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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사(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고별기도를 여러번 읽고, 지금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그 음성을 들으며 묵상해 봅시다.
17장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향해 말씀 하시기에 고별기도라고 한다.
1. 고별기도의 제목
“그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었다”
<릴 암스토롱 - 최초 달 도착자의 말>
한 인간이 똑같은 말을 한다하더라도 어떤 위치에서 시점. 운명 앞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의 무게가 달라진다.
하물며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신 이 고별기도는
너무나 중요하다. 이 고별기도라는 제목 말고, 주의 기도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지금의 주님의 기도는 오히려 신자들이 드리는 기도이다.
2. 고별기도의 성격
고별기도의 모습은 성격상 중재기도이다 - 다른 이를 위해서 기도 하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재 기도 드리심은 우리 신앙인들이 죽음 앞에서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도 알려 주신다.
죽을 때 어떤 장롱에 통장이 있고, 집문서가 있고... 아니고, 그것은 미리하고
죽음 직전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생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충성을 다해 살아가도록 그들을 위해기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3. 고별기도의 구조
-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5절).
-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절)
- 제자들을 통해서 신자가 될 모든 이들 위한 기도(20-26절)
4. 주요 구절에 대한 이해
"아버지, 시간이 왔습니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입니다.”(17,1)
예수님은 아람어 로 압빠라고 하셨는데, 성서가 쓰여 질 무렵의 신자들이
아람어를 모르니까 이 단어를 다 아버지로 바꾸었다.
● ‘우리 아버지’와 ‘아버지’ - 압빠 - 고별기도가 시작.
이 압빠 칭호 통해서도 이미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이를 짐작 할 수 있다.
깊이 일치된 사이, 깊은 사랑이 오가는 사이.
예수님은 우리 압빠 라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독생자이시기에 우리라는 단어를
쓰시지 않는다.
● 영광의 의미 - 십자가의 길을 잘 걸을 수 있게 해 달라 시는 기도.
영광 - 요한복음에서 항상 십자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회피 했다면, 말은 하고 실제로는 아무런 영광도
못 드리고 하느님을 욕되게 한다.
묵상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
정말 정직하게 모르고 있는가? 결혼한 사람이라면 나의 배우자를 위해서
내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인가? 형제와 자식들을 위해서
응당 해야 될 일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진리를 쫓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일터에서 사회에서 정말 해야 될 일을 모른 단 말인가?
솔직히 얘기하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17,2)
1절에서 예수님이 당신자신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하셨는데, 그 영광이 바로
신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 - 그것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다.
“저는 그들을 위해서 청합니다. 세상을 위해서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들을 위해서 청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17,9)
*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아버지 사람은
아버지가 보호해 주실 텐데 새삼스럽게 또 보호해 달라고 청하고 계신다.
기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확정된 아버지의 뜻이 실현되도록 청하는 것이다.
예로 주님의 기도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 하느님은 당연히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이 세상을 움직이고 계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청함은,
확정된 아버지의 뜻이 드러나도록 청한다는 것이다.
“제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저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17,10)
“제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요 - 이냐시오 성인 기도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 이 기도는 예수님만 하실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 “제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요”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는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청하지 않고 그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청합니다. 제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17,15-16)
세상에 속해있지 않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의 고향을 떠나도록 요구 - 우상 숭배를 떠나
참된 하느님을 섬기도록 요구, 즉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서 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를 통해 하느님이 말씀
하실 때, “너희는 이제 이집트의 풍속을 따라 살지도 말 것이며, 가나안 땅의 풍속을
따라 살지도 말 것이다” 즉 세상에 속한 존재로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성서 전체에 나오는 말씀이다.
바울로 사도도 똑같은 말을 한다.
< 로마 12,2 >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 그러나 세상 안에 있다.
● 세상 안에서 세상을 거슬러 사는 제자들 - 그리스도인의 신원.
Identity(정체성), Involvement(함께 함), Influence(영향력)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 Identity(정체성) - 아이덴디티
정체성 - 우리의 신원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세상 안에서 세상을 거슬러 살 수 있다.
* Involvement(함께 함) - 인발브먼트
정체성을 가지고서 세상과 함께하나,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 Influence(영향력) -인플런스
세상에 변화가 이루어지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바로 빛과 소금으로 영향력을 발휘 하는 것이다.
