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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서 노아 방주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고 합니다. 지난주 노아 방주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노아 방주에는 방향 키나 그러니까 조양 장치나 그리고 동력원이 전혀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주는 홍수 중에도 물 위에 떠 있고 그리고 아라산에 이를 때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에는 방주가 무리에 떠 있기 위해서는 배가 무리에 떠 있기 위해서는 저항 장치도 필요하고 동력원도 필요합니다. 만약에 이걸 다 상실하게 되면 우리가 난파당했다 그러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노아의 방주는 난파당한 배와 같은 처지인 거죠. 왜냐하면 방향 키도 없고 동력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방향키나 조향 장치가 없는 배는 인간의 상식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배입니다.
우리는 상식을 되게 좋아합니다. 상식을 좋아하다 보니까 상식에 갇혀서 살아요. 문제는 신앙이 상식선에서 움직이면 신앙이 상식이 된다는 거예요. 신앙은 상식을 기본으로 하지만 상식에 갖춰서는 안 돼요. 그러니까 상식 이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배가 거센 홍수 가운데 항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력원이 있어야 됩니다. 배를 움직이는 동력이 없는 배는 인간의 상식에는 존재할 수 없는 배예요.
그런데 노아 방주는 그랬습니다. 노아 방주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일 수 있는 배였습니다. 홍수를 주관하시고 바다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안전하고 편안한 배였던 겁니다. 방수에는 동력원이 되는 그 당시에 대부분의 동력원은 돛이겠죠. 돛이 없었어요. 엔진 역할을 하는 그 어떤 기관 당연히 없었죠. 그 당시는 기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홍수를 견뎌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동력이 없는 배가 어떻게 바다를 항해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 홍수가 난 바다, 큰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어떻게 항해할 수 있었을까 노아의 방주가 안전하게 항해하는 방법은 방주를 계획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였습니다.
노아 방주에는 또 다른 특징이 하나 있었습니다. 창문이 방주 옆에 난 것이 아니라 위층에 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방주의 위로부터 한 규이니까 45cm 정도 위치에 그러니까 거의 그냥 하늘로만 창이 나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보통 배가 항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창이 나 있어야 하고 옆으로도 창이 나 있어야 하고 d도 나 있어야 돼요. 그래야 방안을 볼 수 있잖아요. 감각을 가질 수 있어요. 배를 운전할 수 있는 감각을 지식과 어떤 정보를 우리가 체득할 수 있어요
근데 방주는 다 막혔고 오직 하늘로 난 창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난파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배를 항 방주를 운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어떤 정보도 취득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방주는 아무런 문제없이 홍수를 견뎠고 거센 파도를 견뎠고 안전하게 아라라 산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방주는 3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방주 옆에 문이 달려 있긴 했지만 창문은 오직 위로만 뚫려 있었어요. 성경에 많은 상징들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건도 메시지를 가지고 있고 말씀도 메시지를 가지고 있고 어떤 상징도 다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요.
이 말은 방주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온 여러분과 저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방주의 모양새를 통해서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또 오늘 방주가 우리에게 하는 메시지 주된 메시지는 참된 메시지는 우리를 구원하는 진짜 메시지는 오직 하늘로부터 온다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삶의 위기가 닥치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세상에서 분주하게 메시지를 찾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오면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엄청 또 분주해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은 느려져요.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상식이라면 믿음이라면 우리가 기본적인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 삶이 어려우면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분주해야 정상이잖아요.
근데 삶이 어려운데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은 딱 끊어버리고 세상을 향한 발걸음만 분주하다는 거예요. 방주의 창이 오직 하늘로 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메시지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거죠. 세상에서의 메시지를 얻으면 안 되고 우리를 살릴 메시지, 우리를 구원할 메시지, 내 인생을 살아야 할 메시지를 우리가 오직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의미인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온 메시지를 듣지 않고 세상에서 온 메시지로 세상을 살려고 합니다.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은 질서가 없잖아요. 왜요? 하나님이 만드신 그 질서를 우리의 죄가 파괴돼 버렸기 때문에 세상은 질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서가 없어요. 그래서 세상에게서 온 메시지는 우리를 점점 더 혼란스럽게 만들어요.
