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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4대 관점
세계(universe)
↑
작품(work)
↙ ↘
작가(artist) 청중이나 독자(audience)
비평가 M. H. 에임브럼스(Abrams)는 이것을 도표로 만들어서 위와 같이 제시한 바 있다.
우주에서 소재를 빌리고, 작가가, 작품을 창조하고, 독자가 읽는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소재를 차용하는 것은 모방론이며,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표현론이고,
작품을 대중이 감상하는 것은 효용론이며,
작품 자체만으로는 존재론(구조론)으로 설명된다.
1.모방론
작품은 현실 세계의 반영이다.
기본적으로 작품은 우주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소재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반영된 세계와 대상 세계를 비교 검토하며 소재의 세계를 얼마나 정확하게, 그 특성과 본질을 잘 드러냈는가
하는 것이 평가 기준이다.
모방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으로 부터 이어진 오랜 전통을 지닌 미술비평의 한 형식이다.
모방론에서는 작품과 작품에서 표현된 대상 세계의 관계에 주목한다.
같은 소재를 표현한다고 해도 작품마다 작가의 주관적 체험에 의해서 상이한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이는 이상적 진실과 체험적 진실의 상관관계에 의해서 규정되어 진다.
2.표현론
작품은 작가의 정신의 표현이며, 작가의식, 작가의 감정의 표현이다. 여기서 작품과 작가의 관계를 주목
한다. 따라서 표현론에서 평가기준은 작가의 독창성이다. 소재선택과 주제의 해석, 표현방식에 의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예술의 개념을 인간 정서를 기록하고 정서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보는 것이 예술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것은 19세기가 처음이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가 예술가에게 부과한 여러 엄숙한 제한들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것이다.
신고전주의는 예술에서 감정의 분출을 억제했다. 정서의 지나친 표출은 "고상함"과 "적절함"이라는 이상을
해친다.
신고전주의론은 예술가가 절대적 이상적인 미를 탐구한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물을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신고전주의는 예술이 감정이 메마르고 구태의연한, 창조력의 결핍된, 형식과 양식의 경직이라는 결함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에 생동감과 자연스러움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후기 고전주의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격정적이고 열정적이다.
자신들의 창조적 욕구에 어떠한 한계도 가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작품이 채택할 수 있는 주제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거부하였다.
이러한 낭만주의를 대변하는 미학 이론이 표현론이다.
3.존재론(구조론)
존재론은 작품을 작품의 외적요소와 결부시키지 않고 작품 자체만 가지고 평가하는 경우이다.
이는 시의 비평에서 주로 나타난다.
시에서는 많은 상징과 함축이 녹아있다. 시를 그 자체로 취급하는 것, 즉 시인과 독자 그리고 현실세계와
독립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이론이 나오는 것은 예술작품이 모방의 대상, 표현 주체, 독자와의 관계를 떠나 그 자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미술작품에서도 이러한 비평의 방법은 아주 중요한 방법이다.
형과 색, 구도 등 부분적 차원에서의 다양성과 전체적 차원에서의 일관성과 통일성 등 부분과 전체의 조화
가 얼마나 잘 묶여 있는가하는 것과 작품의 기법과 양식, 미적 요소의 균형과 아름다움이 중요한 평가 기준
이다.
미술에서 형식주의 예술론은 모방론과 반대이다.
형식주의에서 진정한 예술은 일상적인 경험을 구성하는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예술은 "삶"에서 빌리거나 "모사"해야 할 이유가 없는 하나의 고유한 세계라는 것이다.
화가 칸딘스키는 "미술가는 대상에서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 이유는 순수하게 회화적인 수단만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려는 그를 대상이 방해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시작된 큐비즘운동에서 자연적인 대상들은 한층 더 "추상적으로"취급되었다.
레제가 "그것이 무엇을 재현하는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라고 말한다.
4.효용론
예술작품이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하는 것이 주된 비평 관점이다.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어느 정도 주었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관점이다.
