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막 12:17)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에게도 반갑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적대시했던 이유는 백성을 사랑하며 희생을 이야기하지만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위선과 폭력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힘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들이었지만 백성의 마음을 갖고 있던 예수님을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습니다. 과연 백성의 마음(민심)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지도자들의 매우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들은 민심의 힘을 받던 예수님을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의 권위에 도전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이들이 전혀 다른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14절)’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 즉 하나님의 통치를 믿고 하나님 나라의 재건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통치자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는 이스라엘에게 우상 숭배의 이방 나라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고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은 낸다는 것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된 이후 중세를 지나는 동안 신정 국가란 명목으로 새로운 종교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백성을 착취하고 탄압한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표방하지만 새로운 정치 세력이 되었던 교회는 현재의 왜곡된 교회 세력으로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질문은 로마의 세금을 내는 일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로마의 세금을 거부하는 로마의 반역자로 실정법을 거부하는 선택을 강요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하는지를 알고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전 안에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로마의 동전에는 당시의 황제 가이사와 그의 글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17절)’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세속 사회를 부정하고, 경건한 교회 안의 삶만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입니다. 비록 세상이 죄로 타락한 세속적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세계이고 그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였지만 우리는 대적자로부터 ‘탈취’하여 하나님의 좋은 세계로 회복해야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하나님의 것’과 분명히 대립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가이사의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세상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내는 것(마 17:27)에 대해서 허락하셨습니다. 세금에 관련한 문제에 국한하더라도 국가의 혜택은 받으면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에 대한 지불은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는 오랜 시간 세속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종교가 세속 정치와 유착하여 타락하는 길을 막으려는 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가이사의 것과 구분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원칙에 세속의 자리를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창 1:26)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이 가이사의 것에게 돌려지듯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바쳐져야(되돌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