* 익사한 오리
오리들은 무조건 물에 뜨지 않고, 오리의 날게 밑에 특별한 기름이
나오는데 (특수 방수 기름), 이것을 끊임없이 온몸에 발라 주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 게으른 오리가 그 작업을 안 하고 물속에 뛰어 들었다가 죽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즉 오리가 오리라는 자각을 갖고 그 기름을 발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문제가 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각의 기름을 끊임없이 발라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빛 - 어두운 세상 안에 밝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소금 - 부패해 가는 세상 안에 부패하지 않도록 버무려 주면서 역할을 하는 것.
세상 - 바로 우리 주변을 의미한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파견하신 것처럼 저 또한 그들을 세상에 파견했습니다.
그들도 진리로 거룩해지도록 저는 그들을 위해 제 자신을 거룩하게 하옵니다.”(17,17-19)
* 그들도 진리로 거룩해지도록 저는 그들을 위해 제 자신을 거룩하게 하옵니다
예수님은 이미 거룩하신 분인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 거룩함/성화(聖化)의 의미 = 성별(聖別)되어지는 것임
우리는 거룩하다의 개념을 - 죄 없는 분, 티 없는 분이라는 생각은 잘못 된 것이고. 원래 의미는 성별되어 지는 것이다 - 거룩한 구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거룩함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구별 한다 - 십자가에 바친다는 의미.
거룩함 - 모든 형태의 악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상태 - 윤리적으로 깨끗한 상태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을 위해서 구별 되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함 - 하느님을 위해서 따로 구별된 것 - 성별이다.
성전. 성물. 성직자 - 하느님을 위해 따로 떼어서 봉헌했다는 의미.
비록 우리가 세상 안에 살 것이지만, 세상에서 따로 떼어내서 하느님께 속한
존재로서 살게 한다는 의미다.
● 성화(聖化)의 목적은 파견에 있다
성별하는 이유? - 파견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에서 거슬러 살면서 복음을 선포케 함이다.
● 신원상의 거룩함과 실제상의 거룩함을 다르다
실제로 거룩한 존재가 되려면 진리로 거룩해 질 수 있다.
여기서의 진리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가변적인 진리는 아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의 절충적인 진리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무제한 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이다.
무신론자는 -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하는 데,
그 말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하면 자기들의 그 말은 절대적이라 한다.
● 어떻게 해야 우리는 실제상의 거룩함을 살 수 있을까?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이다. 여기에 순종할 때 거룩한 존재가 된다.
● 실제적 거룩함의 추구에 대해서( 영성신학)
- 갈망하는 마음 - 마음. 목숨. 뜻을 다해 하느님을 갈구해야한다.
- 순종하는 태도 - 아버지 뜻에 대한 순종 - 말씀 안에서 드러난다.
우리자신의 이해와 바람과 어긋날 때도 순종하는 것.
거룩함 - 어떤 신비스런 체험이나, 엄청난 열심이나, 금욕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영성신학자들)
우리가 주님 섬김에 실패 했을 때 - 내가 이런 죄 때문에 실패했다.
패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는 불순종 한 것이다.
거룩함을 향한 진보 앞에 패했다, 실패했다는 표현은 쓰지 말자, 오히려
내가 불순종 했다고 말해야 한다.
파스칼 - 빵세 명상 집 저자
빠스칼 : 수학자, 철학자 (카이로스의 Θ만난 시간 적은 것)
외투 안쪽에 꿰매어진 곳 발견 - 그 속에 쪽지가 있었다.
<1654 .11. 23 월. 밤 10:30 - 12:30 까지 나는 Θ만났다. Ab.Θ. 이사악Θ. 야곱의Θ은
철학자나 유식한 사람들의 Θ이 아니다. 확실함. 확실함. 감격스러움. 감격스러움. 환희. 평화. 그분은 예수그리스도의Θ. 그리고 나의 Θ이시다.>
파스칼은 이 은혜를 망각하지 않으려고 항상 그렇게 넣고 다녔는데, 3년 지나고 나서
자신의 모든 수학적. 철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언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쓴 글이 빵세이다. 이 신앙 명상서는 10년 계획하고 방대한 작업에 들어갔는데
불과 2년 도 안 되어 중병에 걸려 쓰러졌다. 그리고 죽었다.
빵세는 미완성 작품이다. 그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집필하다가 중병으로 쓰러졌을 때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치유해 달라고 기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의 뜻이 만약 중병에 걸림에 있으면 그것에 순종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다..
체력적으로 다운되어서 글 쓰는 일을 그만두고, 소박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얼마
안되어 숨을 거두었다.
거룩함의 정도 - 순종하는 것이다.
- 인내하는 자세
신원상의 거룩함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 세례 받으면서 이미 성도로,
서품 받으면서 성직자가 된다.
