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남계서원(咸陽 灆溪書院)
개 요
〇 분류 :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서원
〇 수량/면적 : 41,218㎡
〇 지정(등록)일 : 2009.05.26
〇 소재지 :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일원 (원평리)
〇 관리자 (관리단체) : 함양군
남계서원 소개
수동면 원평리 소재로 조선 명종 7년(1552)년에 개암 강익(姜翼)이 문헌공 정여창(鄭汝昌)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고 남계서원이라 칭하였는데 서원으로서는 백운동서원(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 사액 된 서원으로 명종 21년(1566)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정홍서를 모셨다가, 고종 5년(1868)에 이는 훼철되었다. 앞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는 강학공간을 두었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공간을 이룬 전학 후문에 배치를 하였다.
2019년 7월 6일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함양 남계서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최종 등재 하였다.
누문인 풍영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옆으로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재 앞에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내삼문 안쪽으로 사당이 있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밖에 전사청과 고직사·묘정비각 등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세계유산 등재 : 한국의 서원(2019. 7. 6.)>
○ 유산지역 :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 (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 (자료 출처 : 함양군)
청계서원(淸溪書院)
함양 청계서원(靑溪書院)
함양 청계서원(咸陽 靑溪書院)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6호 청계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 요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김일손(金馹孫)
김일손(金馹孫, 1464년 2월 13일(음력 1월 7일)~1498년 8월 14일(음력 7월 27일))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2],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호(號) 탁영(濯纓)은 ‘갓끈을 씻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에서 따온 것이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이 된적이 있다. 훈구파의 공격으로 처형된다 (자료 출처 :위키백과)