쾌락적인 만족을 전해주는가, 어떤 교훈적 기능이나 깨달음이 있는가,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켜 정서를
순환시키는가라는 점이 주된 기준이 된다.
효용성에서 대중의 반응은 개인의 처한 상황과 역사적 상황,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편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효용론은 대중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점과 대중이 작품감상에 능동적 주체가 되는 반면 대중이 느끼는
의미와 작품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가 불일치 할 수 있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
절대주의적 관점과 종합주의적 관점에 대해서
절대주의적 관점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작품밖에 없으며, 작품 속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작품을 그 자체로 독립된 자족적 세계로 인식해야 하며 작품을 작가 시대 환경으로부터 독립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종합주의적 관점은 작품의 총체적이고 통일적인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모방론적, 표현론적, 존재론적, 효
용론적인 다각적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을 어떤 하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그 작품의 부분적 의미만을 볼 가능성이 있다.
작품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고 이것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하다.
네 가지 관점을 상호 유기적으로 통일시켜 작품을 감상, 비평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 비평의 4대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이러한 비평 이론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러한
관점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미술작품을 바라본다면 전문적이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훌륭한 감상의 견해와
비평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어떻게 볼것인가 ?
17세기의 거장 얀 베르메르. 미술사와 문화이론에서 다양한 이론적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그의 작품은
그만큼 많은 이야기 거리를 담고있다.
필자는 오늘날까지도 그림의 해석 방법론에 대해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회화와 알레고리>를
통해 그림읽기의 상반된 해석방향을 말하고 있다.
도대체 그림을 본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천천히 필자의 안내를 따라가보자
〈회화의 알레고리〉 이 그림은 프란스 할스, 렘브란트와 함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작품이다.
베르메르하면 우리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기도 한데, 인상주의 화가 르느와르가 죽기 전에
한번 꼭 보고 싶다던 그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화가의 아틀리에〉, 〈모델과 화가〉, 〈회화 예술〉 혹은 〈회화예술의 영광〉 등의 다른
제목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하나의 그림이 이처럼 여러 가지 제목을 갖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화가 자신이 따로 제목을 정해 놓지 않았을 경우 - 사실 옛시대의 작품들 중 그런 경우가 아주 많은데 -,
그림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화상들에 의해 화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목이 정해지거나 화가의 유족 혹
은 친근들에 의해 애칭 비슷하게 불리우던 것이 제목이 되기도 한다.
영어권에서는 〈회화 예술 (The Art of Painting)〉이라는 제목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화가의 미망인이
이 그림을 팔지 않고 보관하는 과정에서 회화 예술(Schilderconst)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독일어권에서는 미술사학자들의 해석 의지에 따라 위에 열거한 여러 개의 제목들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제목을 바꾸어 부를 정도로, 보는 이에 따라 하나의 작품이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는 건, 하나의
풍경 앞에서 다섯 명의 화가가 그림을 그릴 경우 다섯 가지의 서로 다른 풍경화를 얻게 되는 결과와 비슷
하다.
앞으로 우리는 하나의 예술작품을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적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누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정말 그런가. 보고자 하는 만큼 볼 수 있고, 아는 만큼만 보일 뿐이다.
베르메르의 이 그림을 두고 1960년대 독일 미술사학계에서는 재미난 논쟁이 있었다.
요점인즉슨, 그림을 해석할 때 어디에서부터 먼저 시작을 해야 할 것인가였다.
논쟁의 주인공은 《중심의 상실》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한스 제들마이어(H.Sedlmayr)와 바르부르그
연구소의 쿠르트 바트(K.Badt)였는데, 이 논쟁을 정점으로 오늘날까지 독일에서는 그림을 어떻게 서술하
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뜨거운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우선 그림을 들여다보자. 누가 방금이라도 걷어낸 것 같은 커다란 커텐을 등지고 베레모를 쓴 한 화가가 등
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곱게 차려 입은 한 소녀를 그리고 있다.