여러분이 인생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을 향한 분주히 발걸음을 옮겨요. 그래서 많은 메시지를 사람들로부터 얻어요. 근데 그 메시지는 오히려 나의 삶을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는 거예요.
저는 되게 좀 빠릿빠릿한 사람이에요. 등치가 이렇게 커서 그렇게 안 보이시지만 실제로 행동도 빠르고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일을 막기 위해서 움직임이 아주 분주한 사람이에요. 옛날 저의 특징은 제 목회나 삶의 어려움은 사람들을 엄청 찾아다닌 거였어요. 저는 그냥 마음에 어떤 느낌이 오면 그냥 전화를 하고 시간이 되면 사람을 만나요. 그래서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분들도 만나서 또 좋은 이야기도 듣고 근데 그래서 사람들을 분주하게 찾아다녔어요.
이상하게 더 혼란스러운 거예요. 도대체 모르겠어요. 근데 어느 날 그 사람들의 메시지를 좀 제가 차단을 하고 새벽에 하나님께 엎드리면 여지없이 여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내 인생을 향한 메시지가 온다는 거예요.
저는 말씀을 준비하는 메시지도 늘 새벽에 얻어요. 새벽에 좀 일찍 내려가서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감동이 있어요. 그 감정을 제 핸드폰에 노트 기능이 있어서 다 치고 나요. 그게 그 주간에 거의 대부분의 메시지가 되는 거예요. 원래는 세상을 자연을 보다가 많은 메시지를 얻기도 했는데 이제는 거의 새벽 그 시간이 저는 메시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시간이에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어떻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엄청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해요. 왜냐하면 경험상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는 더 교회나 그리고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요. 제가 말씀을 정말 아름답고 멋지게 전할 수는 있겠지만 말씀을 전한 뒤에 교회는 더 혼란스러워지더라고요.
반면에 하나님께 온 메시지로 말씀을 전하면 제가 가끔은 좀 버벅거리고 핵심을 좀 놓친 경향이 있어도 말씀을 선포하고 난 후에 보면 교회는 오히려 질서가 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혼란스러워요. 질서가 없어요. 그래서 세상에 얻은 대부분의 메시지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일반 계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심어놨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든지 그를 깨달을 수 있지만 그것을 보고 깨닫는 것도 최후적으로는 하나님께로 온 메시지와 연결이 되어야만 세상에 그것들을 자세히 깨닫고 우리가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사람에게 답을 찾는 노력을 멈춰야 돼요.
어떨 때는 완전히 멈춰야 돼요. 완전히 답답하잖아요. 사람을 쫓아다녀야 되고 누군가를 대화를 해야 되고 뭔가를 부탁할 것 같지 않아요 어때요?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과 저를 방주 안에 그냥 가둬버릴 때도 있어요. 하나님이 가둘 때는 그냥 방주 안에 그대로 있어야 돼요. 그리고 하늘로부터 온 메시지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들어야 됩니다. 우리가 아직 문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것은 하늘로 난 창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불안해요. 그래서 자꾸 앞과 옆과 뒤로 난 창을 찾아요. 왜 앞에는 창이 없을까 왜 옆에는 창이 없을까, 왜 뒤에는 창이 없을까라고 자꾸 찾아요. 하늘로 난 창만 바라보면 방주가 난파할 것 같고, 하늘로 난 창문을 바라보면 파괴될 것 같아서 불안한 거예요. 하나님이 그래서 그래서 방주를 만들 때 옆으로 하는 모든 창은 없게 하셨고 오직 하늘로 난 책만 만들어 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면 인생의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내가 믿음으로 살면 내 인생에 뭔가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믿음이 부족하다고 항상 생각해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지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럼 우리 예배가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교회를 30년 40년 다니면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믿음의 전환이 필요한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의 전환이 필요해요. 믿음으로도 얼마든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의 전환이 필요해요.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로 난 창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한 번 더 합니다.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잘 살펴야 문제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고 해결 방법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문제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 현실을 잘 알기 위해서 우리는 자꾸 옆으로 난 창을 찾아요.
