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헌 목사
『범사가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8-20)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있어도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데도 때가 있습니다. 지금 들녘에는 농부들의 바쁜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긴 겨울을 지나고 날씨가 풀리면서 한해의 농사를 위해 씨앗을 심을 준비를 하는 계절입니다. 씨앗은 파종의 때를 놓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농사짓는 일뿐 아니라 인생사에도 때가 있는 법입니다. 때를 놓치면 후회의 인생을 살게 마련입니다. 오늘 읽은 전도서 3:1-8에 보면 매사에 때가 있다는 것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범사가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천하만사가 때가 있으니 때를 놓치지 않아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유명한 철학자였습니다. 어느 날 친하게 사귀던 여자로부터 청혼을 받았습니다. 칸트는 용기가 없어서 머뭇거리기만 했지 받아드리지 못했습니다. 답답한 여자는 청혼수용 여부를 분명히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칸트는 생각해 보겠다며 도서관에 들어가서 결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책들을 구해서 결혼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연구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얻고 여자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여자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여보게, 너무 늦었다네. 우리 딸은 이미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네.” 칸트는 결혼에 대해 너무 심사숙고 하다가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때를 놓치면 후회합니다. 인생에게 찾아오는 기회를 놓치고 후회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처음에 기회를 놓쳐서 훗날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 잘 해결할 수 있었는데도 때를 놓치므로 훗날 엄청난 문제에 봉착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값을 지불해야 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출산율 저하’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30여년전만해도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잖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적게 낳아 잘 기르면 부모 좋고 자식 좋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하루 앞선 가족계획 10년 앞선 생활안정”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녀를 많이 낳으면 마치 국가에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여기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인구비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계 최하위의 출산율 때문에 고령사회의 진입로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경제, 교육, 정치, 심지어는 도덕문제에 이르기까지 처음에 잘못 대응하여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신앙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구원의 길에서 낙오하여 영원히, 아주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합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광야에 나가서 소리소리 지르며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2:7, 10)고 외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에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부자는 날마다 자색옷을 입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 집 대문 밖에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들의 신분의 차이가 영원할 것 같았지만 인생은 짧았습니다. 둘 다 죽어 부자는 지옥에,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자색옷을 입고 즐기는 생활이 영원할 줄 알았던 부자는 죽음이 쉬 찾아온 후에야 후회했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놓쳐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음부의 고통에서 영원히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복된 사람입니까? 구원의 복음을 들었을 때 즉시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만큼 마음과 영혼 바탕이 순박하기 때문입니다.
1)
형제여 지체말라 왜 거기서 방황하나
그 은혜를 입은 자 중에 주 너희를 두시려네
오라 오라 지체말고 오라 오라 오라 지체말고 오라
4)
형제여 지체말라 이 기회를 잃지말라
주 너에게 복 주실 때니 곧 주 앞에 나아오라
오라 오라 지체말고 오라 오라 오라 지체말고 오라
(형제여 지체말라: 찬 537장)
복음서에 보면 “곧”(immediately)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는 무려 49회나 등장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졌을 때, 즉시 응답해야 한다는 긴급성을 깨닫게 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곧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든지,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고 나셨을 때 곧 사탄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고 가서 시험했다는 사건이라든지, 예수님이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를 부르셨을 때 곧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사건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복음을 빛으로 해석을 합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빛으로 찾아옵니다.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으로 복음이 임합니다. 어둠에 빛이 찾아오면 어둠이 밝은 빛으로 바뀌든가, 빛을 피하여 어둠으로 남아있는 것이지 빛과 어둠을 동시에 소유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결단과 선택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빛을 선택하지 않으면 어둠이 그대로 있습니다. 빛을 받아드리기로 결단하지 않으면, 어둠의 세계에서 불행한 인생을 마치고 맙니다. 다시는 그 빛이 찾아들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아데네에서 전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바울의 복음을 듣던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내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행 17:32-34)
첫째 부류는 바울의 복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부류는 다음에 다시 듣기로 마음먹고 미룹니다.
그리고 셋째 부류는 소수이지만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기 첫째 부류와 둘째 부류는 다시는 복음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24:25에서도 벨릭스 로마총독이 구원의 기회를 놓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
다시 듣겠다 하였으나 그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마 4:18 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수제자들이었던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Come, follow me,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하시니 그들이 “곧”(at once or immediately)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께서 부르시니 “곧” 그물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주저하지 아니하고 “곧”, “즉시” 따르는 자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기회를 놓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기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스트 빌 게이츠(Machiavellist Bill Gates)라는 책에 보면 충격적이고 치열한 비즈니스 전투기록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특징은 빌 게이츠라는 이 시대의 영웅이요, 컴퓨터 제왕으로서의 특정인물을 미화시키고 있다기보다는 그의 치열한 비즈니스 전투기록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컴퓨터 사업과 관련해서 얼마나 치열한 속도전쟁을 벌렸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 제목이 말해주듯 마키아벨리스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니 빌 게이츠의 성공담을 보는 시각이 독특합니다.