이 소녀를 두고 그 앞에는 여러가지 소품들이 널려 있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그 뒤로는 커다란 지도
가 벽에 걸려 있다. 방은 깨끗하고 조용해 보인다.
소녀의 이마 위로 햇빛이 떨어지는 걸로 봐서 왼편으로 창문이 나 있는 듯하다.
언뜻 봐서는 〈모델과 화가〉라는 제목이 이 그림에 가장 잘 어울릴 듯하다.
그러나, 어째서 〈회화의 알레고리〉라는 복잡한 제목이 붙게된 걸까.
이 그림을 예술작품 해석 이론의 대표적인 예로 끌어들인 사람은 바로 제들마이어였다.
그의 해설에서 이 그림은 〈회화예술의 영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왜냐하면, 화가의 모델을 서고 있는 소녀를 파마(Fama), 즉 영광의 알레고리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제들마이어는 전체 화면을 지배하는 모티브로 모델을 지적하는데, 그에 따르면 벽에 걸린 지도의 왼쪽 귀
퉁이 부분, 소실점의 위치, 모델이 입은 옷의 파란색과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의 노란색이 보여주는 뚜렷한
대비, 약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화가의 시선, 가운데 놓인 책상의 모서리가 가리키는 방향 등이
이 중심 인물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설명한다.
책상 위에 놓인 여러 가지 소품들은 회화예술을 설명하는 상징물로 설명된다.
즉, 활짝 펼쳐진 스케치북은 디제뇨(disegno), 즉 소묘. 석고마스크는 조각. 옷감 뭉치는 장식.
이처럼 이태리 미술이론의 개념들을 끌어다 대상물을 해석하는 건 제들마이어의 특기이다.
바트와의 논쟁 얘기를 꺼내기 전에 잠시 제들마이어의 설명 중 수정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모델에 대한 해석이다.
베르메르 시대 때 화가들이 꼭 참조하곤 했던 책 중에 체자레 리파의 《이코놀로지아》라는 도상학 책이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개념들, 예를 들면 사랑, 우정, 믿음, 정의같은 개념들을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해
야 될 것인가를 사전처럼 정리해 놓았는데, 이를 보면 화가의 모델을 서고 있는 소녀가 헤시오드가 얘기
한 아홉 뮤즈 중의 하나인 클리오(Klio)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머리 위에 얹은 월계관과 오른손의 트럼펫, 왼손의 책은 역사기술을 담당하는 클리오가 지녀야 할 상징물
들이다. 리파의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제들마이어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화가의 모델을 클리오라고 바로 설명하고 있는 바트는 그녀의 등장에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그림 속의 클리오는 진짜 뮤즈가 아니다.
그저 한 여자 모델이 클리오의 차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보통 옛 그림들에 등장하는 뮤즈들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묘사되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화가가 자신의 모델을 클리오로 재현시켜 다시 그림 위
에 재현하고 있다.
이 이중의 재현을 바트는 베르메르의 전략으로 파악한다.
즉 화가의 ‘그리기’라는 행위가 지상의 존재를 천상의 존재로 바꾸어 화폭 위에 영원히 남길 수 있는 특별
한 기술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역사기술을 담당하는 클리오가 화가의 모델을 서게 된 걸까.
여기서 역사와 회화의 대비는 우연이 아니다.
역사는 언어를 통해서, 회화는 선과 색을 이용해서 영원의 제국에 들어선다는 의중을 담고 있는 것이다.
‘회화의 알레고리’가 역사 즉 언어 혹은 문자의 상징을 빌어 재현된 건, 그림과 언어의 오랜 경쟁을 다시
빗대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까지가 이 그림에 대한 대강의 설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도상학적 문제가 아니다.
독일미술사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두 미술사학자의 논쟁은 해석학적 입장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구조분석으로 이름을 날린 바 있는 제들마이어는 이 그림을 세 가지 층으로 분할한다.
