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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生이라는 배에서 흔들리는 건달, 그게 바로 詩人인 게야”
세계일보 입력 2007-10-20 11:37:00, 수정 2007-10-20 11:37:00
“나는 시를 쓸 때 어떤 착상이 떠오르면 메모를 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계속 굴려. 그러다가 거의 암송할 정도가 되면 쓰는데, 쓰는 시간은 얼마 안걸리지. 술을 마시면 상상력은 확장되지만 술 마신 상태에서 일필휘지는 안돼. 새벽에, 가장 정신이 밝을 때 써. 시를 쓰기로 작정하면 이삼일 전부터 설레서 잠도 제대로 안와”
시인은 7박10일 동안의 긴 여행을 막 마친 뒤였다. 그는 중남미 콜롬비아 중부도시 마니살레스라는 곳을 다녀왔다. 시차를 계산하지 않고 말한다면 비행기에서만 3일 밤을 보낼 정도의 먼 여행이었다. 국제연극제로 유명한 그 도시에서 매년 전 세계 시인 중에서 한 명씩을 초청하는데 올해는 한국의 신경림(72) 시인이 그 대상이었다. 콜롬비아에 가기 직전에는 2차 남북 정상회담 문화예술계 수행원으로 평양에 다녀왔다. 칠순이 넘었어도 늘 동안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에 꽤 짙은 피로가 묻어 있다. 젊은이라도 그 바쁜 여정을 소화하려면 힘들 터인데,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하지만 그의 피로한 얼굴에는 흔쾌함 같은 것도 함께 섞여 있다. 그를 인터뷰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정상회담 수행원으로 다녀온 북쪽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오랜만에 그의 새 시집이 나온다는 풍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만 명분일 따름이고, 한국의 ‘시성’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그의 이즈음 생각과 체취를 명분에 기대어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후 4시에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는 한 시간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몇년 전 남북작가대회 때 가보고 이번이 두 번째 방북이었는데, 그때보다 좀 나아진 것 같아. 거리에 윤기가 흘러. 우선 밤거리가 조금 더 밝고 나무에 조그만 등도 달고, 비가 오니까 우산 쓰는 사람도 많아졌어. 큰 행사 때문에 전시용으로 꾸민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좀 나아졌다는 느낌이 들어. 김정일이라는 사람 인상이 상당히 따뜻해. 악수할 때도 손에 적당한 힘이 들어가고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내가 당신을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줘. 우리나라 정치인들 악수할 때 상당히 기분 나쁜데, 그동안 몇몇 대통령을 거치면서 청와대에 식사 초청을 받아 몇 번 갔었지만 악수하면서 딴사람을 봐. 노무현이만 달라. 평양 갔다 왔대서 하는 말이 아니야.”
참고로 말하자면 대화 지문에서 경어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모르나, 시인이 그동안 친근하게 대해온 한 세대 어린 기자와의 대화를 윤색하고 싶지 않고 현장감을 살리고 싶은 이유 때문이니 양해주셨으면 좋겠다.
“아리랑 공연을 본 게 인상에 남어. 애들을 고생시키는 게 비인간적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만 명이 넘는 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습이 충격적이었어. 만수대 창작실에서 그림을 구경했는데, 거기에 그런 글이 붙어 있더라고. ‘모든 그림은 위대한 수령을 우러러보는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 그게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것이 그들의 주체예술이야. 생명력 같은 것은 있어 보이지 않아. 음악도 마찬가지고. 테크닉은 완벽한 거 같은데 훈훈하게 전달돼 오는 인간적인 거는 없어. 일단 북의 분위기를 보면 힘든 생존 조건 속에서 살려고 하는데 무조건 비판적으로 얘기하는 건 힘들어. 역지사지하면서 그들의 생존 방식이 옳지 않다는 걸 일깨워주는 게 옳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맞아.”
그래서 북측 사람들이 굳이 ‘북의 싼 임금’을 활용한다거나 ‘개혁·개방’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마당에 ‘북의 우수한 노동력’이라거나 ‘함께 번영하자’는 말로 바꾸는 데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는 방북 전에 청와대 정상회담 실무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차 정상회담 때 고은 시인이 시 낭독을 했던 것처럼 현장에서 시 한 수 낭송해줄 수 없느냐고. 그는 거부했고, 그의 의사는 수용됐다.
“권력의 정상에 있는 두 사람을 위한 시는 의미가 없어. 내가 아무리 민족의 통일과 아픔을 담은 시를 낭송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인 형식은 권력을 위한 것으로 귀결되고 말아. 그건 싫어. 아마 실무진에서 자발적으로 요구한 것일 게야.”
