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대련, 춘풍대아 春風大雅
석야 신웅순
추사의 「춘풍대아」각폭 130.5×29㎝,간송미술관소장
「춘풍대아」는 해․행서가 단아하고 편안하게 어우러진 추사의 만년 명작이다. 추사는 1809년 10월, 24살 때 생부인 동지부사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갔다.
이 때 등석여(1743-1805)의 대련 「춘풍대아」를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등석여는 추사보다 43살이나 위였다. 그 때 그는 이미 4년 전에 작고한 뒤였다.
등석여는 청대 중기의 서예가로 모든 체에 뛰어났다. 특히 전서는 진의 이사와 당의 이양빙에 필적하고, 예서도 청조의 제일인자로 불리워지고 있다. 비학파 碑學派의 비조이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동안 전서는 많은 서예가들에게 부담스러운 서체였다. 인장 글씨,부적,비석의 머리글에 쓰여 신성한 글자로 인식되어 왔다. 이 서체가 잘 쓰이지 않은 것은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다른 서체에 능한 사람들도 전혀 필법이 다른 전서를 쓰려면 거의 초보수준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등석 여는 오랫동안 고서를 연구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전서는 그 법을 알고 나면 어린 아이라도 일주 일이면 쓸 수 있다, 전서의 법식은 역입도출이다.” 그는 설명한다. 먼저,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붓을 역입해서 붓을 움직이다가, 방향을 바꾸어서 필봉을 감추어진 상태로 누른 뒤 그 탄력으로 운필을 해 마지막에 가서는 붓을 반대로 오던 방향으로 거두어 들이는 것이다. 이와 같 이 운필을 하면 시작과 끝이 둥글게 되고 모든 붓의 털이 종이에 고르게 힘이 미쳐 만호제력萬豪 齊力하니 필획에서 윤기가 나고 힘이 충만해진다고 그는 말한다. 이 노하우가 등석여를 전서의 신 품의 경지에 올려놨다. 추사는 서예가이자 전각의 달인인 그를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이상국, 추 사에 미치다, 295쪽)
등석여의 「춘풍대아」각폭 121.5×25㎝,소장처 미상
상유현이 봉은사로 완당을 찾았을 때 방 한 쪽에 있는 완당의 작품 세 점을 보았다. 유홍준은 그 중 하나가 이 작품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추사의 나이 71세이다. 그러고 보면 「춘풍대아」 는 추사가 연경에서 등석여의「춘풍대아」를 접한 후 47년만에 쓴 셈이 된다.
반세기 동안 「춘풍대아」는 추사에게서 어떤 변화를 겪었고 어떤 의미로 자리를 잡았을까.
춘풍대아능용물 春風大雅能容物
추수문장불염진 秋水文章不染塵
봄바람의 큰 부드러움은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가을물의 물무늬는 티끌 먼지가 더럽힐 수 없다.
대아는 시경 시체 詩體의 하나로 가장 전아한 바른 시, 왕도의 융성을 노래한 정악 正樂이다. 그리고 문장은 사실을 기록한 추상같은 산문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춘풍대아는 봄바람 같은 시, 추수 문장은 가을 물빛 같은 산문으로 해석해 다음과 같은 의미고 해석했다.(위의 책,296쪽)
봄바람 같은 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다 받아들인다
가을 물빛 같은 산문은 세상의 한 점 티끌도 용납하지 않는다.
박제가의 『정유각집』에 실려 있는 추사에 대한 편지가 있다. 거기에 ‘김대하에게 답함’이라는 제목「답김대아答金大雅」라는 편지가 있다.(위의 책,298쪽)
이 때 쓰인 ‘대아’는 절친한 문우나 친구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편지 겉봉에 이름 아래에 쓰 는 말일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귀하’라고 쓰듯 옛날에는 ‘대아’라고 썼다는 얘기다.그런데 박제 가는 서얼 출신이고 추사는 양반가의 종손이니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호칭이 애매했을 수도 있다. ‘대아’는 박제가가 추사에 대한 호칭으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 춘풍대아는 또 다른 외연을 지닌다. 대아는 바로 추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백의 「고풍」시 ‘대아구부작 오쇠경수진 大雅久不作 吾衰竟誰陳 : 대아를 오래 짓지 못했으니, 내 쇠약하여 누가 펴 마치리.’가 나온다. 대아를 짓지 못했다는 말은 제대로 된 시 하나 짓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대아‘는 추사 자신 혹은 추사의 시나 글씨일 수 있다.
‘대아’의 대구인 ‘문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추사의 집안 원찰인 화암사에는 완당 관지가 새겨진 ‘추수루秋水樓’라는 현판이 있다. 왜 여기에 이런 현판이 있고 언제부터 있었을까. 추사는 옹방강으로부터 보담재라는 당호를 얻었고, 완원으로부터 완당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추사는 중년 들어서부터 추사라는 호를 쓰지 않았고 완당이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다. 연경을 다녀온 이후의 일이다.