즉, 전경, 중경, 후경. 그런데, 주목할 점은 제들마이어의 그림 설명이 언제나 관람객의 위치에서 가장 멀
리 떨어진 후경, 즉 화가의 모델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물론, 회화라는 것이 일차원적 평면 위에 재현되는 것이기에,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눈이 가늠하는 가상
의 거리감을 상정해야 한다.
제들마이어가 이 모델을 두고 파마, 즉 영광의 알레고리라고 해석한 것은 여기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잘못이야 위에서 보았듯이 몇 가지 문헌만 뒤져보면 금방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림의 전체 맥락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는 제들마이어가 화면의 가운데 부분을 너무나 강조함
으로 해서, 오히려 전체 화면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실패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제들마이어를 비판하고 나선 바트의 입장이다.
그림을 뒷 배경에서부터 설명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인 유럽 회화에서는 그림의 진행이 보통 화면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오른쪽 위에서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그는 원근법의 발달이 우리 눈의 습관과 몸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림 감상의 원리를
‘마주침’에 비교한다.
즉, 방금 막 도착한 사람이 그림 속으로 들어서서 거기에서 펼쳐지는 장면에 맞닥뜨린 것 같은 느낌을 전
해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원근법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니, 정교하게 원근법이 적용된 이 그림에서도 감상자인 우리가 뒷배경의 모델보다는 우리 쪽에 더
가까운 전경에서 먼저 이해의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문제는 그림을 읽는 방향이라는 얘기다. 올바른 방향을 놓칠 경우, 참된 이해를 향한 감상자의 항해는
좌초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림 해석의 방향이 곧 화가가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의 이상향에 도달케
하는 중요한 키잡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독일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 rer)의 동판화 〈성 히에로니무스〉
를 보자.
상황은 비슷하다. 하나의 방이 보인다. 다른 사람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전면이 열려 있다.
보는 이의 시선은 화면 하단에 보이는 턱을 살짝 넘어, 휴식을 즐기고 있는 사자와 강아지를 방해하지 않도
록 조용히 방에 들어선다.
왼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에서 쏟아지는 한 무더기의 햇빛은 강아지의 잠을 돕기에 충분하고, 그 아래 기다란
의자 위에는 책과 쿠션마저 길게 누워 있다.
이 조용한 방에서 깨어있는 이는 성 히에로니무스, 성경을 라틴어로 열심히 옮기고 있는 중이다.
번역을 하는데라야 이러한 조용한 방이 제격일 것이다.
일하는 모습이 마치 명상에 잠겨있는 듯이 보이는 이 성인의 등 뒤로는 여러 가지 소품들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고, 천정 위에는 호박 넝쿨 하나가 그 흔한 풍경화에서처럼 잎줄기를 늘어뜨리고 있다.
자, 어떤가. 만약 우리의 시선이 화면 가운데 위치한 중심인물 히에로니무스에서 출발하여 거꾸로 전면으
로 향해 흘렀더라면, 우리는 이 방안의 분위기를 거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작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직접 방안에 들어올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
라서, 보는 이의 직접적인 체험없이는 이 그림의 구조가 제대로 파악될 리 없다.
문지방처럼 버티고 앉아 이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는 사자와, 화면 윗 부분에 묘사된 방천정의 모서리
마감재, 그리고 그 천정에 달려 있는 호박 넝쿨 등은 바로 감상자의 시선으로 하여금 하나의 가상의 육체
를 상정하여 직접 그림 안으로 들어서게끔 유도하고 있다.
비록 한 장의 종이 위에 찍힌 판화이긴 하지만, 미술가가 사용하는 일차원의 테크닉은 감상자의 육체적
개입으로 인해 그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의 눈의 활동은 동시적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순서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 사이의 시간의 차이란 감지할 수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해석의 방향이란 어디까지나 언어로 설명된 작품 설명 텍스트의 방향을 일컫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현대인의 미술감상의 시작은 미술작품 자체보다는 그것을 설명한 해석을 읽는 것에서
먼저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떤 해석에 귀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올바른 작품 이해의 향방이 결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현애/미술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