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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 목사의 '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이목사가 시무했던 강경교회(옥려봉 아래)
미국 보스턴 클라렌든 침례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폴링 부부와 미혼의 아만다 가데린이 1895년 한국에 와서 강경에서 포목 장사를 하던 지병석 씨를 전도했다. 1896년 2월 9일, 폴링 부부, 아만다 가데린, 지병석 씨와 부인 천성녀 씨, 5명이 강경 북옥동 136번지 지병석의 자택에서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 강경침례교회의 시작이다.
1899년 여름, 군산에 있던 남장로교 부위렴 선교사를 초청하여 금강변에서 최초의 침례식을 거행하여 지병석, 홍봉춘, 장교환, 고래수 등이 침례를 받았다. 펜윅 선교사가 강경, 칠산, 공주지역에서 1896년부터 1906년까지 31개의 교회를 설립하고,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교단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 후 1906년 10월 6일 강경침례교회에서 최초의 침례교단 총회를 창립하였다.
이 총회에서 펜윅 선교사는 초대 총회장격인 감목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기독교회’라는 최초 한국 침례교단을 조직한다. 한편 1943년 일제 탄압으로 옥녀봉 일대의 교회 대지 4천 평을 신사당으로 몰수당해 폐교되었으나, 해방 후인 1945년 이종덕 목사가 제4대 담임으로 취임하면서 홍교리 114번지의 일본인 사찰을 매입해 교회당으로 사용하였다.
▲순교자 이종덕 목사
이종덕은 공주시 이인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20세 때 독립당에 가담,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는데 펜윅 선교사와 임천면 유지 장기영 씨의 도움으로 풀려나 1905년 공주교회 내 성서학원에 입학, 최초의 신학생이 되었다. 1906년 펜윅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배우며, 오직 복음만이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종덕은 1912년 10월 경북 산점교회에서 모인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14년 12월 원산 총회에서 펜윅에 이어, 한국인 최초로 제2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이 목사는 1937년 일제에 비협조한다는 이유로 4개월간 구속되었고 풀려난 후 만주에서 8년간 순회 목회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강경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이종덕 목사는 1946년 제36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49년 총회에서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교’에서 다시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고 오히려 목사 신분을 크게 적은 명함을 들고 인민위원회 내무서 등을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갑시다.’ 전도하다가 9.28 수복 시에 퇴각하던 공산군에 체포된다.
이때 이미 순교를 각오한 이종덕 목사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사모에게 주며 “하늘에서 만납시다.” 말을 남겼고, 같이 끌려가던 김요한 집사에게 기회를 만들어 도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목사는 결국 옥녀봉 교회에서 잘 보이는 금강변 갈밭으로 끌려가 총살당해, 66세를 일기로 주님의 품 안에 안겼다.
▲옥려봉 밑에 있는 이종덕 목사 순교비
일제에 짓밟혔던 교회를 복원하고 교단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던 이종덕 목사의 순교 피 위에 세워진 강경침례교회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2007년 교단의 연감 발간 시, 한의원 집사의 추적을 통해서 비로소 침례교단 최초의 교회로 인정받았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는 옥녀봉에 위치한 북옥리 137번지 일대를 ‘침례교단사적지’로 지정하였으며, 강경침례교회는 금강변 순교현장에 이종덕 목사 순교비를 건립하고, 최근 ‘침례교 선교 기념교회’로서 새 성전을 건축했다. 강경교회는 충청과 호남을 통틀어 최초의 침례교회로 세워져 선교의 발판이 되었다. 순교자 이종덕 목사처럼 복음의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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