얼마 후 추사는 등석여의 ‘춘풍대아능용물 春風大雅能容物 추수문장불염진 龝水文章不染塵’의 추수‘龝水’에 의미를 부여해 ‘추수루秋水樓’라는 현판을 썼을 것이다. 또한 추사가 새겼을 것으로 보이는 호 완당은 대련을 본 이후에 쓴 현판임을 증명한 관지가 될 수 있다. 등석여는 추사가 쓴 가을 ‘秋’가 아닌 ‘추’자의 고자와 본자의 조합, 거북 ‘귀’같은 정체모를 글자를 썼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이런 것들이 ‘秋水文章’과 연결해볼 수 있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의 문장은 가을 물같이 티끌하나 없이 맑고 깨끗해야한다는 그런 이미지가 추사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으면서 썼을 것이다. ‘대아’가 시를 지칭한다면 당연히 ‘문장’은 산문이어야 대구가 맞는다.
화암사의 추수루 현판
이상국은 ‘춘풍대아능용물’은 ‘창신’이고 ‘추수문장불염진’은 ‘법고’의 정신이라고 해석했다.
‘춘풍대아능용물’은 추사가 평생을 두고 고민했던 ‘창신 創新’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멋진 메타포 이다. 새로움을 개척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바로 저 봄바람 같은 것이고 시와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함, 그리고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창의성, 때로 가장 낮은 본성과 사소 한 사물의 울림에 귀기울여 가장 높은 하늘에 닿는 그 비약의 일대 경지가 바로 창신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추수문장불염진’은 ‘법고 法古’의 정신이다. 금속에서 옛 법식을 궁구하고 책에 서 진실을 가려내는 엄격함은 금강안이고 혹리수여야 한다. ……미심쩍은 구석이 하나 없도록 환 하게 밝히는 철저한 고증의 정신이다. 가을에는 법고를 생각하고 봄에는 다시 창신을 생각했다.자 연이 이미 법고창신에 관한 위대한 경이다. 봄에는 모든 것을 수용하여 새롭게 이루어내는 기적을 보여주고 가을에는 한 점 의문을 남기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엄혹한 고경考經에 관해 설법한다. 그렇다면 저 두 행은 바로, 법고창신을 봄마다 가을마다 환기하고 되새기는 탁월한 암호였던 셈이 다.
등석여는 옛날에 사라져버린 전서의 법식을 찾아내 자신의 것으로 화려하게 개화시켰고 추사는 전예해행을 두루 섭렵해 중국과 조선에서 그 이전에 없었던 독창적 경지로 자신을 밀어올렸다.그 런 법고창신의 의발衣鉢이「춘풍대아」를 통해 이미 전수되고 있었던 셈이다. (위의 책, 300-301 쪽)
이성현은 정치와의 관련 속에서 해석해 이와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춘풍대아능용물 春風大雅能容物
추수문룡불염진 秋水文龍不染塵
변화의 봄바람이 불어와 대아의 밝은 정치가 펼쳐지면 온 세상 사람들이 제 모습으로 웃으련만
가을 연못 속 문룡이 웅크리고만 있으니 백성들을 감화시키지(이끌지) 못하네
대아는 시경의 편명 篇名으로 가장 전아한 글이며 왕도의 융성을 노래한 정악이다.
그는 봄 ‘春’을 ‘시작’으로 읽고 ‘바람 風’을 ‘변화’로 읽고 ‘용’을 ‘활짝 웃는 사내의 얼굴 모습’인 그림 문자로 첫 문장을 만들어냈다.
둘째 문장에서는 등석여의 정체모를 합성 글자 ‘추’에서 맹꽁이 ‘맹’ 대신 ‘풀 艸’와 ‘눈썹眉’를 끌어내어 ‘풀초’는 ‘백성’의 의미로 ‘눈썹 미’는 ‘가장자리’의 뜻으로 읽어 이어지는 물 수자와 연결해 또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문채 장’자에서 ‘용의 약자 룡’자를 찾아내 ‘추수문장’을 ‘추수문룡’으로 바꿔 읽었고 ‘추수문룡’은 연못에 머물고 있는 용‘의 의미로 재해석했다. 추사가 가르쳤던 왕세자를 회상해 추사의 만년 코드를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다.
추사는 이십세 중반에 접했던 등석여의 「춘풍대아」를 재해석해 그의 나이 71세 철종 7년 1856년에 다시 썼다. 이를 쓰고 그해 추사는 한 많은 세월을 마감했으니 이 대련은 추사의 유언과도 같은 작품일 수 있다. 그가 반세기 동안 간직해온 정치에의 꿈이 오롯이 담겨있는 회한에 찬 작품일지도 모른다.
추사는 미래의 국왕이 될 사춘기에 접어든 왕세자의 교육을 맡았다. 5년 후 왕세자는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했다. 외척세력을 누르고, 조정의 개혁을 주도하기 위해 추사에게 힘을 실어주었으나 세자는 그만 스물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추사의 파란만장한 정치 역경은 사실상 여기서부터 시작된 셈이 되었다.
「춘풍대아」는 그러한 추사 만년의 자화상이자 한 인생의 결산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월간 서예 2016. 8월호,131,3쪽
첫댓글 귀한글 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선생님...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