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端의 追憶 #170, 향림정 & 성지 방문기
향림정은 흑석동의 중앙대 정문 맞은편 비탈진 길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 이름처럼 마당에는 잡목이 우거져 있었다. 아래 사진은 십 수년전 한번 찾아가 봤을때의 모습이다. 왼쪽 상단에 노광공 교주가 기거했던 방이 보인다.
서울의 흑석동 명수대 가는 길에 소재했던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 향림정은 사진처럼 잡목이 우거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동방교에서 대기처로 구입하기 이전에는 무슨 병원의 입원실을 하던 건물이었는지 여러개의 방들을 1호실, 2호실 이런식으로 불렀던 기억이 있다.
건물의 뒤편으로는 당시의 동방교 대기자들이 파 놓은 자그마한 토굴이 하나 있다. 토굴을 파낸 흙더미는 향림정 아래 중앙대 쪽으로 뻗어내린 골목길에 리어카로 실어다가 쉬엄 쉬엄 깔았다고 한다.
골목길이 포장이 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토굴을 팠던 신도 대기자중 한명은 아직 부산 해운대에 생존하고 계신데 가끔 만날때마다 그 시절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곤 한다. 그야말로 기록하기도 어려운 숨은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곳 향림정 대기처에는 서울의 각처에 분산되어 있는 대기자들에게 이발을 해 주던 노인도 한분 계셨는데 특이하게도 이분은 대기자들에게도 돈을 받고 이발을 해 주었다.
이번 상경한 김에 다시 오랜만에 향림정을 찾았다. 10여년 사이에 옛 자취는 사라져 버렸고 빌라 건물 한동이 덩그러니 들어서 있다. 세칭 동방교의 남겨진 재산중 하나가 외부에 팔려 사라진 모양이다. 세칭 동방교 시절 추억이 어린 장소인데 빌라 뒤편의 건물에 아직 남아있는 몇그루의 울창한 나무가 겨우 옛 시절의 풍광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옛 추억을 더듬어 경기도 소사에 있던 성지를 찾았다. 입구에서 대문 너머로 바라보는 풍광에 옛 자취는 1도 찾을 수 없었다.
1대 교주 노광공이 당뇨합병증으로 54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후 그의 시신을 안양의 어느 공동묘지에 가매장 했다가 이곳 소사면 소래리로 이장했는데 이곳이 행정구역 개편 이후 경기도 부천시 소래면 대야리가 되고 지금 현재의 주소로는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도로명 주소로는 경기도 시흥시 호현로가 된다.
노광공 교주의 묘지가 있던 이곳을 세칭 동방교에서는 聖地라고 칭했다. 지금은 노광공의 묘지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현재는 한빛수도원이 소재하고 있다. 당시 경기도 소사면의 '소래'라는 지명의 뜻이 원래 성민(동방교 신도를 일컫는 통칭)들이 ‘솟아나서 오라’는 뜻이라고 그때는 한창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런 단어의 파자풀이가 그때는 동방교 내에서 횡횡하고 있던 시절이다.
다음은 ‘질곡의 삶, 애증의 세월’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에 나오는 실화 한 토막이다.
[ 이곳에서 나의 경험담이다. 내가 심취했던 이 이단종교의 자칭 하나님인 교주가 54세에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1967년에 사망했을 때 무슨 하늘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 그의 옥체(玉體)를 어느 공동묘지에 임시 가매장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경기도 소사면 소래리(박태선의 신앙촌에서 서쪽 방면)에 있는 산을 단장 하더니, 가매장한 공동묘지에서 시신을 파내어 이곳으로 이장(移葬)을 하였다. 그리고 왕릉처럼 무덤을 성역화 해 놓고 그 곳을 성지(聖地)라고 불렀다. 전기불도 없는 캄캄한 밤 산속에서 한 두 시간에 한 번씩 나는 랜턴을 들고 순찰을 하며 하나님(?)의 무덤을 지켰다. ]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 P261-
소사연수원, 지금의 한빛수도원이라고 하는 곳은 아시겠지만 노광공의 왕릉같은 무덤과 제사지내는 제각이 있던 '성지'라고 불리던 장소입니다. 1960년대 당시, 서울에서 인천가는 대로변, '소사'이던가에서 버스를 내려 먼지 풀풀 날리는 자갈 깔린 신작로 길을 30여분 이상이나 걸어서 '소래'라는 지역의 야산주위에 돌복숭나무가 심겨져있고 주위에 논밭이 있어 대기자들이 농사도 짓고 과수들도 재배하던 곳,
밤이면 대기자들이 한 두시간에 한번씩 렌턴을 들고 무덤주위를 둘러보며 이상유무를 체크하던 곳, 바로 여호와 이래 노광공의 무덤, 하나님(?)이 죽어 이땅에 묻혀 남긴 무덤, 바로 '성지'라고 불렀지요. 바로 그 장소입니다. 거기에서 진리교육을 받으셨군요... 하 하... 온갖 잡동사니 유불선을 망라한 미신잡설이죠... 지금은 그 무덤도 충북 괴산으로 이장하여 비밀에 붙여놓고 있습니다.
--'이단의 추억' 기록중에서
‘저 날카로운 바람’님과의 대화 중--
출입은 제한이다. 혹시나가 역시나다. 안쪽에서 우리를 발견한 대기자, 요새는 수도자라 부르는듯 한 누군가의 급한 연락으로 우연찮게 이곳에서 구총회 전직 간부 J를 만났다. 그의 말로는 이 근처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약간의 언쟁이 있었지만 서로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사이라...
각설하고,
단도직입적으로 J에게 물었다.
노광공이 하나님이 맞느냐고,
대답은 간단했다.
'그것은 하늘에 가서 봅시다'라고 한다. 현존 세상에서는 확신이 없는 회피적 답변이니 지금은 좀 확실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안O회'라는 곳이 있다. 죽은 '안O홍이 하나님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공개된 만천하 인터넷에 당당하게 올려놓고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많은 찬반의 토론이 형성되고 있다.
세칭 동방교도 어쩌면 노광공이란 인물에 대하여 이처럼 좀 당당해졌으면 좋겠다는 일말의 연민조차 느낀다. 그리고 그런 토론의 장이 존재한다면 오히려 더 떳떳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무엇이 두려울까?
전직 간부 J는 말하기를 빨갱이는 남이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않는다고도 한다.
내가 답했다. 그것은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이단의 추억'을 읽으면 피가 거꾸로 쏟는다고도 한다. 읽기는 읽는것 같다. 기록을 남기는 보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열받기 이전에 기록에 잘못된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해 달라는 이야기를 첨언했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정중하게 사과도 하고 싶다.
시간에 쫓겨 궁색하게 나눈 몇마디 대화였지만 충분한 토론을 원하거나, 반박할 사항, 혹은 기록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답글을 기다리려 한다.
역시 아직 狂信의 한 세대가 더 지나야 자칭 좁은길=세칭 동방교는 변화되던지 사라지던지 양단간에 결단이 나지 않을까 생각되는 京釜간에 바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