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화開花
바람 한 점 없는데 매화나무 풍경이 운다
아득한 경계를 넘어 가도 가도 사막길 같은 날 물고기가 눈을 뜬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꽃 피는 소리에 놀라 허공에서 몸뚱이를 가만가만 흔들고 있다 꽃그늘에 앉아 술잔마다 꽃배를 띄우던 소인묵객騷人墨客들 마음 빼앗겨 잠시 주춤하는 사이 뼈만 남은 가지마다 폭발하는,
오오, 저 푸른 화약花藥 내!
♧ 할미꽃
생전에 고개 한 번 들지 못한 삶이었으니 죽어서도 여전하구나 있을 때 잘해! 라고 말들 하지 지금 여기가 극락인 줄 모르고 떨며 사는 삶이 얼마나 추우랴 천둥으로 울던 아픈 삶이었기 시린 넋으로 서서 절망을 피워 올려 보지만 자줏빛 한숨소리 우뢰처럼 우는 산자락 무덤 위 할미꽃은 고갤 들지 못한다 이 에미도 이제 산발한 머리 하늘에 풀고 서서 훨훨 날아가리라, 할미꽃.
♧ 유채꽃
내가 쓰는 글마다 하나같이 노란 연서 같다 성산일출 바다가 풀어놓는 물감보다 시적인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온통 노랗다 어쩌자고 제주 현무암처럼 내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뚤리는가 봄이 오면.
♧ 각시붓꽃*
무지개 피듯 양지바른 산자락 잠시 다소곳 앉아 있던 처자 일필휘지로 꽃 한 송이 그려 놓고 날이 더워지자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나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도 소식이 없고 자줏빛 형상기억으로 남아 봄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네 기쁜 기별 기다리고 있네.
--- * 각시붓꽃은 여름이 되면 꽃과 잎이 없어지는 ‘하고현상(夏枯現象)’을 일으킴.
♧ 배꽃 - 홍해리(洪海里)
1 바람에 베어지는 달빛의 심장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불꽃이네 호르르 호르르 찰싹이는 은하의 물결.
2 천사들이 살풀이를 추고 있다 춤 끝나고 돌아서서 눈물질 때 폭탄처럼 떨어지는 꽃 이파리 그 자리마다 그늘이 파여……
3 고요가 겨냥하는 만남을 위하여 배꽃과 배꽃 사이 천사의 눈짓이 이어지고 꽃잎들이 지상을 하얗게 포옹하고 있다 사형집행장의 눈물일지도 몰라.
4 배와 꽃 사이를 시간이 채우고 있어 배꽃은 하나지만 둘이다 나와 내가 하나이면서 둘이듯이 시간은 존재 사이에 그렇게 스민다.
♧ 서향瑞香 --화적花賊
꽃 중에서도 특히 이쁜 놈이 향기 또한 강해서
다른 놈들은 그 앞에서 입도 뻥끗 못하듯
계집 가운데도 특히나 이쁜 것들이 있어서
사내들도 꼼짝 못하고 나라까지 기우뚱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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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