그런데 방주에는 옆으로 앞으로 뒤로 난 창이 없었어요. 이 말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옆으로 난 창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늘로 난 창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도 하나님께로부터 임하고요. 현실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하나님께로부터 임해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문제 앞에서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라 자꾸 세상을 직시해요. 그래서 문제를 더 자세히 보라고 합니다. 저도 약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럴 때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현실적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문제는 현실적이 된 성도가 하늘을 보지는 않더라고 이게 문제예요. 현실을 직시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어려움을 우리가 돌파해 갈 수 있다 생각하고 현실을 직시해서 잘 연구하고 잘 살피고 잘 분석을 해요.
근데 문제는 이 과정을 통해서 아예 우리의 눈이 땅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는 거예요. 현실적이 된 사람들이 눈이 하늘을 향하기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요.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은 실패가 있어야 이 눈이 하늘로 올려지더라고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오래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을 자꾸 땅을 보고 살아가요. 땅을 봐야 안 넘어질 것 같잖아요.
여러분 원래 잘 걷거나 잘 뛰면 뛰려면 앞을 보면 안 돼요. 저기 멀리를 봐야 돼요. 계단 오르는 운동을 하잖아요. 이 운동할 때도 계단을 보면 안 돼요. 목이 아프고 몸에 무리가 가요. 계단을 보지 말고 정면을 봐야 돼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잘 알기 위해서 현실을 직시하다가 눈이 그냥 땅에 머물게 된 거예요. 그래서 하늘로부터 오는 그 어떤 메시지도 못 받아들이고 그 어떤 해결 방법도 못 받아들여요. 그래서 문제를 갖고 평생을 살기도 합니다.
방주의 창이 오직 하늘로만 왔다는 것은 옆으로나 앞으로 난 창으로 홍수를 보면 그들의 마음이 무너질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에요. 홍수가 났어요. 창이 옆으로 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떠다니는 시체가 보였을 겁니다. 홍수로 파괴된 세상이 보였을 거예요. 못 견뎠을 거예요.
여러분 그런 장면을 보고 우리의 멘탈이 견뎌낼 수 있을까요? 못 봐요. 그 떠다니는 시체 중에는 분명히 친척 이웃도 아는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아이도 있었을 거고, 그 장면을 보고 어떻게 우리가 견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 가족이 아예 못 보도록 옆으로는 앞으로 드러난 창을 다 만들지 않으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창이 하늘로 만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좌절이 있고 하나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옆으로 난 창으로는 뭐가 보이냐 좌절과 절망이 보여요. 반면에 위로난 창으로는 희망이 보입니다. 방주는 일상의 배는 아니에요. 위기 때 타는 배예요. 일상적인 배의 모습은 아닙니다.
방주가 말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위기 극복의 힘이 오직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위기가 오면 이런 거죠. 어려움이 오면 방주를 타야 된다는 거죠. 배나 군함을 타는 게 아니라 방주를 타야 된다는 거예요. 방향키도 없고 동력원도 없고 창문은 오직 하늘로만 나 있는 방주를 타야 우리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기가 오면 세상이 가르치는 방향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 노아 방주에 370여 일을 머물러 있었어요. 377일 78일 계산하기는 조금 차이는 있어요. 그러니까 1년이 넘는 긴 시간을 방주 안에 있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죠. 노아를 구원하기 위해서 방주에 가뒀어요.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때로는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방주에 가둔다는 거예요. 제가 설교를 준비하고 또 말씀 전하기 전에 찬양을 하면서 궁금히 생각했어요. 내 인생의 방주는 어디였을까? 하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어디 가뒀을까 그러니까 몇 개 떠오르는 일이 있더라고요.
하나는 제가 열심히 공부할 시점에 집안이 좀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이것저것 해야 됐어요.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중에 내가 방주라고 생각했던 아르바이트가 뭐냐 하면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거예요. 지금은 그런 공장이 거의 구로 지역에는 다 없어졌지만 저희 때는 엄청났어요. 정말 많은 봉제 공장이 있고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또 초등학교를 졸업한 많은 이렇게 사람들이 올라와서 거기서 그 공장 일을 저도 제 돈을 벌기 위해서 거기에 취직을 하고 다닌 적이 있었어요. 진짜 교회와는 다 단절이 되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술 담배 쩔어 사는 사람들, 밤새 술을 마신 사람들 그리고 그러니까 이런 말이 뭐 학고방이라고 그러죠. 총 한 방에 8명씩 10명 자는 그런 방에서 같이 지냈어요. 진짜 누우면 아무것도 안 돼요. 이게 다예요. 이렇게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또 일을 가야 했어요.