이 책에 의하면 1970년대 말 PC(Personal Computer) 운영체제를 정복한 사람은 빌 게이츠가 아니라 디지털 리서치사의 게리 킬달(Gary Kildal)이었습니다. 그는 CP/M(Control Program for Microcomputer Moniter)의 창시자였습니다. 이는 곧 PC 발전의 기본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IBM 임원들이 킬달을 찾아갔습니다. 공동프로그램을 만들어 PC를 개발하자는 제안과 함께 엄청난 스톱옵션을 제시했습니다. 킬달은 그날 낚시를 갈 계획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IT회사의 임원들을 홀대하고 다음 기회에 보자며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낚시를 즐겼습니다. 기분이 나빠진 IBM 임원들은 발길을 돌려 하버드대학생인 빌 게이츠를 찾아갔습니다. 이것이 빌 게이츠가 경쟁자인 킬달을 제치고 컴퓨터 제왕이 되는 시발점이었습니다. 그 후 킬달은 아내와 헤어지고 그의 회사는 노벨사(Novel)로 넘어가고 1994년 허름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가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1990년대 초 킬달의 회고록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그의 회고록에서는 빌 게이츠가 악마로 비유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회를 잃은 자의 한탄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구약성경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삼상25장에 보면 다윗이 쫓길 때 갈멜산 부근 마온(Maon)에 사는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습니다. 나발은 갈멜에 땅이 많았는데 양이 3,000마리요, 염소가 1,000마리나 되었습니다. 쫓기던 다윗은 병사 10명을 보내어 먹을 것을 도와 달라 했습니다. 나발의 종들과 양들을 잘 보호해 주었으니 도움을 주면 감사 하겠다 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갈렙 족속이었습니다. 다윗의 도움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 25:10-11)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나발을 치려했습니다. 군사 400을 이끌고 쳐들어가니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떡과 먹을 것을 다윗에게 주며 간청함으로 나발은 겨우 위기를 모면했으나 결국 며칠 뒤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어쩌면 유대 땅을 통일하는 다윗에게 발탁되어 크게 쓰임 받을 기회가 나발에게 왔지만 완악한 마음이 기회를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 많은 재산으로 더 행복한 삶을 살지도 못한 채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불행한 삶을 삽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즉시 응답해야 크게 쓰임 받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모두가 주님이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곧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그들은 마침내 성경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었고 만고에 빛나는 사도의 칭송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가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 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사울이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이에 바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다메섹에 들어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했더니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와 기도하여 눈도 뜨게 하고, 그가 마침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오늘의 기독교를 세우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즉시 응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큰일을 맡기십니다.
셋째로 은혜도 때를 놓치지 않아야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성령님께서 찾아오셔서 많은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은혜 받을 때를 현대인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과학의 발전으로 생활이 편리해진 것만은 틀림없으나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핸드폰만 해도 전화를 걸거나 받는 역할 이외에 수많은 기능이 있어서 우리처럼 나이 먹은 사람은 사용할 줄도 모릅니다. 너무 복잡해서 오히려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더 복잡한 것을 원합니다. 더 편리하고 유익한 정보를 많이 활용할 수 있어서입니다. 대문에 달린 잠금장치도 기능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잡한 과학문명의 소리가 자칫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소음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방해가 됩니다. 세상의 소리가 더 좋고 충격적이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음이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제는 부흥회를 열어도 잘 참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소리가 또 그 소리라 여기며(unchanging words) 세상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세상의 소리가 달콤하고 새롭다(changing words)하여 거기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교회는 봄철 부흥성회를 가졌습니다. 은혜도 받고 체험들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강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곧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분들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 시간대에 TV 드라마 ‘아내의 유혹’이 더 유익하다고 여겼을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은혜도 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늘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때, 내가 받아야 된다고 여기는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옵니다. 그 때를 놓치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때가 찼다”(The time has come)는 말씀은 내게 은혜 받을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를 놓치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을 놓치는 격이 되고 맙니다.
어떤 분은 부흥회에 참석은 했으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데도 받아드리지 않고 거부하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눈물이 솟으며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지만 애써 거부했을 것입니다. 두려워서입니다. 혹시 숨겨진 죄라도 드러나면 어찌할까? 혹시 창피한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하나? 혹시 돈벌이 그만두고 목사나 하라하면 어찌하나? 두려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려 했을 것입니다. 정신이 들면 인생 망친다 여겼을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을 창피하게 하거나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살도록 인도했습니다. 은혜 받고 인생 망친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을 보십시오. 그는 10대 때 창녀촌을 드나들며 사생아도 낳았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은혜를 받았을 때 그런 것들이 그에게 절대로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록에 보면 어거스틴이 은혜를 받았을 때 그런 치부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빠졌습니다. 훗날 그런 치부는 어거스틴이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기 위해 그의 회고록(또는 참회록)에 의해 밝혀진 것입니다.
앞으로 희망자에 한해 이번 성회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토록 하려고 합니다. 더 큰 은혜가 내릴 줄 믿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간증은 자기 신앙을 확고하게 하고 키워줍니다. 더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기회입니다. 기회를 놓치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