그가 북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은 ‘가자미식혜’와 ‘뱃속김치’라고 했다. 식사 자리에서 그것들을 계속 먹었더니 금방 비운 접시를 다시 채워서 가져다 놓았는데, 배가 불러 정작 밥은 못 먹었다. 가자미식혜는 동해에 가면 충분히 접할 수 있지만, ‘뱃속김치’란 과일인 배의 속을 파고 그 안에 김치를 넣는 방식이라서 말만 들어도 상큼하고 시원해 군침이 돈다.
북쪽 얘기는 이만하면 됐다. 사실 시인에게 정치적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가 5년 만에 펴내는 9번째 시집 이야기로 옮겼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11월에 나온다고 했는데, 정작 시인은 아직까지 원고를 넘기지 않았다. 그는 시집 제목을 ‘낙타’로 하겠다고 했다. 시집을 출간할 ‘창비’ 편집자에게 그 시 ‘낙타’를 이메일로 받았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채/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낙타’ 전문)
2002년에 나온 시집 ‘뿔’의 정조도 죽음을 마주보고 누항(陋巷)을 헤매는 슬픈 정조가 깊었다. 그때 그 시집을 보고 문학리뷰에 이렇게 썼다.
-비오는 누항의 거리를 터벅터벅 걷는 황혼의 나그네. 먼저 간 아내가 오늘도 뜨개질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 이승의 떠돌이는 텅 비워 가벼워진 몸으로 바람이 된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가로수에 매달려 광고판에 달라붙어 쓸쓸한 소리로 축축한 소리로 울면서 얼어붙은 거리를 녹이고 팍팍하게 메마른 말들을 적시”는 바람이 된다.
이번 시집도 그러한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걸까.
“사실 시인은 건달이야. 합리적이지 않고 좀 엉뚱하지. 생활에서도 성실하지 않고 좀 삐딱해. 하지만 성실하게 사는 사람도 한쪽에선 그런 욕망이 있어. 그걸 만족시켜주는 게 시 같아. 나도 건달이지. 시 쓰는 것만 열심히 했지, 그 외에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어. 직장생활을 하다가도 툭 하면 집을 나가 돌아다니다가 들어오고, 그걸 안 하면 속에서 불이 나고…. 결혼하고 나서도 그랬어.”
신경림의 시에서는 늘 슬픈 정조의 노래가 들린다. 그 노래는 삭막한 생활 속 누군가의 가슴을 파고들어 헛헛하고 쓸쓸한 삶을 위무해주는 탁월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의 시에서 그러한 슬픔을 지탱하는 한 축은 너무 빨리 사별해버린 그의 아내가 만들었다.
충북 노은면에서 상경해 김관식 시인의 집에 세 들어 살다가 겨우 집 한칸 장만해 이사했는데 그의 장남이 만 6살이던 때 아내는 갔다. 그러니 결혼생활 길어보았자 6∼7년이다. 그 사이 시인은 얼마나 나고 드는 ‘건달’의 방황을 반복했던가. 그 아픔이 그의 초기 시 곳곳에 배어 있다. 칠순에 가까운 나이에 쓴 지난번 시집에도 여전히 그 흔적은 남아 있다.
“아내가 고향에 가 묻히던 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렸다 그녀와 헤어지던 그 가을/ 무력한 내 손에 꽂히던 연민과 경멸의 눈빛/ 머리칼이 젖고 목덜미가 젖고 나뭇잎이 젖고/ 우리들 오랜 떨림과 기쁨이 젖고…// 그날도 비가 오리라 내가 세상을 뜨는 날/ 벗어놓고 갈 헌 옷과 신발을/ 허위와 나태의 누더기를/ 차고 모진 빗줄기로 매질하면서”(‘비’에서)
그는 아동문학가 이오덕의 주선으로 1980년대 초반에 새 부인을 맞았다. 하지만 그 여인은 종교에 헌신한 상태였고, 그는 시와 결혼하다시피 한 몸이었다. 20여 년 동안 법률혼은 유지되었지만 그는 새 아내를 “2∼3년에 한 번 만났다”고 말했다. 2002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는 “나를 안 만났으면 얼마든지 더 잘 살 수 있었을 텐데…”라고 되뇌었다. 그러니 거칠게 말하자면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곳은 없고, 사랑은 하지만 그 사랑이 머물 시간을 짧아서 시인은 시를 썼고 그 시에 슬픔의 알토란이 스며든 것 아닐지.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단순한 분석일 터인데, 시인은 단지 생활의 고난만으로 창조되는 건 결코 아니다.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시를 쓸 때 어떤 착상이 떠오르면 메모를 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계속 굴려. 그러다가 거의 암송할 정도가 되면 쓰는데, 쓰는 시간은 얼마 안 걸리지. 술을 마시면 상상력은 확장되지만 술 마신 상태에서 일필휘지는 안 돼. 새벽에, 가장 정신이 맑을 때 써. 시를 쓰기로 작정하면 이삼일 전부터 설레서 잠도 제대로 안 와.”