근데 그 시간 삶을 이기는 힘과 내 인생의 많은 방향들을 거기서 얻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방주의 나를 가두신 거죠? 봉제 공장이 있는 방주에 저를 가뒀어요.
또 하나 제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내 인생의 방주는 어디였을까 이렇게 생각해 봤더니 군 시절이었어요. 특별히 최전방에 3년 제가 GOP에 3년 동안 군 생활을 했는데 거기는 처음에 한 2년간은 휴가도 가지도 않았어요. 그냥 거기서 병사들과 그냥 머물러만 있었어요. 새벽에 기도하고 밤으로 병사들 데리고 밤으로 기도하고 군에 갔다 온 남자분은 알지만 밤에 GOP에서 병사를 데리고 기도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거예요. 근데 그렇게 3년을 제가 전반에 보냈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 시간 동안 내 목회나 내 인생에 영양분을 저에게 주셨더라고요. 하나님이 저를 55년대라는 방주에 가둔 것도, 하나님이 나를 봉제 공장이라는 방주에 가둔 것도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곳에 가둬둔 거예요. 그리고 그걸 통해서 저를 목회자로 만들어 가시고 또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는 생각이 예배 전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구원하는 방법을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방주에 가둔 거였습니다. 구원을 위해 절대 순종의 방주에 가뒀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주에 하나님은 때로 여러분과 저를 우리에게 길을 여시기 위해서 우리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절대 순종의 방지 우리를 가둘 때가 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 우리를 가둬요. 그리고 어디를 보게 해요? 하늘을 보게 하는 거죠. 하나님을 보게 하는 거죠. 위로부터 온 메시지만 듣게 해요. 다른 메시지는 다 차단하고 오직 위로 오는 메시지만 듣게 해요. 그게 하나님이 성도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위기가 오면 밖으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해요. 근데 하나님은 노아를 구원하기 위해서 가두셨어요.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가두시는 분이에요. 가두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절대적으로 들리는 그 순간이 우리가 회복될 시간인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 의심되지 않는 그 순간이 그렇게 믿어지는 순간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시간인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 고백을 하기 위해서 그런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여러분과 저를 황주에 가둬라. 어쩌면 많은 성도들 목장 교회 성도는 지금 하나님이 만드신 방지에 가두어져 있을지도 몰라요.
여러분 절망할 필요가 없어요. 왜요? 방주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자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방주에서 하나님의 소리만 들리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거예요. 세상의 불안한 소리를 다 단절하고 오직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만 듣게 하시고 그 음성이 들리는 순간 여러분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지금 기다리고 인내하고 계신 거죠. 하나님의 음성이 절대적으로 들리는 순간이 우리가 회복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가치 없게 들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대수롭지 않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있다면 아직 회복식의 시간은 좀 먼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킬 때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유일한 음성으로 들을 때예요.
그 음성이 나를 살린다고 믿을 때 교회를 회복시키고 가정을 회복시키고 삶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방주dp 옆으로 창을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만 보여야 방주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방주는 크다고 해도 세상에 비하면 협소해요. 그리고 온갖 동물로 가득 차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370여 일 동안 그런 곳에 갇혀져 있다면 아마 정신병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만 봤다면 그곳에 있는 동물을 봤다면 사방으로 꽉 막혀 있는 벽만 봤다면 공황 장애가 왔을 거예요.
