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박정희의 계시 같았다…전두환 홀린 허문도 등장
제3부 금남로의 총소리
1회 ‘5공 이데올로그’ 허문도의 등장
“1980년 7월 31일 아침 최규하 대통령이 찾으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중략)
전 사령관, 미안하지만 중책을 맡을 준비를 해주어야겠소. (최규하)
각하, 저는 지금 이 자리도 과분하게 생각하고 힘이 드는데 또 무슨 중책을 말씀하십니까? (전두환)
이리저리 생각해 봤는데 이 난세를 극복해 나갈 사람은 전 사령관뿐이오. (최규하)
(중략)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기회를 잡은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역사의 부름’ 받았다는 전두환
1980년 8월 18일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면서 전두환 장군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전두환 회고록에서 ‘역사의 부름’이란 소제목이 붙은 대목의 일부다. 전두환은 자신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것을 개인적으로 운명, 더 크게는 역사의 부름이라 생각했다.
최규하 대통령과의 대화는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두 사람만의 독대였는데, 최규하는 신군부, 5공 탄생과 관련해 증언이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주역들은 한결같이 ‘국난 극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 보니 정권을 잡게 됐다’고 말했다. 물론 신군부의 쿠데타, 전두환의 집권 과정이 처음부터 계획돼 있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10·26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돌발사건이었다. 그러나 12·12는 치밀하게 계획된 사건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신군부는 대한민국의 무력을 장악했다. 무력 장악은 곧 정권 장악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마치 박정희 소장이 5·16 혁명공약에서 ‘원대복귀’를 약속했지만 결국 정권을 잡고, 나아가 영구집권(유신)의 길로 나섰던 것처럼.
전두환의 3김 비토
전두환은 10·26 직후만 해도 김종필 공화당 총재를 차기로 생각했던 듯하다. 박정희 시대의 2인자였던 김종필을 후계로 상정하는 것은 당시 보수진영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12·12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1980년 1월 김종필 쪽에서 전두환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접촉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메신저는 전두환·이순자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최영희(유정회 소속, 전 참모총장) 의원이었다. 최영희는 2군사령관 시절 전두환의 장인 이규동을 참모로 데리고 있었던 인연으로 주례를 맡았었다.
최영희는 “김종필을 앞세우면 야당의 양김(김영삼·김대중)이 나와도 이길 수 있다”며 김종필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김종필만 아니라 3김 모두 안 됩니다”며 단호하게 잘랐다. 최영희가 “그럼 누가…”라고 되물었다. 전두환은 “고민 중”이라고만 대답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한자리에 모인 3김. 4월 7일 사회장으로 치러진 통일당 양일동 총재 장례식에 참석한 김대중(왼쪽), 김종필(가운데), 김영삼(오른쪽). 세 사람 모두 대권 꿈에 부풀었지만, 신군부는 이들을 모두 비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