그러나 실제적 거룩함은 오늘 내일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년, 수십 년
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묵묵히 ... 단순한 단조로운 삶을 묵묵히 걸어가자!
어떤 사람은 열심 할 때는 극단적인 열심을 보이다가, 그렇지 않을 때는 완전히
풀어지는 모습은 거룩함의 축에 있어 상당히 안 좋다.
기타 줄을 너무 팽팽히 조여도 소리가 안 나고, 너무 느슨하게 조여도 소리가
안 나듯이 거룩함의 추구에서는 항상 온유함과 함께 묵묵히 걸어감이 필요하다.
* 프린치스꼬 드쌀레 : 평신도 영성을 위해 좋은 글 쓴 이분은
늑대와 곰은 분명히 벼룩보다 위험하다. 하지만 늑대와 곰보다는 벼룩이 우리를
더 괴롭히고 우리의 인내력을 더 많이 시험한다.
살인을 피하기는 쉽지만, 작은 욕정들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그 욕정들을 제어 하기는
매우 어렵다. 간음을 피하기는 쉽지만, 곁눈질 하는 것을 억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큰 유혹들에 용기 있게 맞서, 싸울 준비는 물론이지만, 작고 별것 아니게 보이는 것들에도 항상 열심히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누구든지 한 주일에 하루만 경건하게 살고, 나머지 시간은 몽땅 자기 욕망에 따라
살 수 있다고 얘기하면 살 수 있다. 하루만큼은 경건하게...
이런 식으로는 거룩함이 추구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성화를 추구하는 삶은 매일같이 꾸준하게 묵묵히 그냥 나아갈 뿐이다.
매 순간 순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이 순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갈망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시작과 끝은 갈망과 인내인 우리 태도이고, 실제 행동은 순종이다.
“이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저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17,20 필자 직역)
이 사람들 - 제자. 저 사람들 - 우리들이다
● 세 가지 방향에서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심
- 하느님 아버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
- 신자들 사이에 하나 됨
- 사도들과 하나 됨
● 오늘날 교회의 현실
이 사람들과 저 사람들의 일치는 ?
사도적 전승 안에서 철저히 일치하기를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다.
당신이 직접 할 수 없으니까, 사도들을 통해서 전승시킨 그 전승 안에서의
그 신앙에 우리가 충성하기를 바라시는 일치이다.
가톨릭이 특별히 가르치는 것이 사도적 전승의 일치이다.
아무리 어떤 신학자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교회 가르침을 떠나서 자기 입장을
표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파문을 받게 된다.
교회 가르침을 앞지른다 해도 비판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교도권의 가르침을
거부 할 수는 없다. 한스킹 - 바로 이래서 떠난 사람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절한 기도가 무색할 정도로 교회는 갈라졌다.
1,000년 지났을 때 서방교회. 동방교회로 갈라졌다.
또다시 500년 더 지나서 서방 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갈라졌다.
개신교는 몇 십 년도 지니지 않아서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 등등으로 갈라지고, 갈라진 그 개신교단들은 각각 수십 개의 분열로 갈라졌다.
장로교 경우 우리나라 안에서 기장. 예장이 있고 - 예장 통합과 합동으로 갈라지고. 마치 아메바가 세포 분열하듯이 교회가 끈임 없이 끈임 없이 교회 분열의 길을 걸어왔다. 예수님의 고별기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교회가 갈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같은 교파 신자들과의 사이에서 분열은 심각하다. 시기. 미움. 마찰. 경쟁심. 이기심. 용서하지 못한 옹졸한 마음. 거친 언어 사용, 무슨 수를 써서라도 꺾으려는 마음. 비 협동적인 정신, 온갖 종류의 거짓말들이 교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끈임 없이 일어난다.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분열 시키고 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저 또한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 또한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파견하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으니,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저를 파견하신 사실과 또한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신 사실을 세상이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17,21-23)
“아버지, 원하옵건대 제가 있는 곳에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그들 또한 저와 함께
있게 하시고.”(17,24)
사랑하는 사람과 천국에서 함께 있기를 원하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자상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시다.
고별기도에 대한 결론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세상에서 이런 일을 말하는 것은 네가 속으로 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너를 미워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너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청하지 않고 너를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청하였다. 내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너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아버지의 말씀은 곧 진리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파견하신 것처럼 나 또한 너를 세상에 파견한다.
너를 위해서 내가 내 자신을 거룩하게 하니, 이는 너 또한 진리로 거룩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17,13-19)
자기 자신에게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고별사라고 믿고 묵상하며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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