그런데 하늘로 구멍이 뚫려져 있어서 살 수가 있었던 거예요. 어떤 학자는 이 구멍으로부터 햇빛이 쬐서 그래서 안에 있는 동물들이 살 수 있었다. 또 하늘 보는 창이 있어서 공기가 순환이 돼서 안에 있는 동물들이 살 수 있다. 이렇게 성경에 그런 기록은 없지만 그렇게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하늘로 난 창은 방주는 창이 달린 방주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었다는 것. 새 출발의 계획이었어요. 하나님 뜻대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새 출발시키기 위해서 막막한 곳에 우리를 가두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공황 장애 날 만큼 힘든 공간에 우리를 가두시기도 해요.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내 인생 가운데 새 일을 행하시려고 냄새나는 곳에 우리를 가두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에 때때로 우리를 가두시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벽을 보고 절망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뚫어놓으신 하늘로부터 난 하늘로 난 창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부터 희망이 있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이 만드신 방주에는 반드시 하늘로 난 창이 있어요. 여러분의 삶에 아무리 힘들어도 하늘로부터 난 창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가 있어요. 아무리 절망적인 장소라도 하늘로 난 창은 여러분 달려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우리를 고난 가운데 연단 가운데 빠뜨리실 때 절대로 하늘 위의 창까지 절대로 막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사람도 아무리 낙심이 큰 사람도 아무리 문제가 많은 사람도 하나님의 음성은 다 들을 수 있도록 하늘로는 창문 다 뚫어놓으셨다는 거예요.
노아의 방주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타고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노아의 방조는 자기의 의지나 생각이나 노력을 내려놓지 않으면 탈 수 없는 곳이에요. 다 있을 수 없는 곳이에요.
여러분 본능적으로 조향 장치를 찾지 않을까요? 본능적으로 돛을 만들려고 하지 않을까요? 어떻든 방주에 구멍을 내서 위로 올라가서 거기에 뭔가를 달려고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주에 우리를 태우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가두시는지, 이 힘든 공간에 나를 위해 묶어두시는지, 왜 이런 어려운 일을 나를 당하게 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을 때가 태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주에 자꾸 노를 저으려고 해요. 자꾸 노를 노를 젓지 않아야 살 수 있는 곳이 방주잖아요. 자꾸 돛을 달려 그래요. 살려고
여러분 방주에서 사는 길은 노를 젓지 않는 거예요. 돛을 포기하는 거예요. 그 어떤 동력도 다 동력원도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럴 때 방주가 구원의 장소가 되고 회복에 장서게 되고 우리 인생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과 의지가 있는 한 방주는 새 출발의 장소나 구원의 장소가 될 수 없어요. 아직 여러분의 의지가 남아 있는 한 여러분 노를 저는 여러분의 의지가 남아 있는 한은 방주는 새 출발의 장소가 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인생의 또 다른 동력원을 찾고 있다면 방주는 절대로 새 출발의 장소가 될 수 없어요.
여러분의 의지와 생각이 다 포기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그 가운데 행하시고 하나님의 일들을 펼쳐가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듣고 싶어 하고 웃고 싶어 하는 진짜 음성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늘로 난 창을 봐야 그 답을 얻을 수 있어요.
여러분 지금까지 세상에 얻으려고 했던 그 답들을 이제는 좀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 이런 설교 수없이 들었잖아 비슷한 결의 설교들 여러분 한번 내려놔 보셨어요? 설교는 듣고 아 좋다 그래야지라고 다 지나버리셨잖아요. 정말 여러분의 의지와 생각을 다 내려놓은 적이 있으신가요?
근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방주에서 안에서 자기가 갇힌 방주 안에서 뜻과 생각을 다 포기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움직임에 우리의 시선이 꽂히면 답을 얻을 수 없고요. 하나님의 움직임에 우리의 시선이 꽂히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번 따라가겠습니다.
응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오직 새 출발도 하나님께 있고요. 오직 구원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방주 안에 갇혀 있다면 방주의 벽을 보지 마시고 하늘로 보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이 선포하신 이 말씀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음성을 통해서 여러분 삶의 새 일을 새 역사를 시작하게 하실 것입니다.
방주에 나온 인류는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새 인류의 시초가 됐어요. 인류를 새 출발하게 하는 새 출발하게 하는 가족이 된 거예요.
여러분 2025년 24년 힘들게 사셨죠? 이제 며칠 하는 이 시간도 우리의 생각 의제를 좀 내려놓고 연말을 보내십시오. 그리고 내년이면 더더욱 그냥 방주에 갇혀있다고 생각하시고 한 해를 살아보십시오. 그럼 반드시 여러분의 영혼을 살릴 음성이 들릴 것이고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생겨날 것이고, 자녀들이나 인생을 구원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이게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