그는 시인으로 데뷔한 지 올해로 52년째다. 시 쓰는 일, 징글징글하지 않을까. 충주고등학교 재학 시절 국어선생님께 시를 제출했는데, 선생님이 극찬을 하면서 극찬의 근거로 그가 신뢰하는 아들의 호평을 예로 들었다. 그 선생님은 유촌, 그의 아들은 한국의 인문적 근엄함의 사표인 문학평론가 유종호였다. ‘문학예술’지로 등단한 이후 오랫동안 금전판 등지를 떠돌며 이 땅의 밑바닥을 구석으로 방황하던 신경림이 득의의 시편 ‘농무’로 빛을 보았던 시절, 그 빛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그의 선배이자 동료인 유촌 선생의 아들 유종호였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질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1973년 ‘농무’ 전문)
“시인이라는 거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것, 만지지 못하는 것을 쓰는 사람이지. 시가 대중가요와 다른 지점은 남이 다 아는 것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야. 시의 기능은 깨달음과 보듬는 것, 그 두 가지가 중요해. 시인 홀로 깨닫고 일러주는 일방적인 것도 아니고, 읽는 이를 위무하는 그런 따뜻한 기능을 방기하는 것만도 아닌, 그 양자가 결합된 지점에 가장 훌륭한 시가 존재하는 거야.”
그에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는 가장 큰 회한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살아온 모든 게 다 회한”이라고 했다. 그는 분명 건달이다. 생이라는 배에서 흔들리는 건달, 흔들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멀미를 하는 다수의 생활인들에게 배와 함께 흔들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그런 건달이다. 그는 일필휘지로 술동이를 껴안고 시를 휘둘렀던 이태백보다 고향을 떠나와 전쟁터에서 고뇌 속에 슬픔을 각인했던 두보가 더 좋다고 했다.
글 조용호, 사진 이제원 기자 jhoy@segye.com
■신경림 연보
▲1935년 4월6일
충북 충주군(현재는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번지에서 태어났다. 노은초등학교 재학 시절 충북도교육위원회 주최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등 산지기 아들이 아닌 시 잘 쓰는 아이로 통했다고 한다. 평론가 유종호의 모교이기도 한 충주고를 거쳐 1955년 동국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56년
동국대 입학 이듬해에 ‘문학예술’지에 ‘갈대’ ‘낮달’ ‘석상’ 등이 추천돼 등단했다. 건강이 나빠 낙향해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농사, 공사판 노동, 광산일 등 온갖 일을 경험하며 약 10년간 절필했다. 그러다 충주읍내에서 만난 김관식 시인의 조언에 따라 1965년 상경해 서울 홍은동 산1번지에 살며 다시 시를 창작했다. 현대문학사, 희문출판사, 동화출판사 등에서 편집일을 보며 생계를 꾸렸다.
▲1970년
10여년간의 침묵을 깨고 ‘창작과 비평’지에 ‘파장’을 발표했다. 홍은동 동네 어귀에서 만난 술취한 두 젊은이를 보고 지은 시인데 문단에서는 “민중시의 물꼬를 텄다” “문학과 현실이 처음으로 하나의 육체를 만났다”는 등의 찬사가 이어졌다. 이후 핍박받는 농민의 애환을 노래한 ‘원격지’(1970) ‘산읍기행’(1972), ‘시제’(1972) 등을 발표했다.
▲1973년
첫 시집 ‘농무’를 발표했다. 민요 정신을 계승한 소박한 언어로 붕괴돼가는 농촌의 삶과 산업화 이면의 궁핍상을 절절하게 노래한 이 시로 이듬해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75년에는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했다.
▲1984년
광주민주화항쟁 직후 후배 유해정 등과 함께 민요연구회를 만들었다. 우리 사회를 오염시킨 미국과 일본 문화에 대항해 건강한 우리 문화를 만들고, 80년대 독재정권의 탄압에 봉쇄된 사람들의 공간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민요기행을 통해 채집한 가락과 정서를 녹여 만든 시집이 ‘민요기행’(1985)과 ‘길’(1990)이다. 장시집 ‘남한강’을 1987년 발표했고 90년 제2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19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98년 ‘벽초 홍명희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으며 2001년 제6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4·19문화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제6회 만해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부터 예술원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