 사명입니다.
성화와 복음화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닙니다
미사 때 신자들의 기도에서 숱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가 숱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작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의 차원에서 끝나고 있는 현실을 자주 목격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아마도 삶의 본질과 사명을 분리하고, 신앙 행위 안에서의 기도와 사목적 헌신을 분리하는 경향 때문에 그렇습니다. “침묵을 사랑하지만 다른 이들과 교류는 회피하는 자세, 휴식만 취하려 들고 활동을 거부하는 자세, 기도를 추구하지만 봉사는 폄하하는” “건강하지 않은 자세” 때문입니다.(26항) “사목적 헌신이나 세상 속에 투신하는 일이 마치 성화와 내적 평화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분심거리’인 것 마냥 이를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은 유혹”(27항)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태도가 사명을 수행하는데 걸림돌과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관상과 행동, 둘 다 중요하다고 말은 합니다. 하지만 정작 실제에서는 그 둘을 자꾸만 분리하고 어느 한쪽을 더 중요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 관상, 성화, 내적 평화, 침묵, 영성 체험, 이런 것들이 신앙에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봉사, 활동, 헌신, 투신, 사명 수행, 등은 중요하지만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와 사목적 헌신이 분리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성덕의 정신이란 혼자 있는 시간만큼 봉사에 헌신하고, 사생활만큼 복음화활동에 투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성화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31항)
신앙인은 무엇보다 내적 성숙과 영적 성장을 통해 자신을 성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성화와 세상의 복음화는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화가 먼저이고, 세상의 복음화는 그 다음이라는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화와 세상의 복음화는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화와 복음화의 여정이 우리의 삶이며 사명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일상의 성인들(옆집의 성인들)
모든 신앙인은 거룩함(성덕, 완덕)으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러저러한 평범한 존재로 안주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항)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소명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거룩한 사람, 성덕의 사람, 완덕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해진다는 것, 성화된다는 것, 완덕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같은 의미를 나타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거룩해진다는 것(성화된다는 것, 완덕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닮는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함’이라는 말, ‘성덕’이라는 말, ‘완덕’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 때문에 이 말의 참 의미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무언가 특별한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평범한 일상의 신앙인들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영웅적 덕행의 징표들, 목숨을 바친 순교,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른 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삶을 내어주는 사례들”(5항)을 보여주는, 복자나 성인들만 거룩한 사람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뛰어난 성인들과 순교자들만 거룩함으로 부르시고, 그들에게만 거룩함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 백성들 가운데에 성덕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십니다.”(6항)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 신앙인 모두가 거룩함으로 불림을 받았고 또 거룩함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일상의 거룩함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모든 신앙인들이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는 거룩함에 대해 참 아름답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는 하느님 백성 안에서 드러나는 성덕이 보기 좋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 가정을 부양하고자 열심히 일하는 수많은 남녀, 병자들, 한시도 미소를 잃지 않은 노(老) 수도자가 있습니다. 날마다 한 결 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에게서, 저는 투쟁 교회의 성덕을 봅니다. 이는 우리 옆집 이웃 안에서 발견되는 성덕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우리 한가운데에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합니다.”(7항)
우리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들 일상의 삶은 무슨 대단한 영웅적 투쟁의 장이 아니라 어찌 보면 사소하고 작은 투쟁의 장일뿐입니다. 우리의 생은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고통들을 견뎌내고 버텨내는 인내를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들이 가끔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가끔은 이웃을 향한 작은 헌신의 몸짓들이 요청되기도 합니다. 자기 생의 운명을 견뎌내는 인내의 행위 속에, 자기 생의 무게를 감당해내는 책임 있는 태도 속에, 세상과 이웃을 향한 작은 헌신의 모습 속에 일상의 거룩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앙인이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거룩함은, 결국 자기 생의 여정에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앙의 방식’으로 응대하는 일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과 사건과 사고와 일들에 대해 ‘예수님의 방식’으로 응대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선과 관점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태도로 응대하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길에서,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사람은 저마다 자기 생의 운명이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자기 생을 살아냅니다. 제멋대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 자신이 선택해야 할 자신의 방식이 있습니다. 사람의 삶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입니다. 사람들이 그려내는 삶의 무늬는 다채롭습니다. 누구나 다 영웅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다 스펙터클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밋밋한 생을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굴곡진 삶을 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단조로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때론 그 길이 주어지고 강요된 길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또 때론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과 탈출의 방식이든, 긍정과 수용의 방식이든, 사람은 누구나 다 저마다의 길을 찾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저마다 자기의 길을 식별하고,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안배해 주신 개인적 은사인 자신의 최고 장점을 발휘하는 일입니다.”(11항) 모든 신앙인은 자기만의 성덕의 길을 찾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거룩해져야(성화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둔 부모의 길을 걸어가는 신앙인이라면,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는 일이 거룩함의 길입니다. 아마도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 그 자체가 진정 거룩한 일일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표현한, “무한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부모들”의 성덕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가정을 부양하고자 열심히 일하는 수많은 남녀”의 성덕이라는 표현은, 가족을 위한 노력과 헌신이 곧 거룩함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어느 소설가는 이것을 “밥벌이의 거룩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거룩함(성덕)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무슨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자기의 길에서 신앙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 은총의 이끄심에 따라 우리는 수많은 작은 몸짓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신 그 성덕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습니다.”(18항) 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자기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성덕의 척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다다르시는 경지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 전 생애에 걸쳐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21항) 성인(聖人, 거룩한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하고 재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교회의 성인들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써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성인의 삶 전부가 완벽하고 완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인들의 삶 안에도 숱한 실수와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22항) 단지 성인들은 그분들의 삶의 전체적 지향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영웅적 덕행과 영웅적 순교와 영웅적 헌신을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일상의 덕행과 일상의 순교와 일상의 헌신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모범을 통한 자녀교육에 헌신하고 가족을 위한 자기희생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부모들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육체노동자로 살아가든, 선생과 공무원으로 살아가든, 사회 운동가로 살아가든, 그 사람의 직업적 모습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 생의 자리에서 자기의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온힘을 다해 애써 노력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일상의 성인입니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온 생각으로, 온 마음으로, 온 몸으로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